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2구 레오폴드슈타트

레오폴드 1세는 누구?

정준극 2014. 10. 6. 05:57

레오폴드 1세는 누구?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레오폴드 1세(1640-1705)

 

비엔나의 제2구인 레오폴드슈타트라는 이름은 17세기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레오폴드 1세를 기념하여서 붙인 지명이다. 현재 레오폴드슈타트는 비엔나에서 유태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돌이켜 보면 유태인들은 어디를 가나 박해를 받으며 살아왔고 이곳의 유태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지역의 유태인들보다 더 많은 상처를 받고 살아왔을지 모른다. 예를 들어 나치 시대에는 레오폴드슈타트의 카르멜리터플라츠(갈멜광장)가 비엔나와 인근의 유태인들을 동구의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집합장소로 이용되었다. 레오폴드 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가톨릭 교회의 옹호자였지만 반면에 유태인들은 박해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므로 유태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의 이름을 유태인들을 가장 열심히 박해하였던 사람을 기념하여서 지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수 없다. 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있을 때 두가지 커다란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비엔나를 침범한 역병(페스트) 때문에 수많은 시민들이 죽어 나갔던 사건이다. 비엔나에서 페스트가 물러난 것을 기념하는 그라벤의 페스트기념탑(페스트조일레)은 레오폴드 1세가 세운 것이다. 또 하나는 터키가 두번째로 비엔나를 포위하고 당장이라도 함락시킬 것 같았던 제2의 비엔나 공성이었다. 결과적으로 터키군은 대패하여 물러갔지만 레오폴드 1세는 하나님이 도와 주시어서 터키군이 퇴각한 것이라고 믿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실은 그것이 레오폴드를 설명하는 전부가 아니다. 레오폴드 1세의 통치 시기는 전쟁으로 얼룩진 시기였다고 말 할 정도로 밤낮 없이 전쟁에 시달렸다. 오토만 제국과의 전쟁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2차 북방 전쟁, 프랑스와의 전쟁, 헝가리와의 전쟁 등이 하루가 멀다하고 벌어졌다. 개인적으로 그는 뛰어난 음악가이기도 했다. 작곡가로서 그는 오라토리오 등 여러 작품을 남겼다. 다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이어서 미안할 따름이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부전자전이라고 했다. 아버지인 페르디난트 3세도 작곡을 하는 군주였다. 레오폴드는 언어에도 재능이 많았다. 라틴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에 능숙하였다. 그런데 프랑스어는 평소에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를 원수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레오폴드는 원래 황제 또는 왕이 될 순번이 아니었다. 둘째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릴 때에는 성직자가 되려고 마음 먹었었다. 그런데 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왕위 계승자가 되었고 결국 오스트리아 대공, 크로아티아 왕, 헝가리 왕, 보헤미아 왕,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타이틀을 가지는 신세가 되었다. 이제 레오폴드 1세가 어떤 배경의 인물인지 살펴보자.

 

레오폴드슈타트는 레오폴드 1세 황제를 기념하여서 붙인 지명이다. 오늘날 비엔나 제2구인 레오폴드슈타트의 야경. 도나우를 건너서 저 멀리 프라터가 보인다.

 

레오폴드 1세의 아버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페르디난트 3세였고 어머니는 스페인의 마리아 안나였다. 레오폴드 1세는 왕위 계승자 영순위였던 형 페르디난트 4세가 세상을 떠나자 불과 14세 때에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그는 우선 1655년에 헝가리 왕으로 선출되었고 이듬해인 1656년에는 보헤미아 왕이 되었으며 1657년에는 크로아티아 왕이 되었고 아울러 그 해에 오스트리아 대공으로서 대관식을 가졌다. 그리고 18세 때인 1658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다. 그는 이 모든 직함을 1705년 65세로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영위했다. 레오폴드 1세의 치하에서는 전쟁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제국의 동쪽에서 오토만 제국과 싸운 전쟁, 그리고 제국의 서쪽에서는 라이발인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싸운 전쟁이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사촌간이었으니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 아무튼 사촌간에 백성들을 고생시키고 국가재정을 어렵게 만들면서까지 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이런 저런 전쟁 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것은 오토만 터키와의 전쟁이었다. 레오폴드 1세는 거의 50년이라는 기간 동안 왕위에 있었지만 그중에서 10년이 넘는 기간을 터키와의 전쟁으로 세월을 보냈으니 잠을 자다가도 터키라는 소리를 들으면 벌떡 일어날 지경이었을 것이다. 터키와의 전쟁은 결국 레오폴드 1세의 승리로 마감되었다. 뛰어난 전략가인 사보이의 오이겐 공자의 공로와 용감한 폴란드 왕 얀(요한) 조비에스키의 기여가 컸었다. 그래서 사보이의 오이겐 공자를 구국의 영웅이라고 부르며 또한 얀 조비에스키도 크게 존경을 받았다. 레오폴드 1세는 터키와의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헝가리 왕국의 거의 전부에 해당하는 영토를 차지할수 있었다. 당시 헝가리 왕국은 1526년 모하츠 전투에서 터키에게 크게 패배하여 터키의 속박 아래에 있었다.

