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사운드 오브 뮤직

폰 트랍 해군소령

정준극 2010. 10. 15. 19:35

'사운드 오브 뮤직'의 주인공

폰 트랍 해군소령

 

'사운드 오브 뮤직'의 주인공 게오르그 루드비히 폰 트랍 해군소령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The Sound of Music)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혹시 영화를 보지 못했다고 해도 ‘도레미’나 ‘에델봐이스’라는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하다못해 시골 노래방에 가더라도 가라오케 기계 안에 ‘도레미’와 ‘에델봐이스’가 준비되어 있는 실정이니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음악들이 얼마나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몇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주인공인 폰 트랍(von Trapp)이라는 사람은 실제 인물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이 제일 먼저 나온다. 우선 대답을 한다면, 실제인물이다. 영화에 나오는 트랍 가족의 스토리는 실제인가 아닌가? 대답은 '거의 비슷하지만 소설적인 면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그러면 실제로 폰 트랍을 비롯한 가족들의 스토리는 어떤 것인가? 폰 트랍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또 폰 트랍과 결혼한 견습수녀(실은 수녀지망생) 마리아의 얘기는 사실인가 아닌가? 트랍 가족이 나치를 피하여 스위스로 건너갔다는 것은 정말인가? 이런 점들을 별로 할 일도 없으므로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폰 트랍 콰이어의 공연

 

게오르그 폰 트랍은 실존 인물이다. 오스트리아제국의 해군장교였다. 정확히 말하면 오스트리아제국이 아니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었다.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기 직전의 이야기이다. 당시의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와 하나의 제국을 이루고 있었다. 한편, 바다라고는 하나도 없는 오스트리아제국에 무슨 해군이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오스트리아제국이 트리에스테를 포함한 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지배한 일이 있음을 생각하면 해군이 있다는 사실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아드리아해에 면한 트리에스테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해군기지가 있었다. 해군에서 폰 트랍의 계급은 독일어로 코르베텐카피탠(Korvettenkapitän)이었다. 이를 굳이 설명하자면 해군소령이다. 하지만 같은 소령이라고 해도 해군소령은 함장이나 다름없는 지휘권을 가진다. 작은 군함에서는 함장이고 큰 군함에서는 부함장이다. 트랍 소령은 오스트리아제국 해군의 장교로서 SMU-5라고 하는 비교적 작은 잠수함의 함장이었다. 폰 트랍 함장은 1차 대전 당시 아드리아해(Adriatic Sea)에서의 전투작전에 투입되어 현재의 몬테네그로 앞 바다에서 프랑스 함정들을 침몰시켰으며 이밖에도 많은 전공을 세웠다. 아드리아해는 서쪽으로는 이탈리아반도를 안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알바니아를 줄줄이 바라보고 있는 바다이다. 아무튼 폰 트랍 소령은 오스트리아제국을 위해 혁혁한 전공을 세워서 여러 훈장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군인으로서는 최고의 명예인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훈장’을 받은 것은 실로 가문의 영광이 아닐수 없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을 받는다는 것은 신성로마제국 시대로부터 군인으로서 대단한 영예였기 때문이다. 얼마나 영예인가하면 만일 그 훈장을 의젓하게 달고 파티에 참석한다면 만장한 모든 신사숙녀들이 훈장을 단 사람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드려야 할 형편이라는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1차 대전이 끝날 즈음의 게오르그 폰 트랍 해군소령

 

