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공동묘지 문화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 - 3 [모차르트 묘지]

정준극 2010. 3. 14. 21:01

[모차르트 묘지]

 

새단장을 하기 전의 모차르트의 가묘

 

비엔나 외곽의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St Marx Friedhof)가 세상에 잘 알려진 것은 순전히 모차르트 덕분이다.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는 위대한 작곡가인 모차르트가 처음에 매장된 곳이다. 다만, 매장된 장소를 모르기 때문에 적당한 장소에 모차르트의 가묘(假墓)를 만들어서 묘비를 세워놓았다. 가묘라고 한 것은 진짜 묘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묘비만 세워져 있을 뿐이며 매장되어 있는 유해는 없다.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에 있던 모차르트의 가묘는 1888년 중앙공동묘지로 옮겨졌다. 물론, 중앙공동묘지의 모차르트 묘지에도 유해는 없다. 한편,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는 모차르트의 묘지가 있었다는 것을 기념하고 싶어서 기념비를 새로 만들어 세웠다.1791년 12월 8일에 모차르트를 징크트 맑스 공동묘지에 매장 할때에 어느 곳에 매장하였는지 표시를 해두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모차르트의 진짜 유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모차르트 묘지 안내표지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비엔나의 슈테판성당에서 가까운 라우엔슈트라쎄(Rauhenstrasse)의 어느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어느 집이라고 말한 것은 그 집이 현재는 없고 새로운 집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새로 지은 집은 현재 슈테플 백화점 뒤편에 연결된 집이다. 12월 6일에는 슈테판성당에서 모차르트에 대한 영결미사가 조촐하게 거행되었다. 당시 비엔나의 장례식은 우리나라처럼 3일장 또는 5일장 같은 관례는 없고 1753년의 법령에 의해 48시간이 지나야 매장할수 있었다. 48시간으로 정한 것은 당사자가 만일 실제로 죽지 않고 가사(假死)상태에 있다면 살려내기 위해서였다. 모차르트의 시신은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에 매장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는 몇 년전 요셉2세의 개혁정책에 의해 새로 조성된 공동묘지였다. 모차르트의 장례식은 평소에 후원하였던 고트프리트 반 슈비텐이라는 사람이 경비를 내고 주선을 해주었다. 아무튼 3일 후인 12월 8일, 모차르트의 시신은 마차에 실려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로 향하였다. 12월 초순이었으므로 추운 날씨였다. 당시의 법에 의하면 조문객 행렬은 비엔나시의 경계 밖으로는 나갈수 없었다. 그러므로 가족과 친지들은 영결식장에서 작별을 고하는 것이 보통이며 그중 직계 가족들과 아주 가까운 친지들만이 장례마차를 따라 시의 경계까지 따라 갈수 있었다. 모차르트의 경우에도 부인 콘스탄체, 친구인 쉬카네더, 제자인 쥐쓰마이르 등 가까운 사람들만 슈투벤토르(Stubentor)까지 와서 모차르트와 마지막 작별을 고하였다고 한다. 부인인 콘스탄체는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까지 가야 했지만 감기가 심하게 들어서 가지 못했다고 한다. 슈투벤토르는 오늘날 슈투벤링(Stubenring)에 있는 비엔나 성문이었다. 성문으로부터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까지는 관례에 따라 장의사 사람들만이 관을 실은 마차를 몰고 갔다.

 

1888년에 조성된 중앙공동묘지의 모차르트 묘지. 물론 지하에는 아무것도 없다.

 

당시 요셉2세가 만들어 놓은 개혁장례법은 매우 엄격했다. 정말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묘지에 십자가를 세우지 못했으며 묘비도 세우지 못하였다. 죽으면 그만이지 왜들 난리를 떨어야 하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해당되지도 않는 사람의 장레식을 국민들의 혈세를 펑펑 쓰면서도 국장으로 치루어 주는 경우가 있으니 만일 요셉2세 황제가 알았다면 큰일날 일이 아닐수 없다. 그리하여 아무튼 당시 모차르트가 묻힌 장소를 아는 사람은 당일 근무했던 묘지일꾼인 요셉 로트마이어(Joseph Rothmayer)뿐이었다고 한다. 요셉 로트마이어라는 이름은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에서 모차르트의 시신을 매장했다는 이유만으로 역사에 남는 것이 되었다.

 

새로 만들어 설치한 모차르트 묘비의 천사상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1809년(또는 1808년) 모차르트의 부인이었던 콘스탄체가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를 찾아와 남편 모차르트의 묘지에 꽃이라도 놓아두려고 했으나 묘지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냥 왔다고 한다. 1791년에 매장담당자였던 요셉 로트마이어가 불과 몇달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모차르트의 무덤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콘스탄체는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를 찾아가기 전에 요셉 로트마이어에게 미리 연락하여 남편 모차르트의 정확한 묘소가 어딘지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얼마후에 콘스탄체가 찾아갔을 때에는 요셉 로트마이어가 뜻밖에 세상을 떠나 아무것도 알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콘스탄체는 아마 생존한 두 아들과 함께 성묘하러 갔을 것이다.

 

모차르트의 부인 콘스탄체 . 1782년. 형부인 요셉 랑이 그린 작품이다.

 

모차르트의 탄생 1백주년은 1856년이었다. 1백주년을 한 해 앞두고 당시 비엔나 시장이던 요한 카스파르 폰 자일러(Johann Kaspar von Seiller)는 프란츠 요셉 황제로부터 모차르트의 묘지라고 생각되는 곳을 찾아서 모두가 알도록 표지를 세우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로부터 타스크 포스(TF)가 구성되어 모차르트가 매장되었다고 생각되는 장소를 찾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하지만 1백년이 지난 마당에 어찌 찾아 낼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도 타스크 포스는 이리저리 노력을 기울여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 구내의 제3열인지 제4열인지에 묘지 하나를 찾아내고 mit grösster Wahrscheinlichkeit(미트 그뢰쓰터 봐르샤인리히카이트)라고 기록하였다. 가장 진짜 장소라고 생각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그곳에 조각가 한스 가써(Hanns Gasser)에게 부탁하여 1859년 12월 6일 기념비를 만들어 세웠다. 그것이 오늘날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에 있는 모차르트의 가묘(假墓)에 있는 기념비이다. 모차르트 탄생 1백주년을 기념하여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에 기념비를 세운 것이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에서 치룬 마지막 모차르트기념행사였으며 그 이후로는 중앙공동묘지가 바톤을 이어 받았다. 예를 들어 모차르트 서거 1백주년 기념행사는 중앙공동묘지에서 1891년 12월 5일에 거행되었다. 브루크너가 앞장서서 모차르트 기념행사를 주관하였다.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에 있던 모차르트 기념비는 1945년 전쟁 중에 상당히 훼손되었다. 비엔나 시당국은 1950년 조각가 플로리안 요세푸 드루오트(Florian Josephu-Drouot)에게 요청하여 기념비를 새로 만들도록 했다. 훼손된 기념비는 현재 3구 란트슈트라쎄 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예전 것과 똑같이 생긴 새로운 기념비는 2005년에 설치되었다. 그러므로 만일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란트슈트라쎄 구(區)박물관에 들려 모차르트의 첫 묘비를 구경하고 슬쩍 사진도 찍어 오는 것이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란트슈트라쎄구 박물관 간판. 이곳에도 모차르트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