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오페라 에피소드

민족주의 작곡가

정준극 2014. 4. 11. 10:02

민족주의 작곡가(국민작곡가)

 

19세기는 민족주의에 대한 열정이 높았던 시기였다. 이에 따라 강대국에 의해 속국의 신세에 있던 나라와 민족들은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한 독립을 요구하는 정치적 항쟁을 드높이 펼쳤다.19세기에는 음악에 있어서도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경향이 어느 때보다도 강렬했다. 프란츠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Hungarian Rhapsodies)은 그러한 생각을 품고 있던 각 나라의 작곡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유럽 여러 나라의 작곡가들은 자기들 나라의 스타일을 발전시키기로 결심들을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유럽의 음악은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가 중심적인 필라의 행세를 하며 버티고 있었다. 이들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자는 것이 음악에 있어서의 민족주의 운동이었다. 이를 위해서 각국의 작곡가들은 우선 자기 나라, 자기 민족의 고유한 무곡, 민요, 역사, 전설 등을 작품의 바탕으로 삼았다. 음악에 있어서 민족주의 운동이 특히 활발했던 나라들은 러시아, 보헤미아(현재는 체코공화국의 일부), 헝가리, 폴랜드, 루마니아, 핀랜드, 스페인, 그리고 영국과 신생 미국도 그러한 조류에 합류하였다. 한국은? 안익태 선생이 '한국환상곡'을 작곡한 것은 대표적인 민족주의 운동의 하나였다. 애국가의 주제와 아리랑의 선율이 나오며 우리가락의 장단이 스며있는 작품이다. 일제시대에 만들어졌다. 그나저나 민족주의 작곡가라고 하니까 혹시 압박과 설움에 넘쳐 있는 백성들을 구제하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는 그런 투사형 작곡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정도는 아니고, 다만 음악으로 민족의 정기를 살리고 민족의 전통을 바로 잡자고 노력하는 분들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대표적인 민족주의 작곡가들은 누구인지 살펴보았다.

 

○ 러시아의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odest Mussorgsky: 1839-1881)

 

러시아에서는 '막강한 5인조'(Moguchaya kuchka: The MIghty Five)로 알려진 일단의 작곡가들이 러시아 음악에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입히는 노력을 하였다. 이 다섯 명 중에서 가장 영향력을 끼친 사람은 누가 무어라해도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사코프(Nicolai Rimsky-Korsakov: 1844-1908)와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였다. 무소르그스키는 정규 음악공부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기만의 독특한 하모니에 대한 센스와 오케스트레이션에 의존하였다. 무소르그스키는 보통 사람들의 가식적인 감정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순수하고 정직한 감정을 표현하였다. 그는 여러 작품을 시도하였지만 그 중에서 몇 작품만이 완성했을 뿐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서는 피아노 조곡인 '전람회의 그림'이 있다. 나중에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이 오케스트라를 입혀서 찬란한 곡으로 만들었다. 연가곡인 '죽음의 노래와 춤'도 있다. 그리고 러시아 오페라에서 최고의 걸작인 '보리스 고두노프'(Boris Godunov)가 있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러시아의 위대한 민족시인인 알렉산더 푸쉬킨의 비극에 바탕을 둔 것이다. 짜르 보리스가 권력을 잡은 것과 멸망한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보리스 고두노프'에서 대관식 장면은 무소르그스키의 관현악적 재능을 여실히 볼수 있는 예이다. 대관식이 거행되는 중에 크렘린의 종들이 일제히 울리는 소리를 관현악으로 표현한 것은 장관이다. 그런데 무소르그스키의 대부분 작품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동료인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다시 손을 보았고 일부는 편곡까지 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다만, 무소르그스키의 오리지널 스코어를 보면 러시아적인 거칠고 우직한 면모가 그대로 돋보이고 있다. 그런 점은 무소르그스키의 교향시인 '민둥산에서의 하룻 밤'에서도 찾아 볼수 있다. 유령들이 출몰하는 산정에서 마녀들이 벌이는 연회를 그린 작품이다.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에서 대관식 장면

 

○ 보헤미아의 안토닌 드보르작(Antonin Dvorak: 1841-1904)