그러나 폰 트랍 소령이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훈장’을 받은 전쟁영웅이기 때문에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그의 인생 스토리와 가족들 이야기가 뮤지컬, 연극, 영화, 소설 등으로 소개된 것은 미안하지만 아니다. 폰 트랍 소령과 부인 마리아의 러브 스토리가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다. 폰 트랍 소령이 첫번째 부인에게서 7명, 재혼한 부인인 마리아에게서 3명, 도합 10명이나 되는 자녀를 거느렸으므로 정부의 출산장려 정책에서 모범을 보였기 때문에 유명해진 것도 아니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2차 대전이 시작되려는 때에 미국으로 피난의 길을 떠나 살게 되었다. 사람들은 폰 트랍과 가족들이 알프스를 넘어 스위스로 가서 살았다고 믿고 있으나 그건 영화 속의 이야기이고 실은 미국에 가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미국에 간 이들은 2차 대전이 끝난 직후 잘츠부르크를 비롯한 오스트리아의 여러 지방에서 주민들이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어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의연히 떨쳐 일어나서 ‘폰 트랍 가족 오스트리아 구조회’를 설립하고 자기의 재산을 털고 모금활동을 하여 고국의 어려운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도와주었다. 모금활동은 주로 가족들 모두가 출연하는 음악회를 열어서 돈을 모은다든지 또는 음반을 만들어서 돈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폰 트랍 가족의 이같은 구호활동 때문에 생명을 부지하고 재기에 나선 잘츠부르크 지역의 사람들이 수천명이나 되었다. 그러므로 실상 이러한 업적만으로도 폰 트랍 가족은 만인으로부터 칭송을 받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폰 트랍 가족은 가족들간의 진솔한 사랑을 통해서 지구상의 모든 인류에게 희망과 사랑을 보여주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 가족간의 사랑, 가정의 소중함, 조국에 대한 사랑 등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귀중한 가치관을 노래를 통해서 만인에게 보여주었다.

 

게오르그 폰 트랍의 생애와 전쟁중 활동을 기술한 책자

 

나치를 피하여 미국에 도착한 폰 트랍 가족은 미국에서 ‘폰 트랍 패밀리 싱거스’(Trapp Family Singers)를 조직했다. 전쟁으로 지쳐있고 낙심해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노래로서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미국은 물론 세계를 누비며 노래의 메시지를 전했다. 말하자면 오스트리아의 음악대사들이었다. 폰 트랍 가족이 나치를 피하여 오스트리아를 떠나게 된 스토리는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The Sound of Music)으로 만들어져서 브로드웨이에서 인기를 끌게 되었고 얼마 후에는 할리우드 영화로 만들어져 세상 곳곳에 정말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뮤지컬이나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스토리는 실제와는 여러 차이가 있는 픽션에 불과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폰 트랍 가족의 스토리에 너무나 감동을 받아서 ‘사운드 오브 뮤직’의 스토리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을 정도이다. 그통에 잘츠부르크는 ‘사운드 오브 뮤직’의 관광지로서 대단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의 관광상품 중에는 '사운드 오브 뮤직'이란 것도 있다.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장소들을 찾아다니는 상품이다.

 

폰 트랍이 태어난 달마티아(현재의 크로아티아)의 차다르 중심가

 

폰 트랍 소령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가? 폰 트랍 소령과 다시 결혼한 마리아는 어떤 사람인가? 폰 트랍 소령의 아이들은 그후 어떻게 되었나? 폰 트랍 소령은 1880년 4월 4일,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속한 달마티아(Dalmatia: 현재의 크로아티아)의 주도인 차다르(Zadar)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든지 하는 주장이 있다면 이는 사실과 다르다. 원래 이름은 게오르그 루드비히 트랍(Georg Ludwig Trapp)이었다. 그의 아버지인 아우구스트 폰 트랍도 해군 장교였다. 아우구스트 폰 트랍은 아들 게오르그가 태어나기 4년전에 귀족의 반열인 리터(Ritter: 기사)의 작위를 받았다. 그로부터 그의 자손들 까지도 Ritter von 이라는 귀족적 칭호를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운드 오브 뮤직’의 주인공인 폰 트랍 소령의 공식 이름은 게오르그 루드비히 리터 폰 트랍이며 편의상 폰 트랍이라고 줄여서 부를 뿐이다. 게오르그 폰 트랍의 자손들도 모두 von 이라는 귀족 표현을 사용할수 있었다. 리터라는 작위는 남작과 비슷한, 또는 그보다 아래에 해당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평민이지만 공로가 있어서 귀족처럼 높여주고 싶으면 리터라는 작위를 주었다. 독일어의 Ritter는 영어의 Knight로서 기사(騎士)라는 뜻이다. Ritter의 작위를 받은 사람의 자손은 아들이면 Ritter von을 사용할수 있지만 여자는 von 이라는 단어만 사용한다. 그리고 Ritter의 작위를 받은 사람은 일반적으로 남작과 같은 신분으로 대우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정부가 발행한 게오르그 리터 폰 트랍 기념 우표. 따지고 보면 작은 잠수함의 함장을 지냈을 뿐인데 정부발행의 우표에까지 나왔으니 대단하다. 실은 그를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한 오스트리아 정부가 더 대단하다.

