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mple English Class/소브리케

Joltin' Joe(졸틴 조)

정준극 2010. 12. 10. 10:32

Joltin' Joe(졸틴 조): '졸틴 조'는 1936년부터 1951년까지 미국 야구선수로 활동했던 조셉 폴 디마지오(Joseph Paul DiMaggio: 1914-1999)의 별명이다. Jolt 라는 단어는 '세게 때리다'라는 뜻이다. 디마지오의 배팅이 대단히 세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었다. Joe 라는 이름은 Joseph의 애칭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애인'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Joltin' Joe 는 '방망이를 아주 세게 휘둘러 때리는 우리들의 애인'이라는 의미라고 보면된다. 디마지오는 The Yankees Clipper 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양키 팀의 명품 선수'라는 의미이다. 그런가하면 센터 필더인 디마지오는 우아한 플레이로서 사랑을 받았다. Clipper 라는 단어는 명품 또는 일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쾌속 범선을 말하기도 한다. 디마지오의 플레이가 마치 쾌속 범선처럼 우아하다는 뜻에서 이다. 디마지오는 모든 미국 청년들이 어메리칸 드림을 이루고자 하는 모델이며 우상이었다. 디마지오는 챨스 린드버그, 엘비스 프레슬리에 버금하는 미국인의 우상이었다. 우선 그는 베이브 루스나 루 게릭에 이은 대단한 야구선수였다.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전미국을 대표하는 뛰어난 야구선수가 되어 부와 명예를 차지하였다. 또한 디마지오는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인인 마릴린 몬로와 결혼하였다. 그건 정말 대단한 센세이션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디마지오는 비록 마릴린 몬로와의 짧은 결혼생활을 끝내고 헤어졌지만 마릴린 몬로가 뜻밖에 세상을 떠나자 그로부터 20년 동안 1주일에 세번씩 한번도 빠짐없이 빨간 장미꽃 다발을 마릴린 몬로의 묘소에 보냈다. 그건 정말 놀라운 순애보가 아닐수 없다. 그런 점에서 모든 미국인들은 '아니, 어쩜 사람이 그럴수가 있냐 말인가!'라면서 감동을 하고 있다. 디마지오는 자기가 어린시절을 어렵게 지낸 것을 생각하고 선수 생활을 마친후 대단히 훌륭한 아동병원을 설립하였다. 플로리다에 있는 Joe DiMaggio's Children's Hospital 이다. 노블리제 오블리제이다. 레이건 대통령은 디마지오의 팬이었다. 모든 미국인의 우상인 디마지오를 백악관으로 초청해서 자기도 팬임을 과시했다.

 

레이건 대통령의 따듯한 마중을 받고 있는 졸틴 조 디마지오

 

디마지오는 메이저 리그 선수로서 13년동안 뉴욕 양키스에서 센터필더로 뛰었다. 1955년에는 전미 야구 명예의 전당에 올라가는 인물로 선출되었다. 디마지오에게는 두 형제가 있었다. 우연한 일치인지 모르지만 모두 메이저 리그 선수가 되었으며 더구나 모두 센터필더였다. 디마지오는 세번이나 MVP에 올랐고 13회나 전미 올스타 선수로 뽑혔다. 그가 13년동안 양키스에 있을 때 양키스는 13번의 우승을 차지했으며 아홉번이나 월드 챔피언이 되었다. 그가 은퇴할 즈음에 그는 미국 야구 역사상 다섯번째로 홈런을 많이 친 선수로 기록되었다. 통산 361개의 홈런을 날렸다. 그의 타율은 미국 야구 역사상 6번째로 높은 것이었다. 5할 7푼 9리였다. 야구와 관련하여 디마지오라고 하면 생각나는 것은 연속 56타석에서 히트를 때렸다는 것이다.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수 없다. 투수가 고의 사구로 내보내려는 시도도 해 보았지만 관중들이 그러지 말라고 소리를 치는 바람에 정식으로 투구를 했고 그 결과 계속 안타를 허용했던 것이다. 1941년 5월 15-7월 16일 두달 동안 벌어진 경기에서 그런 놀라운 실적을 거두었다. 이 기록을 깬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1969년에 디마지오는 야구팬들의 투표에서 현존하여 있는 야구 선수 중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로 선정되었다. 야구 얘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으므로 이쯤해서 그만하고 그의 결혼생활에 대하여 잠시 설명코자 한다.

