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7년전쟁의 모든 것

사실상의 1차 세계대전

정준극 2010. 3. 30. 21:55

7년전쟁이 뭐길래...사실상의 1차 세계대전

1756-1763년의 7년간 전세계에서 일어난 전쟁

 

1757년 6월 18일 보헤미아의 콜린에서 벌어진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전투. 7년 전쟁이 시작된 이래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이 전투로 2만2천여명이 전사했다. 옛날에는 무식하게 싸워서 전사자가 더 많았다.

 

7년 전쟁은 175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1763년에 겨우 마무리된 7년간의 전쟁이다. 무대는 어디인가? 전쟁이라고 하면 관록이 붙은 유럽이 본무대이다. 그런데 7년 전쟁은 유럽에서의 다른 전쟁과는 달리 범위를 크게 넓혀 아프리카, 인도, 북미, 남미, 그리고 아시아의 필리핀 군도에서까지 일어난 전쟁이다. 가히 세계대전이다. 교전국은 어디어디인가? 한쪽은 프러시아(독일), 영국과 식민지들, 하노바 공국, 포르투갈과 식민지들, 브룬스위크-볼펜뷔텔 공국, 헤쎄-카쎌 공국, 이로쿠아 연방(Iroquois Confederacy)이며 다른 한쪽은 프랑스와 식민지들,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신성로마제국, 제정 러시아, 스웨덴, 스페인과 식민지들, 작소니 공국, 사르디니아였다. 이렇듯 7년 전쟁에는 유럽의 강호들 뿐만 아니아 이들이 강점한 식민지들에서도 부화뇌동으로 전쟁에 참여하였다. 7년전쟁으로 교전 당사국들이 얻은 결과물은 무엇인가? 우선 프랑스는 캐나다의 프랑스 식민지를 영국에 양보했으며 지금은 미국 땅인 루이지애너를 스페인에게 넘겨주었다. 영국은 인도 이외에도 지금의 방글라데쉬에 해당하는 벵갈을 합병했으며 스페인은 아메리카의 플로리다를 영국에게 건네주었다. 이같은 영토의 이양을 결정한 평화협정으로는 세가지가 체결되었다. 생페터스부르크 조약, 파리조약, 후버투스부르크(Hubertusburg)조약이다. 7년 전쟁의 진면목을 이해하는 것은 18세기의 유럽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나아가서 합스부르크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제 7년 전쟁의 발단과 전황, 결과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지금 생각하면 지나간 일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흥미있는 역사이다. (이로쿠아 연방이라는 용어가 생소할 터인데 그것은 북미의 인디언 원주민 다섯 부족의 연맹을 말한다. 즉, 모호크족, 카이엔케하카 오네이다족, 오나요테카오노 오논다가족, 오눈다가오누 카유가족, 구요코뇨 세네카족의 연맹을 말한다. 이로쿠아 연방에는 추후에 두세개의 다른 부족들이 더 가입하였다.)

 

지중해의 작은 섬인 미노르카의 항구와 구시가지. 본격적인 7년전쟁을 알리는 영국과 프랑스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7년 전쟁은 18세기에 유럽의 열강들이 거의 모두 관련된 대규모 전쟁이었다. 발단은 1754년 북미에서 일어난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이며 여기에 서인도제도에서의 전투가 가미되었고 나아가 아시아의 인도전쟁이 추가되었고 이로 인하여 1756년부터 1763년까지 7년 동안 전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들어갔던 전대미문의 세계 대전이었다. 다시 설명하지만, 7년 전쟁에서는 프러시아와 영국, 그리고 독일의 작은 공국들이 연합하여 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 스웨덴, 작소니와 전투를 벌였다. 러시아는 처음에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편에 서있다가 전쟁의 후반에는 마음을 바꾸어 프러시아와 영국의 편에 서서 전투를 했으니 이것도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닐수 없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전쟁이 시작된지 한참 후에 전쟁에 합류하여 서로 대적하였다. 스페인은 프랑스-오스트리아 편에 붙었고 포르투갈은 영국 편에 붙었다. 화란(더치 공화국)은 처음에는 중립을 표방하여 전쟁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나중에 인도에서 공격을 받아 어쩔수 없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들어갔다.