 

게오르그의 아버지인 아우구스트 폰 트랍은 1884년에 세상을 떠났다. 게오르그가 겨우 네 살 때였다. 게오르그의 어머니는 헤드비히 베플러(Hedwig Wepler)라는 분이었다. 훌륭한 가정주부였다고 한다. 게오르그 폰 트랍에게는 누이가 하나 있었다. 헤데 폰 트랍(Hede von Trapp)으로 나중에 화가가 되었다. 형도 하나 있었다. 베르너 폰 트랍이었다. 1차 대전중에 전사했다. 그래서 1차 대전 이후에는 사실상 게오르그가 집안의 기둥역할을 맡아했다. 게오르그 폰 트랍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1894년, 열네살의 어린 나이로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리예카(Rijeka)라는 곳에 있는 사관학교에 들어갔다. 당시에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통치를 받는 지역이었다. 4년후, 그는 18세의 젊은 나이로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2년간의 항해 실습훈련을 떠났다. 아드리아해로부터 저 멀리 호주까지 갔다가 왔다. 1900년, 사관후보인 게오르그 폰 트랍은 순양함인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함(Kaiserin und Königin Maria Theresia)에 배속되었다. 이 함선은 중국에 까지 가서 의화단(Boxer)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로부터 2년후 게오르그 폰 트랍은 해군장교로 정식 임관되었다.

 

폰 트랍 가족 합창단. 게오르그와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세자녀도 함께.

 

폰 트랍은 잠수함에 매혹되었다. 1908년 그는 바라던 대로 새로 조직된 잠수함전투단(U-Boot-Waffe)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2년후인 1910년에는 전투단에 속하여 있는 U-6 잠수함의 함장으로 임명되었다. 새로 건조된 U-6는 어뢰를 발명한 영국의 로버트 화이트헤드(Robert Whitehead)의 손녀딸인 아가테 화이트헤드가 진수하였다. 바로 그 아가테 화이트헤드가 폰 트랍 소령과 결혼하였으며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일곱 소년소녀들의 생모였다. 폰 트랍은 1913년까지 3년동안 U-6를 지휘하였다. 2년후인 1915년, 1차 대전이 한창이던 시기에 폰 트랍은 U-5 잠수함의 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U-5 함장으로 있으면서 아드리아해에서 프랑스 무장순양함 1척과 이탈리아 잠수함 1척을 침몰시켰으며 그리스 군함 1척을 나포하는 전공을 세웠다. 폰 트랍은 그 해에 U-14 잠수함의 함장으로 승진했다. U-14는 원래 프랑스 잠수함인 큐리호였다. 아드리아해에서 폰 트랍 함장에게 나포되어 오스트리아제국 해군에 배치된 잠수함이었다. 폰 트랍은 U-14의 함장으로 있으면서 그야말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영국 유조선 1척, 이탈리아 증기선 3척, 그리스 증기선 1척, 프랑스 증기선 1척, 영국 증기선 5척 등을 침몰시켰다. 이같은 전공으로 인하여 폰 트랍은 소령으로 진급하였고 프란츠 요셉 황제로부터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을 받았으며 몬테네그로 해안의 코도르만(Bay of Kodor)에 있는 오스트리아 해군기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게오르그 폰 트랍과 첫번째 부인인 아가테 화이트헤드. 1910년. 이 여인이 실제로 일곱 자녀의 어머니였다.

