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사운드 오브 뮤직

마리아 아우구스타 폰 트랍

정준극 2010. 10. 15. 19:37

'사운드 오브 뮤직'의 여주인공

마리아 아우구스타 폰 트랍(Maria Augusta von Trapp)

  

마리아 아우구스타 폰 트랍의 어린 시절. 티롤지방의 칠러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귀엽고 꿈많은 마리아가 퇴역 해군소령과 결혼하고 호적상 10명 아이들의 엄마가 되며 죽어서 미국 버몬트주 스토우 마을의 언덕에 묻힐 줄을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주인공인 마리아는 줄리 앤드류스가 맡아다. 그래서 폰 트랍가의 마리아라고 하면 우선 줄리 앤드류스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실제로 마리아는 어떻게 생겼을까? 줄리 앤드류스처럼 생겼을까? 위의 사진에서 보는대로 줄리 앤드류스와는 거리가 멀다. 그래도 가만히 보면 기품이 있고 인자스러우며 재주가 있어 보인다. 하기야 비록 정식 수녀는 아니지만 일단 수녀원 출신이므로 신앙심만은 당연히 깊을 것이다. 그보다도 실제의 마리아는 상당히 튼튼하게 생겼다. 저 정도면 그 많은 아이들을 돌보고 가정 일을 하며 대외적인 사업을 하는데 지침이 없어 보인다. 마리아는 나이 들어서 둔둔하게 보이지만 결혼할 당시의 사진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 때에는 아주 사랑스럽게 보였다.

 

결혼 당시의 게오르그 폰 트랍과 마리아

 

마리아는 16세 연상의 폰 트랍 퇴역 해군소령과 결혼하고 나서 전처 소생의 일곱 자녀들을 친자식 이상으로 돌보았다. 그리고 폰 트랍과 결혼하여서 세 자녀를 생산하였다. 남편인 폰 트랍은 1947년에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는 남편보다 무려 40년을 더 살다가 1987년에 남편 곁으로 떠났다. 폰 트랍 부부는 미국 버몬트주 스토우 마을에 있는 가족묘지에 합장되어 있다. 딸 들 중에서 헤드비히(셋째 딸로서 영화에서는 브리기타)와 다섯째 딸인 마르티나(영화에서는 막내 그레틀)도 합장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의 궁금증은 마리아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이나 기타 뮤지컬, 연극 등으로 저작료를 얼마나 받았을까 하는 것이다. 모르긴해도 상당한 돈을 벌었을 것이다. 재산은 얼마나 남겼을까? 버몬트주의 스토우 마을에 대단히 넓은 부동산을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여관 스타일의 Trapp Family Lodge가 있으며 크로스 컨트리 스키장도 경영하고 있다. 여기에 빌라를 지어 분양하고 있다. 수십년전에 싼 값으로 사놓은 땅이 지금은 금값이 되었다. 모든 재산은 막내 아들인 요한네스 폰 트랍이 관리하고 있다. 얘기가 이상하게 빗나갔음을 미안하게 생각하며 다시 스퀘어 원으로 돌아가 마리아가 누구인지 알아보자.

 

젊은 시절의 마리아

 


마리아 아우구스타 쿠체라(Maria Augusta Kutschera)는 1905년 1월 26일 티롤지방의 칠러탈(Zillertal)에 살고 있던 어머니가 비엔나의 어떤 병원으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타고 가는중에 기차 안에서 태어났다. 그때부터 아마 여행을 하며 살아야 하는 운명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그의 어머니는 이유를 알수 없는 병에 걸려 진단을 받기 위해 비엔나로 가는 중이었다고 한다. 비엔나에서 잠시 산후조리를 한 어머니는 아기 마리아와 함께 고향 칠러탈로 돌아왔다. 그리고 시름시름 앓더니 마리아가 일곱 살 생일을 맞이하는 날 그만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 아버지도 일찍 세상을 떠났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일곱 살에 고아가 된 마리아는 비엔나에 있는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비엔나의 국립사범학교에 입학할수 있었다. 장차 교사가 되어 안정되게 살 요량이었다. 1923년, 마리아는 18세 때에 이것도 저것도 다 떠나서 수녀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서 잘츠부르크에 있는 베네딕트 수도회의 논버그(Nonnberg) 수녀원에 들어갔다. 마리아는 정식 수녀가 될 때까지는 견습수녀(예비수녀)로 있었다.

