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7년전쟁의 모든 것

초른도르프를 사수하라

정준극 2010. 4. 17. 09:43

1758년의 초른도르프 전투

 

1758년 후반기에 전황은 프러시아와 영국 측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서부전선에서는 브룬스위크의 페르디난트 공자가 이끄는 군대가 크레펠트(Krefeld) 전투에서 프랑스 군을 격퇴하였다. 1758년 말에는 역사에 남은 초른도르프(Zorndorf) 전투가 벌어졌다. 프레데릭 대제가 직접 지휘한 3만 5천의 프러시아 군이 페르모르(Fermor) 백작이 이끄는 4만 3천의 러시아 군을 패배시킨 전투였다. 초른도르프 전투는 참으로 피아간에 처절한 전투였지만 프러시아는 죽음을 각오하고 요새를 사수하여 승리를 이끌어 냈다.  한편, 북쪽에서는 스웨덴군이 프러시아군의 기습을 받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군은 호흐키르헤(Hochkirche)전투에서 프러시아의 주력부대를 무력화하였다. 프레데릭은 포병의 대부분을 잃었지만 다행히 질서있게 퇴각함으로서 생각보다 심각한 손실을 입지 않았다. 프레데릭은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숲을 잘 이용하여 후퇴하였다. 후퇴가 진격보다 더 어렵다는 사실을 입증한 전투였다.

 

초른도르프 전투에서 프러시아군이 러시아군에게 대반격을 가하고 있다. 

 

1759년에 들어서서는 프러시아가 여러 전선에서 패배를 기록하였다. 카이(Kay) 전투에서는 러시아의 살티코프(Saltykov) 백작이 이끄는 4만7천의 군대가 칼 하인리히 폰 베델(Karl Heinrich von Wedel) 장군이 이끄는 2만 6천의 프러시아 군을 격파하였다. 하노바군은 민덴(Minden)에서 6만의 프랑스군을 격퇴하였지만 오스트리아군의 다운(Daun) 장군은 막센(Maxen) 전투에서 프러시아 군 1만3천명 전원의 항복을 받아내는 전과를 올렸다. 게다가 프레데릭 대제 자신은 쿠너스도르프(Kunersdorf) 전투에서 거의 반에 이르는 병력을 잃었다. 프레데릭의 군사 경력중 가장 심각한 패배였다. 프레데릭은 쿠너스도르프의 패전으로 인하여 하야 요청까지 받았으며 프레데릭 자신은 자살할 생각까지 했었다. 패전의 주요 원인은 러시아군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러시아군은 그동안 초른도르프와 그로쓰 얘거스도르프 전투에서 패배만 하였기 때문에 프러시아로서는 진짜 실력을 알수 없었다.

 

초른도르프 전투에서 패배한 러시아군 총사령관 페르모르 백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