 

1683년 비엔나 전투. 폴란드 왕 얀 조비에스키가 이끄는 구원군과 터키군의 전투. 비엔나를 포위하고 공성을 퍼붓던 터키군은 이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결국 퇴각하였다.

 

프랑스와는 세번에 걸친 전쟁을 치루었다. 덧치 전쟁(Dutch War), 9년 전쟁,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이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레오폴드 1세가 샤를르 2세(1661-1700) 스페인 왕이 세상을 떠나자 막내 아들인 샤를르(나중에 샤를르 6세가 된 사람)를 스페인의 왕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에 생긴 전쟁이다. 레오폴드 1세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첫째 아들이 자기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요셉 1세(재위: 1705-1711)이고 둘째 아들은 두살 때 세상을 떠났으니 언급할 필요가 없으며 셋째 아들이 문제의 샤를르 6세이다. 샤를르 6세는 형인 요셉 1세가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재위: 1711-1740)가 된 사람이다. 그런데 아버지 레오폴드 1세는 스페인의 샤를르 2세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샤를르 6세를 스페인의 왕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여담이지만 레오폴드 1세는 손자가 없고 손녀만 셋을 두었는데 샤를르 6세의 딸들인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안나, 마리아 아말리아이다. 그중에서 큰 손녀가 저 유명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이다. 다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돌아가서, 전쟁의 당사국은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인데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밥먹고 별로 할 일이 없었던지 두 나라의 전쟁에 끼어 들었고 그리하여 마침내 전유럽이 전화에 휩싸이는 듯한 양상으로 발전되었다. 레오폴드 1세는 전쟁의 초기에는 계속 승전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전황이 지지부진해 지는 바람에 여간 힘들었던 것이 아니었다.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은 그렇게 무려 14년이나 끌었다. 문제는 레오폴드 1세가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막을 내린 것은 레오폴드 1세가 세상을 떠난지 9년 후의 일이었다. 싸움은 시작해 놓았지만 마무리를 지은 것은 아들인 요셉 1세의 몫이었다. 오스트리아는 그 전에 있었던 오토만 터키와의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승전가를 부를수 있었지만 스페인과의 전쟁에서는 14년이나 싸웠으면서도 승전도 아니고 그렇다고 패전도 아니기 때문에 승전가를 부르기는 커녕 무어라고 소리칠 입장도 아니었다.

 

레오폴드 1세의 세번째 결혼. 신부는 독일 도나우 강 연안에 있는 작은 공국인 팔츠 노이부르크(Pfalz-Neuburg)의 엘레오노레 공주이다.


