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사운드 오브 뮤직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이런 저런 이야기

정준극 2010. 10. 16. 12:01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이런 저런 이야기

실제 스토리와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

 

'사운드 오브 뮤직'의 오프닝 장면

 

폰 트랍 가족의 스토리를 담은 리챠드 로저스(Richard Rogers: 1902-1979)와 오스카 햄머슈타인(Oscar Hammerstein II: 1895-1960)의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The Sound of Music)은 1965년에 제작되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스타 트렉' 등을 감독한 거장 로버트 와이스가 감독하고 줄리 앤드류스와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주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인 '사운드 오브 뮤직'을 영화한 것이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은 1949년에 나온 마리아의 자서전적 저서인 The Story of the Trapp Family Singers(트랍가족싱거스 이야기)를 기본으로 한 것이다. 그 전에도 마리아의 이 저서를 기본으로 하여 영화가 만들어지긴 했지만 아무래도 1965년도에 제작된 줄리 앤드류스의 영화를 따라갈 작품은 없다. '사운드 오브 뮤직'에는 여러 곡의 감동적인 노래가 나온다. Edelweiss, My Favorite Things, Climb Ev'ry Mountain, Do-Re-Mi, Sixteen going on Seventeen, The Lonely Goatherd 등이다.

 

 

미국에서 말년을 보내며 조국 오스트리아를 잊지 못하는 게오르그 폰 트랍과 마리아 폰 트랍. 1940년 후반.

 

'사운드 오브 뮤직'은 주로 잘츠부르크에서 촬영되었다. 남부독일의 바바리아와 20세기 폭스사의 캘리포니아 스튜디오에서도 촬영되었지만 역시 잘츠부르크에서의 현장 로케이션 장면이 압도적이다. '사운드 오브 뮤직'은 20세기 폭스사의 파산을 막아준 효자 작품이었다. 20세기 폭스사는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주역을 맡은 '클레오파트라'에 대단히 많은 제작비를 투입하였지만 수입은 기대에도 미치지 못하여 파산 직전에 있었다. 그러는 중에 '사운드 오브 뮤직'이 돈을 벌어 주어서 빚을 모두 갚고도 상당한 이익을 보았다. 결론적으로 '사운드 오브 뮤직'은 미국 영화 역사상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스타 워스'에 이어 세번째로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준 작품이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촬영은 웅장한 70mm Todd-AO로 했다. 극장마다 스크린을 압도하는 화면이어서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아카데미 5개 상을 받았으며 1965년도 최우수 영화로 선정되었다. 2001년에 미국 의회도서관은 '사운드 오브 뮤직'의 필름을 영구보관키로 했다.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또한 심미적으로 뛰어난 작품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뮤지컬이든 영화이든, '사운드 오브 뮤직'의 스토리는 실존했던 폰 트랍 가족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것이다. 그러면 과연 뮤지컬이나 영화의 내용은 사실을 얼마나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었을까? 미안하지만 영화는 영화일뿐이다. 여러 파트에서 실제와 차이가 있다. 어떤 점들이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자.

 

폰 트랍이 마리아에게 청혼하는 장면

 

- 게오르그 폰 트랍이 가족들을 데리고 오스트리아를 떠난 것은 은행파산으로 어려움을 겪자 할수 없이 외국으로 떠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폰 트랍 퇴역 해군소령은 반나치주의자여서 나치 점령의 오스트리아에서는 박해가 심할것 같아 살수가 없어서 미국행을 선택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한편, 그가 사는 저택만해도 그렇다. 폰 트랍은 잘츠부르크 인근의 아이겐(Aigen)이라는 마을에서 지냈다. 영화에서는 폰 트랍의 저택을 마치 궁전처럼 대단한 모습으로 그렸지만 실제로 그가 살았던 집은 그다지 크지 않은 집이었다. 영화에서처럼 무도회장이 있고 앞 마당이 강과 연결되어 있어서 보트를 타고 놀수 있는 그런 저택은 아니었다.

