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위대한 발자취

위대한 지휘자를 기리는 거리

정준극 2012. 1. 7. 09:54

위대한 지휘자를 기리는 거리

 

비엔나 슈타츠오퍼 바로 옆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플라츠가 있다.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1구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플라츠(Herbert von Karajan Platz). 1908-1989

- 에드문트 라임: 12구 에드문트 라임 가쎄(Edmund Reim Gasse) 작곡가 겸 지휘자. 비엔나. 1859-1928

- 카를로스 클라이버: 14구 클라이버가쎄(Kleibergasse). 1930-2004

- 아르투르 나키슈: 14구 니키슈가쎄(Nikischgasse). 1855-1922

- 펠릭스 모틀: 19구 펠릭스 모틀 슈트라쎄(Felix Mottl Strasse). 1886-1911

- 레오나드 번슈타인: 22구 레오나드 번슈타인 슈트라쎄(Leonard Bernstein Strasse). 1918-1990

- 프란츠 잘름호퍼: 23구 잘름호퍼슈트라쎄(Salmhoferstrasse). 1900-1975 작곡가 겸 지휘자

- 아르투르 토스카니니: 23구 토스카니니가쎄(Toscaninigasse). 1867-1957

 

잘츠부르크 출신의 명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그를 기리기 위해 비엔나에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플라츠라는 지명이 있으며 컈른트너링에 카라얀기념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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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얀, 번슈타인, 토스카니니 등 거장들에 대하여는 별도로 소개키로 하고 금번에는 다만 에드문트 라임, 카를로스 클라이버, 아르투르 니키슈, 프란츠 잘름호퍼에 대하여 간단히 소개코자 한다.

 

○ 에드문트 라임(Edmund Reim)

1859년 비엔나에서 태어나 1928년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난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겸 지휘자였다. 에드문트 라임은 원래 음악교사였다. 처음 음악활동을 한 것은 비엔나남성합창단(Wiener Männergesang-Verein)에서부터였다. 그후 철도합창단 지휘자로 활약했다. 그는 약 75곡을 작곡했다. 주로 비엔나남성합창단을 위한 합창곡을 작곡했다. 이밖데오 2편의 오페라, 가곡들, 무곡들, 오케스트라 작품도 남겼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 즉위 50주년을 기념하는 콩쿠르에서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 찬가'를 작곡하여 2등상을 받았다. 에드문트 라임은 마이들링에 살았다. 쇤브룬너 슈트라쎄 230 번지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라임은 마이들링 공동묘지(Meidlinger Friedhof)에 안장되었다. 마이들링에 그를 기념하여 '에드문트 라임 가쎄'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1937년이었다.

 

○ 카를로스 클라이버(Carlos Kleiber)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서명과 지휘하는 모습

 

1930년에 베를린에서 태어나서 2004년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는 오스트리아의 지휘자인 에리히 클라이버였으며 어머니는 미국인이었다.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취리히공대에서 화학을 공부하였으며 1940년 가족과 함께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가서는 음악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그의 이름은 독일에서 Karl 이었으나 아르헨티나 시민이 되고부터는 Carlos 가 되었다. 독일로 돌아온 그는 처음에 뮌헨의 개르트너플라츠 극장의 연습지휘자로 일하였다. 그가 지휘자로서 처음 데위한 것은 1954년 포츠담극장에서 칼 밀뢰커의 오페레타 갸스파로네(Gasparone)를 지휘한 것이었다. 1958년부터 1964년까지는 뒤셀도르프의 도이체 오퍼 암 라인의 지휘자로 활동했고 1964-66년에는 취리히 오페라의 지휘자로 활동했다. 1966년부터 1973년까지는 슈투트가르트의 수석지휘자였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직책이었다. 그 이후에는 프리랜서로서 여러 곳에서 지휘를 했다. 그는 1980년에 오스트리아 시민이 되었다.

 

그는 프리랜서 기간 중에 특별한 경우에만 지휘를 한 것으로 유명했다. 1966년에는 에딘버러 페스티벌에서 알반 베르크의 '보체크'(Wozzeck)를 지휘한 것은 그 중의 하나였다. 그의 아버지인 에리히 클라이버는 1925년 '보체크'의 베를린 초연을 지휘하였으므로 에딘버러에서의 지휘는 특별히 감회가 있는 것이었다. 클라이버의 바이로이트 데뷔는 1974년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였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교향악단을 지휘한 것은 1978년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것이었다. 이어 1983년에 다시 지휘하였다. 미국 교향악단을 지휘한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한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데뷔는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인 1988년 푸치니의 '라 보엠'을 지휘한 것이었다. 환상의 콤비인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미렐라 프레니가 출연한 공연이었다. 이듬해인 1989년에 클라이버는 베를린 필하모닉으로부터 폰 카라얀의 후임으로 와 달라는 오퍼를 받았다. 하지만 거절하였다. 클라이버는 1989년에 메트로폴리탄에 돌아와 '라 트라비아타'를 지휘했고 1990년에는 '오텔로'와 '장미의 기사'를 지휘했다.

