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오스트리아 세시기

브루군디의 메리

정준극 2010. 12. 27. 08:35

브루군디의 메리 공주

설탕을 처음 비엔나에 소개한 사람

 

브루군디의 메리.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과 결혼할 당시의 초상화

 

비엔나는 맛있는 초콜릿 케익이나 사탕(봉봉)으로 유명하다. 토르테(Torte)는 비엔나의 대표적인 초콜릿 케익이다. 자허호텔에서 만들어 내는 자허 토르테는 가히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이다. 비엔나 사람들은 단 것을 좋아한다. 이빨이 상하니까 제발 단 것 좀 그만 먹으라고 그래도 죽어라고 단 음식을 찾아다닌다. 비엔나 사람들이 봉봉을 얼마나 좋아하느냐는 것은 요한 슈트라우스가 뜻한바 있어서 '봉봉 폴카'(Bon Bon Polka)를 작곡한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부활절 시장이나 연말의 크리스마스 시장에 가보면 정말 맛있게 보이는 별별 과자와 사탕들이 다 나와 있다. 비엔나 사람들은 커피도 많이 소비하지만 설탕도 대단히 많이 소비한다. 설탕은 비엔나 사람들의 생활필수품이다. 서론이 길어졌음을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하며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면, 비엔나에 설탕을 처음 소개한 사람은 다름 아니라 브루군디의 메리이다. 브루군디의 메리가 누구냐하면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지낸 막시밀리안 1세(재위: 1493-1519)와 결혼한 여인이다. 브루군디는 지금의 벨기에 일대를 말한다. 브루군디의 메리가 비엔나로 시집 올 때에 함께 따라온 요리사들이 설탕을 가져와서 처음으로 비엔나에 설탕을 전파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설탕이 없었을 때에는 어떻게 단 맛을 냈는가? 주로 꿀을 사용했다. 커피가 비엔나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에도 단 맛을 내기 위해 꿀을 사용했다. 그래서인지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보헤미아) 등지는 꿀 생산으로 유명하며 이곳에서 나온 자연산 꿀은 품질과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자허 토르테. 비엔나 사람들은 참으로 단 것을 좋아한다. 정말 맛있기도 하다.

 

브루군디의 메리(Mary of Brugundy: 또는 Marie)는 어떤 여자였나? 우선 대단한 부자였다. 얼마나 부자였던지 별명이 '부자 메리'(Mary The Rich)였다. 여자로서 브루군디 왕국에 속한 모든 영토를 전부 상속받았으니 그럴만도 했다. 화려한 궁전도 몇개나 가지고 있었다. 그런 입장인데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과 결혼하였다. 브루군디의 모든 영토와 막대한 재산은 남편의 가문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영향 아래에 있게 되었다. 아무튼 막시밀리안이 메리와 결혼함으로서 오스트리아는 유럽의 저지대에 있는 막대한 영토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게 되었다. 메리는 1457년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태어날때 하늘에 천둥소리가 요란하여서 사람들은 '과연 한 인물할 아기가 태어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정작 아들이 아니라 딸이 태어나자 할아버지인 필립은 섭섭하여서 나중에 메리의 세례식에도 집에서 할 일도 없으면서도 참석하지 않았다. 브뤼셀은 오늘날 벨기에의 수도이지만 당시에는 브라반트 공국의 수도였다. 메리는 태어날때부터 '브루군디 공작부인'(Duchess of Brugundy)이라는 타이틀을 가졌다. 이를 suo jure(수오 주레)라고 부른다. 즉, 여자가 결혼하여 남편이 귀족이기 때문에 귀족의 타이틀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작위를 가진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어 Maria Theresia of Austria(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라는 타이틀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남편 프란츠 슈테판과 결혼하여서 얻은 타이틀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버지인 샤를르 6세로부터 받은 타이틀이다. 그래서 마리아 테레지아를 공식적으로 표현할 때에는 Suo jure Maria Theresia of Austria라고하여 Suo jure를 공식 타이틀의 앞에 넣는다. 얘기가 또다시 곁길로 갔음을 다시한번 송구스럽게 생각하며 이제로부터는 브루군디의 메리에 대하여만 얘기코자 한다.

 

메리와 막시밀리안과 자녀들과 친척들

 

당시 브루군디의 군주(공작)는 샤를르였다. 어찌나 용맹하고 거침이 없었던지 Charles The Bold(대담한 샤를르)라는 별명을 가진 인물이다. 샤를르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이사벨라와 결혼하여  고대하던 아들은 얻지 못하고 딸 하나를 두었으니 그가 메리이다. 어머니 이사벨라는 메리가 여덟살 때에 요단강을 건너갔다. 아버지는 요크 가문의 마가레트와 재혼하였으나 하늘도 무심하였던지 자손을 점지하여 주지 않았다. 아무튼 메리는 무럭무럭 자랐다. 그러다가 1477년 프랑스와의 낭시전투(Battle of Nancy)에 출전한 아버지 샤를르가 그만 전장에서 전사하였다. 전투가 어찌나 치열했던지 샤를르의 시신은 전투가 끝난지 3일 후에야 겨우 발견되었다. 당시 메리는 낭낭 19 세였다. 메리가 넓은 브루군디의 영토를 모두 상속받았다. 오늘날의 벨기에는 물론, 프랑스 북부 일대와 네덜랜드 남쪽 일대가 모두 브루군디 공국의 영토였다.

