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소프라노 젤마 쿠르츠(Selma Kurz)
구스타브 말러가 발탁한 콜로라투라
[위대한 소프라노 젤마 쿠르츠(젤마 폰 할반-쿠르츠: 또는 셀마 쿠르츠)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의 '디바의 세계' 중 소프라노의 세계에서 소개하였으므로 중복을 피하기 위해 본란에서는 간략히만 설명코자 한다.]
젤마(셀마) 할반-쿠르츠
비엔나의 23구 리징에는 위대한 소프라노 젤마 쿠르츠를 기념하기 위한 할반-쿠르츠-슈트라쎄(Halban-Kurz-Strasse)라는 길이 있다. 보통 셀마 쿠르츠라고 부르는 이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결혼 후 이름이 셀마 할반-쿠르츠이기 때문에 할반-쿠르츠-슈트라쎄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옛 오스트리아제국에 속한 실레지아(현재의 폴란드)의 평범하고 가난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젤마 쿠르츠는 비엔나에 와서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로서 기사(리터) 작위를 받은 요셉 폰 할반(Ritter Joseph von Halban)과 결혼하여 귀족의 신분을 지니게 되었으며 세상을 떠나서는 위대한 예술가만이 영면할수 있는 중앙공동묘지의 예술가묘역에 안장되는 영광을 얻었다. 중앙공동묘지에 있는 젤마 쿠르츠의 묘지는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의 묘지와 가깝게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비엔나에는 그를 기념하는 거리까지 생겼다. 젤마는 첫번째 남편인 요셉 폰 할반과의 사이에 딸과 아들 하나씩을 두었다. 그중에서 딸인 데지 할반(Desi Halban: Desiree von Halban-Kurz)은 어머니의 뒤를 이어 훌륭한 소프라노가 되어 세계에 이르을 떨쳤다. 데지 할반은 특히 구스타브 말러의 작품을 해석하는데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었다. 어머니인 젤마 할반은 젊은 시절에 구스타브 말러의 추천으로 비엔나 궁정오페라(슈타츠오퍼)에 데뷔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에 젤마의 딸 데지가 구스타브 말러의 작품에 정진하여 세계 정상의 말러 성악가가 된 것은 대단한 인연이 아닐수 없다.
세계 정상의 소프라노인 젤마 쿠르츠
사족이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비엔나의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극장)는 1920년대에 역사적으로 슈타츠오퍼를 빛낸 10명의 성악가를 추천한바 있다. 말하자면 슈타츠오퍼 10대 명가수이다. 잠시 지면을 빌려 이들을 소개하자면, 바리톤 파스쿠알레 아마토(Pasquale Amato), 베이스 테오도레 샬리아핀(Theodore Chaliapine), 테너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 소프라노 아멜리아 갈리-쿠르치(Amelia Galli-Curci), 소프라노 펠리아 리트빈느(Felia Litvinne), 소프라노 넬리 멜바(Nellie Melba), 소프라노 콘치타 수페르비아(Conchita Supervia), 테너 프란체스코 타마뇨(Francesco Tamagno), 소프라노 루이자 테트라찌니(Luisa Tetrazzini), 그리고 소프라노 젤마 쿠르츠이다. 비록 1920년대에 한정된다고 해도 슈타츠오퍼의10대 명가수에 포함된다는 것은 대단한 명예인데 젤마 쿠르츠가 이에 포함된 것이다. 젤마 쿠르츠는 어떤 사람인가?
폴랜드의 비엘스코-비알라 시청. 비엘스코-비알라는 젤마 쿠르치가 태어난 곳이다.