아드리아해에서 오스트리아제국의 잠수함 U-5를 지휘하는 폰 트랍 함장

 

1918년, 1차대전이 종결되는 시점에서 폰 트랍 해군소령은 전쟁 중에 19척의 전함, 11척의 수송선을 격침하고 1척의 이탈리아 화물선, 1척의 프랑스 순양함, 1척의 이탈리아 잠수함을 나포하는 전과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1차 대전의 종말은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붕괴를 가져왔다. 이와 함께 오스트리아제국은 해외에 있던 여러 영토를 원주인에게 돌려 주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로서는 대규모 해군을 유지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해군 장병들의 명퇴가 진행되었다. 폰 트랍 소령도 해군을 떠나야 했다.

 

앞에서도 언급한대로 폰 트랍은 아가테 화이트헤드(Agathe Whitehead)와 결혼하였다. 어뢰를 처음 발명한 영국의 로버트 화이트헤드의 딸로서 폰 트랍이 잠수함 U-6의 함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U-6를 진수한 여인이었다. U-6는 1910년에 진수되었고 두 사람은 1911년(어떤 자료에는 1912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부인 아가테는 발명가인 아버지로부터 많은 재산을 상속받았다. 폰 트랍과 아가테는 별다른 부족함이 없이 트리에스테(현재는 이탈리아 영토) 부근의 폴라(Pola)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하였다. 폴라에서 지낼 때에 첫째 아이가 태어났다. 루퍼트 폰 트랍(Rupert von Trapp)이었다. 영화에서는 프리드리히로 나오는 의젓한 아들이었다. 영화에서는 리즐이라고 하는 딸이 형제자매 중에서 가장 첫째로 나오지만 그건 사실과 다른 이야기이다. 아무튼 폰 트랍과 부인 아가테 사이에서 이후 여섯 자녀가 더 태어났다. 첫 아들 다음으로 태어난 첫 딸은 엄마의 이름을 따서 아가테라고 했다. 아가테 폰 트랍은 폴라에서 태어났지만 그 아래의 마리아 프란치스카, 베르너, 헤드비히, 요한나는 잘츠부르크 인근 첼 암 제(Zell am See)에 있는 가족저택인 에를호프(Erlhof)에서 태어났다. 막내 마르티나는 비엔나 근교 클로스터노이부르크에 있는 가족저택인 마르틴슐뢰쎌(Martinschlössel)에서 태어났다. 결혼생활 10년쯤 지나서 1922년 9월에 부인 아가테가 성홍렬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큰 딸인 아가테 폰 트랍으로부터 성홍렬이 전염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2년후인 1924년, 폰 트랍 가족은 잘츠부르크 교외의 아이겐(Aigen)으로 이사를 갔다.

 

폰 트랍 가족이 한때 살았던 첼 암 제(Zell am See) 마을. 이곳에서 일곱 자녀 중에서 네명이 태어났다.

 

아이겐이라는 시골에서 조용하게 지낸지도 2년이 지났다. 둘째 딸인 마리아 프란치스카가 병에 걸렸다가 회복은 되었지만 학교를 다닐 정도는 아니었다. 폰 트랍은 잘츠부르크의 논버그(Nonnberg)수녀원에 연락해서 가정교사를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렇게 하여 논버그 수녀원에 있던 마리아 아우구스타 쿠체라(Maria Augusta Kutschera)가 폰 트랍 가정에 가정교사로서 들어오게 되었다. 마리아는 비엔나 부근에서 태어났지만 원래 고향은 티롤의 칠러탈(Zillertal)이었다. 마리아가 비엔나 부근에서 태어났다고 설명한 것은 티롤에서 비엔나로 가는 기차 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별일도 다 있다. 아무튼 당시 가정교사로 들어온 마리아 아우구스타는 22세였고 주인 아저씨인 폰 트랍 소령은 47세였다. 두 사람은 '사랑에 나이차이가 무슨 상관이냐?'면서 1927년 11월 26일 논버그수녀원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마리아와 폰 트랍 부부는 결혼후 세 자녀를 두었다. 첫째 로제마리(Rosemarie)는 결혼한 이듬해인 1928년 2월에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둘째 엘레오노레(Eleonore)는 1931년 역시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셋째인 아들 요한네스는 8년 후인 1939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늦둥이였다. 그리하여 폰 트랍의 자녀들은 모두 10명이나 되었다. 그러므로 사실상 폰 트랍 패밀리 싱어스의 멤버는 7명이 아니고 마리아와 재혼하여 낳은 3명의 자녀까지 포함하고 여기에 아버지, 어머니까지 가세시켜서 12명이었다. 잘츠부르크에서 살던 폰 트랍의 가족들이 어떻게 하여 미국으로 가게 되었는가?