- 원래 마리아는 폰 트랍 가정의 셋째 딸인 마리아(영화에서는 루이자) 한 사람만을 위해 가정교사로 들어왔다. 영화에서는 전체 일곱 아이들의 가정교사로 취직한 것처럼 설명되어 있지만 원래는 아니었다. 셋째 딸 마리아는 성홍렬의 후유증이 심해서 집에서 개별적인 공부를 할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사실상 마리아는 수녀도 아니었고 더구나 아직 견습수녀도 아니었다. 영화에서는 마치 수녀(또는 견습수녀)인 것처럼 수녀복을 입고 나오지만 사실상 그런 옷을 입을 아무런 자격도 없는 처지였다. 마리아의 처지는 견습수녀로서 적당한지의 여부를 테스트 받는 견습수녀 후보자였을 뿐이었다. 실제로 마리아의 양부모는 마리아를 종교와는 거리가 먼 사회주의자로 길렀다. 그런고로 마리아가 수녀가 되겠다고 수녀원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교사가 되기 위해 수녀원에 들어와 공부를 했던 것이며 그러는 중에 신앙심도 생겼다.

 

마리아와 폰 트랍 소령의 결혼식. 잘츠부르크 대성당이 아니라 몬트제의 미하엘교회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현재의 몬트제 성미하엘교회 전경과 중당제단. 영화의 결혼식 장면에서 중앙제단의 모습이 등장한다.

 

- 영화에서는 베를린의 나치가 폰 트랍에게 전보를 보내어 해군으로 복귀할 것을 명령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런 명령이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폰 트랍이 제국의 해군 소령으로서 전투에 참가했던 것은 1918년이 마지막으로서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1938으로부터 20년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1938년에 폰 트랍의 나이는 이미 58세였다. 나치가 구시대의 노병을 불러서 함장으로 임명할리는 없다. 영화에서는 신혼여행을 갔다온 폰 트랍에게 나치가 전보로 군대복무를 명령하자 입대를 거부하는 의미에서 그날 밤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산을 넘어 다른 나라(스위스)로 피신한 것처럼 되어 있으나 사실에 있어서는 폰 트랍이 먼저 전쟁성을 찾아가서 일자리가 있는지 알아보았지만 마땅한 자리가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오스트리아에서 그가 해야 할 일도 없으니 미국으로 가자고 결심했다는 얘기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에서 '소 롱 페어웰 아우프비더젠'을 부르는 폰 트랍 가족들


-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은 1938년 3월에 이루어졌다. 잘츠부르크 음악제는 6월에 열렸다. 그러므로 6월이면 이미 국경이 모두 봉쇄된 후였다. 별로 든든한 옷도 입지 않은 아이들을 데리고 눈 덮힌 산을 넘어 국경을 건넌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6월이면 산꼭대기에나 눈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이 다니는 산길에는 눈이 없다. 한편, 영화에서는 잘츠부르크 음악제를 마치 민속음악 경연대회처럼 그렸으나 그렇지 않다. 잘츠부르크 음악제는 세계적인 고전음악 페스티벌로서 콘서트와 오페라가 공연되는 것이 일반이다. 성아가테 성당의 아마추어 성가대원들이 나와서 노래 부르는 행사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록에 의하면 마리아와 폰 트랍은 1927년에 결혼하였기 때문에 결혼식을 올리고 난 후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까 나치 깃발이 걸려 있었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영화에서는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장화 소리가 저벅저벅 나는 독일군이 잘츠부르크의 시내를 행진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건 결혼한지 11년 후인 1938년의 일이다. 폰 트랍과 마리아가 신혼여행을 갔다가 오니까 나치세상이 되었고 소집통지서가 왔다는 것은 시간상으로 맞지 않는 일이다.

 

논버그수녀원에의서 결혼식에 입장하는 마리아. 실제로 폰 트랍 소령과 마리아가 결혼식을 올린 것은 1927년이며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것은 1938년이다.

