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오페라 에피소드

위대한 작곡가들의 국적 논란

정준극 2014. 4. 8. 10:33

위대한 작곡가들의 국적 논란

저들의 국적은 과연 어느 나라인가?

 

헨델은 독일에서 태어났다. 그러다가 영국으로 귀화하여 영국 시민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헨델이 독일의 작곡가라고 주장한다. 영국은 당연히 헨델이 영국의 작곡가라고 주장한다. 헨델의 묘지도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다. 헨델은 영국을 위해 작곡을 했다. 그만하면 영국의 주장이 타당하다. 다른나라에 가서 세상을 떠났고 그 곳에 묘지가 있다고 해서 그나라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쇼팽은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고 파리의 페레 라셰즈 공동묘지에 묘소가 있지만 쇼팽을 프랑스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쇼팽은 폴란드 사람이다. 자크 오펜바흐는 독일의 쾰른에서 태어났다. 쾰른의 오페라하우스는 오펜바흐 기념극장이다. 오펜바흐는 청년시절에 파리에 와서 활동하다가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펜바흐의 묘소는 파리의 몽마르트 공동묘지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오펜바흐를 독일의 작곡가라고 분류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오펜바흐는 프랑스의 작곡가이다. 자코모 마이에르베르는 독일의 베를린에서 태어났고 베를린에서 자라났다. 그는 청년시절에 이탈리아에 가서 지내면서 이름도 자코모라고 이탈리아 스타일로 바꾸었다. 그후 프랑스에 가서 활동했지만 마이에르베르라는 독일식 이름은 바꾸지 않았다. 마이에르베르를 독일 작곡가라고 분류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이탈리아 작곡가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없다. 마이에르베르는 프랑스 작곡가이다.

 

베토벤은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22세의 청년으로 비엔나에 와서 지내다가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비엔나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비엔나에는 베토벤 기념관이 세개나 있고 베토벤의 이름을 붙인 지명이 여러 개가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오스트리아는 베토벤을 오스트리아의 작곡가라고 강력히 주장하지 않고 있다. 독일이 워낙 강하게 자기들의 작곡가라고 내세우고 있기 때문인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베토벤이라고 하면 독일 작곡가라는 생각을 한다. 비발디는 비엔나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글룩도 비엔나에서 지내다가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독일의 브람스도 비엔나에서 지내다가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생페터스부르크의 교외에 있는 오라니엔바움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생페터스부르크의 마리인스키 극장의 오페라 성악가였다. 당시에 생페터스부르트는 제정러시아의 수도였다. 그는 프랑스에서도 오랫동안 지내다가 미국으로 가서 1945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고 뉴욕에서 향년 88세로 1971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지는 베니스 앞바다의 섬인 산미켈레에 있다. 스트라빈스키를 미국의 작곡가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자료에나 기록상으로 미국인으로 되어 있을 뿐이다.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의 작곡가이다. 로린 마젤은 이탈리아 계통이지만 미국의 작곡가 겸 지휘자이다. 미국에서 태어났고 미국에서 활동했다.

 

자기의 나라가 남의 나라의 영토에 속하는 바람에 다른 나라의 국민으로 태어나고 활동했지만 나중에 자기 나라가 독립을 하자 국적을 회복한 경우도 많이 있다. 과거 오스트리아 제국, 그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에 이 제국에 속해 있던 헝가리, 보헤미아(체코), 모라비아, 실레지아 등에서 태어난 작곡가들이다. 그런가하면 어쩔수 없이 다른 나라의 국적을 취득하고 살아야 했던 작곡가들도 있다. 주로 나치의 박해를 피하여 미국으로 건너간 작곡가들이다. 이런 저런 경우의 유명 작곡가들로서 누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들의 국적은 과연 어느 나라인가?

 

독일의 할레에 있는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의 생가

 

○ 헨델은 영국인이다

 

조지 프리데릭 헨델(George Friderick Handel: 1685-1759)은 독일 마그데부르크 공국의 할레(Halle)에서 태어났다. 헨델의 아버지는 할레에서 이름난 이발사 겸 외과의사였다. 헨델의 아버지의 이름도 조지 헨델이었다. 조지 헨델은 아들 조지 프리드리히 헨델을 63세 때에 얻었다. 대단한 정력의 노인네이다. 헨델은 1710년에 하노바 선제후인 게오르게의 궁정지휘자가 되었다. 그런데 게오르게 공자가 1714년에 대영제국과 아일랜드의 왕인 조지 1세가 되었다. 헨델은 1712년에 이미 영국으로 가서 정착키로 결심했다. 그리고 세상 떠날 때까지 40여년을 영국에서 보냈다. 헨델은 말년에 눈이 잘 보이지가 않아서 무척 고생했다.

