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21구 플로리드스도르프

[참고자료] 슐로쓰 호프(Schloss Hof)

정준극 2010. 9. 24. 08:44

[참고자료]

슐로쓰 호프(Schloss Hof) - Imperial Palace Hof

 

18세기 초 슐로쓰 호프의 위용

 

오스트리아에는 비엔나 이외에도 지방의 여러 곳에 궁전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슐로쓰 호프는 아름다운 바로크 정원과 함께 가장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슐로쓰 호프는 비엔나 동북쪽 슬로바키아와의 접경지대에 있다. 지역적으로는 니더외스터라이히의 마르흐펠트(Marchfeld)에 속하여 있다. 슐로쓰 호프의 첫 소유자는 프린츠 오이겐(오이겐공자)이었지만 나중에 합스부르크 황실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합스부르크 황실의 여름 궁전으로 알려져 있다. 마르흐펠트는 약 9백 평방Km에 이르는 넓은 지역으로 오스트리아 최대의 평지이다. 말하자면 사냥장소로서 이만한 곳이 없다. 동쪽으로는 슬로바키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고 남쪽으로는 도나우가 흐르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비엔나의 비잠버그(Bisamberg)에 연결되어 있다. 마르흐(March)라는 말은 도나우의 지류인 모라바 강을 말한다. 옛 모라비아로 땅으로 흘러들어가는 강이다. 마르흐펠트에는 슐로쓰 니더봐이덴(Schloss Niederweiden)과 슐로쓰 에카르차우(Schloss Eckartsau)가 있어서 시간이 남으면 찾가가 보는 것도 미상불 보람이 있지만 다른 궁전들을 구경하고 나서 이들보다는 슐로쓰 호프가 대단히 규모가 크므로 혹시 공연히 고생해서 찾아왔다는 생각을 가질지가 걱정이다. 슐로쓰 호프는 비엔나에서 자동차로 두시간 정도 걸린다.

 

프린츠 오이겐이 슐로쓰 호프에서 지역주민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슐로쓰 호프는 일반에게 공개되어 있다. 단, 4월 2일부터 11월 1일까지이며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저녁 6시까지이다. 입장료는 1인당 10.50 유로이며 단체로 갈 경우에는 매 10인당 한명이 무료이다. 슐로쓰 호프는 크게 나누어 바로크 궁전, 바로크 정원, 동물원, 그리고 손님용 숙소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숙소건물은 마이어호프(Meierhof)라고 부르며 주로 사냥을 나온 손님들이 묵는 곳이다. 하인들의 방과 부억, 작업실등도 따로 있다. 슐로쓰 호프에는 Zum weissen Pfau(하얀 꿩집)이라는 식당이 있어서 따듯한 식사를 할수 있으며 Prinz Eugen Patisserie라는 제과점도 있어서 커피와 케익을 즐길수 있다. 관광객들은 조랑말도 탈수 있는데 토요일과 일요일, 그리고 휴일에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탈수 있고 마차는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역시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2유로를 내고 탈수 있다. 사냥숙사인 마이어호프에서는 바구니 만들기, 도자기 만들기, 잼 만들기 등의 여러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어서 구경만 해도 심심하지 않다. 하지만 슐로쓰 호프의 가장 특색있는 프로그램은 9월부터 시작되는 무도회와 연주회이다. 무도회의 참가자들은 바로크 풍의 의상을 입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지만 그것이 오히려 즐거움이 되고 있다. 낙엽이 물드는 가을 밤에 바로크 의상을 입고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정원을 거니는 귀부인들의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과 같다.   

 

슐로쓰 호프의 바로크 페스티벌에 참석한 여인들의 화려한 의상

 

슐로쓰 호프의 처음 소유자는 유명한 사보이의 프린츠 오이겐이다. 프린츠 오이겐은 비엔나 시내 헬덴플라츠의 노이에 호프부르크 바로 앞에 있는 기마상의 주인공이다. 헬덴플라츠의 건너편에 있는 기마상인 샤를르 대공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구국영웅이다. 더구나 프린츠 오이겐이라고 하면 클림트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는 벨베데레 궁전(Schloss Belvedere)의 주인이었으므로 모르는 사람이 없다. 프린츠 오이겐은 비엔나 시내에 벨베데레라는 궁전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은 겨울궁전으로 쓰고 마르흐펠트의 땅을 사서 이곳에 여름궁전을 짓기로 했으니 그것이 슐로쓰 호프이다. 슐로쓰 호프의 건축은 유명한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Johann Lucas von Hildebrandt)가 맡았다. 1720년경이었다.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는 벨베데레 궁전, 쇤보른 궁전 등 수많은 건축물들을 완성한 인물이다. 그러고 보면 슐로쓰 호프는 건물의 형태나 정원의 규모가 벨베데레와 거의 흡사하다. 심지어 정원에 스핑크스가 놓여 있는 것, 분수를 만들어 놓은 것도 벨베데레와 비슷하다. 다만, 슐로쓰 호프의 정원이 벨베데레와 다른 점이 있다면 슐로쓰 호프의 정원은 일곱개의 각기 다른 테라스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 더 한다면 1730년대는 유럽에서 바로크 양식이 물결 치던 시기였다.

