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공동묘지 문화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Sankt Marxer Friedhof) - 2

정준극 2010. 3. 14. 20:55

장상크트 맑스 공동묘지(Sankt Marxer Friedhof)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는원래 비엔나 3구 란트슈트라쎄에 속하여 있는 공동묘지였으나 1874년 폐쇄되어 현재 기념비만 남아 있다.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가 특별히 유명한 것은 모차르트의 처음 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모차르트의 공식적인 묘지는 짐머링의 중앙공동묘지의 음악가 묘역에 있다. 비엔나 시당국은 현재 사용하지 않고 있는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를 결국은 공원으로 만들 계획이다.

 

생맑스(장크트 맑스: 생마르쿠스) 공동묘지의 한적한 오후

 

[요셉2세의 개혁]

비엔나시는 16세기에 시내에 있는 묘지들을 폐쇄하고 더 이상 매장을 하지 않을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비엔나 시민들은 교회묘지를 중심으로 종교축제를 가지는 관습이 있기 때문에 시민들과 교회 당국은 당장 모든 교회묘지를 폐쇄한다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8세기에 요셉2세 황제는 역병과 위생상의 이유를 들어 시내의 교회 및 수도원묘지들을 시외로 이전하고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개혁정책을 내놓았다. 다만, 황실영묘인 카이저그루프트(Kaisergruft)와 슈테판성당의 카다콤, 잘레시안수도원(Salesianerkloster)의 묘지만은 예외로 삼았다.

 

요셉2세의 개혁정책과 관련하여 비엔나시는 1784년 처음으로 비엔나 성벽 밖의 교외에 공동묘지를 조성하고 지역공동묘지(commnunale Friedhöfe)라고 불렀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지역공동묘지로는 오늘날의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St Marxer Friedhof), 훈트슈투름 공동묘지(Hundsturmer Friedhof), 마츨라인스도르프 공동묘지(Matzleinsdorfer Friedhof), 배링 공동묘지(Währinger Friedhof), 그리고 슈멜츠 공동묘지(Schmelzer Friedhof)이다. 이들은 비더마이어 프리드회페(Biedermeier-Friedhöfe)라고 하는 불리기도 한다. 비더마이어는 화려하지 않은 실용적인 양식을 말한다. 한편, 비엔나의 유태인들도 요셉2세 황제의 지시를 지켜야 했다. 로싸우(Rossau)에 있던 유태인 공동묘지는 폐쇄하고 성밖인 배링에 새로운 유태인 공동묘지를 마련했다.

 

장크트 맑스는 비엔나 교외인 란트슈트라쎄의 한 파트였다. 장크트 맑스라는 이름은 이곳에 성마가(상크트 마르쿠스)에게 봉헌된 작은 카펠레(예배처)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성마가 카펠레는 당시 이곳에 있던 시민양로원에 속해 있었다. 잘 아는대로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는 시내에 있는 공동묘지의 사용금지로 시외에 생긴 여러 공동묘지 중의 하나이다. 당시 란트슈트라쎄에는 상크트 니톨라스 공동묘지도 새로 생겼었다. 오늘날 로후스마르크트(Rochusmarkt)가 있었던 곳이었다. 유명한 조각가인 게오르크 라파엘 돈너는 상크트 니콜라스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는 1784년 5월 17일 운영을 시작했다.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는 시내의 일부와 교외인 란트슈트라쎄, 에르드버그, 봐이쓰거버, 그리고 오늘날의 레오폴드슈타트의 주민들이 사용할수 있었다.

 

19세기 들어서서 비엔나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행정구역이 확장되자 그때까지 이른바 교외에 있는 공동묘지들은 더 이상 매장을 받아들일수 없을 정도로 포화상태가 되었다. 그리하여 비엔나의 중앙공동묘지를 조성키로 결정되었다. 짐머링의 중앙공동묘지는 1874년 11월 1일 역사적인 문을 열었다. 이로써 교외에 있던 다섯 곳의 공동묘지들은 약 90년에 이르는 서비스를 마치고 은퇴하였다. 당시에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는 그동안 확장을 거듭하여 거의 6만 평방미터에 이르는 넓이가 되었다. 이는 슈멜츠 공동묘지에 이어 비엔나의 지역공동묘지(commnunale Friedhöfe)에서 두 번째로 큰 공동묘지였다. 그러나 중앙공동묘지와는 게임이 되지 못했다.

