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비엔나악우회

비엔나 악우회가 걸어온 길

정준극 2010. 10. 19. 10:58

비엔나 악우회가 걸어온 길 - 크로놀로지

 

1945년 초, 비엔나에도 봄 기운이 어른거렸지만 전쟁의 어두운 포화는 날로 거세어지기만 했다. '비엔나 악우회'의 사람들은 '혹시라도 악우회 건물이 폭격을 받으면 어떻게 하나?'라며 노심초사하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악보, 자료, 수집품들을 안전하게 간수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연주회가 제대로 개최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비엔나 악우회'는 연주회를 마련했다. 놀랍게도 전쟁의 막바지라는 와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입장권은 매진되었다. 난방도 안되는 추운 연주회장(황금 홀)이었지만 모두들 '비엔나 악우회'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연주회에 참석하였다. 그러던중 종전의 소식이 전해지기 며칠 전에 악우회 건물에 그렇게도 바라지 않았던 폭탄이 떨어졌다. 폭탄으로 황금 홀까지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마침내 2차 대전이 막을 내렸다. 두어달 후인 1945년 7월 3일, '비엔나 악우회'는 아직도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건물에서 전후 첫 음악회를 열었다. 브람스 홀에서 열린 '브람스 가곡의 밤'이었다. 한편, '비엔나 악우회'는 온 직원이 합심하여 그동안 폭격으로 허물어진 부분을 복원하는데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1945년 9월 16일에는 대연주회장에서 요셉 크립스(Josef Krips)의 지휘아래 빈필의 연주회를 열수 있었다. 이날의 빈필 연주회는 '비엔나 악우회'의 재개관을 기념하는 뜻 깊은 행사였다.

 

'황금 홀'에서의 빈필 연주회. 지휘 레오나드 번슈타인

 

비엔나와 음악은 떼어서 생각할수는 없다. 비엔나의 사람들은 일상에서 당연하게든지 또는 무의식 중이든지 음악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비엔나에서 음악보다 더 불가결한 것은 없다. 오히려 음악이 불가결이라고 하기 보다는 불가피한 존재였다. 이를 독일어로 Selbstverstandlichkeit(젤브스트페어슈탠들리히카이트)라고 부른다. 뭐라할까? 굳이 번역하면 스스로 알아차린다는 뜻이다. 아무튼 비엔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음악은 밥먹고 잠자는 것 다음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비엔나 악우회'가 생긴 것은 비엔나 사람들의 자부심이었다. '비엔나 악우회'가 공식적으로 태동한 것은 1812년 11월 29일이지만 실상 따지고 보면 그로부터 한참 전인 1785년에 이미 비슷한 성격의 움직임이 있었다. 당시 비너 차이퉁(Wiener Zeitung: 비엔나 신문)을 보면 '비엔나의 아마추어 및 전문 음악인들이 시민들을 위해 매주 월요일 저녁에 벨베데레 궁전 정원에서 음악회를 개최하오니 부디 참가하심이 어떠하신지요?'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일단의 자원봉사 음악가들이 모여 자기들도 기쁘고 남들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음악회를 개최하였음을 알수 있다. 이들의 한가지 공통점은 두말하면 잔소리이지만 '음악애호'이며 '음악을 통해 서로 친구가 되자'는 것이었다.

 

'비엔나 악우회' 황금 홀에서 빈필의 신년음악회 

 

18세기 말만해도 비엔나에는 일반 연주회를 갖는 전문 오케스트라가 없었다. 일부 극장에 전속되어 있는 오케스트라, 또는 전통적인 귀족 집안에 전속되어 있는 오케스트라는 있었지만 순수한 연주회 목적의 상설 오케스트라는 없었다. 만일 오케스트라 활동이 필요하면 즉흥적으로 멤버들을 구성하여 연주회를 갖는 것이 일반이었다. 기획이나 매니저를 하는 사람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작곡가들은 자기의 작품을 연주하기 위해 스스로 오케스트라를 구성하여 연주회를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한 때에 비록 아마추어들이 포함되기는 했지만 일단의 음악인들이 자원하여 벨베데레에서 연주회를 가진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안타깝게도 벨베데레의 연주회는 얼마후 자취를 감추었지만 반면 이를 기화로 상설오케스트라가 있어야 한다는 여론이 점차 높아만 갔다. 그런 중에 비록 임시이긴하지만 몇몇 음악인들이 합심하여 오케스트라를 구성하여 연주회를 개최하기도 했으니 대표적인 경우는 1808년 3월 27일 비엔나 학술원 대강당에서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를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지휘로 연주한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전문 지휘자가 없어서 주로 작곡가들이 지휘를 하였다. 이 연주회는 하이든이 공식석상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인 대단히 의미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설 오케스트라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움직임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비엔나 학술원 대강당에서의 하이든의 '천지창조' 연주회가 끝나고 치하를 받고 있는 하이든. 의자에 앉아 있는 분. 

