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델스존과 오페라
오페라 '카마초의 결혼'과 징슈필 남겨...'로렐라이'는 미완성
자신만의 오페라 에 대한 기준 설정
펠릭스 멘델스존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1809-1847)이라고 하면 가곡 '노래의 날개 위에', '바이올린 협주곡 E 단조', 결혼행진곡이 나오는 '한여름 밤의 꿈', 오라토리오 '엘리야'와 같은 작품을 연상하게 되지만 오페라 작곡가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멘델스존은 천재적인 작곡가였다. 괴테도 멘델스존의 뛰어난 재능을 높이 찬양하였다. 그런 멘델스존이지만 세계 오페라 작곡가의 명단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섭섭히 생각할 필요는 없다. 멘델스존이 오페라를 전혀 작곡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세울만한 작품이 없다는 것일 뿐이다. 멘델스존이 만든 오페라(징슈필)로서 그나마 내세울만한 것은 '카마초의 결혼'(Die Hochzeit des Camacho)이다. 이밖에도 너댓편의 징슈필이 있지만 그것들은 마치 습작과 같아서 일반적인 오페라의 대열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그런데 미안한 말이지만 완성된 오페라라고 하는 '카마초의 결혼'도 초연 당일의 단 한번 공연으로 막을 내리고 자취를 감추어야 했다. '카마초의 결혼'은 실패였다. 초연에 참석했던 멘델스존도 전체 공연이 다 끝나기도 전에 속이 상해서 자리를 떠나 집으로 돌아갔을 정도였다. 그후로 멘델스존은 더 이상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았다. 그렇다고해서 멘델스존이 무대작품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인 '한여름 밤의 꿈'을 위해 음악을 작곡한 것은 놀라운 업적이었다. 심지어 사람들은 멘델스존이 극음악에 대하여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까지 말했다.
멘델스존은 비록 38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다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활동하던 기간 동안에 오페라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도전하였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멘델스존의 작품 목록을 살펴보면 무대를 위한 작품이 무려 17개나 된다. 그중에는 3막의 코믹 오페라(또는 징슈필)인 '두 명의 조카'(Die beiden Neffen: 1822-23: 일명 <보스톤에서 온 삼촌>(Der onkel aus Boston)은 1824년에 식구들과 친구들을 위해 공연된 것으로 대본은 요한 루드비히 카스퍼(Johann Ludwig Casper)가 쓴 것이다. 카스퍼는 그 이전에 이미 멘델스존을 위해 몇 편의 대본을 제공한바 있다. 1820년에는 '병사의 사랑'(Die Soldatenliebschaft), 1821년에는 '두 명의 선생님'(Die beiden Pädagogen), 1822년에는 '유랑 배우'(Die wandernden Komödianten)의 대본을 제공했다. 모두 단막의 징슈필이다. 이 징슈필들은 대개가 모차르트와 베버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다가 본격 오페라의 형태인 '카마초의 결혼'을 작곡하였다. 멘델스존은 '카마초'를 작곡하기 전에 베버와 모차르트의 오페라들을 아주 세심하게 관찰하고 연구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오묘하여서 멘델스존은 그렇게도 오페라에 관심과 도전의식이 많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오페라를 거부하고 외면하였다. 마치 애증의 두 상반된 감정이 병존하여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사랑과 증오의 감정이 병존하면 어떠한 상황이 되는지는 잘 알것이다. 아무튼 그러한 반대감정의 병존이 멘델스존의 오페라에 대한 의지를 마비시키고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주변사람들과 극장들은 멘델스존에게 오페라를 작곡하라고 반강제적으로 요구하였다. 멘델스존은 어쩔수 없이, 아니면 자발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래서 어쩌면 뛰어난 작품을 완성했을 지도 모르지만 실제 상황에 있어서는 오페라에 대한 양면적인 관념의 지배를 받아서 더 이상 펜을 들지 못했다.
10대 중반 소년시절의 멘델스존. 멘델스존은 어려서부터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주었다. 이 나이 때에 이미 징슈필을 작곡하였다.
