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소프라노 대분석

세기의 카르멘 리제 스티븐스...99세로 타계

정준극 2013. 4. 20. 11:58

99세로 타계한 왕년의 메트로폴리탄의 여왕 리제 스티븐스(Risë Stevens)

격조 높은 이미지, 다양한 재능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메조소프라노

 

세기의 메조소프라노 리제 스티븐스

            

카르멘이라고 하면 우선 누가 생각나는가? 1950년대와 6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단연 리제 스티븐스를 꼽는다. 그때에는 그의 하바네라를 들었던 사람들은 모두 '참 대단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세기의 메조소프라노 리제 스티븐스(Risë Stevens)가 2013년 3월 20일 향년 100세를 3개월 남겨두고 작고했다. 그래서 향년 99세! 그만큼 장수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가는 세월은 어쩔수가 없어서 과거의 화려했던 디바 리제 스티븐스도 이제는 더 이상 우리 곁에 머물러 있지 않다. 리제 스티븐스는 메트로폴리탄에서 오페라의 전성시기인 1938년부터 1961년까지 23년간 메조소프라노 디바로서 독보적인 존재를 차지했으며 미국 출신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떨친 성악가들이 거의 없던 시절에 미국의 위상을 크게 높혔던 성악가이다. 더구나 할리우드 배우로서도 재능을 보였던 인물이다. 수많은 소프라노와 테너들이 메트로폴리탄의 스타로서 찬란한 활약을 하던 시대에 메조소프라노로서 스타의 반열에 오른 사람은 아마 리제 스티븐스가 유일할지도 모른다. 리제 스티븐스의 선조는 노르웨이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Risë 라는 이상한 스펠링의 이름은 '리자'라고 읽는 것이 옳다고 한다.

 

카르멘의 리제 스티븐스. 역대 카르멘 중에서는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다.

 

리제 스티븐스는 메트로폴리탄에 있을 때 '빌퀴레'의 프리카와 '장미의 기사'의 옥타비안으로부터 '피가로의 결혼'의 케루비노와 '미뇽'의 타이틀 롤까지 수많은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한 '카르멘'...카르멘이라고 하면 리제 스티븐스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리제 스티븐스는 메트로폴리탄에서 23년 동안 있으면서 무려 351의 출연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 오랜 기간동안 그와 함께 공연했던 전설적인 성악가들을 몇 사람만 꼽아보면, 키르스텐 플라그스타드, 로리츠 멜키오르, 로테 레만, 비두 사야오, 에치오 핀자, 패트리스 먼젤, 친가 밀라노프, 리챠드 터커, 레오나드 워렌, 엘리오너 스테버, 쿠르트 바움, 크리스타 루드비히, 레오니 리자네크, 발터 베리, 로베르타 페터스, 루신 아마라, 라몬 비나이, 로살린드 엘리아스...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이다.

 

'미뇽'의 타이틀 롤을 맡은 리제 스티븐스

 

리제 스티븐스는 오페라 무대에서 폭넓은 레퍼토리, 세련된 연기력, 정확한 음악성, 그리고 뛰어난 음성으로 잘 알려졌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음성을 비로도와 같다고 말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스무스하고 따듯하다고 말했다. 그런가하면 풍부하고 빛나는 음성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리제 스티븐스의 음성은 그의 자산이었다. 1945년에 런던의 로이드회사는 리제 스티븐스의 음성을 1백만불에 보험을 들을 정도였다. 음성을 보험에 든 것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고 1백만불이라는 거액의 보험금을 책정한 것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리제 스티븐스의 기나긴 그리고 다양한 음악생활을 한마디 단어로서 표현한다면 어떤 것일까? 아마도 '격조가 있는'(Class)라는 단어일 것이다. 그는 평생의 경력을 통해서 한번도 연주자로서 자기 자신을 존경하지 않은 적이 없다. 심지어 저속하다고까지 말할수 있는 카르멘의 역할을 맡더라도 그는 격조높은, 음악적으로 귀족적인 느낌을 갖도록 연주했다. 그것은 그가 옥타비안을 맡든지, 오르페오 또는 델릴라를 맡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심지어는 TV를 통해서 팝송을 부를 때에도 그의 음성에는 높은 격조가 있었다. 그러므로 메트로폴리탄에서 리제 스티븐스가 출연한다는 것은 언제나 최고의 공연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밀라노의 호텔 밀라노 발코니에서. 리제 스티븐스에게는 언제나 격조 높은 품위가 있었다. 1954년.

