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비엔나의 거리

비엔나 거리의 번지수 이야기

정준극 2010. 9. 30. 17:27

비엔나 거리의 번지수 이야기

번지수는 어떻게? (Hausnummering und Strassenschield)

 

19구 노이슈티프트 암 봘데 표지판

 

다시 설명하는 내용이지만 비엔나에는 2010년 현재 모두 6,783개의 길이 있다. 이들 길의 총 길이를 합산하면 2,800km가 된다. 그중에서 51km가 자동차 전용의 고속도로(Autobahn und Schnellstrasse)에 속하며 216km는 간선도로(Hauptstrasse)이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고속도로를 제외한 비엔나 도로의 거의 대부분은 이른바 공공도로(Gemeindestrasse), 즉 시도로에 속한다. 비엔나의 거리 중에서 가장 짧은 도로는 이리스가쎄(Irisgasse)로서 17m에 불과하다. 가장 긴 도로는 그린칭에서 칼렌버그를 거쳐 노이슈티프트에 이르는 회엔슈트라쎄(Höhenstrasse)이다. 무려 14.8km이다. 교량의 길이는 길의 거리와는 별도이다. 비엔나의 교량의 길이는 모두 합하면 54km가 되니 비엔나에는 이런 저런 교량이 많기는 많은 것 같다. 그래서 브뤼케(Brücke)라고 붙인 지명이 많다. 케텐브뤼케 등등...

 

호엔슈트라쎄

 

기록상으로 비엔나에서 가장 오래된 거리는 시내 중심가에 있는 호에르 마르크트(Hoher Markt)와 노이에 마르크트(Neue Markt)이다. 마르크트(시장)가 무슨 거리가 되느냐고 생각하겠지만 마르크트를 중심으로 둘러서 있는 건물에 번지수가 붙으므로 거리나 마찬가지이다. 호에르 마르크트는 앙커우르와 결혼분수가 있는 길이다. 일찍이 1233년에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노이에 마르크트는 로브코비츠광장의 옆에 있는 광장이다. 노이에 마르크트 광장의 가운데에는 돈너분수가 있어서 찾기에 쉽다. 예전에는 대체로 시장을 중심으로 길들이 뻗어 있었다. 무릇 길이름으로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이는 경우가 가장 많다. 비엔나의 거리이름 중에서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인 가장 오래된 경우는 4구 뷔덴에 있는 노이만가쎄(Neumanngasse)라고 한다. 1797년부터 그렇게 불렀다고 되어 있다. 마차로 화물을 운송하던 사업을 하던 요셉 노이만이라는 사람이 그 곳에 저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제국의 외교자문관까지 지낸 유명인사였다.

 

3구 아담스가쎄라는 표지판이다.

 

비엔나에서 처음으로 거리의 집들에 번호를 부여한 것은 1566년이다. 페르디난트1세 황제 시절이었다. 거리를 따라 들어선 집들에 대하여 어떻게 번호를 부여하느냐는 문제는 궁정에서 큰 논란이 되었다. 다시 말하여 어떤 집을 1번지로 정하느냐에 따라 체면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논란이 있었지만 페르디난트 황제가 직접 해결하여 더 이상 논란이 없었다. 당시에는 시내 중심가의 저택들만을 대상으로 번지수를 정해 주었을 뿐이었다. 외곽으로 나갈수록 자꾸 새로운 길이 생기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번지수를 부여하기가 어려워 우선 시내에만 한정하여 번지수를 매겼다. 비엔나에서 모범적으로 번지수를 제정한 것은 실은 군사목적 때문이었다. 징집영장을 발부하려고 보니 정확한 주소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주소지 정리를 위해 무던히도 노력한 결과 계속 발전을 거듭하여 1782년에 가서야 겨우 정리될수 있었다.

 

모퉁이 집은 주소가 두개일수가 있다. 슈토쓰 임 힘멜과 살바토르가쎄의 모퉁이 건물이다.