멘델스존이 이 오페라(징슈필)를 작곡하기 시작한 것은 그가 불과 15세 때인 1824년 여름이었다. 실상 멘델스존은 이미 10대 초반에 징슈필과 리더슈필(Liederspiel: 노래가 있는 연극)들을 몇 편 작곡한바 있다. 개인적으로 식구들을 위해서 또는 친구들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할수는 없었다. 좀더 규모가 있는 무대작품을 만들고 싶어했다. 마침 그러한 때에 프리드리히 보이그트(Friedrich Voigt)의 전2막의 '카마초의 결혼'이라는 대본이 눈에 들어왔다. 스페인의 세르반테스가 쓴 '돈키호테'에 나오는 에피소드를 무대작품 대본으로 만든 것이었다. 멘델스존은 곧 작곡에 착수하여 그해 12월에는 1막의 음악을 모두 완성했고 이듬해 2월에는 서곡을 완성했다. 그리고 1825년 8월에는 2막까지 완성하여 베를린 샤우슈필하우스(연극극장)에 제출하여 공연할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극장측은 천재소년으로 알려진 멘델스존의 오페라이므로 한번 공연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재력가인 아버지의 영향력도 작용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멘델스존의 오페라 '카마초의 결혼'은 우여곡적을 겪은 후 1827년 4월 29일 베를린의 샤우슈필하우스에서 초연의 막을 올렸다. 뛰어난 재능의 멘델스존은 아마도 스스로 이 오페라의 성공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페라 작곡가의 생애는 언제나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카마초의 결혼'은 실패였다. 멘델스존은 2막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실패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멘델스존 연구자들은 극장 매니저인 가스파레 스폰티니(Gaspare Spontini: 1774-1851)가 문제를 제공했다고 보고 있다. 스폰티니는 프러시아에서 왕실음악감독(카펠마이스터)로서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출신인 그는 독일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멘델스존이 작곡한 '카마초의 결혼'을 일단 수준 이하로 간주하였다. 스폰티니는 멘델스존으로부터 '카마초의 결혼'의 스코어를 받고는 그대로 책상설합에 둔채 거의 1년을 보냈다. 궁금한 멘델스존이 찾아가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자 그제서야 스코어를 꺼내 들고 이곳저곳 수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멘델스존은 스폰티니의 코멘트이므로 두말하지 않고 몇 군데를 손질해 주었다. 아무튼 그래서 리허설이 1827년 4월까지도 시작되지 않았다. 게다가 돈 키호테 역할을 맡은 성악가가 병이 나는 바람에 공연은 더 지체되었다. 4월 29일의 초연은 생각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특히 합창단이 연습이 부족해서인지 제대로 합창을 하지 못했다. 관중들은 오페라가 계속될수록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실망한 멘델스존은 오페라가 끝이 나기 전에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다음날 예정되어 있던 두번째 공연을 스스로 취소했다. 독일과 이탈리아 스타일의 파스티셰(Pastiche)인 '카마초의 결혼'은 그 후 멘델스존의 생전에 다시 공연되지 않았다. (파스티셰는 혼성곡을 말한다. 이곳저곳에서 음악을 가져와서 짜집기로 작품을 만든 것을 말한다.) 멘델스존은 다른 무대작품의 경우에 시간만 있으면 수정을 계속하는 편이었으나 '카마초'의 경우에는 다시 들여다 보고 수정도 하지 않았다.
'카마초의 결혼'. 돈키호테도 등장
멘델스존은 1829년에 처음으로 영국을 방문하였다. 그때 그는 또 다시 징슈필에 손을 댔다. '외국으로부터의 귀환'(Heimkehr aus der Fremde)라는 제목이었다. 영어 제목으로는 '아들과 나그네'(Son and Stranger)라고 했다. 그는 이 징슈필을 영국을 방문하는 중에 썼다. 영국에서 완성했지만 실은 베를린에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을 위해 공연코자 작곡한 것이었다. 이 징슈필은 1829년 12월 26일 멘델스존의 집에서 1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초연되었다.
'카마초' 사건은 오페라 작곡가로서 멘델스존에 대한 스토리의 끝이라고 볼수 있다. 그런데 참으로 뜻밖이지만 '카마초' 사건은 멘델스존에게 있어서 새로운 시작이기도 했다. 멘델스존은 그후 새로운 오페라를 작곡하기 위해 평생을 새로운 대본을 찾고자 무던히도 노력했기 때문이다. 멘델스존의 재능을 깊히 알고 있는 극장감독들, 대본가들, 성악가들, 시인들은 한결같이 멘델스존이 새로운 오페라를 작곡하기를 열망하였다. 멘델스존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에게는 약 50편에 이르는 대본이 제시되었다. 멘델스존는 그중에서 어떤 대본은 마음에 들어서 몇년이나 작곡을 구상하기도 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멘델스존은 생의 마지막 시기에 그가 찾고 있던 가장 이상적인 대본을 발견했다. 그후 이 징슈필은 멘델스존이 세상을 떠난 후인 1851년 런던의 헤이마켓 극장에서 공연되었다. 멘델스존은 영국으로부터 1829년에 이 징슈필을 공연하겠다는 제안을 받았으나 영어로 번역된 대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보류를 했었다. '외국으로부터의 귀환'의 독일어 대본은 멘델스존의 친구인 칼 클링게만(Karl Klingemann: 1798-1862)이 썼다.
