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21구 플로리드스도르프

[참고자료] 폭스테아터(Volkstheater)

정준극 2010. 9. 24. 09:45

[참고자료]

폭스테아터(Volkstheater) - 국민극장

옛 독일국민극장(Deutsches Volkstheater)

 

폭스테아터의 위용

 

비엔나의 오페라 극장에 대하여는 일단의 소개를 했지만 연극을 주로 공연하는 부르크테아터(궁정극장: Burgtheater)와 폭스테아터(Volkstheater)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에서 거명만 했을 뿐이지 소개한 일이 없어서 차제에 소개코자 한다. 다만, 부르크테아터에서는 역사적인 연주회가 자주 있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1차로 소개하기는 했었다. 폭스테아터가 비엔나를 찾는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었던 것은 위치적으로 시내의 중심가에 있지 않기 때문인 점도 있다. 폭스테아터는 시청(라트하우스) 뒤편 또는 유스티스팔라스라고 불리는 법원청사 뒤편에 있다. 주소는 7구 노이바우의 노이슈티프트가쎄(Neustiftgasse) 1번지이다. 교통편은 지하철 U2 또는 U3의 폭스테아터에서 내리면 된다. 미술사박물관, 자연사박물관의 뒤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비엔나 폭스테아터의 아버지 안첸그루버

 

폭스테아터는 1889년 극작가인 루드비히 안첸그루버(Ludwig Anzengruber)와 사업을 하는 펠릭스 피셔(Felix Fischer)가 비엔나에는 부르크테아터가 있지만 여기에는 귀족들이나 행세깨나 하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므로 일반 시민들이 연극을 볼수 있는 극장이 필요하다는 데에 의견을 일치를 보고 극장건설에 착수하여 빛을 보게 되었다. 사실 독일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도 일반 대중들을 위한 극장이 있었으며 이들 국민극장들은 Verein des Deutschen Volkstheaters(독일국민극장연합)을 구성하여 초청공연 등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안첸그루버와 피셔가 추진하는 극장도 이들과 연계하기 위해 Deutsches Volkstheater(독일 국민극장)이라는 간판을 달기로 했으며 아울러 비엔나에도 비엔나국민극장연맹을 설립하였다. 초대극장장은 의자공장을 경영하는 프란츠 토네트(Franz Thonet)라는 사람이었다. 이 양반도 연극을 무척 좋아하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건축공사는 유명한 Fellner&Helmer(펠너와 헬머)건축회사에게 맡겼다. 이 회사는 중부 독일에서 여러 극장을 지은 경험이 있었다. 이들은 함부르크극장(Hamburger Schauspielhaus)을 모델로 하여 비엔나의 폭스테아터를 짓기로 했다. 한편, 새로 짓는 폭스테아터 지금까지 유례가 없었던 화재보험에 가입하였다. 왜냐하면 1881년에 링테아터(링극장)가 화재로 전소되는 참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전기를 도입하였다. 그것만해도 가히 혁명적이었다.

 

폭스테아터의 화려한 객석

 

객석의 천정화는 에두아르드 바이트(Eduard Veith)의 작품이다. 내용은 빈도보나의 충성맹세이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유명한 극작가인 페르디난트 라이문트(Ferdinand Raimund)를 화환으로 감싸고 있는 그림이 있으며 양 옆으로는 요한 네포무크 네스트로이와 루드비히 안첸그루버를 그렸다. 처음 폭스테아터를 오픈 했을 때에는 객석이 부르크테아터보다 컸었다. 모두 1900석이었다. 아마 독일어 연극을 공연하는 유럽의 어느 극장보다도 컸을 것이다. 그러다가 1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1,539석으로 축소되었으며 다시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970석으로 줄였다. 이렇게 하여 현재로서는 비엔나에서 부르크테아터 다음으로 객석이 많은 극장이 되었다.

 

폭스테아터 포이어의 응접실

 

1889년 9월 14일 개관기념공연은 안첸그루버의 Der Fleck auf der Ehr(명예의 오점)이었다. 폭스테아터는 나치점령시기인 1938년부터 1945년까지 국민오락프로그램인 Karft durch Freude(기쁨으로 힘을 기르자)의 관할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치는 자기들의 선전용 연극만을 무대에 올리도록 했으며 국민 내핍운동의 일환이라고 하며 화려한 장식을 금지하였다. 이에 따라 극장 건물의 현관에 있는 장식물도 모두 철거되는 운명을 겪게 되었다. 폭스테아터는 전쟁의 포화에 예외가 아니었다. 폭격을 받아 쿠펠(원개)이 파괴되었다. 전쟁이 끝난후 폭스테아터는 시민의 손으로 다시 돌아왔다. 재개관은 비엔나의 일부 건물들이 아직도 잿더미 속에 있었던1945년 5월 10일이었다. 피손된 쿠펠 등을 복구한 것은 1981년에 이르러서였다.

 

폭스테아터가 시민관객들을 찾아 나선 것은 옛날 유랑극단의 마을 방문이나 다를바가 없는 프로그램이다.

 

돌이켜보건대 폭스테아터가 최고의 사랑을 받았던 때는 1920년대였다. 유명한 작품을 무대에 올렸을 뿐만 아니라 유명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였고 감독이나 무대장치에 있어서도 가히 최고 수준이었다. 1950년대로부터 60년대에는 레온 에프(Leon Epp)가 극장장으로 취임하여 옛 영화를 다시한번 누려보고자 했다. 그는 주로 라이문트나 네스트로이의 작품을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하여 무대에 올렸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현대 오스트리아의 극작가들인 볼프강 바우어(Wolfgang Bauer) 또는 페터 투리니(Peter Turrini)의 작품을 소화하는 데에도 주력하였다. 한편, 폭스테아터는 1954년 이래 밖으로 나가는 연극을 표방하였다. 즉 비엔나 시내에서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비엔나의 다른 지역에 나가서도 연극을 공연하여 연극인구의 저변확대를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주로 학교강당이나 공회당에서 공연하였으며 특히 우라니아, 한스 만들 직업학교, 악첸트극장에서도 공연하였다. 이어서 2005년부터는 Hundsturm(훈트슈투름)이라고 하여 소극장 형태와 실험극장 형태의 공연에도 도전하였다. 이제 폭스테아터가 안고 있는 과제는 어떻게 하면 젊은이들을 극장으로 인도하느냐는 것이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따분한 연극무대보다는 팝송에 빠져 있으며 컴퓨터 게임에 빠져 있어서 이들을 폭스테아터와 같은 훌륭한 극장으로 인도하는 것은 연극계가 당면한 최대의 과제가 아닐수 없다.

 

폭스테아터와 길건너에 있는 카페 라이문트. 연극이 끝나면 이곳에 와서 평론을 즐겼다.

 

폭스테아터의 무대를 거쳐간 배우 중에 아델레 잔드로크(Adele Sandrock)가 있다. 그를 기념하여 21구 플로리드스도르프에는 잔드로크가쎄(Sandrockgasse)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