 

또 몇년이 흘렀다. 1812년 4월 12일 자선활동을 하는 귀족 부인들이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음악회를 개최하였다. 역시 임시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였지만 음악회가 끝난후 몇몇 음악인들은 '아무래도 상설 오케스트라가 있으면 한이 없을 것 같다'는 의견을 내세웠다. 이 사업을 주도적으로 추진한 사람은 요제프 존라이트너(Joseph Sonnleithner: 1766-1835)였다. 당시 그는 궁정극장의 사무총장(Sekretr des Hoftheaters)였다. 대본가인 존라이트너는 여러 오페라를 위한 대본을 작성하였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베토벤의 '휘델리오'였다. 존라이트너의 주도가 시초가 되어 몇 달 후인 11월 29일과 12월 3일에 스페인승마학교에서 몇몇 인사들이 주도하여 구성한 오케스트라가 연주회를 가졌다. 오케스트라 단원 299명과 합창단원 200명이 출연하는 대규모의 연주회로서 헨델의 오라토리아 '알렉산더의 연회'(Alexander's Feast)를 독일어로 '디모데'(Timotheus) 또는 Die Gewalt der Musik(음악의 힘)이라는 타이틀로 바꾸어 공연하였다. 특이한 것은 관악기와 콘트라베이스는 전문 연주가들이 맡았지만 기타는 아마추어들이 맡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대부분이 연주로서 밥 먹고 사는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음악회가 끝나자 몇몇 사람이 뜻을 같이 하여 '비엔나 악우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비엔나악우회의 시초는 귀족 부인들이 마련한 스페인승마학교에서의 음악회라고 할수 있다.

 

요제프 존라이트너. 비엔나악우회의 창시자이다.

비엔나 도심의 호프부르크에 연결되어 있는 스페인 승마학교의 공연장.

 

'비엔나 악우회'는 처음에 친목 및 간단연주를 목적으로 시작하였으나 곧이어 기왕 말이 나온 김에 공식 단체로 발전되었다. 단체가 되었으니 정관이 필요했고 임원이 필요했으며 기금이 필요했다. 본 블로그의 다른 파트에서 이미 설명했지만 기억을 되살리는 의미에서 다시 한번 설명하면 '비엔나 악우회'는 세가지 사업목적을 내세웠다. 첫째 연주회 개최, 둘째 음악학교 운영, 셋째 자료수집관리였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주도하여 설립한 음악학교로서 주로 성악을 가르쳤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적인 비엔나음악대학교(비엔나 음악 및 공연예술 대학교)의 전신이었다. 한편, 살리에리는 기획음악회를 구상하여 처음으로 티켓을 예매하는 시스템을 운영하였다. 오늘날 모든 음악회가 주문제, 즉 예매제로 치루어지는 것은 오로지 살리에리의 시범에 의한 것이다.

 

안토니오 살리에리

 