                        

집주소를 현재처럼 거리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짝수로, 다른 쪽은 홀수로 채워 나가는 방식은 1857년에야 도입된 것이다. 이 분야에는 권위자인 미하엘 빈클러(Michael Winkler)라는 사람이 고안한 방법이다. 그리고 번지수를 정함에 있어서는 도시의 중심지로부터 방사선형으로 외부로 뻗어나가는 방식을 택하였다. 중간에 십자로가 나오면 모퉁이에 있는 건물은 두 거리의 주소를 함께 가질수 있도록 했다. 예를 들어서 슈토쓰 임 힘멜 1번지는 살바토르가쎄 1번지이기도 한 것이다. 지금은 비엔나의 구(區)가 23개이지만 처음에는 9개였다. 당국은 각구의 주소지 표지판을 각각의 색갈로 구분토록 하였다. 1구는 빨간색, 2구는 자색(바이올렛), 3구는 초록색, 4구는 장미색(Rosa), 5구는 검은색, 6구는 노란색(Gelb), 7구는 파란색, 8구는 회색, 9구는 갈색으로 구별토록 했다. 이러한 구분은 1920년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요즘은 모두 통일되어서 짙은 청색 바탕에 흰 글씨로 쓰도록 하고 있다. 글씨의 형태에 대하여도 사연이 있다. 처음에는 독일식의 고딕체(Fraktur)를 쓰도록 했다. 그래서 옛 거리를 거닐다 보면 아직도 고딕식의 삐죽삐죽한 글씨로 쓴 표지판을 간직하고 있는 것 볼수 있다. 그러다가 1923년부터는 하얀색의 라틴 글씨체를 쓰도록 했다. 그러다보니 이곳저곳의 주소지 표지판의 글씨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정부는 1959년 1월 1일을 기하여 모두 통일토록 했다. 전쟁후에 새로운 집들이 많이 들어섰기 때문에 어차피 준비기간을 거쳐 통일할 필요는 있었다. 비엔나 시내에는 대체로 몇개의 도로 표지판이 걸려 있을까? 그게 무슨 중요한 일이겠느냐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아보면 약 10만개의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독일식 고딕체를 사용한 도로표지판.  간혹 길거리에서 볼수 있지만 지금은 이런 자체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1구 돔가쎄.

 

다른 나라에서도 그렇지만 비엔나의 거리 이름도 초창기에는 주로 주변의 지형을 참고로 했다. 그래서 들판의 이름이나 경작지의 이름(펠트), 언덕 이름(버그 또는 아우), 하천(플루쓰) 이름 등이 많았다. 우리는 논밭마다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이 아닌데 서양에서는 웬만한 밭이면 죄다 이름을 붙였다. 때문에 경작지에 주소 번지를 붙이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다가 도시개발로 인하여 경작지들이 사라지게 되자 유명인물들의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다만, 생존하여 있는 사람의 이름을 거리이름으로 붙이기는 어려웠다. 정치가들이나 사회운동을 하던 사람의 이름을 잘 못 붙일 경우, 나중에 그 사람이 좋지 않은 사람으로 밝혀지면 창피하므로 대체로 그런 사람들의 이름은 남겨두고 대신 나중에 가서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음악가, 화가, 작가, 배우 등의 이름을 즐겨 붙였다. 베토벤가쎄 등등...그러다가 차츰 과학자와 정치가들의 이름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비엔나 거리의 대부분은 사람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구의회 의원직이라는 것도 무슨 벼슬이라고 그들의 이름을 그들의 사후에 붙이기 시작한 것도 이때 쯤부터였다.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말이 좋아서 합병이지 실은 강제로 통합하자 나치는 비엔나의 상당수 거리 이름을 나치의 입맛에 맞게 변경하였다. 대표적으로는 저명한 유태인들의 이름을 붙인 거리이름은 물론, 유태인에게 동조적인 사람, 사회주의적인 사람, 오스트리아 파치스트 성향의 사람의 이름이 붙은 거리이름을 모두 바꾼 것이다. 예를 들어 유태계 은행가인 나탄 아담 폰 아른슈타인(Nathan Adam von Arnstein)을 기념하기 위한 아른슈타인가쎄(Arnsteingassse)는 당연히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고 심지어는 세계적인 지휘자 겸 작곡가인 구스타브 말러를 기념하는 말러슈트라쎄도 바꾸었으나 이 경우에는 전후에 원대복귀된 케이스이다. 유태계의 프러시아 장군인 블뤼허(Blücher)를 기념하는 블뤼허가쎄는 비록 나치시대였지만 그대로 두었다. 프러시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요즘에 들어서서 비엔나시는 특별히 유래를 알수 없는 거리 이름을 정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작은 광장(플라츠) 등이다. 아예 다른 거리에 흡수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유명인사의 이름을 붙여 변경하고 있다. 6구 마리아힐르프에 있는 Kurt-Pint-Platz, Oskar-Werner-Platz, Bundeslanderplatz, 그리고 13구 히칭의 Anna-Strauss-Platz 등이다. 안나 슈트라우스는 요한 슈트라우스2세의 어머니이다.

 

묄커바슈타이. 옛 비엔나 성곽의 능보(바슈타이)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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