젤마 쿠르츠는 1874년 오스트리아제국에 속하여 있는 실레지아의 비알라(Biala)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비알라는 인접한 비엘리츠(Bielitz)와 함께 원래 갈리치아에 속하여 있었으나 당시에는 사정상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한 영토였다. 현재 비알라와 비엘리츠는 폴란드의 실레지아 지방에 속한 비엘스코-비알라(Bielsko-Biala)라는 하나의 도시로 통합되어 있다. 젤마 쿠르츠는 평범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젤마 쿠르츠의 형제자매는 모두 11명이나 되었다. 그러니 가정형편이 어떤지는 짐작코도 남음이 있다. 모두 제대로 학교교육을 받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많은 형제들 중에서 젤마는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불렀다. 음성이 아름다웠다. 젤마의 아버지는 젤마가 노래를 잘 불러서 기특했지만 성악가로서 성공하려면 뒷바라지를 잘 해야 하는데 그럴 여건이 아니므로 차라리 어려서부터 기술을 익혀서 돈을 버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젤마를 인근에 있는 가톨릭 수녀원에 보내어 바느질을 배우도록 했다. 옷만드는 기술자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수녀원의 수녀들은 어린 젤마가 뛰어나게 아름다운 음성을 지닌 것을 알고 놀라서 은근히 노래공부를 하도록 후원해 주었다. 그후 젤마는 간혹 마을에 있는 유태 회당에 가서 독창을 하였고 그 때마다 사람들은 '아니, 저 처녀가 젤마 아닌가? 언제 저렇게 노래를 잘 불렀나?'라면서 놀람을 금치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셀마네 집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노래공부를 시키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사람들은 돈을 모아서 젤마를 음악의 도시 비엔나에 보내어 본격적으로 공부할수 있도록 후원키로 결심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모은 돈은 별로 많지 않았다. 그래도 젤마는 이를 고맙게 여기고 큰 꿈을 안고 비엔나로 떠났다.
당시 비엔나에서 가장 유명한 성악선생은 갠스바허(Gänsbacher) 교수였다. 갠스바허 교수는 여학생을 받지 않았다. 대신, 다른 교수를 소개하여 주었다. 성악교육으로 유명한 요한네스 레쓰(Johannes Ress) 교수였다. 하지만 젤마에게는 당장은 마을 사람들이 모아준 돈으로 먹고 지낼수 있지만 앞으로 레슨비로 낼 돈은 없었다. 젤마의 재능을 눈여겨 본 갠스바허 교수는 저 유명한 에스터하지 가문의 니콜라스(미클로스) 에스터하지 드 갈란타(Nicholas Esterhazy de Galantha) 공자에게 '젤마라는 아이가 대단히 유망하니 재정지원을 하여 주심이 바람직한 줄로 아뢰옵니다'라고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젤마는 에스터하지 공자의 후원으로 요한네스 레쓰로부터 레슨을 받게 되었다. 요한네스 레쓰 교수는 젤마에게 성악의 기본부터 차근차근 가르쳤다. 레쓰 교수는 얼마후 젤마가 어느정도 기본이 되었다고 생각하자 시야를 넓히고 경험을 쌓기 위해 실제로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성악가로부터 레슨을 받도록 소개해 주었다. 젤마는 프랑스의 니스에 가서 유명한 장 드 레츠케(Jean de Reszke)로부터 레슨을 받았으며 이어 파리에서는 유명한 음악교수인 마틸드 마르케시(Mathilde Marchesi)에게서, 그리고 비엔나에서는 당대 정상급 소프라노인 펠리시에 카쇼브스카(Felicie Kaschowska)에게서 레슨을 받았다. 하지만 훗날 사람들이 젤마에게 '그런데 누구의 제자이시죠?'라고 물으면 한결같이 레쓰교수의 제자라고만 대답했다.