'비엔나 악우회'는 당대의 베토벤에게 '비엔나 악우회'를 위한 대곡의 작곡을 의뢰하였다. 베토벤은 그런 요청을 선선히 수락하고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승리'(Der Sieg des Kreuzes Christi)라는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기로 약속했다. 베토벤은 '비엔나 악우회'로부터 착수금 조로 400굴덴을 받아가기까지 했다. 하지만 베토벤은 건강이 악화되는 등 사정이 있어서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였다. 미안하게 생각한 베토벤은 '비엔나 악우회'가 교향곡 제9번과 장엄미사곡의 초연을 맡는다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렇게하여 '비엔나 악우회'는 1824년 5월 7일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 '환희의 송가'(Ode to Joy)와 '장엄 미사곡'(Missa Solemnis 첫 세파트)의 세계초연이라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교향곡 제9번의 초연 연주는 악우회 앙상블, 궁정오페라 오케스트라, 궁정오케스트라가 합동하였다. 물론 당시에는 현재와 같은 악우회 건물이 없었으므로 캐른트너토르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베토벤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826년 '비엔나 악우회'의 첫번째 명예회원이 되었다. 이듬해인 1827년 베토벤이 세상을 떠나자 '비엔나 악우회'는 추모음악회를 개최하였다. 케루비니의 C 단조 진혼곡이 연주되었다. 그리고 '비엔나 악우회'는 베토벤의 악보 등을 경매를 통하여 입수하여 자료실에 영구보전하였다. 그 내용은 '비엔나 악우회' 도서실 편에 조금 더 설명되어 있다.

 

'장엄 미사곡'의 악보를 들고 있는 베토벤

 

슈베르트와 '비엔나 악우회'의 인연도 역사적인 사항이다. 1826년 1월 25일 '비엔나 악우회'는 슈베르트의 연가곡 '마왕'을 초연하였다. '비엔나 악우회'의 특별 프로그램인 '이브닝 음악회'의 일환이었다. 그 기념으로 슈베르트는 C 장조 교향곡을 '비엔나 악우회'에 헌정하였다. 다만, 제스추어로서 '비엔나 악우회'로부터 100굴덴을 사례로 받았다. 슈베르트는 1827년(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해)에 '비엔나 악우회'의 정식 이사가 되었다. 슈베르트는 자기의 작품을 '비엔나 악우회' 연주회장에서 어려움 없이 공연할수 있었다. 그리하여 슈베르트의 여러 작품이 '비엔나 악우회'에서 초연되었다. 이듬해인 1828년 11월 19일, 슈베르트는 31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비엔나 악우회'는 12월 23일 아우구스틴 교회에서 슈베르트 추모음악회를 가졌다. 여러 저명인사들이 참석하였지만 프란츠 그릴파르처도 참석하였다. 프란츠 그릴파르처는 베토벤의 장례식을 위해 조사를 쓴 위대한 극작가로서 슈베르트의 다정한 친구였다.

 

슈베르트

 

1831년, '비엔나 악우회'의 자체 7백석 규모의 연주홀을 가질수 있었다. 투흐라우벤 12번지의 집이었다. 비엔나 최초의 음악회 전용 장소였다. 그전까지는 극장이나 궁전과 같은 곳의 다용도 홀에서 음악회를 가졌었다. 그러한 기쁨도 잠시뿐, 1840년대에 들어와서는 사회가 극도로 불안하여 기획음악회가 거의 열리지 못하였으며 음악원에서의 교습도 중단되었다. 19세기 중반, 즉 1850년대에 들어서서 사회는 봉기와 개혁등 여러 혼란을 겪었다. 새로운 사회기준과 개념이 등장하였다. 음악에 있어서는 과거 작곡가들이 작품을 만들면 이에 따라 연주가들이 연주를 하는 형식에서 벗어나 연주가들이 작곡가들에게 작품을 의뢰하는 추세로 바뀌었다. 연주가들은 자기들의 테크닉에 맞는 작품을 연주코자 했다. 전문가의 시대가 온 것이다. '비엔나 악우회'도 이같은 변화에 부응해야 했다. 음악가들의 악우회가 아니라 청중에게 신경을 쓰는 단체로 거듭나야 했다. 일반 청중들의 요구사항도 변하였다. 풀 스케일의 종교음악이나 교향곡보다는 작은 규모의 성악과 실내악에 대한 요구가 많아졌다. '비엔나 악우회'는 대중들 앞으로 점점 가깝게 다가갔다.