 

대단한 스윙이었다. 선수생활 통산 361개의 홈런을 날렸다. 타율이 5할이 넘었으니 알아 모셔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정말 훌륭한 센터필더였다.

 

디마지오의 첫번째 부인은 배우 출신인 도로시 아놀드였다. 디마지오는 1937년, 23세 때에 세살 아래인 도로시 아놀드(Dorothy Arnold: 1917-1984)를 처음 만났다. 헐리우드의 세트장에서 '맨하튼 메리 고 라운도'(Manhatttan Merry-Go-Round)라는 영화를 찍을 때였다. 이 영화에서 디마지오는 단역을 맡았었고 도로시는 사실상 단역에도 미치지 못하는 엑스트라였다. 그런데 디마지오는 엑스트라인 도로시 아놀드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고 결국 두 사람은 2년 후인 1939년 샌프란시스코의 성베드로-바울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디마지오는 이미 야구선수로서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결혼식에는 디마지오의 열성 팬 2만명이 모여 교회 주변의 모든 거리를 메꾸었기 때문에 인근이 하루 종일 교통지옥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조셉 폴 디마지오2세가 1941년에 태어났다. 디마지오는 모든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자기들도 기회만 있으면 유명하고 돈많은 사람과 결혼할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던중 어느날 디마지오는 마릴린 몬로를 만났다. 디마지오는 그만 마릴린 몬로에게 정신을 빼앗겼다. 당시 디마지오는 도로시와 이혼한 상태였다. 그런데 마릴린 몬로는 디마지오가 잘난체 하기만 하는 야구선수라고 생각하여 데이트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틈에 서로 가까워져서 결국 비밀결혼을 치루기로 약속했다. 두 사람은 1954년 1월 14일 샌프란시스코 시청에서 속성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은 1년도 넘기지 못한 274일 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마릴린 몬로와 결혼식을 올린후 도쿄로 신혼여행을 갔던 디마지오

 

결혼후 두 사람은 어쩐 일인지 여러번 다투었다. 때로는 손찌검을 하는 폭력적인 싸움도 있었다. 그러다가 여러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지경으로 발전하였다. 결혼한지 8개월 후인 9월이었다. 마릴린 몬로는 뉴욕에서 The Seven Year Itch(7년만의 외출)이라는 영화를 찍고 있었다. 빌리 와일더 감독은 뉴욕의 트랜스 럭스(Trans Lux) 극장 앞에서 로케를 하면서 지하철 통풍구의 바람 때문에 마릴린 몬로의 스커트가 휙 올라가는 장면을 연출하였다. 이 장면은 세계적으로 마릴린 몬로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씬이었다. 이 장면을 촬영할 때에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디마지오는 이 장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와이프가 사람들의 웃음꺼리가 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잠시 마릴린 몬로를 극장 로비로 데려가서 뭐라고 했고 이어 큰 소리가 나오는 싸움으로 번졌다. 며칠후 마릴린 몬로는 디마지오로부터 정신적 학대를 받았다는 이유로 이혼소송을 걸었다.

 

마릴린 몬로의 The Seven Year Itch(7년만의 외출) 포스터

 

디마지오와 같은 우상에게는 언제나 가십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더구나 마릴린 몬로와 결혼했던 세계적 남자가 아니던가! 마릴린 몬로와 이혼한지 얼마후인 1956년 디마지오가 배우 리 메리웨더(Lee Meriwether)와 약혼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하지만 나중에 그저 소문일 뿐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또 얼마후에는 디마지오가 1957년도 미스 아메리카인 매리안 맥나이트(Marian McKnight)와 결혼할 정도로 가깝게 지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맥나이트는 미스 아메리카 선발대회에서 마릴린 몬로의 '7년만의 외출' 흉내를 내서 결국 1등으로 선발되었던 여자였다. 하지만 맥나이트와의 소문도 소문으로만 끝났다. 이후에는 리즈 르네이(Liz Renay), 클레오 무어(Cleo Moore), 리타 갬(Rita Gam), 말렌느 디트리히(Marlene Dietrich), 글로리아 드헤이븐(Gloria DeHaven) 등과 염문이 있다는 소문이 끝도 없이 맴돌았다. 그러나 디마지오가 이들과 섬싱이 있다는 것은 단 하나도 확인되지 않은 것이었다.