누구나 그렇지만 젤마의 첫번째 공식 활동도 미약한 것이었다. 이제 성장한 젤마는 1895년 3월, 비엔나에서 레쓰교수 문하생 합창발표회에 합창단원의 하나로 연주한 것이 첫 공식음악활동이었다. 젤마는 곡중 솔로를 맡았다. 젤마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그의 청아하고 아름다운 음성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로부터 젤마에게는 여러 오페라 단체로부터 단원으로 들어와 달라는 요청이 쇄도하였다. 함부르크 오페라단의 조건이 그중 수락할만 했다. 그렇게 하여 젤마는 그해 5월 함부르크 슈타트오퍼(시립오페라극장)에서 토마의 '미뇽'의 타이틀 롤을 맡아 드디어 오페라의 세계에 진출하였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젤마가 함부르크라는 대도시에서 오페라의 주역을 맡은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얼마후 젤마는 프랑크푸르트의 초청으로 4개 시즌에 출연하였다. 젤마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알레비의 '유태여인'에서 유도시(Eudoxie), 바그너의 '탄호이저'에서 엘리자베트, 비제의 '카르멘' 등을 맡아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의 예술가묘역에 있는 젤마 쿠르츠 묘지. 젤마 쿠르츠가 세상을 떠나자 비엔나 음악계의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를 중앙공동묘지의 베토벤과 모차르트와 슈베르트에서 가까운 곳에 안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엔나 궁정오페라(당시 정식 명칭은 제국및 황실 궁정오페라: Imperial Hofoper)의 음악감독인 구스타브 말러는 1898년도 다 저물어 가는 어느 날, 프랑크푸르트에서 젤마의 노래를 들었다. 말러는 젤마의 노래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말러는 젤마를 가장 훌륭한 독일적인 소프라노라고 생각했다. 말러는 젤마에게 비엔나에 와서 오디션을 받아 보도록 권고했다. 젤마는 비엔나로 가서 말러로부터 오디션을 받았다. 말러는 오디션이 끝나자 마자 즉각 젤마와 계약을 맺었다. 젤마는 이듬해인 1899년 9월, 토마의 '미뇽'으로 비엔나에 데뷔하였다. 이렇게 하여 30년에 걸친 젤마의 비엔나 호프오퍼 경력이 시작되었다. 젤마에게 있어서 말러를 만난 것은 인생의 전환점이 된 중대한 일이었다. 비엔나 호프오퍼에서 젤마의 활약은 뛰어났다. 젤마의 인기는 해를 거듭할수록 놀랍도록 높아졌다. 어느 때, 말러는 젤마가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 4막에서 레오노라의 아리아를 부르는 것을 듣고 젤마의 음성이 고음에서 말할수 없이 청아하고 완벽한 것을 듣고 젤마로 하여금 하이 콜로라투라(Hochkoloratur) 소프라노로 전환해 볼것을 권고하였다. 그동안 젤마는 미뇽이나 카르멘 처럼 메조소프나로의 역할만을 맡아 왔었다. 이렇게 하여 젤마 쿠르츠는 호프오퍼의 프리마 돈나 아쏠루타(Prima donna assoluta)가 되었다.
젤마 쿠르치가 30년을 활동한 비엔나 슈타츠오퍼(구 호프오퍼)
호프오퍼의 음악감독인 말러는 젤마에게 적합한 역할을 단계적으로 맡김으로서 그를 하이 콜로라투라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처음에는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로지나를 맡았다. 로지나의 역할은 모든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입문과정이나 다르없는 것이었다. 이어 마이에르베르의 '위그노'에서 우르뱅(Urbain)을 맡았고 이어 '가면무도회'에서 오스카(Oscar)를 맡았다. 그 다음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 플로토우의 '마르타'에서 타이틀 롤을 맡았으며 얼마후에는 마침내 '에르나니'에서 엘비라, '라크메'에서 타이틀 롤을 맡았고 이어 '후궁에서의 도주'에서 콘스탄체, '리골레토'에서 질다, '라 트라비아타'에서 비올레타, 그리고 최종적으로 '람메무어의 루치아'에서 루치아를 맡아서 하이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서 완성을 보았다. 놀라운 진전이었다. 젤마 쿠르치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서 위대한 승리를 이루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정적인 리릭 소프라노의 역할을 잊지는 않았다. 젤마 쿠르치는 비엔나 슈타츠오퍼에서 모두 992회의 오페라 출연을 했다. 그중에서 100회 이상이 '라 보엠'중에서 미미의 역할인 것을 보면 그의 리릭 소프라노에 대한 애정을 알수 있다. 그런가하면 젤마 쿠르치는 1907년 '나비부인'의 비엔나 초연에서 나비부인의 이미지를 창조하였다. 이어 1910년에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집시 남작'에서 자피(Saffi)의 이미지도 창조하였다. 1911년에는 '유진 오네긴'에서 타티아나를 노래했고 또한 '장미의 기사'에서 조피(Sophie)를 맡았다. 한편, 1916년 10월 4일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낙소스의 아리아드네'의 새로운 버전의 세계초연에서 체르비네타를 맡은 것은 진정으로 뜻깊은 일이었다. 젤마 쿠르치는 비엔나에서 체르비네타 역할만 36회를 하였다.