 

리제 스티븐스가 메트로폴리탄에서 가장 성공적인 경력을 기록하게 된데에는 시대적 배경도 기여한바가 컸다. 그가 메트로폴리탄에 데뷔할 즈음인 1930년대 후반에는 유럽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던 때였다. 유럽에서 활동하던 성악가들이 미국으로 건너오기가 쉽지 않았다. 또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성악가들도 가족들의 문제 등으로 유럽으로 돌아가기에 바뻤다. 메트로폴리탄도 성악가의 부족을 겪어야 했다. 메트로폴리탄의 제느럴 매니저인 에드워드 존슨은 미국 출신의 성악가들을 기용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재능있는 성악가들이 메트로폴리탄에 발탁되어 오페라 성악가로서의 경력을 쌓게 되었다. 예를 들면 엘리노어 스테버, 리챠드 터커, 레오나드 워렌, 헬렌 트라우벨 등이었다. 메트로폴리탄에 합류한 리제 스티븐스은 대중들이 좋아하는 역할을 맡아했다. 대중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였다. 단역이나 별로 특징이 없는 역할을 거의 맡지 않았다. 카르멘은 대표적인 경우이다. 대중들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역할이었다. 리제 스티븐스는 메트로폴리탄 자체무대와 미국 순회공연을 통해 카르멘만 124회를 공연했다. 그 다음이 바지역할인 옥타비안이었다. 74회를 공연했다. 그 다음이 델릴라(32회), 그 다음은 미뇽(28회)였다. 그래서 카르멘 또는 옥타비안, 델릴라, 미뇽이라고 하면 누구보다도 리제 스티븐스를 머리에 떠 올리게 되었다. 리제 스티븐스 자신은 그가 맡았던 역할 중에서 오르페오를 가장 좋아한다고 밝힌바가 있다. 그는 1955년 이래 메트로폴리탄에서 오르페오를 10회나 맡았었다.

 

'장미의 기사'에서 옥타비안을 맡은 리제 스티븐스

                             

그는 초기에는 바그너의 역할을 자주 맡았었다. '라인의 황금'에서 에르다, '발퀴레'에서 프리카 등이었다. 그러다가 그보다는 덜 무거운 역할들을 맡기 시작했다. 오히려 바그너가 아닌 역할들이 그의 음성에 가장 적합했었다. 리제 스티븐스는 오페라 수퍼스타로만 알려진 사람이 아니었다. 라디오, TV, 영화에도 출연하여 명성에 손색이 없는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브롱스 토박이 디바 답게 서민적이었다. 리제 스티븐스는 무대에서 은퇴한 후에 음악인으로서 제2의 경력을 시작하였다. 예술행정가라는 역할이었다. 그는 1964년에 마이클 마누엘(Michael Manuel)과 함께  국립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의 제느럴 매니저로 임명되었다. 새로운 오페라단으로서 주로 미국내에서 전국을 순회공연하는 역할이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오페라단은 1967년에 재정문제로 해산해야 했다. 그후 그는 메트로폴리탄오페라단 지역오디션위원회의 국장으로 활약했다.

