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시컬 뮤직 팟푸리/클래시컬 뮤직 팟푸리

자기의 두개골을 연극 소품으로 기증한 작곡가

정준극 2014. 1. 20. 14:43

안드레 차이코브스키의 해골

오페라 '햄릿'에서 소품으로 사용

 

안드레 차이코브스키의 실물 두개골을 소품으로 사용한 '햄릿' 공연

 

폴란드 출신의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안드레 차이코브스키(Andre Tchaikowsky: 1935-1982)는 특이한 음악인이다. 우선 그의 이름이 차이코브스키인 것부터가 특별하다. 그렇다고 러시아의 위대한 작곡가인 표트르 일리이치 차이코브스키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어쩌다가 보니 차이코브스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원래 그의 이름은 폴란드식으로 Andrzej Czajkowski(안드레이 차이코브스키)였다. 사실 그것도 원래 이름은 아니었다. 진짜 원래 이름은 로베르트 안드레이 크라우트함머(Robert Andrzej Krauthammer)였다. 그는 1935년에 폴란드의 바르사뱌에서 태어났다. 1935년이라고 하면 나치가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던 때였다. 로베르트는 어릴 때부터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났다. 그래서 피아니스트인 어머니로부터 4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그런데 그의 가족들은 유태인이었다. 2차 대전이 터지자 그의 가족들은 나치에 의해 바르샤바의 게토로 옮겨졌다. 로베르트와 가족들은 바르샤바 게토에서 1942년까지 형편없는 생활을 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1942년에 마침내 게토를 몰래 탈출하였다. 로베르트는 안드레이 차이코브스키(Andrzej Czajkowski)라는 이름의 새로운 증명서를 얻었다. 그때부터 안드레이 차이코브스키가 되었다. 로베르트는 식구들과 함께 시골에 있는 할머니 집에서 숨어 지냈다. 그러다가 1944년에 바르샤바 봉기가 일어났다. 로베르트 가족은 체포되어서 이번에는 유태인이 아닌 폴란드 시민으로서 푸르츠코프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1945년 전쟁이 끝나자 석방되었다. 로베르트(안드레이)는 피아니스트로서의 꿈을 접을수 없어서 마치 쇼팽이 파리에 가서 활동했던 것 처럼 파리에 가서 공부를 계속하다가 1950년에 바르샤바로 돌아갔다. 안드레이 차이코브스키의 아버지인 카를 크라우트함머는 전쟁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하지만 어머니는 식구들과 바르샤바 게토에서 헤어져 그후 생사를 몰랐으나 1942년 트레블린카에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아버지는 재혼하였다.

 

오페라 '베니스의 상인'의 한 장면

 

안드레이 차이코브스키는 나중에 그의 이름의 스펠을 Andre Tchaikowsky로 바꾸었다. 1950년에 파리에서 바르샤바로 돌아온 그는 소포트(Sopot)에 있는 국립음악원에서 공부를 계속했고 이어 바르샤바의 국립음악아원으로 자리를 옮겨 공부를 계속했다. 그는 이미 학생시절에 피아니스트로서 콘서트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바흐의 골드버그 변주곡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곡목이었다. 그는 연주 할 때에 쇼맨쉽도 대단하여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누가 어떤 주제를 주던지 그것으로 즉흥곡을 만들어 연주할수 있는 재능이 있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다가 1951년부터는 작곡을 배우기 시작했다. 1955년에는 국제쇼팽피아노경연대회에 참가하여 비록 8위를 차지했지만 심사위원들의 깊은 관심을 끌었다. 이에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바르샤바를 떠나 브뤼셀로 가서 거장 스테판 아스케나지의 문하에 들어갔다. 아스케나지도 폴란드 출신이었다. 그후 1956년에는 퀸엘리자베스 음악경연대회에 참가하여 3등을 차지했다. 1957년, 그는 파리에서 라벨 서거 20주년을 기념하는 연주회에서 라벨의 작품을 연주하여 대찬사를 받았다. 그는 파리에 있으면서 퐁텐블러의 나디아 불랑제르와 작곡에 대하여 협의를 하였으며 러시아의 아르투르 루빈슈타인과도 교분을 가지며 지냈다.

 

영국에 있을 때의 앙드레 차이코브스키

                       

안드레 차이코브스키는 피아니스트로서 이름을 떨쳤으나 정작 그의 최대 관심사는 작곡이었다. 그는 피아노 협주곡, 현악 4중주곡, 피아노 반주에 의한 셰익스피어의 일곱개 소넷 노래, 피아노 트리오, 기타 피아노를 위한 여러 작품을 작곡했다. 그는 어쩐 일인지 셰익스피어를 크게 존경했다. 그래서 '베니스의 상인'을 오페라로 만들 생각을 했다. 베르디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 여러 오페라를 만들었지만 '베니스의 상인'은 안드레 차이코브스키가 유일하다. 그의 이같은 셰익스피어 열중은 나중에 그의 해골을 셰익스피어의 연극에 사용해 달라는 유언으로 또한번 세계의 화제꺼리가 되었다. 안드레 차이코브스키는 대장암으로 46세라는 한창 나이에 영국의 옥스포드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유언으로 자기의 시신을 의학연구를 위해 기증하였으며 그의 두개골은 왕립셰익스피어극단에 기증하였다. 그의 두개골이 무대에서 소품으로 사용되기를 바래서였다. 특히 햄릿의 공연에서 사용되기를 희망했다. 안드레 차이코브스키가 세상을 떠난후 그의 두개골을 가지고 햄릿을 공연하려는 감독이나 배우는 없었다. 당대의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안드레 차이코브스키의 두개골이어서 께름직해서였다. 그러나 리허설에서는 그의 유언을 존중하여서 소품으로 사용된 일이 몇번 있었다. 그러다가 2008년 드디어 스트래포드 어폰 에이본의 코트야드 극장에서 햄릿을 공연할 때에 데이빗 테난트(David Tennant)가 안드레 차이코브스키의 두개골을 소품으로 직접 사용하였다.

 

젊은 시절의 안드레 차이코브스키

 

스트래포드 어폰 에이본에서 햄릿을 공연할 때에 안드레 차이코브스키의 실물 두개골이 소품으로 사용되었다는 뉴스가 신문에 보도되자 그 후에 햄릿을 공연하려던 극장들은 사용하지 않겠다고 나섰다. 다음 공연은 런던의 웨스트 엔드에서 예정되어 있었다.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관중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웨스트 엔드 극장 측의 해명은 사실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안드레 차이코브스키의 두개골을 소품으로 사용하였다. 이어서 BBC2의 방송 때에도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