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오페라 에피소드

나치의 핍박으로 조국을 떠나야 했던 작곡가들

정준극 2014. 4. 9. 07:19

나치의 핍박으로 조국을 떠나야 했던 작곡가들

 

수많은 음악가들이 나치의 핍박을 피해서 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더러는 스위스나 스웨덴 또는 영국과 같은 유럽의 다른 나라로 도피한 음악가들도 있고 더러는 저 멀리 남미로 떠난 경우도 있다. 작곡가, 연주가,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이 나치의 억압에서 자유를 찾기 위해 독일과 오스트리아 또는 과거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해 있던 동구권 국가들을 탈출했다. 대표적인 작곡가 몇 명만 소개한다. 어떤 작곡가들은 전쟁이 끝나자 조국을 잊지 못해서 돌아와 여생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나 조국의 땅에 묻힌 경우도 더러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머나먼 이국에서 세상을 떠나고 그곳에 묻혔다.

 

○ 아놀드 쇤버그(Arnold Schoenberg: 1874-1951)

 

아놀드 쇤버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일 때에 비엔나의 유태인 게토였던 레오폴드슈타트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비엔나 제2구이다. 쇤버그의 아버지는 작은 상점을 경영한 평범한 사람이었다. 쇤버그는 1934년에 나치를 피해서 미국으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17년을 살다가 로스안젤레스에서 향년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분은 1974년에 비엔나로 옮겨왔고 비엔나의 중앙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쇤버그는 미국에서 오래 살았고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가족들은 대부분 미국에 남아 있지만 오스트리아 작곡가로서 기억되고 있다. 쇤버그는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1898년 그가 24세 때에 루터교회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그러다가 1933년에 아마도 그가 경험했던 나치의 반유태주의에 자극을 받아서 기독교인인 것을 과감히 거부하고 유태교 신앙을 재확인하였다.

 

쇤버그는 1901년에 지휘자이며 작곡가인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의 여동생인 마틸데 쳄린스키와 결혼했다.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와는 1894년 이래 함께 공부한 친구였다. 두 사람은 두 자녀를 두었다. 게르트루트(1902-1947)와 게오르그(1906-1974)이다. 그런데 부인 마틸데가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 어린 두 아이를 집에 두고 1908년에 젊은 화가인 리하르트 게르스틀(Richard Gerstl)과 눈이 맞아서 몇 달 동안 가출한 일이 있었다. 그건 그렇고 쇤버그는 1933년에 독일에서 완전히 정권을 잡자 유태인에 대한 핍박과 예술에 대한 억압을 점차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 그해에 쇤버그는 프랑스를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그를 아끼는 사람들이 그에게 독일로 돌아가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한 일이니 그냥 프랑스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고했지만 그럴수는 없었다. 하지만 쇤버그는 이때 파리의 유태교 회당에서 유태교로 다시 돌아오겠다고 선언했다. 그후 그는 BBC의 주선으로 영국에 갈 일이 있었고 간 김에 계속 머물면서 교단에 설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일이 제대로 진척되지 못하여 대신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 갔다가 몇 달후 비엔나로 돌아온 그는 마침내 미국에 가서 살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리하여 1934년에 미국으로 건너갔고 이름도 Schönberg에서 Schoenberg으로 바꾸었다. 왜 그렇게 바꾸었느냐고 묻자 '그것이 미국의 관행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하기야 영어의 알파벳에는 ö가 없기 때문에 쓸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Schoenberg의 발음도 쇤베르크가 아닌 쇤버그라고 불렀다.

 

이스라엘에서 발행한 아르놀드 쇤버그의 오페라 '모세와 아론' 기념 우표

 

쇤버그는 이상하게도 미신적이 요소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13 에 대한 공포심이 컸다. 악마의 숫자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13을 기피하는 성격을 트라이스케이드카포비아(triskaidekaphobia)라고 한다. 쇤버그의 친지들에 의하면 쇤버그는 13 의 배수에 해당하는 해에 세상을 떠난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래서 특히 65세가 되는 1939년을 두려워했다. 65라는 숫자는 13의 5배수가 된다. 그런데 실제로 그 해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러는 중에 쇤버그의 친지들은 그가 76세 생일을 맞이하는 1950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므로 조심하라고 입을 모아 얘기해 주었다. 왜냐하면 67 에서 6+7=13 이 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쇤버그는 무척 놀라기도 했고 두려워하기도 했다. 쇤버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13의 배수가 되는 해만 생각을 했었지 그의 나이의 숫자를 더하여 13이 되는 해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쇤버그는 1951년 7월 13일 금요일에 세상을 떠났다. 쇤버그는 7월 13일 밤 11시 45분에 숨을 멈추었다. 만일 15분만 더 견디었더라면 13일의 금요일을 피할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로부터 며칠후 쇤버그의 시신은 비엔나로 이송되어 중앙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소스에 따르면 쇤버그는 미국에서 화장을 한후 그 유분만을 비엔나로 보내어 1974년 6월 6일에 중앙공동묘지에 묘지를 만들고 안치했다고 한다. 쇤버그가 13을 기피하는 또 한가지 예는 그의 오페라인 Moses und Aron이다. Aron의 이름은 원래 Aaron으로 써야 하지만 이 제목의 알파벳을 모두 더하면 13이 되기 때문에 Aaron에서 A를 빼어내어 합이 12가 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비엔나의 3구 란트슈트라쎄의 차우너가쎄(Zaunergasse) 1-3번지 아르놀드 쇤버그 센터(기념관)