 

헨델과 조지 1세

 

○ 베르디는 프랑스 국적으로 태어났다

 

'오페라의 황제'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는 이탈리아 북부 타로 지방의 부세토 인근에 있는 르 론꼴(Le Roncole)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작은 여관집을 경영하지만 주로 마차의 바퀴를 수선하는 사람이었다. 당시에 이탈리아 북부의 부세토와 인근 지역은 프랑스 제1제국의 통치 아래에 있었다. 그러므로 베르디는 정확히 말해서 프랑스 국적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렇지만 그 누가 베르디를 프랑스 사람이라고 말하겠는가? 그렇게 주장했다가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라도 일어날지 모른다. 아무튼 당시 프랑스 제1제국은 이탈리아 북부에 있던 파르마와 피아첸자 공국(Duchy of Parma and Piacenza)을 합병하여 통치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피아첸자(Piacenza)지방은 당시에 타로지방(Department Taro)이라고 불렀다. 르 론꼴은 베르디를 기념하여서 오늘날 론꼴레 베르디라는 지명으로 바뀌었다.

 

론꼴레 베르디의 베르디 생가

 

○ 프란츠 폰 주페는 크로아티아 작곡가이다

 

'경기병 서곡', '시인과 농부' 등으로 유명한 프란츠 폰 주페(Franz von Suppe: 1819-1895)는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스플리트(Split)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당시 스플리트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달마티아 왕국에 속한 지역이었다. 아드리아해의 동쪽 해안에 자리잡고 있는 항구도시로서 고대로부터 무역이 활발하던 곳이었다. 오늘날에는 유럽의 휴가도시로서 유명한 곳이다. 이탈리아어로는 스플라토(Splato)라고 부른다. 주페는 비엔나의 요제프슈타트극장의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초빙을 받아 비엔나에 가서 지휘자 겸 작곡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하였다. 주페는 향년 76세로서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지는 비엔나의 중앙공동묘지(첸트랄프리드호프)에 있다.

 

프란츠 폰 주페의 고향인 아드리아 해안의 스플리트

 

○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오스트리아인이 아니다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Johann Strauss II: 1825-1899)는 결혼 때문에 국적을 바꾸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비엔나에서 태어난 오스트리아 국민이지만 세번째 부인인 아델레와 결혼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국적을 버리고 독일의 작세 코부르크 고타 공국의 시민이 되어 그곳에서 1887년에 아델레와 개신교 결혼식을 올렸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오늘날의 비엔나 7구인 노이바우(Neubau)에서 태어났다. 당시에는 장크트 울리히(St Ulrich)라고 불렀던 마을이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세번 결혼했다. 대단한 인기인이었으므로 여인들이 줄줄 따라다녔을 것이니 이해가 간다. 첫번째 부인은 예티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메조소프라노 헨리에타 트레프즈였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보다 7년 연상이었다. 두 사람은 1862년 8월 27일에 슈테판스돔(성슈테판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37세의 중년이었을 때였다. 그러다가 1878년 59세인 예티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혼자 지낼수가 없어서 예티가 세상을 떠난지 7주 후인 1878년 5월에 릴리라는 애칭의 여배우 안젤리카 디트리히와 결혼했다. 비엔나의 칼스키르헤(칼교회)에서였다. 몇년이 지나자 릴리는 다른 남자에게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결국 릴리는 1882년에 가출을 해서 당시 테아터 안 데어 빈(빈강변극장)의 매니저의 집으로 아예 들어가서 지냈다. 그때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개인 회계사로고용한 유태인 계통의 아델레라는 아주 관찮은 여인과 결혼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비록 가출한 여인이지만 아직 두번째 부인 릴리와 이혼한 상태가 아니어서 결혼이 곤란했다. 가톨릭 국가인 오스트리아에서는 이혼수속이 말처럼 쉽지 않았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아델레와 어서 결혼하여 안정을 되찾고 싶어서 일단 로마 가톨릭에서 개신교(루터교)로 개종을 하고 이어 오스트리아를 떠나 독일 코부르크 공국으로 가서 그곳 시민권을 얻었으며 그로부터 이혼소송을 하여 몇년 후에 이혼판결을 받았다. 그래서 마침내 1887년에 코부르크 공국의 개신교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62세 때였다. 그러므로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공식적으로 오스트리아가 자랑하는 '왈츠의 왕'이 아니라 독일의 코부르크 공국의 국민이다. 하지만 코부르크 공국이 벌써 문을 닫고 독일에 통합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독일 국민으로 인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비엔나의 7구 노이바우에 있었던 요한 슈트라우스의 생가 건물에 붙어 있는 기념 명판. 이 자리에 요한 슈트라우스 아들이 1825년 10월 25일에 태어났던 방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 레이날도 한은 프랑스인이다