 

낭시전투에서의 메리의 아버지 샤를르의 죽음. Mulo 작품.

 

메리는 어릴 때에 이미 브루군디 공국의 유일한 상속 후계자로서 자리를 차지하게 되자 유럽의 내노라 하는 왕자들로부터 빗발치는 듯한 청혼을 받았다. 첫 청혼은 메리가 고작 다섯 살때에 스페인 아라곤의 공자로서 나중에 페르디난드2세가 된 사람이었다. 그래서 양가에서 적당히 좋다고 언약을 맺었는데 메리의 아버지가 전쟁에서 전사하는 등 사태가 변하자 흐지부지 되었다. 또 하나의 강력한 후보자는 프랑스의 루이왕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루이왕의 아들은 미안하게도 메리보다 열세살이나 어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유치원 원생도 아니고 열세살이나 어린 아이와 결혼할수 있단 말이가? 역시 흐지부지되었다. 가장 강력한 후보는 로레인공작인 니콜라스였다. 니콜라스는 메리보다도 몇살 위였다. 그리고 로레인공국은 브루군디 바로 옆에 있어서 서로 모르는 처지도 아니었다. 그런데 로레인의 니콜라스는 1473년에 전쟁에 나갔다가 그만 불귀의 객이 되었다. 당시 유럽의 내노라 하는 군주들은 밥만 먹었다하면 전쟁에 재미를 붙여서 난리들을 폈기 때문에 사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운명이었다.

 

브루군디의 메리

 

1477년 메리의 아버지 샤를르가 낭시전투에서 전사하자 브루군디 공국은 하루아침에 초상집이 되었다. 이틈을 타서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의 루이11세가 브루군디의 모든 영토를 집어 삼키려고 호시탐탐하였다. 루이11세에게는 샤를르라는 왕자가 있었다. 루이11세는 왕자 샤를르와 브루군디의 메리가 결혼하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그렇게 되면 브루군디의 그 넓은 영토를 앉아서 뼈채 삼킬수 있기 때문이었다. 루이11세는 필요하다면 무력을 동원하여서라도 결혼을 성사시키려고 했다. 메리는 프랑스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무엇보다도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메리는 네덜란드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네덜란드는 '때는 이때다'라면서 이런 저런 조건을 내세우고 브루군디와 동맹을 맺었다. 그후 정치적으로 복잡다단했던 사건들은 본 란의 주제가 설탕이므로 생략키로 하고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과의 결혼에 대하여 일고코자 한다.

 

메리는 여러 구혼자들 중에서 결국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과 결혼키로 결심했다. 메리는 참으로 애석하게도 결혼한지 얼마후인 25세 때에 세상을 떠났다. 메리가 서거한 후 막시밀리안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결혼식은 메리의 아버지 샤를르가 전사한지 몇 달 후인 1477년 8월, 브루군디의 겐트(Ghent)에서 거행되었다. 메리는 Mary of Brugundy라는 타이틀에서 Archduchess Mary of Austria 가 되었다. 그리하여 브루군디를 비롯한 저지대 공국들이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의 우산 아래에 들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메리는 브루군디 군주로서의 자리를 계속 유지하였다. 메리는 비엔나로 올 때에 브루군디로부터 요리사를 여러명 데려왔으며 이때 설탕도 함께 가져왔던 것이다. 비엔나에 설탕이 전래된 유래는 그와 같았다.

 

메리는 결혼한지 5년후인 1482년 말에서 떨어져 아깝기 짝이 없는 삶은 마감했다. 메리는 남편 막시밀리안과 함께 매사냥에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허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메리는 사고가 발생한지 며칠후 숨을 거두었다. 메리는 브루제(Bruges)의 성모교회에 안장되었다. 메리는 결혼 5년동안 세자녀를 두었다. 큰 아들인 필립은 핸섬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어머니 메리가 세상을 떠나자 브루군디의 필립4세가 되었다. 필립은 나중에 카스티유의 요안나 공주와 결혼하여 카스티유의 필립1세가 되기도 했다. 메리와 막시밀리안의 딸 마르가레트는 아라곤의 페르디난드2세의 아들인 후안과 결혼하였다. 둘째 아들 프란츠는 태어난후 얼마 되지 않아서 숨을 거두었다.

 

브루제의 성모교회에 있는 메리의 대리석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