 

7년 전쟁이 본격적으로 막을 올리기 전에 1754년, 북미에서는 영국과 프랑스가 서로 식민지 문제로 전투를 벌였다. 당시 오늘날의 미국은 독립하기 전이었으며 대체로 영국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아무튼 북미에서의 영국과 프랑스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결과적으로는 전세계에 총성을 울리게 한 7년 전쟁의 서막이 되었다. 사실 그때 북미에서 프랑스와 영국이 서로 잘났다고 전투를 벌인 것이 결국은 7년이나 끈 전쟁으로 확산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유럽의 열강들은 전쟁을 치루는 것을 일종의 취미생활 정도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북미에서 전투가 벌어지자 그러지 않아도 심심하던 판에 잘되었다고 생각하여 흥분하기 시작했다. 전투는 점차 확산되어 세계 각지로 번져 나갔다. 목에 힘깨나 주는 유럽 군주들의 취미생활을 무슨 수로 막을수 있다는 말인가? 하기야 전쟁에서 이기면 영토와 백성들이 늘어나고 게다가 수많은 보물들을 챙길수 있어서 전보다 더 잘먹고 잘 놀수 있지만 말이 쉬워서 이기는 것이지 이기는 사람이 있으면 지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므로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7년 전쟁은 북미에서의 영국과 프랑스간의 전투가 발단이 되었지만 정작 본궤도에 오르게 된 것은 프랑스가 지중해에 있는 영국령 미노르카(Minorca)를 공격하므로서였다. 때를 같이 하여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제가 작소니 공국을 공격하였다. 프레데릭 대제는 신성로마제국의 샤를르 6세(마리아 테레자 여제의 아버지)에 의한 국사조치(Pragmatic Sanction)에 반발하여 오스트리아 편을 들고 있는 작소니 공국을 첫 공격 타깃으로 삼았던 것이다. 국사조치라는 것은 황위 계승에 있어서 아들 적자가 없으면 딸도 군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내용이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며 오스트리아 대공인 샤를르(칼) 6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딸인 마리아 테레자만 있었다. 샤를르6세는 마리아 테레지아를 오스트리아의 군주에 앉히고 나아가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아 앉히고 싶어서 국사조치라는 것을 발표하여 딸도 군주가 될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주장했다. 평소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를 넘보고 있던 프러시아가 샤를르6세의 국사조치에 반발하고 나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인 샤를르6세. 그가 딸 마리아 테레지아를 다음 황제로 삼기 위해 국사조치를 발표한 것이 7년 전쟁의 단서가 되기도 했다.

 

전쟁의 본무대는 유럽이지만 유럽에서의 전쟁은 큰 진전이 없이 교착상태를 계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메리카 대륙과 아시아에서는 전쟁이 질기게 진행되어 많은 피해가 발생하였다. 7년 전쟁은 1763년에 대표적으로 파리조약이 체결됨으로서 마무리 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유럽의 맹주였던 프랑스는 파리조약을 통하여 영국과 프러시아에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즉, 북미와 서인도 제도에서의 식민지 권위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프러시아는 비로소 유럽의 맹주로서 위치를 굳건히 하였으며 오스트리아가 소유하고 있던 실레지아 지방을 다시 차지하게 되었다. 영국은 인도와 북미에서 완전히 세력을 굳히게 되었으며 세계의 식민지 제왕으로서 군림하게 되었다. 이처럼 7년 전쟁은 팽팽하던 유럽 열강들의 위상에 일대 변화를 가져온 것이었다. 그리고 7년 전쟁으로 약 90만명에서 1백40만명의 인명이 희생되었다.

 

보헤미아의 콜린에서 펼쳐진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전투. 참으로 치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