 

1851년 비엔나악우회는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 조직개편을 하였다. 오케스트라 분야는 자체 오케스트라, 필하모닉, 그리고 자원 연주가들로 구성된 앙상블을 거느리도록 했다. 자원 연주가들이란 아마추어들을 말한다. 음악의 친구들이라면 당연히 아마추어라고 해도 음악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마찬가지로 합창단도 전문합창단과 아마추어합창단을 두었다. 1862년은 '비엔나 악우회'의 설립 50주년을 맞는 해였다. 헨델의 메시아가 공연되었다. 내외귀빈들이 다수 참석하였지만 젊은 음악도들도 많이 참석하였다. 얼마전에 비엔나에 온 브람스도 자리를 함께 했다. '비엔나 악우회'는 설립 50주년을 맞아 새로운 회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비엔나 악우회가 주관하는 연주회가 점점 적극적으로 열렸기 때문이다. 1865년에는 콘체르트감독인 요한 허베크(Johann Herbeck)의 지휘로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곡'이 초연되었다. 다음해에는 브람스의 '독일 진혼곡'이 초연되었다. '독일 진혼곡'은 4악장으로 구성될 예정이었으나 당시에는 3악장까지만 완성되었었다. 1868년에는 린츠에 있던 안톤 브루크너가 '비엔나 악우회'에 합류하였다. 브루크너는 악우회 음악원(콘서바토리)의 교수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1870년 1월에는 마침내 새로운 회관이 완성되어 역사적인 오프닝을 가졌다. 이미 설명한 대로 새로운 회관(현재의 뵈젠도르퍼 슈트라쎄 12번지)은 프란츠 요셉 황제가 칼스플라츠 한 쪽에 있는 대지를 하사함으로서 실현된 것이다.

 

요한 허베크.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곡의 초연을 지휘했다.

 

비엔나음악연맹 건물의 오프닝에는 프란츠 요셉 황제가 직접 참석하여 세개의 연주회장, 즉 대연주회장(현재의 황금 홀), 소연주회장(현재의 브람스 홀), 실내악 홀을 오픈하였다. 브람스가 1872/73년 시즌의 콘체르트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브람스는 1875년까지 '비엔나 악우회'의 업무를 보다가 작곡에 더욱 전념하기 위해 사임하였다. 그 해에 청년 구스타브 말러가 음악원의 학생으로 들어왔다.휴고 볼프는 이미 음악원의 학생으로 다니고 있었다. 1876년, 안톤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2번(수정본)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1877년 12월의 교향곡 제3번 세계초연은 브루크너에게 실망을 안겨준 것이었다. 어쩐 일인지 연주 도중에 청중들이 자리를 뜨기 시작하더니 마지막 악장을 연주할 때에는 고작 25명만이 남아 있는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비록 연주회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3번은 그 시대의 또 하나 위대한 역사로 남게 되었다. 몇년 후인 1884년, 한스 리히터(Hans Richter)가 콘체르트감독이 되었다. 한스 리히터는 '비엔나 악우회'의 역사상 콘체르트감독과 빈필의 음악감독을 겸직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1895년에는 구스타브 말러를 새로운 콘체르트감독으로 영입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해에 두명의 위대한 음악가가 '비엔나 악우회'의 명예회원이 되는 것으로 선서하였다. 브람스와 요한 슈트라우스였다. 브람스는 그로부터 2년후 세상을 떠났으며(1897), 요한 슈트라우스는 브람스보다 2년 후인 1899년에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은 '비엔나 악우회'를 통하여 우정을 다졌다.

 

요한 슈트라우스와 브람스 

 

세기말에 '비엔나 악우회'의 재정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사회가 혼란하던 때여서 기부가 수월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1909년 '비엔나 악우회'는 마침내 산하의 음악원을 국가로 이양했다. 그렇게 하여 당초 내세웠던 세가지 목적중 음악교육이라는 목적은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비록 어려운 재정이었지만 비엔나 악우회는 1911년에 그동안 미루어왔던 리모델링을 과감히 착수하여 5개월후 대연주회장 등이 새로운 모습으로 선보이게 되었다. 재개관 기념 음악회에서는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포함한 협주곡들과 교향곡 제9번이 오랫만에 연주되었다. 1913년에는 음악원이 로트링거슈트라쎄에 신축된 비엔나 콘체르트 하우스(Wiener Konzert Haus)로 옮겨갔다. 건물 공간이 상당히 확보되었다. 이 때에 유명한 출판사인 유니버살 에디션(Universal Edition)과 피아노 제작회사인 뵈젠도르퍼 사무실이 새로 입주하였고 또한 빈필의 사무실 등도 '비엔나 악우회'의 건물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같은 인연으로 현재의 뵈젠도르퍼슈트라쎄에 있는 악우회 건물에 유니버살 에디션과 뵈젠도르퍼 사무실이 들어설수 있었다.