 

도쿄 제국호텔에서의 디마지오와 마릴린 몬로. 뒤에 서있는 사람은 제국호텔 총지배인

 

디마지오는 마릴린 몬로가 아서 밀러(Arthur Miller)와의 결혼을 끝내고자 했을 때 다시 한번 마릴린 몬로와 결합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1960년 2월에는 페인 휘트니(Payne Whitney)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마릴린 몬로를 법적으로 대응하여 구출해 내기도 했다. 마릴린 몬로는 잠시동안이지만 디마지오가 양키스의 타격코치로 있는 플로리다에 가서 함께 지냈다. 두 사람은 '그저 친구사이'(Just friends)라고 했지만 항간에서는 두 사람이 다시 결합할 것이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거처하고 있던 아파트의 밖에는 취재기자들이 밤낮으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밥 호프는 33차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주제가의 후보에 오른 The Second Time Around 라는 노래를 디마지오와 마릴린 몬로에게 헌정하였다. 실제로 디마지오는 마릴린 몬로가 자꾸 파멸되는 것 같아서 무척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마릴린 몬로를 위해 헌신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야구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새로 시작한 사업인 군납회사를 1962년 8월 1일 정리하고 마릴린 몬로에게 다시 청혼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를 어쩌랴! 마릴린 몬로는 불과 며칠후인 8월 5일 브렌트우드의 소박한 자택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한 많은 인생이기는 했지만 마지막 길은 약물남용으로 인한 자살이라는 명예스럽지 못한 것이었다. 디마지오의 아들인 조 주니어(Joe Jr)는 바로 그 전날 밤에 마릴린 몬로와 전화로 통화까지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몬로가 어떻게 될 것이라는 어떠한 기미도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 마릴린 몬로의 시신은 화장되었으며 유분은 로스안젤레스의 피어스 브라더스 웨스트우드 메모리얼 팍(Pierce Brothers Westwood Memorial Park)의 납골시설에 안치되었다. 화려한 명성과 생활과는 달리 대단히 소박한 묘소이다.

 

마릴린 몬로의 유분을 안치한 곳

 

마릴린 몬로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 디마지오는 법적으로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지만 모든 장례절차를 앞장서서 치루었다. 장례식은 할리우드의 내노라하는 배우들이 참석하는 것도 금지하고 조용하고 엄숙하게 치루아졌다. 그후에 디마지오는 1주일에 세번씩 빨간 장미다발을 마릴린 몬로의 묘소에 보냈다. 무려 20년 동안! 대단한 순애보였다. 디마지오는 마릴린 몬로의 남편이었던 다른 두 사람과는 달리 평생을 지내면서 마릴린 몬로의 사생활에 대한 얘기를 기자들에게 공공연하게 말한 일이 없다. 디마지오는 마릴린 몬로와의 이혼 이후 평생을 혼자 살다가 1999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캘리포니아주 콜마(Colma)에 있는 성십자묘역(Holy Cross Cemetry)에 안장되었다.

 

캘리포니아 콜마에 있는 디마지오의 묘소

 

'Simple English Class > 소브리케' 카테고리의 다른 글

King of Kings(왕중왕)  (0) 2010.12.10
The Killer(킬러) - Jerry Lee Lewis  (0) 2010.12.10
Iz the Wiz(이즈 더 위즈)  (0) 2010.12.09
Hogtown(호그타운) - 돼지마을  (0) 2010.12.09
Air Jordan(에어 조단)  (0) 2010.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