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7년전쟁의 모든 것

콜린 전투에서 참패한 프레데릭

정준극 2010. 4. 14. 10:13

1757년의 콜린 전투

 

콜린 전투에서 패배한 프레데릭 대제의 약간 한심한 모습. 율리우스 슈라더 작품.

 

1757년 초, 작소니를 점령한 프레데릭은 의기양양하여 내친 김에 군대를 이끌고 보헤미아(현 체코 공화국)를 향하여 진군하였다. 당시 보헤미아는 오스트리아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프레데릭은 '오스트리아인지 뭔지 얼마든지 상대해 주겠다'는 자만심에 넘쳐 있었다. 프러시아군은 오스트리아-보헤미아 군이 방어하고 있는 프라하를 포위하고 밤낮으로 공격하였다. 그러다가 오스트리아 군이 성문을 열고 나와서 기습 반격을 가하자 포위를 풀고 밀려날수 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 군은 퇴각하는 프러시아 군을 향해 죽음 힘을 다해서 공격에 공격을 거듭하였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콜린 전투(Kolin)였다. 프레데릭의 프러시아 군은 작소니를 공격한 이래 승승장구하던 기분을 접어 두고 참패를 경험해야 했다. 몇 달 후, 이번에는 잠자코 있던 러시아군이 프러시아의 동부를 침공하였다. 러시아군은 별로 방비도 하지 않고 있던 프러시아 군을 완전히 밟아 버렸다. 이것이 저 유명한 그로쓰 얘거스도르프(Gross Jaegersdorf) 전투였다. 프레데릭은 보헤미아 전선에서의 병력을 거두어 프러시아로 돌아갈수 밖에 없었다.

 

 콜린전투. 7년 전쟁에서 프러시아의 첫번째 패전.

 

막강 프러시아였지만 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게 되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오스트리아군은 프러시아가 관할하는 땅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프랑스는 서부전선에서 프러시아를 압박하였다. 그러나 프러시아도 달리 프러시아이던가? 만만치 않았다. 프러시아는 로쓰바흐(Rossbah)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기습하여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 로이텐(Leuthen)전투에서는 뛰어난 전술로서 오스트리아군을 마치 빗자루로 청소하듯 몰아냈다. 이제 프러시아군은 승리의 기쁨에 들떠 있었다. 프레데릭 대제는 다시한번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병사들을 이끄는 가장 위대한 지휘관으로서 명성을 되찾게 되었다. 하지만 승리에 도취된 것도 잠시뿐, 시간이 지날수록 프러시아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직면하게 되었다. 서부전선에서는 프랑스군이 전열을 가다듬어 공격해 왔고 남쪽에서는 오스트리아군이 대공세를 취하고 있으며 동쪽에는 러시아군이 집결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고 북쪽에서는 스웨덴군이 바이킹의 용맹을 자랑하고 있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하노버군대가 하스텐베크(Hastenbeck)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 대패하여 비참하게도 전원 항복하였다. 이로부터 하노바와 브룬스위크는 프러시아의 전쟁에 참가할수 없게 되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되자 프레데릭은 영국에 SOS를 쳤다. 군수품과 군비를 더 많이 보내달라는 요구였다. 프레데릭 대제는 독일의 군주들로부터는 어떠한 지원도 받을수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유일한 동맹국인 영국에 의존할수 밖에 없었다.

 

한편, 영국도 사정이 만만치 않았다. 미국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윌렴 헨리 요새(Fort William Henry)에서 프랑스군에게 패배한 것은 씻을수 없는 실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본토의 정치 상황은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 1757년 새로 출범한 연정은 영국의 기존 대외정책에 약간의 변화를 보여준 것이었다. 두가지 전략을 동시에 추진하는 정책이었다. 영국은 비록 유럽 대륙에서 떨어져 있는 섬나라이지만 유럽에 계속 연고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신상에 유리하다고 생각 하였으며 이와 관련하여 영국의 왕실과 친족관계가 유난히 돈독한 독일을 계속 지원키로 한 것이다. 두번째 정책은 세계 곳곳에서 프랑스가 식민지로 삼고 있는 곳을 공략하여 영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영국의 이같은 두가지 정책의 기조는 7년 전쟁이 끝나고서도 한동안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