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오스트리아 작곡가

알마 말러 베르펠(Alma Mahler Werfel)

정준극 2011. 4. 14. 18:28

알마 말러 베르펠(Alma Mahler Werfel)

 

알마 말러-베르펠의 가곡 음반 커버

 

알마 말러 베르펠(또는 간단히 알마 말러)은 비엔나 출신의 화가로 분류될수 있고 작곡가로 분류될수도 있다. 본란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유명한 화가인 에밀 야콥 쉰들러인 것과 관련하여 화가로 분류하려다가 오히려 가곡을 여러 편 작곡하여 남겼으므로 음악가로 분류한다. 물론 알마가 재주있는 화가였음에는 이의가 없다. 또한 그는 유명 화가들인 구스타브 클림트, 오스카 코코슈카 등과 인연이 있었다. 그러기에 비엔나 화단의 인물로 소개하여도 무리는 없었을 것이다. 알마 쉰들러가 세인의 관심을 받는 인물로 부각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그가 위대한 작곡가이며 지휘자인 구스타브 말러와 결혼했다는 사실 때문이며 또한 말러와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다른 남자와 밀회를 즐겼고 말러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공식적으로 두 번이나 더 결혼을 했다는 대단한 사실 때문이다. 사실상 알마를 음악사에 남을 정도의 작곡가로 보기에는 어렵다. 알마는 재능있는 피아니스트였지만 그렇다고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던 것도 아니었다. 알마는 작곡가인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로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작곡가로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알마의 작품은 16편의 가곡이다. 음반으로도 나왔지만 연주회의 레퍼토리로 올라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알마는 아버지가 화가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예술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알마는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인으로 성장하였다. 그래서 20세가 되기도 전에 비엔나의 예술가 그룹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구스타브 클림트는 알마를 모델로 하여 몇 점의 초상화를 그리기까지 했다.

 

알마 말러가 그린 풍경화

 

음악에 재능이 있던 알마는 말러와 결혼하고나서 음악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건 말러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말러는 알마와 결혼하면서 알마에게 더 이상 작곡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했다. 말러로서는 생각이 깊었을 것이다. 음악가로서의 길이 험난하다는 것도 생각했을 것이다. 자기가 유태인이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알마의 활동도 핍박을 받을 것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보다 더 유명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알마는 말러의 이같은 제안을 기꺼이 받아 들여 작곡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알마는 남편을 위해 자신을 희생키로 했다. 알마가 결혼후 그나마 음악적인 활동을 했던 것은 남편인 말러가 작곡하여 오선지에 적어 놓은 것을 다시 정서하거나 교정을 보는 일을 한 정도였다. 알마가 계속 작곡을 했다고 하면 어떻게 되었을까? 별로 뛰어난 작품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알마가 그동안 작곡했던 노래들을 보면 그 수준을 알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과 함께 작곡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말러는 알마가 측은하여서 그랬는지 또는 다른 일에 너무 정신을 쏟지 말라는 의미에서 그랬는지 하여튼 알마가 작곡한 노래들을 모아서 출판토록 하여 작곡가로서의 위상을 그나마 나타내 보이게했다. 그러한 알마는 말러와의 결혼생활 중에 다른 남자와의 밀회를 가졌다. 작곡을 하지 못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그랬다는 설명도 있지만 아무튼 천성적으로 남성편력의 능력이 많았던 것 같다. 말러는 알마를 무척 사랑했다. 말러의 교향곡 제6번의 제2주제는 알마를 염두에 두고 작곡했다는 얘기가 있다. 참으로 아름답고 우아하며 마치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같다. 교향곡 제8번은 실제로 알마에게 헌정된 것이다. 여기에도 제6번의 제2주제와 닮은 아름답고 우아한 음악이 등장한다. 알마의 음악적인 초상화라는 설명이다. 그만큼 말러는 알마를 생각했다.

 

알마 말러 베르펠

 