미모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젤마 쿠르츠
슈타츠오퍼에서 젤마 쿠르치의 마지막 공연은 1927년 2월 12일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로지나였다. 그가 슈타츠오퍼에서 처음으로 로지나를 불렀을 때로부터 거의 30년이 지난 때에 바로 그 로지나로서 그의 오페라 인생의 막을 내렸던 것이다. 젤마 쿠르치의 마지막 공연을 보기 위해 유럽 각지에서 수많은 팬들이 비엔나에 당도하였다. 젊은 시절에 로지나를 보았던 어떤 사람은 이제 나이가 연만하여 청년이 된 아들을 데리고 함께 슈타츠오퍼를 찾기도 했다. 이날의 로지나 공연은 20세기 오페라 연혁에서 가장 찬란한 공연이었다. 젤마 쿠르츠가 생애의 마지막 노래를 부른 것은 1932년 9월이었다. 젤마 쿠르치는 이미 병마와 싸우고 있는 힘든 상황에서도 루마니아의 안톤 대공과 일레아나 공주의 아들인 슈테판 대공의 세례식에 참석하여 모차르트의 Ridente la calma와 바흐-구노의 아베 마리아를 불렀다. 세례를 받는 어린 아이의 할머니인 루마니아의 마리 왕비는 젤마 쿠르치와 개인적으로 절친한 친구였다. 젤마 쿠르치는 이날의 세례식에 참석하여 마지막 노래를 부른지 9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젤마 쿠르츠가 남긴 음반은 별로 많지 않다. 1920년대이기 때문에 레코딩 기술도 뛰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비록 모노이지만 젤마의 노래를 들어보면 무언지 마음 속에 와 닿는 감동이 깊다.
젤마 쿠르츠의 음반에 어떤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곡들이 수록되어 있는지 알아보자.
- 루이지 아르디티(Luigi Arditi): L'estasi: Parla!: Il bacio
- 요한 슈트라우스2세(Johann Strauss II): Frühlingsstimmen Op 410(봄의 소리)
- 프릿츠 크라이슬러(Fristz Kesler): Caprice viennois Op 2(비엔나 카프리치오)
- 엔리코 토셀리(Enrico Toselli): Serenade Op 6 No 1(세레나데)
- 벤자민 고다드(Benjamin Godard): Jocelyn Op 100: Ah! ne t;eveille pas encor 'Berceuse'
- 니콜라스 드 폰트네이유(Nicholas de Fontenailles): Obstination(완고함)
- 펠리시앙 세자르 다비드(Felicien Cesar David): Le perle du Bresil(브라질의 진주)
- 샤를르 구노(Charles Gounod): Ave Maria(아베 마리아): Serenade(세레나드): '로미오와 줄리엣' 중에서 왈츠 Je veux vivre dans le reve
- 암브로이스 토마(Ambrois Thomas): '미뇽' 중에서 Je connais un pauvre enfant
- 자코모 마이에르베르(Giacomo Meyerbeer): '북극성' 중에서 La, la, la, air cherie: '위그노' 중에서 Nobles seigneurs, salut!: '디노라' 중에서 Ombre legere
- 레오 들리브(Leo Delibes): '라크메' 중에서 Ou va la jeune indoue?(종의 노래)
- 다니엘 프랑소아 오버(Daniel Francois Auber): Les diamants de la couronne: 아리아와 변주곡
- 조르즈 비제(Geoerges Bizet): '진주잡이' 중에서 Aria
'라크메'에서의 젤마 쿠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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