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7년전쟁의 모든 것

7년 전쟁의 배경

정준극 2010. 4. 14. 08:09

7년 전쟁의 배경

 

‘7년 전쟁’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의 연장이라고 말할수 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은 1740년부터 1748년까지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주축이 되어 벌인 전쟁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며 오스트리아의 대공인 샤를르 6세에게는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생후 7개월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딸만 셋이 있었다. 샤를르 6세는 큰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를 자기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겸 오스트리아 대공으로 삼고자 했다.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열강들은 당장  ‘아니, 여자가 무슨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단 말인가?’라면서 반대의 뜻을 표명하였다. 샤를르 6세는 당초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대신 로레인 가문의 프란시스를 큰 사위로 맞아 들여 그가 신성로마제국의 새로운 황제 겸 오스트리아 대공의 자리에 오르게 하여 대를 잇도록 했다. 우리 식으로 보면 데릴 사위였다. 1740년, 샤를르6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겸 오스트리아 대공이 세상을 떠나자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시스1세가 결국은 합스부르크를 대표하여 새로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시스는 명목상의 군주이며 모든 정사는 사실상 마리아 테레지아가 관장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인 샤를르 6세(1685-1740)와 어머니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폰 브라운슈봐이크볼펜뷔텔. 세 딸은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아나, 마리아 아말리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계속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이어지자 유럽에서 어깨에 힘깨나 주던 프러시아의 프레데릭2세는 ‘어찌하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합스부르크 사람들만 계속 해 먹느냐?’면서 이런저런 구실을 내걸고 마리아 테레지아를 견제하다가 결국은 군대를 동원하여 합스부르크를 공격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별로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프러시아의 공격을 받았다. 전투의 과정은 생략하고 결론만 말하자면 거의 8년 동안 끈 전쟁에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오스트리아가 패배하여 1748년 액스 라 샤플르(Aix-la-Chapelle)조약에 따라 실레지아를 프러시아에 양보했다. 실레지아는 오늘날 주로 폴란드에 속한 지역이며 일부는 체크공화국과 독일에 걸쳐 있는 곳이다. 전쟁에 패배하여 프러시아에 실레지아를 주어야 했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와신상담을 다짐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군비를 재건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동맹을 만들기 위해 프러시아에 일단은 머리를 숙였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평생 원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레데릭을 '악마같은 인간'이라고 불렀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외교 전략은 전혀 상식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전통적인 동맹국인 영국에 과감히 등을 돌리고 영국과 견원지간의 프랑스와 새로운 동맹을 맺었다. 이에 따라 유럽의 정치지도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의도대로 다시 그려지게 되었다.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의기투합하여 동맹을 맺어 프러시아와 영국을 대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1756년의 Diplomatic Revolution(외교혁명)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되자 프러시아의 유일한 지원국은 영국밖에 없게 되었다. 영국과 프러시아는 조상이 같은 하노버 가문이라면서 동맹을 맺자 겉으로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더구나 영국의 하노버 가문은 오래동안 프랑스로부터 위협을 받아 왔다. 그런 점에서 영국과 프러시아는 ‘우리는 진작에 동맹을 맺었어야 했는데! 나 원 참!’이라면서 늦었지만 동맹을 맺게 된 것을 무척 다행으로 생각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영국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을 가지고 있었다. 카리브해와 대서양에서 스페인 함대를 약탈하기를 밥 먹듯이 한 것도 영국의 해적, 좋게 말해서 해군이었다. 한편, 프러시아는 유럽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2차 대전 당시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명령에 따라 돌격만 하는 독일병정의 정신은 바로 프러시아 육군이 자랑하는 정신이었다. 영국은 유럽 본토에 프러시아라는 강력한 동맹국을 갖게 되자 그 틈에 해군력을 최대한 동원하여 해외 식민지 개발에 더욱 열을 올렸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외교혁명’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동맹(프랑스-오스트리아-러시아)이 프러시아와 싸우지 말고 평화스럽게 지내기를 바란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렇지만 영국과 프러시아가 동맹을 맺은 것은 결국 7년 전쟁을 야기한 촉매역할을 하였을 뿐이었다. 비록 수많은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지만 유럽의 군주들은 헤게모니 쟁탈을 위해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시스 1세의 자녀들. 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는 자녀가 11명이었다. 그후 다섯명이 더 태어났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은 거의 모두 유럽의 여러 왕실의 사람들과 결혼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유럽의 어머니였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프러시아에 패배한 마리아 테레지아는 군대 시스템을 과감하게 개혁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속담에 따라 프러시아 시스템을 도입하여 군대를 개혁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군사지식은 실로 휘하 장군들도 놀랄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다. 한편, 마리아 테레지아는 퇴역병사와 전사자 및 부상당한 병사들에 대한 복지도 크게 강화하였다. 이에 감동한 오스트리아의 군대가 비록 뚱뚱한 여자였지만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충성을 다짐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퇴역장병들은 나라로부터 생활비 지원을 받게 되자 그 은혜에 감읍하여 전쟁이 일어나면 당장이라도 마리아 테레지아를 위하여 총칼을 들고 전선으로 달려갈 기세에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과거 프러시아로부터 모욕적인 패전을 여러번 당하였다. 그럴 때마다 유일한 동맹국인 영국으로부터의 지원을 바랐지만 바다건너의 영국은 거리가 멀다는 핑게로 선뜻 지원병을 보내지 않고 자기들 실속만 차리기에 바뻤다. 오스트리아와 새롭게 동맹을 맺은 프랑스는 지리적으로 이웃이었다. 프랑스는 신성로마제국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뒤에서 든든히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오스트리아에게는 힘이 되어 주었다. 더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막내딸인 마리 앙뚜아네트를 프랑스의 루이16세에게 시집을 보내지 않았던가!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사돈간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 마리아 테레지아는 눈물을 흘리며 프러시아에 넘겨주어야만 했던 실레지아를 다시 찾고 프러시아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군사행동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상과 같은 배경이 ‘7년 전쟁’의 첫 번째 사연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막내 딸로서 프랑스의 왕세자(훗날 루이 16세)와 결혼한 마리 앙뚜아네트(마리아 안토니아). 12세 때인 1767년. 12세라...