 

슐로쓰 호프의 정원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대단히 검소한 생활을 주장하고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회가 되도록 노력했지만 제국의 위엄도 중시했다. 헬덴플라츠에서, 또는 링슈트라쎄의 대로에서 군대 퍼레이드를 즐겨 가졌던 것도 그런 배경에서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린츠 오이겐의 여름 궁전인 슐로쓰 호프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다. 결국 1755년 프린츠 오이겐의 후손으로부터 슐로쓰 호프를 구입하였다. 남편 프란시스 슈테판을 지극히 사랑했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로쓰 호프를 남편에게 선물했다. 프란시스 슈테판 황제는 이를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하여 시간만 있으면 슐로쓰 호프에 가서 보냈다. 일설에 의하면 실은 프란시스가 상당한 플레이보이여서 애인들과 함께 비엔나에서 멀리 떨어져 지내기 위해 슐로쓰 호프를 열심히 찾아 갔다는 얘기도 있다. 프란시스 황제는 슐로쓰 호프에 한번 갔다고 하면 몇주간씩 지내다가 왔다. 그렇다고 날이면 날마다 애인과 함께 갔었다는 것은 아니다. 프란시스는 마리아 테레지아와 여러 자녀들과 함께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슐로쓰 호프 본건물의 현관에는 '통치의 멍에로부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라는 말이 적혀 있다. 정치고 뭐고 귀찮아서 이곳에 와서 지낸다는 내용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도 슐로쓰 호프를 무척 사랑하였다. 그래서 자녀들 중에서 가장 총애하는 딸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결혼식도 비엔나가 아니라 바로 이곳에서 가졌다.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작센-테센의 알베르트 대공과 결혼하였다. 알베르트 대공의 비엔나 궁전이 현재 슈타츠오퍼 뒤편에 있는 알베르티나 미술관이다. 그리고 호프부르크 옆의 아우구스틴교회에 있는 기막히게 아름다운 영묘는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영묘이다.

 

 슐로쓰 호프의 정문은 일반에게 활짝 공개되어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부군 프란시스 황제, 그리고 자녀들이 비엔나를 떠나 이곳 슐로쓰 호프에 와서 지내자면 황실법도상 적어도 2백명의 시종, 시녀들이 함께 따라 나서야 했다. 이들은 어디서 지내야 하는가? 생각다 못하여 궁전의 뒤편에 숙소를 지었으니 이것이 사냥숙사로도 사용되는 객사이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시대가 지나자 뒤를 이은 황제들은 슐로쓰 호프에 대하여 그다지 애착을 갖지 않았다. 요셉2세는 슐로쓰 호프를 제국 군대의 병영으로 사용토록했다. 넓은 지역이었으므로 주로 기병대가 훈련장소로 사용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슐로쓰 호프는 그 아름답던 모습이 점점 황폐해 갔다. 황제의 식당은 제국 군대의 장교들이 술이나 마시는 장소가 되었다. 그때 황실의 어떤 똑똑한 시종이 뜻한바 있어서 슐로쓰 호프의 모든 가구들을 하나하나 장부에 기록하고 나중에 200대가 넘는 마차에 실어서 비엔나 시내의 황실가구창고로 가져와 보관하였다. 그리하여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슐로쓰 호프의 빛나는 가구들은 운명이 온전할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무너지고 오스트리아공화국이 들어섰다. 황실가구창고에 있던 슐로쓰 호프의 가구들은 사람들이 그러면 안되는데 새로운 정부가 집기로 가져가서 쓰기도 하고 대사관의 장식품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마이어호프(사냥숙사)

 

정치적인 변혁이 파도처럼 몰려왔지만 슐로쓰 호프는 별다른 영향을 입지 않았다. 다만, 그곳에 주둔하는 군인들의 군복이 자주 바뀌었을 뿐이다. 처음에는 제국 기병대가 자리 잡고 있었고 이어 공화국이 되자 오스트리아연방군이 들어섰으며 그후에는 나치의 국방군이 차지하고 있다가 전쟁이 끝나자 점령군인 소련의 붉은 군대가 들어와 거의 10년동안 차지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네것이냐 내것이냐 알게 뭐냐면서 점점 훼손되어 가는 슐로쓰 호프를 걱정하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소련군이 물러난지 한참 후인 2002년 정부와 국민은 비로소 귀중한 문화유산을 그대로 방치할수 없다고 생각하고 복구에 들어갔다. 모두 3천만 유로가 투입되었다. 이제 슐로쓰 호프는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수 있게 되었다. 건물과 가구뿐만 아니라 정원도 대대적인 손질을 하여 18세기 초 당시의 꽃과 나무의 종자를 가져와 그대로 재현하였다. 그리하여 2005년 드디어 일반에게 공개할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오이겐 공자와 마리아 테레지아가 한때 거처했던 이곳에서 그들의 숨결을 느끼며 감회에 젖고 있다.  

 

슐로쓰 호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