 

보헤미아에는 베드리치 스메타나가 있지만 아무래도 안토닌 드보르작이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보헤미아의 민족음악 작곡가라고 말할수 있다. 드보르작은 미국에서도 활동했다. 1892년부터 3년 동안 뉴욕시 내셔널음악원의 음악감독을 맡았었다. 드보르작은 그의 생애 동안에 가능한한 여러 장르의 음악을 작곡했다. 실내악도 많이 작곡했고 교향곡들, 협주곡들도 많이 남겼다. 드보르작의 작품들은 보헤미아 출신의 다른 어느 작곡가들의 작품보다도 표준 레퍼토리가 되어 있다. 드보르작은 보헤미아의 민속 무곡을 자기의 작품에 인용하기를 좋아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두 세트의 슬라브 무곡이다. 원래는 네 손을 위한 피아노곡이었으나 나중에 관현악곡으로 만든 것이다. 슬라브 무곡 중에서 가장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제8번, 작품번호 46이다. 드보르작은 아홉개의 교향곡을 남겼다. 모두들 보헤미아적인 향취가 담겨 있는 것들이다. 교향곡 제9번 E 단조인 '신세계에서'(From the New World)는 드보르작의 대표작이다. 이 교향곡의 3악장은 보헤미아를 생각하게 만드는 악장이다. 교향곡 제7번 D 단조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느낄수 있다.

 

슬라브 댄스

                 

○ 헝가리의 에르켈 페렌츠(Erkel Ferenc: 1810-1893)

 

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인 에르켈 페렌츠는 생전에 7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대부분이 뛰어난 민족주의적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들이다. '방크 반'(Bank ban)과 '후냐디 라츨로'(Hunaydi Laszlo)는 대표적이다. 헝가리의 아름답고도 우수에 넘친, 그러면서도 웅장한 멜로디가 넘쳐 흐르는 작품들이다. 오페라의 주제는 주로 헝가리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그런 에르켈 페렌츠를 헝가리 그랜드 오페라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헝가리에서는 오늘날에도 에르켈 페렌츠의 오페라가 끊임 없이 공연되고 있다. 에르켈 페렌츠는 헝가리 국가인 힘누츠(Himnusz)를 작곡했다. 1844년에 헝가리 국가로 채택되었다. 에르켈은 헝가리의 기울라에서 태어났다. 에르켈의 가족은 대대로 도나우 슈봐비아 주민이었다. 아버지인 요세프는 음악가였다. 어머니는 순수 헝가리인이었다. 에르켈은 오페라 이외에도 피아노 작품과 합창곡들을 작곡했다. 축제 서곡은 대단히 웅장한 작품이다. 에르켈은 엑토르 베를리오즈와 친밀하게 지냈다. 에르켈은 베를리오즈에게 라코치 행진곡을 소개해 주었다. 베를리오즈는 라코치 행진곡을 '파우스트의 겁벌'에 사용하였다. 에르켈은 1853년에 창설된 부다페스트 교향악단을 이끌었다. 그는 또한 1853년까지 헝가리음악원장을 지내면서 피아노 교습도 병행했다. 에르켈은 1884년에 문을 연 헝가리국립오페라의 음악감독을 지냈다.

 

에르켈 페렌츠

 

에르켈은 1839년에 아델 아들러스와 결혼했다. 네 아들은 모두 음악적 재능이 있어서 에르켈의 후기 오페라를 완성하는 일을 도왔다.  기울라(Gyula), 엘레크(Elek), 라츨로(Laszlo), 산도르(Sandor)이다. 에르켈은 국제적으로 알려진 체스 선수였다. 그리고 부다페스트 체스 클럽을 창설했다. 1911년에 문을 연 부다페스트의 또 하나 오페라 극장은 1953년부터 에르켈 극장(Erkel Szinhaz)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헝가리 국립은행은 에르켈 탄생 2백주년을 기념하여 기념 금화와 은화를 발행했다. 에르켈이 남긴 오페라들은 다음과 같다. 바토리 마리아(Batori Maria: 1840), 후냐디 라츨로(Hunyadi Laszlo: 1844), 에르체베트(Erzsebet: 1857), 방크 반(Bank Ban: 1861), 사롤타(Sarolta: 1862), 도차 기외르기(Dozsa Gyorgy: 1867), 브란코비츠 기요르기(Brankovics Gyorgy: 1874). '방크 반'은 헝가리 국가 오페라로 간주되고 있다.