 

마리아의 부모가 살았으며 마리아가 어린 시절을 보낸 티롤 지방의 칠러탈 마을 

 

어느날, 원장수녀님이 마리아를 부르더니 잘츠부르크에 게오르그 폰 트랍이라는 퇴역 해군소령이 있는데 상처를 하고 아이들 일곱명과 함께 지내는데 아이들 중에 큰 딸 아가테가 병약하여 학교를 다니지 못할 형편이므로 그 집의 가정교사로 가서 아가테의 공부를 도와주면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문의하였다. 마리아는 사범학교를 나왔고 더구나 성격이 활달명랑하기 때문에 가정교사로서는 적합하였다. 마리아는 수녀가 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속세에 나가서 살아야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다가 마침내 주님의 뜻이 속세에 나가서 살라는 것으로 믿고 폰 트랍 집의 가정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렇게하여 마리아는 폰 트랍 가정에서 일곱 아이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아이들의 친모인 아가테 화이트헤드는 큰 딸 아가테가 성홍렬에 걸리자  간호하다가 전염되어 결국 시름시름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는 아이들의 어머니인 아가테가 세상을 떠난 것이 마치 자기 어머니가 병마와 싸우다가 일찍 돌아가신 것이나 경우가 비슷하여 마음 속으로 '아하, 내가 갈 곳은 그 집이구나!'라는 생각을 다지게 되었다고 한다.

 

실제 트랍 가족 싱거스 

 

폰 트랍가의 입주가정교사로 들어간 마리아는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홀아비인 아이들의 아버지 폰 트랍 퇴역 해군소령과도 서로 마음이 끌리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하여 4년후인 1927년 11월 26일, 결국 마리아는 주님의 뜻으로 알고 폰 트랍과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은 상당히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당시 폰 트랍은 자기의 재산도 있었지만 세상 떠난 전처가 물려준 재산이 많아서 어려움 없이 지내고 있었다. 마리아는 결혼식을 올릴 때에 이미 임신 중이었다. 하나님이 새로운 가정에 결혼예물을 미리 보내주셨던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인 딸 로제마리는 결혼식을 올린지 3개월만인 이듬해 2월에 태어났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미국 이민에 대한 절차 때문에 서류에 1년 더 일찍 태어났다고 기재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하기야 미국 이민국 직원의 잘못으로 이름이나 생년월일이 잘못 기대된 경우는 부지기수였다.

 

마리아와 폰 트랍의 결혼식. 1927년. 성대하였다.

영화에서 마리아가 결혼식장에 들어가기 전에 원장수녀님의 축복을 받고 있는 장면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아이들도 새엄마를 무척 따랐다. 마리아는 수녀가 되지 않고 가정주부가 된 것이 행복했다. 그러기를 7년! 폰 트랍에게 어려운 일이 닥쳤다. 거의 모든 재산을 잃은 것이다. 폰 트랍은 재산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런던에 투자했었다. 첫 부인인 아가테 화이트헤드의 친정이 런던이었던 것도 큰 이유였다. 그러다가 비엔나에서 어떤 은행을 경영하고 있는 친구 라메르(Lammer) 부인이 잘못하면 은행이 문을 닫을 처지이니 투자 좀 해 달라고 간청하여 이를 뿌리치지 못하고 런던의 재산을 모두 인출하여 비엔나의 친구 은행에 투자하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정치가 극도로 혼란하여지고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기 위한 구실로 경제에 압박을 가하자 비엔나의 은행은 견디지 못하고 파산하였다. 그 은행에 투자하였던 폰 트랍의 재산은 하루 아침에 날아가 버렸다.