 

영화 '초콜릿 병사'에서 넬슨 에디와 함께

 

리제 스티븐스는 뉴욕시티에서 태어났고 자라기는 브롱스에서 자라났다. 리제 스티븐스의 원래 이름은 리제 스틴버그(Risë Steenberg)였다.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10대의 소녀시절에 브루클린에 있는 오페라소극장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이 극장은 나중에 뉴욕 오페라 코미크극장으로 확장되었다. 리제 스티븐스는 브루클린의 소극장에 있을 때에 줄리아드음악학교의 성악과장인 유명한 안나 쇤 르네(Anna Schoen-Rene)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리제 스티븐스는 결국 줄리아드에 들어가 안나 쇤 르네 교수에게 직접 레슨을 받게 되었다. 안나 쇤 르네 교수는 리제 스티븐스에게 한동안 스케일만 가르쳤다. 반년 동안 스케일밖에 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리제 스티븐스는 레슨에 들어가기 전에 '오늘은 선생님이 제발 나에게 노래 한 곡을 불러보라고 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후 안나 쇤 르네 교수는 아리아보다는 발성에 대하여 조직적이고 방법론적으로 가르쳤다. 그러나 그 모든 교육이 리제 스티븐스에게는 크나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줄리아드를 나온 그는 뉴욕 일대에서 어떠한 오페라에도 도전할수 있게 되었다. 르제 스티븐스는 아직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1935년 4월에는 줄리아드학교에서 로버트 러셀 베네트(Robert Russel Benett)의 '마리아 말리브란'의 초연에 출연했다. 그리고 안나 쇤 르네 교수의 도움을 받아 잘츠부르크로 가서 모차르테움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잘츠부르크에서는 독일 출신의 소프라노인 당대의 마리 구타일 쇼더(Marie Gutheil-Schoder: 1874-1935)에게 배웠다. 그러나 마리 구타일 쇼더 교수가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더 오래 배우지는 못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 기념관에 전시될 자신의 카르멘 초상화를 보고 기뻐하는 리제 스티븐스

 

잘츠부르크에 오래 있을 필요가 없었던 리제 스티븐스는 파리로 갔다. 당시 프라하오페라의 음악감독이던 조지 첼(George Szell)이 리제 스티븐스를 주목하였다. 그후 리제 스티븐스는 조지 첼과 여러 면에서 인연을 갖고 음악활동을 하였다. 한편, 리제 스티븐스는 파리에 있으면서 무대에서의 연기기법을 쌓았다. 이때의 연기공부는 그의 평생을 통해 영향을 준 기반이 되었다. 리제 스티븐스는 프라하로 갔으나 큰 활동을 하지 못했다. 다만, 프라하에서 비엔나 출신의 젊은 배우인 발터 추로비(Walter Zsurovy)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두 사람은 얼마 후에 결혼하였다. 남편 발터 추로비는 리제 스티븐스의 장래 경력에 커다란 도움이 되어 주었다. 1939년, 리제 스티븐스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더 이상 프라하에 있을 수 없어서 런던으로 갔다. 리제 스티븐스는 글린드본 페스티발에서 케루비노와 도라벨라를 불렀다. 글린드본의 제느럴 매니저는 루돌프 빙(Rudolf Bong)이었다. 그후 리제 스티븐스와 루돌프 빙은 메트로폴리탄에서 더할수 없는 동지로서, 그러다가는 적대자로서 지내는 운명을 갖게 되었다.

 

리제 스티븐스의 남편인 발터 추로비가 여배우 엘프리데 다치히와 공연한 영화의 한 장면. 리제 스티븐스와의 사이에 아들 니콜라스 추로비를 두었다. 나중에 저명한 영화배우겸 무대감독이 되었다.

 