               

두 번째는 영국과 프랑스간의 과열된 식민지 투쟁을 원인으로 꼽을수 있다. 두 나라는 북미와 남미,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서로 식민지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총검을 앞세우고 대결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오하이오국가(Ohio Country)를 놓고 서로 대결한 것이었다. 오하이오국가는 지금의 미국 오하이오 주를 중심으로 그 일대에 수립된 일종의 신생국가 형태로서 이를 차지하는 것이 추후 아메리카 대륙에서 세력을 잡을수 있는 발판이되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는 운명을 건 전투를 벌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7년 전쟁’이 공식적으로 발발하기 이전인 1754년부터 사실상의 전투를 벌였지만 이는 유럽이 아니라 아메리카에서였기 때문에 유럽의 관심에서 조금 멀어졌을 뿐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외교정책

 

18세기에 프랑스의 동맹국 또는 식민지에 대한 외교정책은 특별했다. 간단히 말해서 ‘되도록이면 당신들 혼자의 힘으로 꾸려나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식민지나 동맹국에서 군사요청을 하면 명목상으로 최소한의 군대를 파견하였을 뿐,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 대신, 만일 프랑스 본토가 군사적인 위협을 받으면 국가적인 역량을 총동원하여 전투를 벌였다. 그러한 배경 때문인지 해외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에서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프랑스 본국에서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는 일은 극히 드믈었다. 다만, 예외가 있다면 북부 아프리카의 알제리, 모로코 등지에 상당수의 군대를 배치한 것이었지만 그것도 프랑스 식민지로부터 모집한 용병들인 외인부대가 주축이었다. 더구나 프랑스는 영국에 비하여 해군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영국은 해외의 식민지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면 즉각적으로 함선에 병사와 보급품을 싣고 지원에 나섰지만 프랑스는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전투에 직접 참가한 프레데릭 대제

 

영국의 외교전략을 좀 더 관찰해보자. 영국이 어떤 영국인가? 세계에 유니온 잭이 휘날리지 않는 곳이 없다는 그 영국이다. 그런 영국의 대외전략은 유럽 대륙에 하나의 든든한 동맹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든든하다는 것은 군사적으로 막강한, 특히 육군이 강력한 나라를 말한다. 18세기에 들어와서 영국은 바로 입맛에 맞는 동맹을 발견하였다. 프러시아였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제(프레데릭 2세: 1712-1786)는 뛰어난 전술가이기도 했다. 영국은 동맹국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군수 물자를 지원하는 한편 해상을 통해 지원을 한다. 하지만 많은 수의 병력을 파견하지는 않는다. 되도록 적은 수의 병력만 파견한다. 그래서 돕는다는 생색을 내며 영국의 이익을 위해 동맹국이 대신 싸워주도록 한다. 프러시아와의 동맹에서도 영국은 프레데릭 대왕이 열심히 싸우도록 군비지원을 해주었다. 그리고 필요할 때에는 해군을 동원하여 적국의 해상운송을 봉쇄하고 적국의 군항에 함포사격을 퍼붓는 일도 영국의 주특기였다. 물론, 외국으로 병력을 수송할 때에도 우수한 해군력으로 임무완수였다.

 

프러시아 보병. 옛날 전투는 이랬다. 전진..또 전진..뻔히 총알을 맞고 쓰러질것을 알면서도 척척 발마추어 전진만 했다.

 

신대륙인 아메리카(미국)에서 영불의 적대관계는 나중에 유럽대륙으로 옮겨졌다. 프랑스는 아메리카에서 이른바 미시시피 밸리(Mississippi valley)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영국은 동부해안지대에서 이미 발판을 굳혀 놓고 있었다. 1750년대에 들어서서 프랑스는 더 북쪽으로 진격을 시도했고 영국은 더 남쪽으로의 진출을 시도했다. 두 세력이 부딪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두 세력은 버지니아(현재의 워싱턴 일대)와 펜실베이니아를 서로 차지하려고 총을 겨누지 않을수 없었다. 이른바 프랑스-인디안 전쟁의 일단이었다. 아메리카에서의 ‘7년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