 

레이날도 한(Reynaldo Hahn: 1874-1947)은 남미의 베네주엘라 카라카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일계 유태인으로 기업가 겸 발명가였으며 어머니는 스페인 바스크계의 베네주엘라인이었다. 레이날도는 세살 때에 가족을 따라 파리에 와서 살기 시작했다. 레이날도는 파리를 중심으로 작곡활동을 하여 높은 명성을 얻었다. 그러다가 레이날도는 1940년에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자 유태계라는 이유로 강제 추방 당했다. 레이날도는 스위스 등지를 전전하다가 전쟁이 끝난 후인 1945년 가을에 파리오페라의 음악감독으로 초빙을 받아 다시 파리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그로부터 2년 후인 1947년에  뇌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베네주엘라는 레이날도 한을 당연히 베네주엘라 국적으로 간주하고 있고 프랑스는 프랑스대로 그를 프랑스인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프랑스인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파리 페레 라셰즈 공동묘지의 레이날도 한 묘지. 그 옆은 에체나구치아 가족묘

 

○ 지안 카를로 메노티는 미국인이다

 

오페라 '영사' '아말과 밤에 찾아온 손님들' 등으로 유명한 지안 카를로 메노티(Gian Carlo Menotti: 1911-2007)는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이탈리아 계통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태어난 이탈리아 이민 후손이 아니라 이탈리아에서 태어나서 비교적 근세에 미국 시민이 된 사람이다. 그러므로 메노티는 분명히 이탈리아인이 아니라 미국인이다. 그런데 사실상 본인은 미국인이 아니라 이탈리아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메노티는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몇년 전인 1911년에 이탈리아의 스위스 국경지대에 있는 마지오레 호수 근처의 카델리아노 비코나고(Vadegliano-Viconago)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비교적 부유한 커피 무역상인이었다. 저 멀리 남미의 콜럼비아에 커피 농장을 가지고 있으면서 커피를 수입하여 판매했다. 메노티는 어릴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의 사업을 계속하겠다는 어머니의 주장에 따라 남미 콜럼비아에 가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는 메노티의 음악적 재능을 더욱 발전시키고 싶어서 1928년 메노티가 17세 때에 그를 필라델피아의 커티스음악원에 입학하도록 했다. 메노티는 그로부터 미국에서 살았다. 현역에서 은퇴한 메노티는 모나코의 몬테 칼로에 집을 구해서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다가 2007년 형냔 95세로 세상을 떠났다.

 

지안 카를로 메노티의 고향인 이탈리아의 카델리아노 비코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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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제국의 보헤미아 작곡가들]

 

합스부르크의 신성로마제국은 1806년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합스부르크의 마지막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프란시스 2세는 비엔나의 암 호프에서 1806년에 신성로마제국의 막을 내린다고 선언하고 이어 오스트리아 공국을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격상한다고 발표했다. 프란시스 2세는 초대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로서 프란츠 1세(프란시스 1세)라고 불렀다. 그후 1867년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헝가리와의 대타협(Ausgleich)를 통해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명칭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변경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18년 제1차 대전에서 패전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오스트리아가 제국의 시절에 보헤미아 등에서 태어나 활동했던 작곡가들,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되고 나서 오스트리아 이외의 지역에서 활동했던 작곡가들도 사실상 모두 오스트리아 작곡가로 간주해야 하지만 오늘날 보헤미아, 헝가리, 모라비아 등이 모두 독립 국가가 된 상황에서는 이들 국가에 속한 작곡가로 간주함이 당연하다.

그런 의미에서 제국시절에 보헤미아 왕국에서 태어나고 활동했던 대표적인 작곡가들, 그리고 헝가리에서 태어나고 활동했던 대표적인 작곡가들을 소개한다.

 

○ 스메타나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한 보헤미아의 작곡가였다

 

베드리치 스메타나(Bedrich Smetana: 1824-1884)는 프라하 동쪽 끝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국경지대에 있는 리토미슬(Litomysl)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에 보헤미아 왕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한 영토였다. 그렇다고 해서 스메타나는 제국의 다른 영토에 있는 사람들처럼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에 와서 활동하지는 않았다. 오로지 보헤미아의 민족음악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려했다. 스메타나는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 성병(매독)에 걸렸고 그 영향으로 정신질환까지 겹쳐서 60세의 나이로 프라하의 카테린스키 정신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스메타나는 현재의 체코공화국 작곡가이지만 공식적으로는 오스트리아 제국 출신이다.