 

비너 콘체르트 하우스

 

1차 대전중의 생활은 힘든 것이었다. '비엔나 악우회'는 제국의 종말과 함께 정치사회적으로 대단히 혼란한 시기에 생존해야 했다. 다행하게도 음악회는 계속되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 많은 청중들이 몰려왔다. 공연이 늘어나자 제2 콘체르트감독이 필요하게 되었다. 1921년에 푸르트뱅글러가 그 직분을 맡았다. '비엔나 악우회'는 정규적인 연주회 이외에도 기념음악회를 기획하여 더 많은 청중들을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예를 들면 1922년 슈베르트 기념음악회, 1924년 막스 레거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기념음악회, 1925년 요한 슈트라우스 기념음악회, 1927년 베토벤, 1928년 다시 슈베르트, 1933년 브람스, 1938년 브루크너 기념음악회가 그것이었다. '비엔나 악우회'는 외국의 유명 연주가들을 초청하여 음악회를 갖는 프로그램도 적극 추진하였다. 그러는 중에 1938년 3월 12일,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과 합병되었다. '비엔나 악우회'는 음악가들을 채용하거나 음악회를 개최하는 모든 일을 새로운 정권으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했다. 유태인들에 대한 박해로 많은 사람들이 '비엔나 악우회'를 떠나야 했다. 도서자료의 업무를 맡아 성심껏 일하였던 유명한 음악사학자인 칼 가이링거(Karl Geiringer)도 떠나야 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산타 바바라로 이민을 떠났다. 어둡고 괴로운 시기가 7년이나 계속되었다. '비엔나 악우회'뿐만 아니라 서방의 문화가 위협을 받았던 시기였다.

 

유명한 음악사학자로서 바흐, 하이든, 브람스 음악 전문가인 칼 가이링거. '비엔나 악우회'의 도서실장을 지냈다.

 

전쟁의 참화가 막을 내렸다. '비엔나 악우회' 건물은 천만다행으로 심한 손해를 보지 않았다. 다만, 종전이 되기 며칠전 폭탄이 떨어져 건물이 다소 파손되었을 뿐이었다. 전쟁이 끝남과 함께 군사적 대결은 종지부를 찍었지만 이번에는 개인간의 분쟁이 음악계의 현실을 어둡게 만들었다. 대표적인 경우는 푸르트뱅글러와 폰 카라얀의 반목이었다. 누가 더 나치에 협조했느냐가 포인트였다. 결국 폰 카라얀이 1950년에 종신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폭격으로 파손되었던 황금 홀 등은 일차적으로 1954년에 복구되었으나 건물 전체에 대한 대대적인 복구작업은 1988년에 가서야 마무리되어 예전의 찬란했던 모습을 되찾을수 있었다. 오늘날 '비엔나 악우회'는 고전으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리고 문호를 개방하여 레퍼토리를 오스트리아에 국한하지 않고 아메리카와 아시아에까지 확대하였다. 예를 들면 챨스 아이브스(Charles Ives)의 작품은 상당히 자주 연주되었으며 이밖에도 미국의 스캇 조플린(Scott Joplin)과 브라질의 헤이토르 빌라 호보스(Heitor Villa-Lobos)의 음악도 전통적인 비엔나 악우회의 플레이빌(프로그램)을 장식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을 전혀 도외시한 것은 아니었다. 슈베르티아드(Schubertiade)는 벌써 10회째를 기록하고 있으며 미국 링컨 센터의 Mostly Mozart(모스틀리 모차르트)와 유사한 하이든 타게(Haydn-Tage) 페스티벌이 마련된 것 등이다. '비엔나 악우회'는 음악의 레종 데트르(Raison d'etre)로서 손색함이 없다. 세계에는 수많은 음악협회가 있으나 '비엔나 악우회'는 단 하나뿐이다.

 

미국의 작곡가인 챨스 아이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