멘델스존을 위해 징슈필의 대본들을 쓴 칼 클링게만
멘델스존은 셰익스피어 원작인 '템페스트'를 오페라로 만들려고 했다. 멘델스존은 '외국으로부터의 귀환'을 완성한지 2년 후인 1831년, 뮌헨오페라로부터 오페라를 작곡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멘델스존는 즉시 뒤셀도르프에 있는 칼 임머만(Karl Immermann)에게 '템페스트'의 대본을 만들어 달라고 연락했다. 그러나 멘델스존은 칼 임머만의 대본을 보고 음악적으로나 극적으로나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멘델스존은 뮌헨오페라와의 계약을 파기해야 했다. 그러나 멘델스존은 이러한 과정에서 극장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 1832년에 뒤셀도르프 시장은 멘델스존에게 시립극장의 음악감독직을 제안하였다. 멘델스존은 즉각 수락했다. 멘델스존은 뒤셀도르프의 오케스트라 콘서트뿐만 아니라 교회음악까지도 책임지는 위치에 있게 되었다. 또한 멘델스존은 오페라하우스의 지휘도 맡았다. 멘델스존은 1833년에 '돈 조반니'의 제작과 지휘를 맡았다. 그런데 출연진 선정이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성악가들은 멘델스존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하기가 일수였다고 한다. 더구나 '돈 조반니'의 공연 중에 오페라하우스 후원자들이 입장료가 비싸게 책정되었다면서 소리를 치는 바람에 이래저래 '돈 조반니'의 오프닝 밤은 대재앙으로 막을 내렸다.
멘델스존이 음악감독으로 있었던 뒤셀도르프 오페라하우스(도이체 오퍼 암 라인)
멘델스존은 1834년까지 뒤셀도르프 오페라하우스의 음악감독으로서 활동했다. 그 동안에 그는 모차르트, 베버, 마르슈너, 케루비니 등의 오페라를 지휘했다. 그 당시에 그는 아우구스트 폰 코체부에(August von Kotzebue)의 희곡인 '페르폰테'(Pervonte)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멘델스존은 '외국으로부터의 귀환'의 대본을 쓴 친구 칼 클링게만에게 '페르폰테'의 대본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칼 클링게만이 써온 대본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새로운 오페라는 불발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멘델스존의 극장에 대한 애착은 점점 높아졌다. 그러다보니 대본가인 칼 임머만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투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멘델스존은 뒤셀도르프 오페라하우스의 음악감독직을 사임하였다. 마침 그때 멘델스존은 라이프치히 게봔트하우스의 음악감독직을 제안받고 있었다. 라이프치히에서의 새로운 직분은 오페라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멘델스존은 마치 해방이라도 된듯 라이프치히에서의 생활에 만족하였다. 멘델스존은 라이프치히에서 개봔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유럽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만들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와 함께 그의 첫 오라토리오인 '성 바오로'(St Paul)을 완성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에게 오페라를 작곡해 달라는 요청이 계속 들어왔다는 것이다. 1838년에는 영국의 유명한 음악출판가인 윌렴 채펠(William Chappell)이 멘델스존에게 제임스 로빈슨 플랑셰(James Robinson Planche)가 에드워드 3세의 1346년도 칼레 공성을 내용으로 쓴 대본으로 오페라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멘델스존은 처음에는 흥미를 가졌었으나 점점 비판적이 되었다. 그래서 결국 오페라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이번에는 파리 오페라가 당대의 프랑스 대본가인 외진 스크리브(Eugene Scribe)와 협동하여 오페라를 제작해 달라는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멘델스존은 이것도 거절하였다. 다른 일 때문에 바쁘다는 이유였다.