 

게오르그 폰 트랍과 마리아의 결혼 사진

 

1935년, 독일에서는 히틀러의 나치가 득세를 하였고 오스트리아에서는 독일과 합병해야 한다는 기세가 높았다. 폰 트랍은 첫 번째 부인인 영국출신의 아가테가 세상을 떠나자 상속받은 재산을 영국의 은행에 투자하였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독일로부터 경제적 압박을 받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은행들은 불안한 상태였다. 폰 트랍은 오스트리아에서 은행업에 종사하고 있는 친구인 아우구스테 카롤리네 람머(Auguste Caroline Lammer)가 제발 도와달라고 하는 바람에 런던에 예치되어 있던 돈을 모두 인출하여 비엔나에 있는 친구의 은행에 저축하였다. 그 오스트리아 은행이 얼마후 불행하게도 파산에 이르렀고 따라서 폰 트랍도 거의 모든 재산을 날리게 되었다. 폰 트랍은 큰 충격을 받고 어떤 활동도 하지 못하며 낙담 중에 지냈다. 여러 아이들과 함께 당장 먹고 살기 위해서 일자리를 구해야 했지만 나라가 사회정치적으로 불안한 마당에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다. 폰 트랍의 가족들은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아이들은 참으로 예술적인 재능이 많았다. 새로 결혼한 마리아는 시간만 있으면 아이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아이들의 마음을 되도록 명랑하게 만들어 주었다. 친척 중에 누가 아이들의 노래를 듣고는 잘만 하면 돈을 벌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폰 트랍은 아이들과 함께 노래를 불러서 돈을 번다는 것은 자존심과 관련된 문제여서 결코 찬성하지 않았다.

 

미국에 정착한 트랍가족. 이들이 트랍 패밀리 콰이어를 이루었다.. 진짜 폰 트랍의 자녀들. 아버지는 없다.

 

그러나 마리아로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을 벌어 아이들을 먹이고 입혀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 마리아는 아이겐 마을의 저택을 하숙집으로 만들어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했다. 주로 신학교에 다니는 신부후보생들을 하숙생으로 받아 들였다. 마리아는 하숙집 운영과 함께 남편 몰래 음악회 주선자와 계약을 하여 아이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전문적인 공부가 필요했다. 그럴 때에 가톨릭 신부인 프란츠 봐스너(Franz Wasner)가 폰 트랍 하숙집의 신학생들을 돌보기 위한 신부로서 파송되어 왔다. 마리아와 거의 같은 나이인 봐스너는 폰 트랍 가족합창단의 가능성을 보고 자진하여 음악감독이 되어 본격적인 합창지도를 했다. 1938년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합병되었다. 히틀러의 해군은 오스트리아제국의 잠수함 영웅이었던 폰 트랍 소령에게 독일해군에 복귀토록 명령하였다. 다만, 오스트리아 출신에게는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해도 중요직책을 주지 않으므로 아마 독일 잠수함의 항해사 정도로 복귀하라고 명령한듯 싶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까지 받은 오스트리아 해군의 영웅이 나치해군의 항해사로서 근무한다는 것은 죽으면 죽었지 못할 일이었다. 한편, 폰 트랍은 1918년 1차 대전이 끝나서 트리에스테가 이탈리아 영토로 복귀되었을 때 뜻한바 있어서 트리에스테 시민권을 획득한바 있다. 그러므로 폰 트랍은 법적으로 오스트리아 국민이 아니기 때문에 나치의 명령을 받지 않아도 될 입장이었다. 그러자 나치는 폰 트랍에게 독일제국을 위하여 자원입대할 것을 종용하며 온갖 압력을 행사하였다. 폰 트랍은 기본적으로 나치를 혐오하였다. 더구나 오스트리아 제국 출신의 귀족이고 제국 해군의 함장까지 지낸 마당에서 독일 해군에 잡일이나 하러 간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폰 트랍은 나치로부터 피신해야 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조국 오스트리아를 떠날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힘들어만 갔다. 폰 트랍은 결국 가족들과 함께 집도 절도 다 버리고 오스트리아를 떠나 신대륙 미국에서 살기로 결심했다.