 

클라이버는 대중들과 어울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언론과의 인터뷰는 한번도 갖지 않았다. 클라이버는 바바리아 국립오페라를 사임한 후에 공식 지휘는 거의 하지 않았다. 다만, 레코딩은 몇차례 가졌다. 클라이버가 지휘한 레코딩은 모두 뛰어난 수준으로 정평이 나 있다. 특히 비엔나 필을 지휘한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과 제7번, 바바리아 국립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베토벤의 교향곡 4번, 6번, 7번은 대단히 훌륭하다는 평을 받았다. 또한 비엔나 필과 함께 한 브람스의 교향곡 제4번, 슈베르트의 교향곡 3번과 8번(미완성), 드보르작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베버의 '마탄의 사수', 요한 슈트라우스의 '박쥐',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도 뛰어난 레코딩으로 알려져 있다.

 

○ 아르투르 니키슈(Arthur Nikisch) - 헝가리어 Nikisch Artur

 

오케스트라의 마법사라고 불리는 지휘자 아르투르 니키슈

 

헝가리의 아르투르 니키슈(1855-1922)는 보스턴, 런던, 베를린에서 지휘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브루크너, 차이코브스키, 베토벤, 리스트의 뛰어난 해석자로서 이름을 떨쳤다. 브람스는 니키슈가 자기의 교향곡 제4번을 지휘하자 '더 이상 훌륭한 연주를 듣기가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르투르 니키슈는 헝가리의 모손첸트미클로스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모두 헝가리인이었다. 니키슈는 1866년에 비엔나음악원에서 지휘는 요한 폰 헤르베크, 바이올린은 요제프 헬메스버거로부터 배웠다. 비엔나음악원을 졸업한 그는 빈필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들어갔으며 1876년에는 바이로이트의 개관기념 연주회에서 연주했다. 그는 1878년에 라이프치히로 옮겨 라이프치히 오페라의 부지휘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884년에 브루크너의 교향곡 7번의 초연을 지휘한 곳은 이곳이었다. 1885년에 그는 배우이며 성악가인 아멜리 호이스너(1862-1938)와 결혼했다. 이어 1893년부터 95년까지는 왕립부다페스트오페라의 지휘자로 활약하였다. 그는 같은 해에 베를린 필의 수석지휘자가 되었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부다페스트오페라와 베를린 필의 지휘자로서 직위를 유지하였다.

 

니키슈는 몇가지 점에서 선구적인 존재였다. 1912년에 그는 런던교향악단을 처음으로 미국으로 데려가서 지휘했다. 유럽의 교향악단이 미국에 간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니키슈는 1913년에 베를린 필과 함께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을 레코딩했다. 베를린 필의 첫 레코딩이었다. 그는 런던 교향악단의 초기 레코딩도 지휘하였다. 그는 1922년에 라이프치히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곳에 안장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직후, 그가 살았던 광장은 니키슈플라츠(Nikischplatz)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1971년에 라이프치히는 젊은 지휘자를 위한 '아르투르 니키슈 상'을 설립했다. 니키슈는 현대 지휘법을 개척한 사람 중의 한 하나이다. 현대 지휘법은 우선 스코어를 깊이 분석하는 일에 치중한다. 그리고 실제 지휘에서는 단순한 비트로 인도하여 오케스트라의 풀 소노리티를 끌어내기 위해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지휘이다. 말하자면 음악의 깊이를 이해하고 측정하는 기법이다. 니키슈의 지휘법에 대하여는 스토코브스키, 토스카니니, 아드리안 불트(Sir Adrian Boult), 프릿츠 라이너, 어빈 나이프레기하지(Ervin Nyfreghhazi), 조지 셀 등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들은 한결같이 니키슈를 '오케스트라의 마법사'(Orchestral wizard)라고 불렀다. 프릿츠 라이너는 니키슈가 자기에게 '큐를 줄 때에는 절대로 손을 사용하지 말라, 대신 눈으로서 보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폰 카라얀도 니키슈가 손으로 큐를 주지 않고 눈으로서 사인을 주는 것을 대단히 인상깊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 프란츠 잘름호퍼(Franz Salmhofer)

 

프란츠 잘름호퍼(오른쪽)가 요제프 막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운데)와 비엔나에서 만나 담소하고 있다.

 

프란츠 잘름호퍼는 1900년에 비엔나에서 태어나 1975년에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난 오스트리아의 지휘자, 클라리네티스트, 작곡가, 시인이다. 그는 비엔나에서 클라리넷, 작곡, 음악학을 공부했다. 그는 프란츠 슈레커(Franz Schreker)와 프란츠 슈미트(Franz Schmidt)의 제자였다. 잘름호퍼는 1929년부터 1945년까지 비엔나 부르크테아터(궁정극장)의 지휘자로서 활동했다. 이어 전쟁이 끝난 1945년부터 1954년까지는 비엔나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극장)의 지휘자로 활동했다. 이어 1956년부터 1963년까지는 비엔나 폭스오퍼의 지휘자였다. 그의 작품은 로맨티시즘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잘름호퍼는 1920년대에 여러 진보적인 작곡자 및 지휘자의 한 사람으로 간주되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낭만주의적인 성향을 잃지 않았다. 작곡가로서 그의 대표적인 오페라는 1938년에 완성한 '이봔 타라센코'(Iwan Tarassenko)이다. 착한 사람의 이상적인 표본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또 다른 오페라인 '청혼의상'(Das Werbekleid:1943)과 발레곡인 '오스트리아 농부의 결혼식'(Osterreichische Bauernhochzeit: 1933)은 오스트리아의 민속적 색채가 짙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