 

○ 파울 힌데미트(Paul Hindemith: 1895-1963)

 

파울 힌데미트는 독일의 하나우(Hanau)에서 1895년에 태어났다. 힌데미트와 나치와의 관계는 상당히 복잡하다. 힌데미트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의 음악이 '퇴폐적'이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그의 초기 오페라에 해당하는 '성 수잔나'(Sancta Susanna)는 지나치게 섹스에 충전되어 있는 것이어서 '퇴폐적'이라고 비난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얼마 후 부터는 나치가 힌데미트의 음악을 공공연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1934년 12월에 나치의 선전상인 요제프 괴벨스는 베를리스포츠궁전에서의 연설에서 힌데미트의 음악을 '무조의 소음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며 공공연히 비난한 것을 보면 알수 있다. 그런데 또 일부 사람들은 힌데미트야 말로 독일적 음악을 현대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 뛰어난 작곡가라며 찬사를 던졌다. 사실 그때 쯤에서 힌데미트는 무조음악과는 거리가 먼 독일 민속음악을 바탕으로 삼은 작품들을 내 놓았다. 그래서 빌헬름 푸르트뱅글러와 같은 지휘자도 힌데미트를 옹호하는 주장을 했다. 힌데미트의 음악을 둘러싼 논란은 1930년대를 거치면서 계속되었다. 어느때는 나치의 의도에 부합하는 음악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또 어느 때는 나치에 반대하는 음악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으로 들어가면서 지지와 옹호의 소리보다는 비난과 반대의 소리가 점점 힘을 얻었다. 힌데미트는 마침내 1938년에 스위스로 이민을 갔다. 물론 그의 부인이 부분적이나마 유태계였다는 것도 독일을 떠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스위스에 있던 힌데미트는 터키 정부의 요청으로 터키의 음악교육 발전을 위한 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 이것도 실은 나치정권의 후원을 받는 것이라고 해서 서방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힌데미트는 1940년에 미국으로 들어갔다. 그는 예일대학교를 중심으로 강의를 하면서 나름대로 작곡 활동을 하였다. 힌데미트가 미국 시민이 된 것은 전쟁이 끝난 후인 1946년이었다. 그러다가 1953년에 유럽으로 돌아와 취리히에서 지내면서 취리히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며 지냈다. 힌데미트는 1963년에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의 어떤 병원에서 췌장염으로 향년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작곡에 몰두하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지휘하는 파울 힌데미트

 

○ 에리히 코른골트(Erich Korngold: 1897-1957)

 