 

미국에서의 트랍 가족

 


폰 트랍가정은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하인들도 거의 모두 내보냈다. 식구들은 꼭대기 방으로 옮겨가고 다른 방들은 가톨릭대학교의 학생들에게 하숙을 주었다. 잘츠부르크의 대주교는 하숙하고 있는 가톨릭신학생들을 위해 신부 한명을 파견하였다. 프란츠 봐스너(Franz Wasner) 신부였다. 봐스너 신부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폰 트랍의 가족들은 봐스너 신부와 함께 지내면서 음악을 사랑하게 되었다. 1935년 가을, 폰 트랍 가족은 잘츠부르크에서 열리는 어떤 음악경연대회에 출연하여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상금도 받았다. 그로부터 폰 트랍의 가족들은 이곳저곳을 순방하여 음악회를 가졌다. 그러던중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였다. 폰 트랍의 가족들은 나치가 싫어서 결국 미국으로 이민의 길을 떠났다. 폰 트랍 가족이 살던 저택은 하인리히 히믈러의 잘츠부르크 사령부가 되었다. 그간의 얘기는 복잡하여서 생략코자 한다.

  

잘츠부르크에 있는 논버그(Nonnberg) 수녀원 

 

폰 트랍 가족은 미국에 와서 버몬트 주에 정착하였다. 아마 이곳에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모양이었다. 폰 트랍 가족은 미국에서도 Trapp Family Choir라는 이름으로 연주여행을 시작하였다. 캐나다에도 갔다. 1938년 뉴욕의 타운 홀에서 연주회를 가질 때 뉴욕 타임스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게재했다. "무언가 말할수 없지만 사랑스럽고 마음에 다가오는 연주였다. 가족들은 모두 겸손하고 진지했으며 가족 간에 서로 믿고 사랑하는 귀한 모습을 볼수 있었다. 핸섬한 폰 트랍 부인과 아이들은 검고 하얀 오스트리아 민속의상을 입고 여기에 빨간 리본을 달아 돋보이게 했다. 세련된 모습이었다. 세련된 모습만큼이나 그들의 노래 또한 세련되어 놓치고 싶지 않다.". 아무튼 이로부터 트랍 가족 합창단의 이름은 미국 전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트랍 가족 싱거스

 

공연을 하자면 매니저가 필요했다. 처음에 계약을 맺은 매니저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얼마후 프레데릭 샹(Frederick C. Schang)이라는 사람과 매니저 계약을 맺었다. 그는 '트랍 가족 합창단'(Trapp Family Choir)라는 명칭은 아무래도 교회 냄새가 너무 나므로 미국식으로 고치자고 하여 트랍 가족 싱거스(Trapp Family Singers)로 고쳤다.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합세하여 아이들만 10명이 되었다. 미국 사람들은 이들의 모습만 복고도 가정의 행복, 하나님의 축복을 생각하며 흐믓해 했다. 더구나 아이들은 모두 조신하고 사랑스럽게 생겨서 어디를 가나 환영을 받았다. 2차 대전이 끝난후 폰 트랍이 Trapp Family Austrian Relief Inc 를 설립하여 오스트리아의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과 의류로 도와준 것은 이미 게오르그 폰 트랍 해군소령의 편에서 설명한바 있다.

 

미국 버몬트주 스토우 마을에서의 마리아 아우구스타 폰 트랍 

 

1940년대에 들어서서 폰 트랍 가족은 버몬트 주의 스토우(Stowe)라는 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이들은 이곳에서 순회여행을 다니지 않을 때는 음악캠프를 개최하였다. 전국에서 많은 청소년들이 트랍 가족의 음악캠프에 와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모든 가족들이 합심하여 캠프를 운영하므로 참가자들은 재미도 있고 보람이 있었다. 1944년에 이르러 마리아와 요한나, 마르티나, 마리아, 헤드비히, 아가테는 미국시민권을 신청하였다. 아버지인 게오르그 폰 트랍은 미국시민권을 신청하지 않았다. 아들 루퍼트와 베르너는 2차 대전 중에 미군을 위해 봉사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미국시민권을 획득하였다. 마리아가 낳은 로제마리와 엘레오노레는 어머니 마리아가 미국시민권을 얻었기 때문에 역시 자동적으로 미국시민이 되었다. 마리아가 낳은 아들 요한네스는 미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노년의 마리아