 

헝가리의 민족오페라라고 하는 '방크 반'의 한 장면

 

○ 폴란드의 스타니스와브 모니우츠코(Stanislaw Moniuszko: 1819-1872)

 

스타니스와브 모니우츠코는 폴란드가 정치적으로 격변기에 있을 때에 활동했던 폴란드의 위대한 작곡가이다. 그는 1819년에 민스크 총독령에 속한 우비엘(Ubiel: 오늘날의 벨라루스에 속함)에서 태어났으며 1872년 폴란드 의회(Congress Poland)가 폴란드를 통치할 때에 바르샤바에서 세상을 떠났다. 모니우츠코는 작곡가이며 지휘자였고 음악교사였다. 그는 수많은 대중적인 예술가곡들을 작곡했고 오페라도 상당수 작곡했다. 그의 음악은 애국적인 민속 주제를 표현하는 것이다. 모니우츠코는 폴란드 국민오페라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모니우츠코는 베를린에서 음악공부를 했다. 모니우츠코는 러시아를 여러번 방문했다. 생페터스부르크에서 미하일 글링카와 알렉산더 다르고미츠스키 등을 만나 음악적인 교분을 쌓았다. 당시 러시아의 음악 평론가들은 모니우츠코의 작품을 '찬란하다'면서 찬사를 보냈다. 모니우츠코의 대표적인 오페라는 '할카'(Halka)이다. 1848년 빌니우스에서 모니우츠코 자신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당시 리투아니아의 빌니우스는 폴란드와 연방을 형성하여 하나의 나라였다. '할카'는 가장 민족적인 색채가 강한 작품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바르샤바에서 초연을 가지기까지는 10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정치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모니우츠코의 '할카'의 무대. 비엔나 슈타츠오퍼

 

○ 핀랜드의 장 시벨리우스(Jean Sibelius: 1865-1957)

 

장 시벨리우스(얀 시벨리우스)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핀란드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작곡가이다. 핀란드의 아름다운 산하를 그렸고 핀란드 국민들의 외세에 항거하는 불굴의 정신을 표현한 작품들을 남겼다. 시벨리우스의 명성이 널리 알려진 것은 그의 일곱개의 교향곡,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여러 교향시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또한 가곡과 피아노곡도 상당수를 작곡했다. 다만 가곡이나 피아노 작품들은 국제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접할 기회가 적을 뿐이다. 그의 교향시에는 핀란드의 정취가 물씬 담겨 있다. '핀란디아'는 대표적이다. 애국적인 열정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시벨리우스의 진정한 예술혼은 그의 교향곡들에서 찾아 볼수 있다. 교향곡 5번 작품번호 82번은 핀란드 특유의 멜로디가 감칠 듯이 표현되어 있는 작품이다.

 

장 시벨리우스

 

○ 영국의 랄프 본 윌리엄스(Ralph Vaughan Williams: 1872-1958)

 

헨리 퍼셀(1649-1694)이 세상을 떠난 이후 영국은 그야말로 '음악이 없는 나라'(the land without music)라는 불명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영국은 궁여지책으로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서 유럽의 다른 나라로부터 작곡가들을 수입하여 그들의 작품을 마치 자기들의 작품인양 내세웠다. 헨델, 하이든, 멘델스존은 영국을 위해 훌륭한 음악들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영국 사람들도 자존심은 있었다. 18세기 중반부터 영국의 작곡가들은 수백년간 수면 중이었던 영국의 음악을 구원하기 위해 힘을 모았다. 그 중의 하나가 본 윌리엄스이다. 본 윌리엄스는 영국 토박이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이탈리아에 가서 공부하지 않았다. 다만, 잠시동안 파리에 있으면서 모리스 라벨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 전부이다. 본 윌리엄스는 아홉 편의 교향곡을 남겼다. 그중에서 제2번인 '런던' 교향곡이 가장 유명하다. 영국의 전통적인 음악을 대변하는 작품이다. 그는 영국의 문화적 유산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관심은 튜도 음악으로부터 엘리자베스 시대의 음악에까지 폭이 넓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영국은 그나마 세계적인 작곡가들을 자랑할수 있었다. 에드워드 엘가(1857-1934), 프레데릭 들리우스(1862-1934), 구스타브 홀스트(1874-1934), 그리고 그 이후의 벤자민 브리튼이 그들이다.