 

- 아이들이 마리아를 찾으러 논버그(Nonnberg)수녀원에 가서 초인종 줄을 잡아 당기는 장면이 있다. 줄을 잡아 당기니까 종소리가 설렁설렁 울렸다. 하지만 논버그 수녀원의 초인종을 잡아 다니는 줄은 명색뿐이며 실제로는 아무리 잡아 다녀도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라고한다. 수녀원측은 영화에서 아이들이 줄을 잡아 당기는 장면이 있다고 하니까 그렇게 하라고 하고 안에서 종소리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

- 영화에서는 폰 트랍 가족들이 알프스를 넘어 스위스로 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잘츠부르크에서 스위스로 걸어서 넘어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잘츠부르크는 독일-오스트리아 국경으로부터는 불과 몇 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스위스 국경으로부터는 대단히 멀리 떨어져 있다. 영화에 나온 스위스의 알프스는 실은 잘츠부르크에서 남쪽으로 5 km 떨어진 운터스버그(Untersberg) 산이었다. 즉, 오스트리아의 산이었다.

 

알프스를 넘는 폰 트랍 가족들. 그러나 실은 잘츠부르크 인근의 운터스버그 산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 폰 트랍은 오스트리아제국의 자라(Zara: 오늘날의 크로아티아 Zadar)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자라는 1차 대전 후에 이탈리아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그러므로 폰 트랍은 물론이고 마리아와 아이들은 모두 이탈리아 시민권자라고 할수 있다. 이탈리아 시민이라면 잘츠부르크를 떠나기 위해 잘츠부르크의 기차역에 가서 이탈리아로 가는 기차만 타면 되었다. 힘들게 걸어서 스위스로 갔다가 이어 이탈리아로 갈 필요는 없었다.

- 폰 트랍의 아이들은 가장 처음 태어난 아이가 아들로서 루퍼트(프리드리히)이다. 영화에서는 딸 리즐이 첫째 아이인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에 있어서 리즐은 둘째이다. 영화에서는 아이들의 이름을 거의 모두 바꾸어서 실제와 혼란을 준다. 리즐의 실제 이름은 아가테이며 루이자는 마리아 프란치스카이다.

- 영화에서 폰 트랍의 저택은 여러 장소를 합성한 것이다. 예를 들면 무도회장은 헬브룬 궁전이었다. 결혼식도 논버그수녀원 교회에서 거행된 것처럼 꾸며져 있으니 실제로는 몬트제(Mondsee)마을의 교회에서 촬영한 것이다.

 

유명한 '도레미 송'을 부르는 장면

 

- '사운드 오브 뮤직'의 상당 부분은 잘츠부르크와 오베레 외스터라이히(Obere Osterreich)에서 촬영되었다. 특히 성페터(St Peter) 수도원교회 묘지. 레오폴드스크론(Leopoldskron) 궁전, 프론부르크(Frohnburg) 궁전, 헬브룬(Hellbrunn) 궁전 등에서도 촬영되었다. 하지만 실존의 폰 트랍 백작이 원래 살던 집에서는 촬영된 장면이 없다. 잘츠캄머구트에서는 푸슐 암 제(Fuschl am See), 장크트 길겐(St Gilgen), 장크트 볼프강(St Wolfgang), 몬트제(Mondsee) 등지에서 로케이션했을 뿐이다. 잘츠부르크의 호엔베르펜 궁전(언덕 위의 웅장한 성)은 도레미 노래를 부를때 배경으로만 나온다. 미라벨(Mirabell) 정원이 도레미의 본무대로 되어 있다. 그런데 성페터(성베드로) 수도원교회 묘지에 대하여는 한마디 하지 않을수 없다. 잘츠부르크에 가면 관광 가이드가 성페터 수도원을 안내하면서 이곳이 바로 '사운드 오브 뮤직'의 묘지 장면을 촬영한 곳이라고 자랑스럽게 설명하지만 그곳에서 촬영하지 않았다. 캘리포니아의 유니버살 스튜디오에서 촬영하였다. 잘츠부르크의 관광 마피아들은 관광객들이 감탄하고 기뻐하는 한 잘못된 정보라고 해도 사실인듯 얘기하는 습성이 있는 것 같다.

 

폰 트랍이 기타를 들고 에델봐이스를 부르는 장면

 

- 에델봐이스(Edelweiss)를 오스트리아의 전통민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에델봐이스가 오스트리아의 국가인줄 알고 있다. 에델봐이스는 1950년대 초반에 리챠드 로저스가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을 위해서 별도로 작곡한 노래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전까지는 아무리 오스트리아를 주제로 삼은 노래라고 하지만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곡이었다. 그러다가 영화가 나온 후에 오스트리아에도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특히 잘츠부르크에서는 마치 잘츠부르크의 노래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폰 트랍 저택에서 무도회가 열릴 때에 정원에서 마리아와 폰 트랍이 랜들러라고 하는 오스트리아 민속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는 그런 스타일의 춤은 오스트리아에 없다고 한다. 근본적으로 랜들러는 농민들의 춤이다. 그런 춤이 귀족들의 무도회에서 연주되는 일은 극히 드믈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춤은 오스트리아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것이었다.