에리히 코른골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브르노(Brno)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브르노는 당시에는 모라비아 지방이었으나 현재는 체코공화국에 속해 있는 지역이다. 1934년에 할리우드에 있는 막스 라인하르트가 코른골트에게 연락해서 미국으로 오라고 말했다.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을 영화로 만드는데 막간음악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이었다. 코른골트와 라인하르트는 과거에 '박쥐'(요한 슈트라우스)와 '아름다운 헬렌'(자크 오펜바흐)의 영화음악을 협력해서 만든 경험이 있다. 코른골트는 그러지 않아도 나치의 기세가 커지고 있고 유태인에 대한 핍박이 눈 앞에 다가오자 두렵고 걱정이 되었는데 미국에서 할 일이 있으니 오라고 하자 두말하지 않고 건너갔다. 코른골트는 그로부터 4년 동안 헐리우드에서 영화음악의 새로운 장을 열면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그리고 다시 비엔나로 돌아왔다. 코른골트는 1938년에 비엔나에서 오페라를 지휘하며 지냈다. 그때 헐리우드의 워너 브라더스로부터 다시 와서 '로빈 후드의 모험'(The Adventures of Robin Hood)의 음악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에롤 플린이 나오는 영화였다. 코른골트는 기꺼이 가겠다고 말하고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가 로스안젤레스에 도착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었다. 오스트리아에 있는 유태인들의 상태는 매우 불안정하고 위태로웠다. 코른골트는 다시 비엔나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중에 코른골트는 '우리는 모두 비엔나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히틀러가 우리를 유태인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발행한 코른골트 기념우표. 오스트리아 작곡가가 아니라 헐리우드 작곡가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코른골트는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다. 1945년은 전쟁이 끝난 해이기도 하지만 코른골트 개인으로서도 중요한 일이 일어났던 해였다. 코른골트의 아버지가 로스안젤레스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코른골트의 아버지는 미국에 온 후로 그저 모든 것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로스안젤레스에 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아들 코른골트가 순수한 음악은 만들지 않고 영화음악이나 만들면서 지내는 것도 못마땅했다. 코른골트의 아버지는 미국에 온 후 얼마되지 않아서 병에 걸려 고생만 했다. 코른골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전쟁이 끝났다. 어느덧 코른골트 자신도 영화음악에 대하여 신물이 날 정도였다. 코른골트는 콘서트 홀이나 무대를 위한 클래시컬 음악을 작곡하고 싶었다. 코른골트는 1946년 이래로 영화음악을 만드는 것을 중단했다. 그가 워너 브라더스를 위해 마지막으로 만든 영화음악은 베트 데이비스가 출연한 '거짓'(Deception)이었다. 그러나 리퍼블릭 픽쳐스가 그에게 바그너의 생애를 그린 영화인 '마법의 불'(Magic Fire: 1955)의 음악을 맡아 달라고 부탁하자 그것마저 거절할수 없어서 맡아했다. 코른골트는 고향이 그리워서 비엔나에 갔다 왔다. 그후 코른골트는 미국에서 콘서트 음악들을 만들면서 지냈다. 바이얼린 협주곡은 그 중의 하나였다. 코른골트는 1957년 11월 29일 할리우드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할리우드의 훠에버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브르노의 에리히 코른골트 생가에 설치되어 있는 기념 명판

 

○ 쿠르트 봐일(Kurt Weil: 1900-1950)

 

쿠르트 봐일은 독일 데싸우(Dessau)의 유태인 구역인 잔트포아슈타트(Sandvorstadt)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태교 회당의 칸토였다. 칸토는 말하자면 회당의 음악책임자이다. 예배 중에 대표로 찬양을 하며 성가대가 있으면 지휘를 맡고 오르간을 연주하는 임무이다. 봐일은 대중들의 인기를 많이 얻었다. 봐일은 소수민족이나 사회소외층에 대한 동정심이 많았다. 그런 그를 나치가 좋아할리가 없었다. 나치는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전에도 봐일을 인기주의자, 불필요한 동정주의자, 그리고 간악한 유태주의자라고 하며 비난했다. 나치는 봐일의 작품들에 대하여도 비난을 쉬지 않았으며 공연이 계획되어 있으면 훼방을 하였다. 특히 1930년의 '마하고니 도시의 흥망'(Aufstieg und Fall der Stadt Mahagonny), 1932년의 '보증'(Die Burgschaft), 그리고 1933년의 '은빛 바다'(Der Silbersee)에 대하여 그러했다. 봐일은 독일을 떠나는 것 이외에 다른 옵션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1933년 3월에 마침내 독일을 탈출했다. 우선은 파리로 갔다. 봐일은 파리에서 브레헤트(Brecht)와 함께 발레 작품인 '일곱가지 큰 죄악'(The Seven Deadly Sins)에 대하여 다시한번 작업을 추진하였다. 봐일은 원래 장 콕토(Jean Cocteau)와 그 작업을 하려고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못해서 취소하고 있었다. 그해 4월 13일에 그의 '서푼짜리 오페라'(The Threepenny Opera)가 브로드웨이에서 초연을 가졌다. 이 오페라/뮤지컬은 여러 의견이 있어서 결국 13회 공연을 마치고 막을 내렸다. 봐일은 자기의 오페라가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에 가고 싶었지만 또 무슨 사정이 있어서 성사가 되지 못하였다. 봐일은 이듬해인 1934년에 교향곡 제2번을 완성했다. 봐일의 마지막 순수 오케스트라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암스테르담에서 연주되었지만 뉴욕에서도 브루노 발터의 지휘로 연주되었다. 봐일은 이때에도 미국에 가려고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서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했다.

 

데싸우의 라이프치거슈트라쎄 59번지 쿠르트 봐일이 태어난 집. 지금은 철거되어 볼수 없다.