 


게오르그 폰 트랍은 1947년 버몬트에서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7세였다. 게오르그는 폰 트랍 가족에 대한 소설, 뮤지컬, 영화가 나오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 폰 트랍은 1987년 3월 28일에 버몬트 주의 모리스빌(Morrisville)에서 수술을 받은 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는 남편 게오르그보다 40년을 더 살았다. 마리아가 남편이 세상을 떠난지 2년후인 1949년에 펴낸 The Story of the Trapp Family Singers(트랍 가족 싱거스 스토리)는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이 자서전을 기반으로 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각각 영화를 제작하였다. 1956년에 나온 The Trapp Family와 1958년에 나온 The Trapp Family in America라는 영화였다. 그러다가 '사운드 오브 뮤직'이 탄생하게 되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아버지(크리스토퍼 플러머)가 아이들을 훈육하고 있는 장면. 왼쪽으로부터 리즐, 프리드리히, 루이자, 쿠르트, 브리기타, 마르타, 그레틀. 실제로는 아들 프리드리히(루퍼트)가 첫번째이며 다음이 리즐(아가테)임. 영화에서는 실제 남매들의 이름을 모두 바꾸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귀재인 로저스와 햄머슈타인이 마리아가 쓴 책을 읽고 '아, 이것이면 좋은 소재가 되겠다'고 생각하고 뮤지컬을 만들었다.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은 대성공이었다. 이어 할리우드가 영화로 만들었다. 리챠드 로저스가 음악을 맡고 오스카 햄머슈타인이 대본을 만들었다. 매린 마틴(Mary Martin)과 테오도르 바이켈(Theodore Bikel)이 주역을 맡았다. 영화로 만든 '사운드 오브 뮤직'에는 마리아가 카메오(잠시 지나치는 단역)로 출연하였다. 브로드웨이에서의 상영은 박스 오피스 기록을 세웠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대성공이어서 돈을 많이 벌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마리아는 로열티로서 50만불만 받았다고 말했다. 그 당시에 50만불이면 거금이었다.

 

'사운드 오브 뮤직' 포스터 

 

우리가 잘 아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은 1965년에 제작된 뮤지컬 영화이다. 로버트 와이스(Robert Wise)가 감독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인 '사운드 오브 뮤직'을 기본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므로 음악과 대본은 로저스와 햄머슈타인 콤비의 솜씨이다. 그리고 기왕 얘기한 김에 한마디만 덧 붙이자면 에델봐이스라는 노래를 마치 오스트리아의 국가와 마찬가지의 오랜 민요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1965년에 리챠드 로저스가 작곡한 것이다. 그건 그렇고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를 소개하는 일은 모두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내용이므로 생략코자 하며 다만 에피소드 정도를 별도 항목에서 소개코자 한다.

 

마리아가 쓴 The Story of the Trapp Family Singers의 표지 

 

폰 트랍 가족에 대한 스토리는 다음과 같은 책자로 발간되었다.

- Maria - My Own Story(마리아 - 나의 이야기): 마리아 폰 트랍 저

- The Story of the Trapp Family Singers(트랍 가족 싱거스 이야기): 마리아 폰 트랍 저(뮤지컬/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기본이 된 책)

- Memories Before and After the Sound of Music(사운드 오브 뮤직 전후의 비망록): 아가테 폰 트랍 저

- The World of the Trapp Family(트랍 가족의 세계): 윌렴 앤더슨 저

- The Trapp Family Book(트랍 가족 북): 한스 빌헬름 저

- To the Last Salute(최우희 경례): 게오르그 폰 트랍의 비망록, 1935년 잘츠부르크에서 초판 발간

  

마리아의 역할을 맡은 줄리 앤드류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