 

잘츠부르크의 미라벨 궁전 정원(정준극 촬영)

미라벨가든에서

 

영화에서 아이들이 노래를 부를 때에 고음이 나는 부분은 다른 사람이 대신 불렀다. 그중 한 사람은 리즐(샤리미아 카르)의 여동생인 달린 카르(Darleen Carr)가 불렀다. 달린 카르는 타이틀 송의 후렴에서 고음을 내는 부분을 쿠르트를 대신하여 불렀다. 그리고 So long, Farewell 이라는 노래에서 끝 부분에 Bye 라면서 높은 음을 내는 것도 달린 카르의 몫이었다. 그런데도 영화에서 달린 카르에 대하여는 미안하지만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외로운 양치기'  인형극 장면

 

로저스가 뮤지컬 '서운드 오브 뮤직' 에서 사용한 How Can Love Survive?, An Ordinary Couple, No Way To Stop It 의 세곡은 영화에서 사용되지 않았다. 로저스의 승인을 받고 제외하였다. RCA 빅터 레코드에서 내놓은 사운드 트랙은 무려 1천1백만장이나 팔렸다. 그렇다고 재고가 없어서 팔지 못한 경우는 없었다. 계속 찍어 냈기 때문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상당기간 동안 '사운드 오브 뮤직'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상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994년 이 영화의 레이저디스크 판에 From Fact to Phenomenon: The Real Story of the von Trapp Family Singers(사실에서 현상으로: 폰 트랍 패밀리 싱거스의 진짜 스토리)라는 30분 짜리  프로그램이 영국의 유명한 배우이며 시낭송가인 클레어 블룸(Claire Bloom)에 의해 취입된바 있다. 이 프로그램의 3부에는 오스트리아가 독일에게 합병된 이후의 오스트리아의 상황을 설명해 주눈 내용도 담겨 있다. 어떤 부분에서는 나치가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애국정서를 지나치게 압박하는 설명도 나온다. 그러자 나치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3부의 내용을 삭제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제작자는 내레이션에 그런 내용까지 포함하여 디스크를 만들어냈다. 이 때문에 독일은 매우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사운드 오브 뮤직'의 극장상영에 제동을 걸었다. 그리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오랫동안 '사운드 오브 뮤직'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지냈었다.   


영화가 나온지 50년 후에 모인 당시의 아이들. 맨왼쪽이 꼬마 그레텔이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영화에서 보면 폰 트랩 대령이 신혼여행을 다녀온 바로 그날 베를린으로부터 전보를 받았는데 당장 브레멘하펜에 있는 해군기지로 신고하라는 내용이었다. 폰 트랩 소령은 나치에게 끌려 가서 봉사하느니 제3국으로 도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날 밤에 잘츠부르크음악제를 이용하여 아이들과 함께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를 탈출키로 결심한다. 한편, 폰 트랩 대령을 브레멘하펜으로 호송하기 위해 잘츠부르크 나치당 지구당위원장이 직접 오스트리아 출신의 나치 병사들을 데리고 폰 트랩 대령의 집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당장 브레멘하펜으로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폰 트랩 대령은 그날 밤에 음악경연대회에 참가해야 한다고 얘기하여 겨우 위기를 모면할수 있었다. 그리고 옛 채석장의 마굿간 극장에서의 음악경연대회에서 가족들과 함께 노래를 부른후에 몰래 탈출한다. 그런데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은 폰 트랩 소령을 브레멘하펜으로 호송한다는 얘기다. 브레멘하펜은 함부르크 인근에 있는 항구도시이다. 잘츠부르크로부터 그곳까지는 상당한 거리이다. 너무 멀다는 생각을 해 본다.

 

오늘날의 브레멘하펜(Bremerhaven) 부두와 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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