리제 스티븐스는 메트로폴리탄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특출한 무대 연기와 아름다운 메조 음성으로  메트로폴리탄의 가장 귀중한 아티스트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자 헐리우드가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1941년에 MGM으로 가서 오스카 슈트라우스의 '초콜릿 병사'(The Cholocate Soldier)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상대방은 넬슨 에디(Nelson Eddy)였다. 이 영화에서 리제 스티븐스는 넬슨 에디의 부인인 마리아 라니(Maria Lanyi)의 역할을 맡아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MGM의 영화에만 시간을 쏟지 않았다. 라디오의 클래식 음악 시간 뿐만 아니라 팝 음악 시간에도 출연하기 시작했다. 리제 스티븐스는 팝 송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주었다. 1944년에는 파라마운트의 Going My Way(나의 길을 가련다)라는 영화에 출연하였다. 뉴욕의 서민거리에서 일어나는 잔잔한 감동의 멜로드라마였다. 리제 스티븐스는 오말리 신부(빙 크로스비)의 옛 친구로서 오페라 성악가의 역할을 맡았다. 오말리 신부는 거리의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는 1944년도 최우수 영화로 오스카상을 받았다. 전쟁 기간 중에 나온 영화로서 대단한 흥행을 이룩하였다. 그로 인하여 리제 스티븐스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인기배우가 되었다. 헐리우드는 리제 스티븐스에게 계속 남아서 영화에 출연해 달라고 요청하였지만 그는 그같은 제안을 거절하고 오페라와 콘서트 연주자로 돌아왔다. 리제 스티븐스는 Going My Way에서 카르멘에 나오는 노래들을 불렀다. 그후 메트로폴리탄에서 카르멘을 실제로 처음으로 맡은 것은 1945년 12월 28일이었다. 리제 스티븐스는 카르멘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 별도로 플라멘코 춤 강습을 받았으며 카스타넷과 탬버린의 연주법도 마스터했다. 리제 스티븐스가 맡은 메트로폴리탄의 카르멘은 공전의 성공이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리제 스티븐스의 매력에 푹 빠졌다.

 

빙 크로스비와 함께 출연한 '나의 길을 가련다'의 한 장면

 

1950년에 루돌프 빙이 메트로폴리탄에 도착했다. 그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의 제작을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여러명의 재능있는 극장감독 또는 영화감독들을 초빙하였다. 무대연기에 무척 관심이 많았던 리제 스티븐스으로서는 환영할 일이었다. 그렇게 초빙을 받아 온 극장감독 중의 하나가 영국에서 온 타이론 거스리(Tyrone Guthrie)였다. 그는 전혀 새로운 연출로서 카르멘을 제작하였다. 1952년 1월의 일이었다. 그러나 타이론 거스리의 카르멘은 주인공들이 과거처럼 열정을 쏟아 붓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오히려 무대 장치와 효과에 더욱 치중한 것이었다. 새로운 연출은 마지막 장면에서도 무대를 전통적인 투우장이 아니라 에스카미요의 분장실로 잡았다. 돈 호세인 리챠드 터커가 카르멘인 리제 스티븐스를 칼로 찌를 때 스티븐스는 입을 벌려 비명을 질러야 하지만 새로운 연출에 의해 소리를 내지 않아도 되었다. 그 대신에 카르멘은 무대의 커튼을 부여 잡고 쓰러지고 그러는 와중에 커튼이 찟어지면서 카르멘의 몸을 덥는 것으로 연출되었다. 이러한 색다른 연출은 전통적인 연출에 익숙하여 있던 관중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 저런 이유 때문에 리제 스티븐스는 루돌프 빙의 혁신적인 연출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서먹한 것으로 발전되었다.

 

'오르페와 유리디스'에서의 오르페오를 맡은 리제 스티븐스

 

1950년대 중반에 접어 들어서 리제 스티븐스는 활동의 영역을 메트로폴리탄에만 국한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에 따라 그는 라 스칼라에서의 비르질리오 모르타리(Virgilio Mortari)의 Figlia del Diavolo(악마의 딸)의 초연에 출연하였다. 그 다음 해에는 글린드본에서 케루비노를 맡았다. 그러는 한편 TV에도 정기적으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1958년에는 리챠드 애들러의 뮤지컬 버전인 CBS의 Little Women(작은 아씨들)에 어머니로 출연하였다. 1960년대 초에 그는 예전처럼 열정적인 공연에 참가할수 없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1961년 4월 12일 카르멘을 마지막으로 메트로와 고별하였다. 리제 스티븐스는 비록 메트로폴리탄의 무대와는 고별하였지만 콘서트 출연이나 음반 취입은 계속하였다. 대표적으로 레코딩한 것은 쿠르트 봐일과 아이라 거슈인이 완성한 Lady in the Dark(어둠 속의 여인)이다. 그는 또한 새로 건설된 뉴욕주립극장에서 라저스와 햄머슈타인의 뮤지컬인 The King and I(왕과 나)에 안나로서 출연하였다. 이어 메츠국립오페라단(Met's National Company)의 제느럴 매니저로 부임하여 젊고 재능있는 음악인의 발굴과 육성, 지역오페라의 진흥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러나 1966년에 링컨 센터에 새로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가 완성될텐데 메츠국립오페라단이 과연 필요하냐는 얘기도 나왔으나 어쨋든 메츠국립오페라단은 1965년 첫 시즌에 칼리슬 플로이드(Carlistle Floyd)의 Susannah(수잔나)를 성공적으로 공연하였다. 그러나 워낙 재정이 부실하여서 그 다음 시즌에는 무려 1백만불의 적자를 기록하였다. 루돌프 빙은 리제 스티븐스를 라이발로 간주하여서 지원에서 발을 뺐다.