 

상크트 맑스 공동묘지의 랜드마크인 십자가

 

비록 1874년에 중앙공동묘지가 운영을 시작했지만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는 그 이후에도 간간히 매장을 허용하였다. 주로 이미 조성되어 있는 가족묘지에서 그러했다. 예를 들어 1878년에는 프라터의 사업자인 바질리오 칼라화티(Basilio Calafati)가 매장되었다. 칼라화티라면 프라터에 있는 커다란 자이안트 목각 인형을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한편, 1880년대에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에 있는 저명인사 묘지들은 대부분 중앙공동묘지의 지정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중앙공동묘지는 신장개업한 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저명인사들의 묘지를 이장해 왔다. 모차르트도 그렇게 하여 중앙공동묘지로 갔으며 배링에 있던 베토벤과 슈베르트도 중앙공동묘지로 옮겨 갔다. 2005년 8월, 비엔나 시당국은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를 최종적으로 폐쇄키로 다시한번 결정하였다. 그리고 점진적으로 공원으로 만들기로 했다. 실제로 지금도 이웃에 아름다운 공원이 있다. 묘역에 있는 묘비들은 최대한으로 보존키로 했다. 역사적으로나 미술사적으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약 8천기의 묘지가 있었으나 현재는 5,635기만이 남아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3구 란트슈트라쎄에 속하여 있으며 남쪽으로 11구인 짐머링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정문은 레버슈트라쎄(Leberstrasse) 6-8번지 쪽으로 가면 된다.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는 비록 폐쇄되었지만 아직도 방문객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모차르트의 원래 묘지와 플리더블뤼테(Fliederblüte)라는 라일락의 일종인 꽃을 보기 위해 4월과 5월에 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

 

 플리더블뤼테가 만발한 5월의 생맑스 공동묘지

 

납골당에 써 있는 글귀가 인상적이다. “Trennung ist unser Loos, Wiedersehen unsere Hoffnung” 과 “Auf irdische Trennung folgt seelige Vereinung”이라고 적혀 있다. 감히 번역하면 ‘이별은 우리들의 운명, 희망으로 다시 만나자’ 와 ‘이 세상에서의 이별은 저 세상에서의 결합’이라고나 할까? 묘역의 센터에는 십자가(Friedhofskreuz)가 세워져 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의 말씀인 “Ich bin die Auferstehung und das Leben(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가 적혀 있다. 묘역의 동남쪽에는 일찍이 한스 펨머(Hans Pemmer)라는 사람이 공공연히 말했듯이 유대마을(Judendörfl: 유덴되르플)이 있다. 당시 비엔나의 유태인들은 배링에 있는 유태인공동묘지에 매장했는데 어찌하여 상크트 맑스 공동묘지에 유태인 묘역이 있는 것일까? 가만히 보면 유태인 묘지들 사이에 가톨릭 신부들의 묘지도 몇기가 눈에 띤다. 이를 미루어보아 아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태인들의 묘역이 아닌가 싶다. 유태인들은 1835년 이후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할수 있었고 그들은 비록 히브리어의 묘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가톨릭으로서 가톨릭 묘지에 매장될수 있었다고 한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상크트 맑스 공동묘지의 옛 정문의 상단에 유태인의 상징인 ‘다윗의 별’(Davidstern)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유태인들의 묘지라는 의미가 아니라 6각형 별모양으로서 마귀를 퇴치할수 있다는 단순한 표시일 뿐이라는 것이다. 중세에는 기독교도들도 6각형 별을 사탄을 쫓는데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옛 정문. 상단에 다윗의 별(다비드슈테른)이 조각되어 있다. 그렇다고 유태인 전용 공동묘지라는 의미는 아니다.

 

모차르트에 대하여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모차르트의 묘비는 묘역의 가운데 대로를 따라가다가 왼쪽에 난 짧은 자갈길을 지나면 나온다. 건너편 작을 길을 지나면 요한 게오르그 알브레헤츠버거(Johann Georg Albrechtsberger)의 아름다운 묘지가 나온다. 작곡가인 알브레헤츠버거는 모차르트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비엔나 문화재국은 1947년 알브레헤츠버거의 묘지를 명예묘지로 선정하고 천사상을 새로 만들어 단장했다. 상크트 맑스 공동묘지에 가서 모차르트만을 보고 나올 것이 아니라 알브레헤츠버거에게도 문안을 드림이 마땅할것 같다.

 

요한 게오르크 알브레헤츠버거 묘지

 

이곳에는 프러시아-오스트리아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작선 및 오스트리아 병사들의 묘지가 있다. 작선 병사들의 묘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Hier ruhen sächsische Krieger, 1866” 이다. 번역하면 ‘이곳에 작센 전사(戰士)들이 잠들다. 1866년’이다. 건너편의 오스트리아 전몰장병들의 묘비에는 “Hier ruhen österreichische Krieger, 1866”라고 적혀있다. 번역하나마나 작센묘비와 내용이 거의 같다.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에는 개신교도들과 로마가톨릭이 아닌 가톨릭 신도들의 묘지도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정교회(grieshisch-orthodoxen Kirche)의 신도들이다. 그리스정교회 사람들은 1837년에 자기들만의 묘역을 정하여 매장하기 시작했다.

 

 어떤 묘비에 있는 천사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