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오스트리아 작곡가

페르디난트 힐러(Ferdinand Hiller)

정준극 2011. 1. 29. 08:08

페르디난트 힐러(Ferdinand Hiller)

 

페르디난트 힐러는 오스트리아 출신이 아니라 독일 출신이지만 상당기간을 비엔나에 와서 활동했으며 특히 베토벤과 친밀하게 지내어 음악사적으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힐러는 역시 독일 출신의 요한 네포무크 훔멜과 함께 베토벤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았으며 베토벤이 서거하자 그의 머리칼을 잘라 간직하는 등 애착을 보인 사람이다. 그가 간직했던 베토벤의 머리칼은 훗날 소더비의 경매를 통해 미국 산호세주립대학교의 베토벤연구센터가 소유하게 되었다.

 

페르디난트 힐러

 

페르디난트 힐러(Ferdinand von Hiller라고도 표기함)는 1811년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태어나 1885년 라인강변의 쾰른에서 세상을 떠난 독일의 작곡가, 지휘자, 작가, 음악감독이었다. 힐러는 프랑크푸르트의 부유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영국으로부터 모직을 수입하는 사람이었다. 힐러도 원래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무역을 하려 했으나 어릴 때부터 음악적인 재능을 보여주어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어린 힐러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피아노는 알로이스 슈미트로부터, 바이올린은 호프만으로부터, 그리고 화음과 대위법은 폴봐일러(Vollweiler)로부터 배웠다. 힐러는 10세 때에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였고 12세 때에는 스스로 작곡을 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말년의 힐러

 

1822년 당시 13세이던 멘델스존이 힐러의 생애에 등장하였다. 힐러는 11세였다. 당시 멘델스존의 가족은 프랑크푸르트에 잠시 체류한 일이 있었다. 그때 힐러는 멘델스존의 가족을 방문하여 펠릭스 멘델스존의 작품과 멘델스존의 누이인 패니 멘델스존의 작품을 연주하여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로부터 소년 멘델스존과 소년 힐러는 급작히 가깝게 지내게 되었으며 이같은 관계는 1843년 힐러가 멘델스존에게 라이프치히 게봔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후임 지휘자로 천거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힐러는 1825년부터 2년 동안 봐이마르에서 유명한 피아니스트이며 음악교사인 요한 네포무크 훔멜(Johann Nepomuk Hummel)의 제자로 있었다. 그러한 인연 때문에 힐러는 1827년 비엔나에서 베토벤이 세상을 떠날 때에 훔멜과 함께 베토벤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았다. 힐러는 베토벤의 머리칼 한 줌을 얻을수 있었는데 이는 1994년 소더비 경매를 거쳐 미국 산호세주립대학교의 베토벤연구센터의 소관이 되어 베토벤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젊은 시절의 힐러

 

힐러는 1828년부터 1835년까지 파리에서 지내며 쇼론(Shoron)음악학교의 작곡 교수로서 활동했다. 하지만 작곡가로서 또한 피아니스트로서 더욱 전념하기 위해 교수의 직위를 포기하였다. 이어 그는 이탈리아로 떠났다. 오페라에 대한 기법을 공부하여 오페라로서 성공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는 끝내 이탈리아 스타일의 오페라를 작곡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독일 징슈필 스타일의 오페라는 여섯 편을 남겼고 습작으로 오페레타를 작곡하기는 했다. 그것도 대본이 없는 오페레타였다.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온 그는 오로지 작곡에만 전념하여 수많은 기악곡과 성악곡을 남겼다. 힐러는 다작의 작곡가였다. 당시 힐러는 불과 25세의 청년이었으나 그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케 만들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와 함께 힐러는 지휘자로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중년의 힐러

 