 

해가 바뀌어 1935년에 그의 오페라 '암소 왕국'(Der Kuhhandel: A Kingdom for a Cow)이 런던에서 공연예정이었다. 봐일은 이를 계기로 런던으로 갔으며 이어 내친 김에 그해 말에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더구나 미국에서는 뉴욕의 유태인 단체가 이미 뉴욕에 와 있는 프란츠 베르펠(Franz Werfel)에게 성서 드라마인 '영원한 길'(The Eternal Road)을 오페라/오라토리오로 만들어 줄것을 요청하였고 베르펠은 봐일에게 작곡을 의뢰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봐일로서는 더더구나 미국으로 갈 명분이 생겼던 것이다. 이 오페라/오라토리오는 1937년 맨하튼 오페라 하우스에서 처음 공연된 이래 15회라는 성공적인 공연을 가졌다. 봐일과 부인인 가수 겸 배우 로테 레냐는 1935년 9월 10일 뉴욕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호텔 모리츠에서 지냈으나 얼마후 아파트를 구해 정착했다. 봐일은 미국에 와서 독일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말도 거의 하지 않았고 글도 거의 쓰지 않았다. 그만큼 독일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다만,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는 아버지가 읽기 쉽도록 하기 위해 독일어로 썼다. 봐일의 아버지는 나치 치하의 독일을 요행으로 빠져나와 팔레스타인에 정착했다. 봐일은 1950년 4월 3일 뉴욕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독일이 2000년에 발행한 쿠르트 봐일 탄생 1백주년 기념 우표. 캬바레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모습이다.

 

○ 에른스트 크레네크(Ernst Krenek: 1900-1991)

 

크레네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당시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집은 현재 18구 배링의 아르가우어가쎄(Argauergasse) 3번지이다. 크레네크의 아버지는 체코 출신으로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병사였다. 크레네크의 대표작은 재즈의 영향을 받은 오페라인 '조니가 연주하다'(Jonny spielt auf)이다. 주인공인 조니는 흑인 재즈 음악가이다. 오페라에서 조니는 여자만 쫓아다니고 게다가 남의 귀한 바이올린까지 훔치는 파렴치한 인물로 그려져 있다. 독일의 정권을 잡은 나치에게는 크레네크가 불명예스러운 인물이었다. 그러던중 1938년에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였다. 한껏 기세가 오른 나치는 문화정책에 있어서도 순수 아리안 문화를 주창했다. 나치는 자기들의 의중에 맞지 않는 음악을 '퇴폐음악'(Entartete Musik: Degenerate music)이라고 부르고 그런 음악들을 사회에서 추방하는데 열을 올렸다. 그런데 '퇴폐음악'을 추방하자는 나치의 선전 포스터에 크레네크의 '조니가 연주하다'의 그림이 대표로 게재되었다. 제3제국은 크레네크를 유태인 작곡가라고 하며 자주 몰아붙였다. 물론 크레네크는 유태인이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체코인이었다. 그런데도 나치는 크레네크가 미국으로 이민을 갈 때까지 계속 위협하고 비난하며 핍박했다. 1933년 3월 6일, 나치가 선거에서 승리하여 제국의회를 장악한 다음날, 크레네크가 괴테의 연극 '감성의 승리'(Triumph der Empfindsamkeit)를 위해 작곡한 극음악이 만하임 공연에서 취소되었다. 나치의 손길은 비엔나 슈타츠오퍼에도 뻗쳐서 크레네크의 작품을 연주하지 못하도록 했다. 비엔나 슈타츠오퍼는 크레네크의 오페라 '카를 5세'(Karl V)의 초연을 취소했다.

 

크레네크의 '조니가 연주하다'의 스코어 표지. 나치는 흑인을 상당히 혐오하였다. 그런데 독일-오스트리아의 작곡가가 흑인을 주인공으로 삼은 오페라를 재즈의 영향을 받은 음악으로 작곡했으니 싫어할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크레네크는 1938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지냈다. 처음에는 바사르대학에서 강의했고 나중에는 미네소타주 생폴의 햄라인대학교에서 강의했다. 크레네크는 햄라인대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에 그의 제자이며 작곡가인 글레이디스 노르덴스트롬과 결혼했다. 세번째 결혼이었다. 크레네크는 1945년에 전쟁이 끝나자마자 미국 시민이 되었다. 그후 그는 토론토로 건너가서 1950년대 중반에 왕립음악원에서 강의를 했다. 크레네크는 1991년에 캘리포니아주 팜스프링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91세였다. 크레네크는 1966년부터 팜스프링스에서 살았었다. 그의 부인인 글레이디스 노르덴스트롬 여사는 1998년에 비엔나에 '에른스트 크레네크 연구소'를 설립하여 크레네크의 작품을 수집 정리하는 역할을 했다. 이 연구소는 2004년에 비엔나에서 크렘스로 이전하였다. (사족: 크레네크는 알마 쉰들러-말러-베르펠의 딸인 안나와 1922년에 사귄 적이 있다.)

 

비엔나의 18구 배링에 있는 크레네크 생가의 기념명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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