오늘날의 라이프치히 게봔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멘델스존이 음악감독으로 있으면서 이 오케스트라의 명성을 유럽 최고의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아무튼 멘델스존의 머리 속에는 오페라에 대한 집념이 남아 있었다. 멘델스존은 누이인 패니에게 독일의 전설인 '니벨룽의 노래'(Nibelungenlied)를 바탕으로 오페라를 한번 만들어 보면 어떻겠냐고 의논하였다. 영국에 있는 화학자인 윌렴 바르톨로뮤(William Bartholomew)라는 사람이 티타니아와 사포에 대한 대본을 제공하겠다고 연락했다. 멘델스존은 처음에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가 나중에는 거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멘델스존과 바르톨로뮤의 친분은 계속되었다. 나중에 바르톨로뮤는 멘델스존의 오라토리오 '엘리야, 첫번째 발푸르기스의 밤'(Elijah, Die erster Walpurgisnacht)을 비롯하여 성각곡의 가사를 영어로 번역했다. 멘델스존의 유명한 Hear My Prayer(나의 기도 들으사)는 바르톨로뮤의 요청에 의해서 멘델스존이 작곡한 곡이다. 영국에서는 계속 멘델스존에게 오페라 작곡을 타진했다. 멘델스존와 영국은 멘델스존이 영국을 방문했었고 '스코틀랜드'라든지 '핑갈의 동굴'에 대한 작품을 썼기 때문에 관계가 깊었다. 영국측은 멘델스존에게 '케닐워스'(Kenilworth), '리어 왕', '햄릿'을 오페라로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했고 또 독일의 어떤 극장은 '파우스트'를 요청했다. 하지만 멘델스존은 모두 거절했다. 멘델스존은 처음에는 자기가 유별나서 대본들을 거절하지나 않는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니 자기가 생각했던 주제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멘델스존에게 오페라에 대한 열망을 새롭게 솟아나게 한 사람이 있었다. 스웨덴의 나이팅게일이라고 하는 제니 린드(Jenny Lind)였다. 멘델스존은 제니 린드를 1844년에 만났다. 멘델스존은 제니 린드에게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아서 반드시 제니 린드를 위한 오페라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멘델스존은 새로운 다짐으로 아이디아와 협력자를 구하였다. 멘델스존은 오페라계에 종사하는 여러 사람들에게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대본은 '독일어로서 고상한 내용이어야 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고 희망을 갖게 해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에 덧붙여서 '라인강에 얽힌 전설이면 더욱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멘델스존은 1846년에 드디어 '로렐라이(Lorelei)의 전설'을 선택하였다. 대본가는 에마누엘 가이벨(Emnanuel Geibel)이었다. 멘델스존은 이듬해인 1847년 초부터 '로렐라이'의 작곡을 시작했다. 멘델스존은 대본을 쓰고 있는 가이벨에게 8월까지는 1막을 완성할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멘델스존에게 뜻하지 아니한 비극이 찾아왔다. 가장 사랑하던 누이 홰니가 5월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홰니의 죽음은 멘델스존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때쯤해서 영국의 음악평론가인 헨리 촐리(Henry Chorley)라는 사람이 멘델스존을 방문했다. 셰익스피아의 '겨울이야기'(Winter's Tale)를 오페라로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협의하러 왔다. 그러나 멘델스존은 작곡에 대한 아무런 의욕도 없이 '그저 죽고 싶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멘델스존의 그런 말은 말이 씨가 되었다. 멘델스존은 몇 달 후인 10월에 심장마비 증세를 두번이나 일으켰고 잠시 차도를 보이더니 결국은 11월 4일에 세상을 떠났다.
스웨덴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리는 소프라노 제니 린드. 멘델스존에게 많은 감동을 주어 멘델스존은 제니 린드를 위한 오페라를 작곡하겠다고 다짐하기까지 했다. 그림은 벨리니의 오페라 '몽유병자'에서 아미나를 맡은 제니 린드.
멘델스존은 생애를 통하여 오페라에 대한 집착을 보였지만 아무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왜그랬을까? 간단하다. 멘델스존은 처음부터 '극장인'이 아니었다. 멘델스존은 무대 뒤에서 벌이지는 음모와 질투와 분쟁을 싫어했다. 그는 오만하고 건방진 디바들을 싫어했다. 그는 교활하기만하고 이익만을 추구하는 임프레사리오(흥행가)를 싫어했다. 더구나 젊은 나이에 이들과 대적하여 압도할 힘도 없었다. 그렇지만 멘델스존은 극장적인 본능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이다. 누가 이렇듯 극장적인 음악을 17세의 소년이 작곡했다고 믿겠는가? 누가 이렇게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뛰어난 극음악으로 둔갑시킬수 있다는 말인가? 멘델스존만이 할수 있는 일이었다. 그가 작곡한 아탈리(Athalie), 안티고네(Antigone), 콜로누스의 외디푸스(Oediupus at Colonus) 등의 극음악은 그의 극장적인 재능을 여실히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멘델스존이 오페라와 같은 규모가 큰 보컬 작품을 작곡할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건 해당이 되지 않는 말이다. 그의 오라토리오 '엘리야' 또는 '성 바오로'를 보면 그런 생각을 가질수 없다. 실제로 '엘리야'는 너무나 오페라적 요소가 풍부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출연자들이 의상을 입고 연주한다.