힐러는 멘델스존의 관심을 받았지만 또한 로시니의 관심도 받았다. 힐러는 이탈리아에 있을 때 밀라노에서 로시니의 첫 오페라인 로밀다(Romilda)의 공연을 지원해 준 인연도 있다. 멘델스존은 힐러에게 라이프치히의 게봔트하우스(Gewandhaus)와 인연을 맺을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특히 힐러의 1840년도 오라토리오인 '예루살렘 멸망'(Die Zerstörung Jerusalems)을 공연할수 있도록 지원했다. 로마에서 교회음악을 공부하고 있던 힐러는 멘델스존의 권유에 의해 라이프치히로 왔고 1843-44년 지즌에 게봔트하우스 콘서트를 지휘하였다. 이때쯤해서 음악계에서 젊은 힐러의 위상은 크게 높아져 있었다. 그에게는 지휘를 해 달라는 청탁이 쇄도하였으며 여러 곳에서 명예로운 신분을 받게 되었다. 힐러는 1847년 뒤셀도르프시의 음악감독 겸 합합창단의 지휘자가 되었으며 1850년에는 쾰른시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힐러는 쾰른에서 '쾰른음악원'(Conservatorium der Musik in Koeln)을 설립하였다. 힐러는 쾰른에서 1884년,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까지 머물면서 음악활동을 하였다. 이 기간동안 힐러는 12회에 걸ㄹ쳐 남부라인음악제의 총책임자로 활약하였다. 그는 또한 드레스덴에서도 지휘하였다. 그리고 1952-53년 시즌에는 파리에서 이탈리아 오페라를 지휘하였다. 그는 작곡가로서 뿐만 아니라 지휘자로서도 유럽의 정상에 있었다.

 

레온 보트슈타인(Leon Botstein)이 지휘하는 어메리칸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힐러의 오라토리오 '예루살렘 멸망'을 연주하고 있다. 2008년 뉴욕 에이버리 피셔 홀. 바리톤 루카스 미헴(Lucas Meachem)이 곡중 예레미아 역을 맡아 노래를 불렀다.

 

쾰른에 있을 때 힐러는 이름에 귀족 명칭인 von 을 수여받았다. 그래서 페르디나트 폰 힐러가 되었으나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쾰른에 있을 때 그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은 막스 브루흐(Max Bruch)였다. 막스 브루흐는 유태인은 아니었지만 힐러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유태인 음악에 대하여 깊은 관심이 있었다. 브루흐의 유명한 첼로 엘레지인 콜 니드라이(Kol Nidrei)는 유태인의 절기인 욤 키푸르(Yom Kippur: 참회의 날)에 유태교 회당에서 불려진 노래에 기본으로 작곡한 것이다. 힐러는 쾰른 음악계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다. 그는 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1884년에 후계자로서 브람스 또는 브루흐를 지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실제로 후임은 '현대주의자'인 프란츠 뷜너(Franz Wüllner)에게 돌아갔다. 프란츠 뷜너는 쾰른시의 음악감독이 되자 바그너, 리스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을 주로 선택하여 지휘하였다. 힐러는 이들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되도록 기피하여 왔었다. 힐러는 1849년 베를린 왕립미술원의 위원으로 위촉되었으며 1968년에는 본(Bonn)대학교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쾰른 공동묘지에 있는 힐러의 묘소의 조각

 

힐러는 많은 작품을 썼지만 불행하게도 오늘날 거의 모두 잊혀져 있다. 힐러의 음악은 성악곡, 실내악곡, 합창곡, 관현악곡 등 거의 모든 장르를 커버하는 폭넓은 것이었다. 한편, 슈만은 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힐러에게 증정하였으며 쇼팽은 작품번호 15번이 세곡의 야상곡을 힐러에게 봉정하였다. 이처럼 힐러는 여러 음악인들과 뜨거운 교분을 맺으며 지냈다. 힐러는 1839-1865년 기간에 여섯 편의 오페라를 작곡하기도 했다. 힐러는 실내악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의 4중주곡은 피아노를 사용한 것도 있고 사용하지 않은 것도 있다. 피아노 4중주곡 1번 B 단주는 피아노를 사용한 4중주곡으로 유명하다. 1830년경에 비엔나의 유명한 출판사인 하슬링거(haslinger)가 출판하였다. 그는 3편의 현악4중주곡을 남겼다. 현악3중주곡 207번은 1886년 그의 사후에 라이프치히에서 리터-비더만(Rieter-Biedermann)에 의해 사후작품 제2번으로 출판되었다. 작품번호 47번인 솔로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는 1852년 함부르크에서 출판되었다. 힐러는 최소한 2편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G 장조의 Im Freien(자유롭게)는 1852년 런던에서 초연되었으며 E 단조는 1865년 마인츠에서 초연되었다. E 단조 교향곡은 독일의 유명한 출판사인 Schott가 출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