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7년전쟁의 모든 것

1756년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정준극 2010. 4. 14. 08:11

[1756년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18세기 영국 수상인 뉴캐슬 공작(Duke of Newcastle)은 아메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전투가 유럽대륙까지는 번지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프랑스가 선수를 쳤다. 툴롱(Toulon)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키더니 얼마 후에는 예상치도 못하게 영국이 점령하고 있는 지중해의 미노르카 섬을 공격하였다. 영국은 미노르카 섬을 프랑스에게 넘겨주고 후퇴해야만 했다. 1756년 6월 28일의 일이었다. 이로 인하여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영국 해군제독인 빙(Byng)이 패전의 죄를 물어 처형당했다. 아메리카의 오하이오에서 영불간의 전투가 벌어진지 2년후의 일이었다.

 

로보지츠 전투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제는 아메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우고 있고 지중해에서는 프랑스가 미노르카 섬을 공격하여 영국군을 몰아냈다는 소식을 듣자 좀이 쑤셔서 가만히 있지를 못하였다. 영국으로부터 군수물자를 보급 받기로 약속받은 프레데릭은 드디어 군대를 이끌고 1756년 8월 29일 작소니를 공격하였다. 작소니는 독일 국가의 하나로 오스트리아와 동맹관계에 있었다. 프레데릭은 장차 오스트리아-프랑스 동맹군이 실레지아를 되찾기 위해 공략할 것으로 판단하여 오히려 선수를 쳐서 작소니를 공격하였던 것이다. 작소니와 오스트리아는 아직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마치 6. 25때 아무런 방비도 없었던 우리나라를 북한 공산당이 일거에 쳐들어왔던 것과 같았다. 작소니와 오스트리아군은 미안한 말이지만 작전상 후퇴를 하였다. 얼마후 재결집한 작소니-오스트리아군은 로보지츠(Lobositz)에서 프러시아군과 건곤일척의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하지만 전략에 뛰어난 프레데릭을 당할 재간이 없었다. 프러시아군은 작소니-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을 훌륭하게 방어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근 피르나(Pirna)에서 작소니군을 포위하여 항복을 받아내기까지 했다. 결국 프러시아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작소니를 점령하고 손에 넣었다. 오스트리아군이 그나마 승리한 것은 실레지아의 일부지역에서였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제가 승리한 로보지츠 전투 

 

실상 영국은 프러시아가 갑자기 전투를 벌이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하지만 이미 일이 그렇게 되었으므로 동맹조약에 의해 보금품이나 열심히 제공할수 밖에 없었다. 이와 함께 영국은 더치 공화국을 설득하여 같은 편에 서도록 시도하였다. 그러나 더치 공화국은 중립으로 남아 있겠다고 하며 어느 편에 서기를 거부하였다. 당시 서로간의 병력을 따져 보면 프랑스-오스트리아 쪽이 훨씬 우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가 벌어지자 프레데릭 대왕의 프러시아 군대는 전격작전의 덕분으로 기대 이상의 승리를 거두었다. 영국은 북미에서 실망스런 결과를 얻었지만 유럽에서는 동맹국인 프러시아 덕분에 일시적이지만 만족스런 결과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