 

어퍼 웨스트 사이드에 있는 만느음악대학. 리제 스티븐스는 존 골드마크 학장의 뒤를 이어 1975년에 이 학교의 학장으로 활약했다.

 

리제 스티븐스와 남편은 잠시 버진 아일랜드에서 살다가 몇 년후 뉴욕으로 다시 돌아왔다. 리제 스티븐스는 자기의 에너지를 분출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래서 1975년부터 만느음악대학(Mannes College of Music)의 학장직을 맡았다. 줄리어드의 전학장인 윌렴 슈만은 리제 스티븐스에게 '아스피린 클럽에 들어 온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적어 보냈다. 만느는 심각한 재정위기에 있었다. 리제 스티븐스의 주요임무는 재정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리제 스티븐스의 기금조성 운동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또한 만느가 이론적인 음악교육에만 치중하고 있는 것을 지양했다. 공연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학교의 위상을 제고하기 위해 세계 각지로부터 뛰어난 연주자들을 교수진으로 영입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였다. 그는 이밖에도 몇가지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 놓았다. 보수적인 이사회가 그의 시도들을 반대하였다. 그는 이사회와 충돌하였고 마침내 1978년에 만느를 사임하였다.

  

리제 스티븐스가 평생을 보낸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

 

1980년에 그는 메트로폴리탄에 합류하여 젊은예술가개발프로그렘의 자문위원 겸 지역오디션국가위원회를 책임맡았다. 그는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젊고 재능있는 인재를 발굴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와 함께 라디오, TV의 강좌 프로그램에 열심히 출연하여서 메트로폴리탄에 대한 일반의 이해를 증진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이런 일들을 하면서 메트로폴리탄에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까지 근무했다. 이어 그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의 운영감독으로 활동했고 메트로폴리탄오페라길드의 이사로서 재직했다. 리제 스티븐스에 대한 책은 두 권이나 나왔다. 하나는 카일 크리치턴(Kyle Crichton)이 쓴 Subway to the Met(메트로 가는 지하철: 1959)이고 다른 하나는 존 페니노(John Pennino)가 쓴 Rise Stevens: A Life in Music(리제 스티븐스: 음악 속의 삶: 2005)이다. 리제 스티븐스는 여러가지를 자랑으로 삼고 있다. 롱 아일랜드에 있는 시골풍의 한적한 집을 사랑하였다. 평생을 요리에 대하여 열정을 가졌다. 1990년 케네디 센터 명예상을 받은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의 아들 니콜라스 수로비(추로비)가 배우로서 성공한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러나 가장 자랑으로 여기는 것은 메트로폴리타과의 평생에 걸친 인연이었다. 그리고 대중들이 그를 격조 높은 성악가로서 인정해 주는 것을 최고의 자랑으로 여겼다. 리제 스티븐스는 2013년 3월 20일 맨하튼의 아파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손녀와 함께 지냈다고 한다. 6월 11일에 태어났으므로 세달만 더 살았더라면 100세를 기념하였을 것이다.

 

DVD로 나온 리제 스티븐스 노래집과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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