오페라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한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멘델스존은 어릴 때부터 바흐의 후가와 베토벤의 소나타를 강조하는 교육을 받았다. 오페라의 가치에 대하여는 교육은 받지 않았다. 게가다 첫번째로 시도한 오페라인 '카마초의 결혼'이 환영을 받지 못한채 사장되어야 하자 리릭 스테이지를 위한 작품을 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멘델스존은 다른 작품, 예를 들어 교향곡이나 협주곡에서는 놀랄만한 찬사를 받았다. 그래서 첫번째 오페라는 어쩌다가 실패로 돌아갔지만 오랜 기간을 두고 고민하였던 두번째 오페라인 '로렐라이'는 반드시 성공할 것으로 믿고 도전하였지만 불행하게도 개인사정으로 완성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보았고 그가 들었던 1830년대와 1840년대 유럽의 오페라들이 그에게 감동을 주지 못했던 것도 이유였다. 파리에서 본 마이에르베르의 '악마 로베르'(Robert Le Diable)에 대하여 인위적이고 비도덕적이라고 말한 것은 그의 그같은 인식을 잘 표현한 것이었다. 자코모 마이에르베르는 멘델스존의 먼 사촌이었다. 그래서 멘델스존은 '현시대의 오페라라는 것이 이 정도밖에 안된다면 차라리 오라토리오를 쓰겠다'고 말했다.
멘델스존은 오페라에 대한 자기자신만의 기본 원칙이 있다. 그 원칙이라는 것은 그저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또는 예쁜 아가씨가 원한다고 해서 오페라를 작곡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오늘날의 대부분 사람들은 오페라를 그저 인기품목으로만 간주하고 있다. 심지어는 오페라의 가사를 쓰는 시인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라고 덧붙여 말했다. 멘델스존의 엄정한 기준에 따르면 그가 작곡하는 오페라는 높은 예술적 수준에 있어야 하며 당시의 리릭 스테이지와는 달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로 멘델스존은 오페라의 개혁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오페라는 도덕적 당위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멘델스존은 '독일 오페라, 또는 다른 나라의 오페라를 듣다가 보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해진다.'고 말하기도 했다. 자기의 사명이란 것은 새로운 이상적인 독일 오페라를 창조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런것을 이루려다가 결국은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멘델스존가 완성하려 했던 '로렐라이'는 그의 그런 기준에 합당한 것인가? 불행하게도 1막의 일부분만이 완성되어서 무어라고 언급할 입장은 아니다. 멘델스존이 완성한 '로렐라이'의 일부 음악은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으며 1867년에 런던의 수정궁(Crystal Palace)에서 연주되었고 이어 다른 콘서트에서도 일반을 위해 연주되었다. 멘델스존이 완성한 '로렐라이'의 음악 중에는 소프라노를 위한 '아베 마리아'가 있고 여성합창도 있다. 이 음악들이 연주될 때에는 F 내추럴 음을 내는 종소리가 울리도록 했다. '포도주 상인들의 합창'도 있다. 목가적인 스타일이다. 단순한 4부 합창이며 백파이프 음악이 곁들이도록 되어 있다. 가장 공들인 부분은 1막의 피날레이다. 장엄하고 화려하다. 하지만 정신세계를 상징하는 그 무엇이 있는 부분이다. 베버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멘델스존 자신의 '동화음악'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에서는 주인공 로렐라이가 마치 드보르작의 '루살카'에서처럼 사랑을 부인하고 모든 남자에 대하여 복수를 다짐하는 내용이 암시되어 있다. (드보르작의 '루살카'는 '로렐라이'를 시작할 때부터 거의 50년 후에 등장한 음악이다.)
멘델스존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지 않고 더 오래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오페라 '로렐라이'를 완성하였을 것이고 당시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대단한 찬사를 받았을 것이다. 아무튼
멘델스존이 더 오래 살았다면 더 많은 리릭 스테이지(징슈필, 오페라 등)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페라에 대한 그의 개혁정신을 생각해 볼때 분명히 오페라의 역사에서 크게 기록으로 남을 멘델스존표 오페라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카마초의 결혼'의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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