 

스메타나가 태어난 리토미슬 거리

 

○ 드보르작도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한 보헤미아의 작곡가였다

 

안토닌 드보르작(Antonin Dvorak: 1841-1904)은 프라하 부근 넬라호제베스(Nelahozeves)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한 보헤미아 왕국이었다. 드보르작은 1892년부터 95년까지 3년 동안 미국에서 지낸 일이 있다. 뉴욕국립음악원장으로 초빙을 받아 활동하였다. 프라하로 돌아온 그는 62세 때인 1904년 원인불명의 병마와 5주간이나 싸우다가 세상을 떠났다. 드보르작은 공식적으로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작곡가이지만 누구나 아는대로 체코공화국의 작곡가이다.

 

넬라호제베스에 있는 드보르작의 생가

 

○ 야나체크는 모라비아 출신이다

 

레오스 야나체크(Leos Janacek: 1854-1928)는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이었던 모라비아의 후크발디(Hukvaldy)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 도시의 어떤 초등학교장이었다. 야나체크는 오스트라바(Ostrava)의 독토르 클라인(Dr Klein) 요양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주로 결핵환자들이 치료를 받고 요양하는 곳이었다. 오스트라바는 현재 체코공화국의 모라비아-실레지아 지방에 있으며 체코공화국 제2의 도시이다. 야나체크는 모라비아 출신이지만 공식적으로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야나체크가 태어난 후크발디에 있는 '교활한 작은 암여우' 조각

 

○ 말러는 보헤미아 출신이다

 

구스타브 말러(Gustav Mahler: 1860-1911)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보헤미아 출신이다. 보헤미아의 프라하와 모라비아의 브르노 중간 지점에 있는 칼리슈트(Kalischt: Kaliste)에서 태어났다. 오늘날은 체코공화국에 속한 지역이다. 말러의 아버지는 칼리슈트 마을에 작은 여관을 가지고 있으며 주로 마차 바퀴를 수선하는 일을 했다. 말러는 1875년 15세 때에 비엔나에 와서 비엔나음악원에 입학하였다. 말러는 미국을 방문한 일도 있다. 1908년에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함으로서 메트로폴리탄에 데뷔하였다. 말러는 몇달 동안 뉴욕에 머물다가 비엔나로 돌아왔다. 말러는 51세 때인 1911년에 비엔나의 뢰브 정신요양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칼리스트의 말러가 태어난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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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한 지역이었다]

 

○ 에르켈 페렌츠는 헝가리인이다

 

에르켈 페렌츠(Erkel Ferenc: 1810-1893)는 헝가리 국민오페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헝가리 왕국의 지울라(Gyula)에서 태어났고 부다페스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에르켈 페렌츠는 헝가리가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하여 있을 때에 태어나서 헝가리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바뀐 시대에까지 지켜보며 활동했다. 그렇다고 에르켈 페렌츠를 오스트리아 작곡가라고 보는 사람은 없다. 그는 진정한 헝가리인이었다.

 

에르켈 페렌츠가 태어난 지울라 도시의 한쪽에 있는 에르켈 호텔

 

○ 리스트는 헝가리인인가 오스트리아인인가?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Ferenc Liszt: 1811-1886)는 특별한 경우이다. 리스트는 당시 헝가리 왕국에 속한 소프론 지방의 도보르얀(Doborjan) 마을에서 태어났다. 독일어로는 라이딩(Raiding)이라고 하는 마을이다. 당시에 헝가리 왕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하여 있었다. 리스트는 헝가리 왕국에 속한 도보르얀 마을에서 태어났지만 헝가리어는 거의 하지 못했다. 독일어를 사용하며 자랐다. 그래서 나중에 뮌헨이나 바이로이트에서 지내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 리스트가 태어난 도보르얀, 즉 라이딩은 오스트리아의 부르겐란트(Burgenland)에 속한 지역이 되었다. 그러므로 리스트를 오스트리아 작곡가라고 주장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리스트의 아버지는 에스터하지 가문의 니콜라우스 2세 공자에게 봉사하는 음악가였다. 헝가리의 에스터하지 궁전에서도 지냈지만 오스트리아의 아이젠슈타트에 있는 에스터하지 궁전에서도 지냈다. 그렇다면 프란츠 리스트는 오스트리아와 더 인연이 많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리스트는 74세에 바이로이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결핵이었다.