 

트랍 패밀리 랏지(Trapp Family Lodge). 옆에 스키장도 있는 산장호텔이다.

 

폰 트랍의 가족은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의 합병을 선언한지 얼마 후에 기차를 타고 이탈리아로 갔다. 사실상 이탈리아는 폰 트랍의 고향마을이나 다름없었다. 트리에스테의 해군본부에서 오랫동안 지냈었기 때문이었고 첫 번째 결혼후에도 상당기간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폰 트랍이 트리에스테에 살았을 당시에는 트리에스테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영토였다. 얼마후 폰 트랍 가족은 미국공연을 초청받았다. 폰 트랍 가족은 미국순회공연을 했다. 그때는 그저 방문이었다. 아무튼 미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미국의 여러 사람들이 폰 트랍에게 제발 다시 오라고 노래를 불렀다. 폰 트랍 가족은 이듬해인 1939년 유럽으로 돌아와 스캔디나비아 국가들에서 공연을 가졌다. 그리고 그해 9월 노르웨이를 갔다가 마침내 기회를 보아 미국으로 건너갔다. 만일 나치에게 들켰더라면 미국은 커녕 스캔디나비아에 머물러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미국에 온 폰 트랍 가족은 처음에 펜실바니아 주의 메리온(Merion)이라는 곳에서 잠시 거처를 정하고 지냈다. 바로 이곳에서 막내 요한네스가 태어났다. 2년후인 1941년, 폰 트랍 가족은 버몬트 주의 스토우(Stowe)에 정착하였다. 폰 트랍은 스토우의 집을 티롤지방 스타일로 개축하고 Trapp Family Lodge(트랍 가족 숙소)라는 이름을 붙였다. ‘트랍 가족 숙소’는 생계를 위해 오픈한 여관이었다. 원래 이 집은 농가였다. 폰 트랍 가족이 들어와서 집이름을 Cor Unum(한 마음)이라고 불렀다가 나중에 여관으로 바꾼 것이다. 폰 트랍과 마리아는 Trapp Family Lodge를 성공적으로 운영하였다. 그로부터 이 숙소는 버몬트 관광에서 빼놓을수 없는 가장 매력적인 장소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Trapp Family Lodge에서는 해마다 Vermont Mozart Festival(버몬트 모차르트 축제)이 열렸다. 더 많은 사람들이 Trapp Family Lodge를 찾아왔다.

 

버몬트 모차르트 페스티벌 포스터

 

세월이 흘러 2차 대전도 끝났다. 오스트리아는 강대국이 신탁통치하게 되었으며 특히 소련의 영향력이 컸다. 2차 대전의 막바지에 미육군 제42 레인보우 사단을 이끌고 잘츠부르크에 진격했던 해리 콜린스 소장은 잘츠부르크 주민들이 극심한 식량부족으로 고생하고 있으며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직접 보고 이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미국에 돌아온 콜린스 소장은 폰 트랍을 만나 고향인 잘츠부르크를 돕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줄것을 간청했다. 그리하여 Trapp Family Austrian Relief Inc(트랍 가족 오스트리아 구조협회)가 발족되어 전후 어려움에 처한 수천명의 잘츠부르크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폰 트랍은 1947년 5월 30일 버몬트 주의 스토우에서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7세였다. 마리아가 Trapp Family Lodge를 운영하였고 1987년 마리아가 세상을 떠나자 그가 낳은 유일한 아들인 요한네스 폰 트랍이 대를 이어서 경영 하고 있다. 비엔나의 23구 리징에 있는 Trappweg(트랍베그)는 폰 트랍가족을 기념하는 길이다.

 

게오르그 폰 트랍과 마리아 폰 트랍의 묘지. 버몬트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