비엔나 이야기/공동묘지 문화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St Marxer Friedhof) - 1

정준극 2010. 3. 14. 20:45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St Marxer Friedhof) - 잔크트 마르쿠스 공동묘지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Sankt Marxer Friedhof: 일반적으로는 생맑스라고 부름)는 짐머링거 하우프트슈트라쎄(Simmeringer Hauptstrasse)가 시작되는 곳, 아르제날(Arsenal)의 동편에 자리 잡고 있다. 생맑스(성마가: 성마르쿠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중 한 사람으로 의사였다. 생맑스(성마가)는 이집트로 전도여행을  떠나 그곳에서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였다. 그런 연유에서 이집트의 콥틱 교회는 생맑스를 이집트 콥틱 교회의 수호성인으로 받들며 존중하고 있다. 이같은 전통 때문에 중세에는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생맑스를 병자들의 수호성인, 병원의 수호성인으로 받들었다. 그 영향이 비엔나의 공동묘지에도 연결된 것이다. 독일어로 산크트 마르크스 프리도호프라고 불리는 '성마가 공동묘지'는 인근에 있었던 성마가 빈민구호소의 이름에서 따온 지명이다. 생맑스 공동묘지가 처음 조성된 것은 1784년 요셉2세 황제 때였다. 음악애호가이며 스스로 작곡도 했던 요셉2세는 모차르트와 인연이 깊어 모차르트에게 독일어 오페라인 ‘후궁에서의 도주’를 의뢰한 인물로서 잘 알려져 있다. 요셉2세는 비엔나 시민들을 위한 공동묘지를 도나우 운하 왼편의 노이슈태터(Neustaedter)에 새로 설치하고 이후부터는 절대로 시내에 묘지를 쓰지 말고 생맑스 공동묘지를 사용토록 했다. 처음에 생맑스 공동묘지가 조성되었을 때는 비엔나 제3구 란트슈트라쎄의 주민들이 주로 사용했으며 비엔나 시내에 사는 사람들은 기존의 여러 공동묘지를 사용하는 경향이었다.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 입구의 조각상. '이승에서의 이별은 저승에서의 만남의 약속'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는 원래 90년동안 사용할 묘지로 조성되었다. 하지만 자꾸만 묘지가 늘어나게 되자 그나마도 장소가 부족하게 되었다. 이에 국가에서는 새로 짐머링(Simmering) 남쪽의 넓은 지역을 선정하여 중앙공동묘지(Zentralfriedhof)를 조성하고 비엔나 근처의 공동묘지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도록 했다. 위생상의 문제도 큰 이유였다. 시내 근처에 있던 기존의 공동묘지들은 대부분 공원으로 만들었다. 예를 들어 베토벤과 슈베르트가 처음에 매장되었던 배링(Währing) 공동묘지는 슈베르트공원(Schubertpark)으로 조성되었다. 생맑스 공동묘지도 공원으로 만들어야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였다. 그래서 점차 황폐해 졌다. 1930년대에 들어서서 비엔나 시민들은 생맑스 공동묘지의 역사적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그리하여 나치 히틀러가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합병하기 전 해인 1937년 새로 출입문을 마들고 구획을 정리하였으며 쓰러진 묘비들은 일으켜 세우는 작업을 수행하여 일반에게 공개하였다. 그런 생맑스 공동묘지는 2차대전중 폭격으로 상당부분이 손상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황폐해진 묘역. 세월은 바뀌어 꽃은 피고 지고..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는 비더마이어(Biedermeier) 시대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화려하거나 엄중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생맑스 공동묘지는 사람들의 깊은 관심을 끌고 있다. 모차르트 때문이다. 1791년 12월 5일 세상을 떠난 모차르트는 비엔나 남쪽 성문을 거쳐 이곳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그러나 모차르트를 생맑스의 어느 곳에 매장하였는지 아무도 모른다. 나중에 사람들은 시신이 없는 가묘(假墓)를 만들었다. 그러다가 정부의 방침에 따라 짐머링의 중앙공동묘지(첸트랄프리드호프)로 이장하게 되었으나 유해가 없기 때문에 중앙공동묘지에도 가묘를 만들었다. 일설에 따르면 원래는 생맑스 공동묘지에 실제로 모차르트의 묘지가 따로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구획정리등 변경사항이 생겨 이장하게 되었는데 인부들이 잘못하여 모차르트의 유해를 다른 유해들과 함께 적당한 곳에 재매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래 묘지의 위치도 정확히 모르거니와 유해도 찾을수 없다는 것이다.


비록 모차르트의 묘지가 중앙공동묘지에 조성되었지만 사람들은 모차르트가 처음 매장되었던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를 잊을수 없었다. 그래서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의 적당한 곳을 정하여 묘지처럼 만들고 기념비를 세우고 묘지 앞에는 작지만 아름다운 꽃밭을 만들었다. 모차르트의 묘비에는 아기천사가 슬픔에 잠겨 있는 모습의 조각이 있다. 중앙공동묘지의 모차르트 묘지에는 음악의 여신 뮤즈가 슬픔에 잠겨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의 조각이 세워져 있다.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에는 유명한 정치인, 과학자, 지식인, 예술가들도 상당수 안장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재봉틀을 처음으로 발명한 요셉 마더슈퍼거스(Joseph Maderspergers)이다. 이들의 대부분은 중앙공동묘지의 저명인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모차르트의 가묘는 중앙공동묘지에 있지만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의 1차 가묘를 찾는 사람들도 많다.


오늘날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는 비엔나에서도 특이한 분위기를 느낄수 있는 장소중의 하나가 되었다. 만일 으스스한 분위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비오는 날이나 잔뜩 흐린 음산한 날에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를 찾아가 보기를 권한다. 벽돌로 된 낡은 정문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완전히 다른 세상,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맛볼수 있을 것이다. 돌로 만든 오래된 묘비들의 행렬, 누군가 배회하고 있을 것만 같은 넓은 숲, 어디선가 모차르트의 진혼곡이 들릴 것만 같은 곳이다. 그러나 화창한 봄날의 방문은 사방에 넘쳐흐르는 라일락 향기에 아스련한 옛추억을 되새기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