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수도원/수도원의 영욕

엥겔스첼(Engelszell) 수도원

정준극 2010. 12. 31. 23:17

엥겔스첼(Engelszell) 수도원 - Stift Engelszell

 

엥겔스첼 수도원은 오베르외스터라이히주 인피어르텔(Innviertel) 지역의 엥겔하르츠첼 안 데어 도나우(Engelhartszell an der Donau)에 있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으로 전에는 시토회에 속해 있었다. 트라비스트 수도회는 베네딕트 수도회의 분파로서 성베네딕트가 정한 규율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는 수도회이다. 엥겔스첼 수도원은 일찍이 1293년 파싸우의 주교인 베른하르트가 시토회 수도원으로서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작은 규모였으나 인근 빌헤링(Wilhering)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옮겨 와서 지내게 되자 점차 규모가 확장되어 수도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엥겔스첼 수도원 교회

 

엥겔스첼 수도원은 종교개혁의 시기에 신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상당한 곤경을 겪었다. 그래서 한때는 개인이 소유하는 수도원으로 전락하기 까지 했다. 그로부터 수세기가 지난 1618년부터 친정이라고 할수 있는 빌헤링 수도원이 팔을 걷어 부치고 도와주기 시작하여 점차 회복세를 보였다. 그랬는데 1699년 부활절 주일 아침에 뜻하지 아니한 화재가 발생하여 수도원은 다시 경제적인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수도원의 운영도 수도사들이 아니라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행정하는 사람들의 손에 좌지우지되었다. 1746년 새로 임명된 수도원장인 레오폴드 라이흘(Leopold Reichl)은 이래가지고서는 안되겠다고 하여 수도원의 일대 개혁을 실시하여 수도원의 수입을 늘이는 경제정책을 추진하였고 아울러 파손된 건물들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이때로부터 엥겔스첼 수도원은 자체 수입을 위해 농사를 짓고 낙농을 하였으며 과일을 재배하여 리커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오늘날 엥겔스첼 수도원은 빵, 버섯, 야채, 맥주, 치즈 등으로 유명한데 그 중에서도 치즈는 엥겔스첼러 트라피스텐캐제(Engelszeller Trappistenkaese)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수도원 교회의 내부

 

시토회 소속의 수도원이 트라피스트 수도원으로 다시 태어난 것은 1차 대전 이후였다. 1차 대전이 끝나자 독일 영토였다가 프랑스의 땅이 된 알자스 지방의 트라피스트 수도사들이 피난 삼아서 엥겔스첼 수도원으로 몰려 왔다. 특히 알자스의 욀렌버그 수도원에서 많이 왔다. 사실 이들은 처음에 반즈(Banz) 수도원에 처소를 잡았으나 기왕이면 아예 정착하여 지낼 처소를 찾다가 엥겔스첼 수도원을 선택한 것이다. 엥겔스첼 수도원은 처음에는 소수도원의 성격이었으나 1차 대전 이후 규모가 커지자 대수도원으로 위상이 격상되었다. 그러다가 1938년 3월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였다. 이듬해인 1939년 12월 나치는 새로운 종교정책을 내걸고 수도원 정비작업에 들어갔다. 더구나 엥겔스첼 수도원은 독일에서 피난온 수도사들이 대부분이어서 나치가 신경을 쓰고 있는 터에 반나치 성향을 보이자 즉각적으로 수도원 건물을 압수했다. 그리고 수도사 73명 중에서 4명은 성향이 나쁘다고 하여 다하우(Dachau)강제수용소로 끌어갔고 수십명은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으며 나머지 수십명은 나치의 국방군에 강제로 입영시켜 전선으로 내몰았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엥겔스첼 수도원으로 돌아온 사람은 3분의 1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후 독일, 보스니아 등지에서 민 성격으로 오스트리아에 온 트라피스트 수도사들이 엥겔스첼 수도원에 합류하는 바람에 수도원은 활기를 띠게 되었다.

 

도나우가 구비쳐 흐르는 엥겔하르트첼 안 데어 도나우 마을의 엥겔스첼 수도원

 

엥겔스첼 수도원 교회는 1764년에 완성되었다. 대단히 인상적인 로코코 양식의 아름다운 건물로서 종탑의 높이는 76 미터에 이른다. 교회의 내부는 거장 바르톨로메오 알토몬테(Bartolomeo Altomonte)와 요셉 도이치만(Josef Deutschmann)의 솜씨이다. 천정과 회중석을 복구한 것은 1957년이었다.

 

트라피스트 수도사들의 식사. 이들의 규율은 '조금 먹고 많이 일하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