 

오스트리아 부르겐란트 주의 라이딩에 있는 프란츠 리스트 생가

 

○ 레하르는 슬로바키아인이 아니다

 

오페레타 '메리 위도우'로 유명한 프란츠 레하르(Franz Lehar: 1870-1948)는 헝가리 왕국이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하여 있을 때 헝가리 왕국의 코마롬(Komarom)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슬로바키아의 코마르노(Komarno)이다. 그렇다고 해서 레하르를 슬로바키아 출신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헝가리 보다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레하르는 오스트리아의 잘츠캄머구트에 있는 바드 이슐에서 향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코마롬에서 태어난 그는 1899년에 아버지가 비엔나의 군악대 지휘자였기 때문에 군악대에 들어가서 부자휘자로 활동했다. 이어 1902년에는 비엔나의 테아터 안 데어 빈(빈강변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해에 그의 첫 오페라인 '비엔나 여인들'(Wiener Frauen)이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초연되었다.

 

레하르가 태어난 슬로바키아의 코마르노(코마롬) 시내중심지역

 

○ 바르토크는 루마니아인이 아니다

 

벨라 바르토크(Bela Bartok: 1881-1945)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한 헝가리 왕국의 나지첸트미클로스(Nagyszentmiklos)에서 태어났다. 이 도시는 1920년부터 루마니아에 속하게 되었다. 루마니아에서는 이 도시를 산니콜라우(Sannicolau)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해서 바르토크를 루마니아의 작곡가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바르토크는 59세에 미국으로 건너갔고 64세가 되던 해에 뉴욕의 어떤 병원에서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고 해서 바르토크를 미국의 작곡가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돌이켜보건대 1930년대에 나치가 득세하자 바르토크는 나치에 반대하여 독일에서 연주회를 갖는 것을 거부했으며 그의 저서가 독일에서 출판되는 것도 거부했다. 그렇기 때문에 1차 대전후 별개의 국가로 독립한 헝가리는 파치스트를 반대하는 바르토크에 대하여 상당히 껄그럽게 생각하였다. 바르토크는 1940년이 시작되자 제2차 세계대전에 혐오감을 가지고 헝가리를 떠날 생각을 했다. 바르토크는 그 해에 부인 디타를 데리고 마지못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아들들은 그대로 헝가리에 남았다. 바르토크 부부는 뉴욕에 정착했다. 1942년에 둘째 아들이 뉴욕으로 찾아왔다. 둘째 아들은 미해군에 입대하여서 태평양 전쟁에 참가하였다. 큰 아들인 벨라 바르토크 3세는 헝가리에 남아 있었다. 전쟁에서 살아 남은 그는 철도공무원으로 일했다. 바르토크는 1945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미국 시민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본인 스스로가 미국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지첸트미클로스의 바르토크 벨라의 생가

 

○ 코다이는 헝가리인이다.

 

졸탄 코다이(Zoltan Kodaly: 1882-1967)는 헝가리 왕국의 중부에 있는 케츠케메트(Kecskemet)에서 태어났다. 바츠 키스쿤(Bacs-Kiskun) 지방의 중심 도시이다. 케츠케메트는 부다페스트와 헝가리 제3의 도시인 체데드의 중간 지점에 있다. 졸탄 코다이의 기념상은 이 도시에도 있고 페츠(Pecs)에도 있다. 코다이는 1959년에 부다페스트의 프란츠 리스트 음악원의 교수로 재직할 때에 19세의 여학생 제자인 사롤타 페첼리와 결혼하였다. 코다이가 77세 때의 일이었다. 코다이는 1967년 향년 84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사롤타 페첼리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코다이는 진짜 헝가리 남자가 아닐수 없다.

 

코다이가 태어난 케츠케메트 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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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핍박을 피해 조국을 떠나 미국에 정착한 작곡가들]

 

○ 아놀드 쇤버그(Arnold Schoenberg: 1874-1951) - 비엔나의 레오폴드슈타트에서 출생

○ 파울 힌데미트(Paul Hindemith: 189501963) -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부근의 하나우에서 출생

○ 에리히 코른골트(Erich Korngold: 1897-1957) - 현재 체코공화국의 브르노 출생

○ 쿠르트 봐일(Kurt Weil: 1900-1950) - 독일 봐이마르 공화국 출생. 1935년 미국 이민. 뉴욕에서 별세

○ 에른스트 크레네크(Ernst Krenek: 1900-1991) - 체코계 오스트리아인. 비엔나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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