알마와 말러는 딸 둘을 두었다. 큰 딸 마리아(마리아 안나)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을 때 알마는 말러가 그 전에 '죽은 아이를 위한 노래'(Kindertotenlieder)를 작곡했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마리아가 죽었다면서 말러를 비난했다. 딸을 잃고 비통에 차있는 말러에게 더 고통을 주었던 것이다. 1910년에 알마는 병에 걸렸다. 의사는 조용한 시골에 가서 요양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했다. 말러는 알마를 데리고 그라츠에서 멀지 않은 온천장인 토벨바드(Tobelbad)로 갔다. 말러는 토벨바드에서 지내면서 작곡을 했지만 역시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알마가 화려한 파티를 즐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탈리아와의 국경지대에 있는 토블라흐(Toblach)로 혼자 가서 작곡에 전념하기도 했다. 토블라흐(이탈리아에서는 도비아코)에는 말러가 일부러 속세를 피하여 작곡을 하며 지내던 아주 작은 오두막집이 있다. 말러가 토블라흐로 떠나 있는 사이에 알마는 독일의 젊은 건축가인 발터 그로피우스(바우하우스의 창시자)와 사랑에 빠져 밀회를 즐겼다. 말러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알마가 그로피우스에게 보낸 편지가 주소를 잘못 적는 바람에 토블라흐의 말러에게 배달되었기 때문이었다. 말러는 이때 교향곡 제10번을 구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1악장만 겨우 완성했을 뿐, 더 이상 진척을 보지 못하였다. 말러가 알마의 불륜을 알고 나서 일종의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에 충격을 받아서였다고 한다. 말러는 알마가 자기에게 성실하겠다고 약속한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1911년에 말러가 세상을 떠나자 알마는 말러의 미완성인 교향곡 제10번의 3개 악장을 더 이상 완성코자 하지 않았다. 사실상 말러는 3개 악장의 스케치는 해 놓았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누가 오케스트레이션만 하면 되는 실정이었다. 알마는 다만 이미 완성한 제1악장을 작곡가인 에른스트 크레네크에게 부탁하여 마지막 손질을 해 달라고 했을 뿐이었다. 알마가 왜 그랬는지에 대하여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일반적인 의견은 알마가 애정행각에 너무 빠져 있어서 말러의 교향곡을 완성하는 일에 신경을 쓰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알마가 미완성 악장을 완성해야 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후로서 알마가 생의 마지막을 보내던 시점이었다.

 

젊은 시절의 알마

 

말러가 세상을 떠난지 1년도 되지 않아서 알마는 화가인 오스카 코코슈카와 애정행각을 벌였다. 코코슈카와 알마가 얼마나 뜨거운 애정행각을 벌였는지는 코코슈카가 자기와 알마를 주제로 하여 그린 '바람의 신부'(Der Windbraut)라는 그림을 보면 잘 알수 있다. 그러나 코코슈카와의 열정적인 애정행각도 잠시뿐, 알마는 1915년에 건축가인 그로피우스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몇년 후에 이혼하였다. 알마는 그로피우스와의 사이에서 딸 마농을 두었다. 그러나 마농은 불행하게도 소녀시절에 세상을 떠났다. 작곡가 알반 베르크는 마농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서 '천사의 죽음에 붙여서'라는 타이틀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여 알마에게 헌정했다. 그로피우스와 이혼한 알마는 당분가 혼자 지내다가 1929년에 작가인 프란츠 베르펠과 결혼하였다. 베르펠도 유태계였다. 알마와 베르펠은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유태인 사냥을 시작하자 비엔나를 떠나 프랑스로 갔고 그후 스페인을 거쳐 요행히 미국으로 건너갈수 있어서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하였다. 알마는 할리우드의 독일 이민자 예술가들 사이에서 마치 여왕처럼 군림하며 지냈다. 알마 말러 베르펠은 1964년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비엔나로 옮겨져 그린칭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알마 말러의 가곡집 표지

 

알마 말러가 작곡한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성악과 피아노를 위한 다섯개의 노래 (말러가 생전시인 1910년 출판)
(i) Die stille Stadt (조용한 도시; Dehmel)
(ii) In meines Vaters Garten (아버지의 정원에서; Hartleben)
(iii) Laue Sommernacht (부드러운 여름밤; Falke)
(iv) Bei dir ist es traut (그대와 함께라면 즐겁다; Rilke)
(v) Ich wandle unter Blumen (꽃들 사이를 거닐면서; Heine)

성악과 피아노를 위한 네개의 노래 (말러의 사후인 1915년 출판)
(i) Licht in der Nacht (밤의 빛; Bierbaum)
(ii) Waldseligkeit (숲의 축복; Dehmel)
(iii) Ansturm (폭풍: Dehmel)
(iv) Erntelied (추수의 노래; Falke)

성악과 피아노를 위한 다섯개의 노래 (1924 출판)
(i) Hymne (찬송가: Novalis)
(ii) Ekstase (희열; Otto Julius Bierbaum)
(iii) Der Erkennende (인식자: Franz Werfel)
(iv) Lobgesang (찬가; Dehmel )
(v) Hymne an die Nacht (밤의 송가; Novalis)

사후에 출판된 작품들 (2000)
Leise weht ein erstes Blühn (첫번째 꽃닢을 떠내려 보내며; Rilke ), 성악과 피아노를 위한 곡

Kennst du meine Nächte? (나의 밤을 아는가? 작사자 미상), 성악과 피아노를 위한 곡

 

뉴욕에서 말러의 악보를 보고 있는 알마

비엔나의 그린칭 공동묘지에 있는 알마 말러 베르펠의 묘지. 알마 마리아 쉰들러로 태어난 그는 동시대에 가장 유명했던 3인의 부인이었다. 위대한 작곡가 겸 지휘자인 구스타브 말러, 건축가인 발터 그로피우스, 작가인 프란츠 베르펠의 부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