 

랄프 본 윌리엄스

 

○ 스페인의 마누엘 데 활라(Manuel de Falla: 1876-1946)

 

스페인이 국민음악의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은 아무래도 이삭 알베니즈(Isaac Albeniz: 1860-1909)의 강림으로부터라고 말할수 있다. 강림이라니? 그러면 그가 그리스도라도 된단 말인가? 하지만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알베니즈의 출현으로 스페인 국민음악이 드디어 긴 기지개를 펴고 깨어났다고 보면 된다. 알베니즈는 스페인의 풍미가 배어 있는 피아노 곡들을 만들었다. 알베니즈의 발자취를 따라서 뛰어난 작곡가들이 등장하였다. 엔리크 그라나도스(Enrique Granados: 1867-1916), 호아킨 로드리고(Joaquin Rodrigo: 1901-1999), 그리고 마누엘 데 활라(Manuel de Falla: 1876-1946)이다. 마누엘 데 활라의 '삼각모자'(El sombrero de tres picos: The Three-Cornered Hat)의 마지막 춤곡은 두말하면 잔소리이지만 스페인 오리진이다. 물론 그라나도스와 로드리고의 음악도 스페인 오리진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지만 특히 데 활라의 음악에서 그것을 금방 느낄수 있다는 것이다. 스페인의 민족주의 작곡가들은 기타를 위한 작품들에 중점을 두었다. 이들의 기타 음악들은 당대의 기타의 명인들인 훌리안 브레암이나 안드레스 세고비아, 그리고 존 윌리엄스 같은 사람들의 명연주를 통해서 백성들의 마음 속을 파고 들게 만들었다. 올레!

 

마누엘 데 활라의 오페라 '짧은 인생' 음반. 빅토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 주연

 

○ 미국의 챨스 아이브스(Charles Ives: 1874-1954)

 

미국이 독립한 시기에는 아무래도 전통이 결여되어 있어서 문화에 있어서도 영국의 영향을 받아야 했다. 음악만 하더라도 영국적인 찬송가와 민요들이 신생 미국에서 그대로 사용되었다. 그후 미국 출신의 음악가들이 유럽으로 건너가서 공부를 하고 유럽의 전통을 미국에 이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미국에 돌아온 그들은 미국적인 음악을 유럽의 음악과 융합하는 시도를 했다. 이른바 미국의 독자적인 스타일은 그렇게 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흑인들의 영가, 블루스, 재즈, 래그타임이 진정한 미국적 고전으로서 등장하였다. 물론 19세기에 스테픈 포스터와 같은 미국의 대중적인 음악을 선도하는 작곡가들이 나타났지만 아무래도 미국이라는 특수한 사회에 부응하여 재즈음악이 가미된 문화가 주도적인 입장을 차지하였다. 최초의 미국적인 작곡가로서는 챨스 아이브스를 거론하지 않을수 없다. 아이브스는 예일에서 음악을 전공했지만 유능한 보험회사원으로 생활을 했다. 그가 작곡을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이후였다. 그는 네개의 교향곡, 다수의 관현악곡, 피아노곡, 실내악곡을 남겼는데 주로 미국적인 찬송가, 민요, 무곡들을 발췌하여 인용하였다. '푸트만의 캠프'(Putman's Camp)라는 작품을 보면 불협화음도 실험적으로 사용하였는데 여기에는 브라스 밴드, 행진곡 조의 가락, 때지난 피아노 곡들이 혼합되어 나온다. 아이브스는 교향곡 3번으로 1947년에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가 1904년에 작곡한 것이었다. 아이브스는 20세기의 진정한 어메리칸 작곡가로서 명성을 얻고 있다.

 

챨스 아이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