레오폴드 1세(이하 레오폴드)는 1640년에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1640년이면 우리나라에서는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의 치세였다. 어린 레오폴드는 미안한 말이지만 생긴 것은 별로인데 머리는 우수한 편이어서 공부하기를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어학에 소질을 보여서 라틴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를 능숙하게 잘 했다. 학교에 들어간 그는 고전, 역사, 문학, 자연과학, 천문학을 공부했고 특히 음악에 조예가 깊어서 작곡도 여러 편이나 했다. 사람들은 레오폴드가 아버지인 페르디난트 3세의 음악적 재능을 닮았다고 말했다. 기왕에 얘기가 나온 김에 페르디난트 3세의 음악적 재능이 어떻길래 그랬는지 소개코자 한다. 그라츠에서 태어난 페르디난트 3세(1608-1657: 이하 페르디난트)는 자타가 공인하는 음악 파트론이었다. 그러면서 작곡도 했다. 페르디난트는 이탈리아의 작곡가인 조반니 발렌티니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페르디난트는 17세기에 가장 뛰어난 키보드 작곡가인 요한 야콥 프로버거(Johann Jakob Froberger)를 궁전에 두고서 함께 음악활동을 했다. 프로버거는 페르디난트가 49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애석해 하며 Lamentation faite sur la mort tres douloureuse de Sa Majeste Imperiale, Ferdinand le troisieme(페르디난트 3세 폐하의 서거를 애통함)이라는 작품을 작곡하여 헌정했다. 이 작품은 프로버거의 모든 작품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한편, 당대의 바이올리니스트인 요한 하인리히 슈멜처(Johann Heinrich Schmelzer)도 페르디난트 3세의 서거를 애도하여서 장송곡을 작곡하여 헌정했다. 페르디난트가 직접 작곡한 작품으로서 오늘날까지 스코어가 남아 있는 것으로는 미사곡, 모테트, 찬송가, 기타 성곡이 있으며 종교음악이 아닌 세속적인 음악도 몇 편이 남아 있다. 페르디난트의 작품은 스승인 발렌티니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스타일과 독특한 테크닉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레오폴드 1세의 아버지인 페르디난트 3세(재위: 1637-1657)

 

레오폴드는 아버지 페르디난트와 마찬가지로 음악의 후원자였으며 작곡에도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는 비엔나 궁전을 음악이 넘치는 궁전으로 만들기 위해 외국으로부터 유명한 연주가나 작곡가들을 초빙하였고 그들을 지원하였다. 레오폴드의 초청으로 비엔나 궁전에 와서 활동했던 작곡가로서는 안토니오 베르탈리(Antonio Bertali), 조반니 보노치니(Giovanni Bonocini), 요한 카스파르 케릴(Johann Kaspar Keril), 페르디난트 토비아스 리히터(Ferdinand Tobias Richter), 알레산드로 폴리에티(Alessandro Poglieti), 요한 푹스(Johann Fux) 등이다. 작곡가로서 레오폴드의 작품들은 대체로 안토니오 베르탈리의 양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오라토리오와 기타 무대작품들은 비엔나 작곡가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발레와 독일 코미디(징슈필 스타일)는 요한 하인리히 슈멜처(Johann Heinrich Schmelzer)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레오폴드가 남긴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아무래도 종교음악일 것이다. 원래 신앙심이 깊었던 사람인지라 종교음악에 매진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수 있다. 종교음악 중에서 오늘날까지 알려진 작품은 그가 그의 첫번째 부인을 위해 작곡한 진혼곡으로 Missa angeli custodis라는 제목이다. 세곡의 성경봉독 노래(Three Lections)는 그의 두번째 부인의 장례식 때 하관식을 위해 작곡한 것이다. 그는 이밖에도 무용조곡들을 작곡했다.  레오폴드의 작품들 중에서 대부분은 아버지인 페르디나트의 작품들과 함께 출판되었다. 악보집에는 '매우 우수한 작품들'(works of exceeding high merit)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다시 레오폴드로 돌아가서, 그는 장자가 아니기 때문에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어서 어릴 때부터 성직자 또는 교회와 관련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 사실상 레오폴드는 종교 교육도 상당히 받았다. 그러나 운명의 수레바퀴는 방향을 바꾸어서 그에게 군왕으로서의 길을 걷도록 했다. 레오폴드는 14세 때인 1654년에 형인 페르디난트가 성홍열에 걸려 저 세상 사람이 되는 바람에 자동적으로 차기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레오폴드는 왕위 계승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회로부터 종교 교육을 계속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신학뿐만 아니라 철학, 법학, 자연과학에서도 뛰어난 학식을 쌓았다. 또한 천문학과 연금술학에 대하여도 조예가 깊었다. 아마 합스부르크의 역대 군왕 중에서 레오폴드만큼 신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에 대하여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아무리 군왕이라고 해도 교회로 보면 하나의 신도에 불과하다는 개념을 주장했다. 그러나 너무 신앙적이며 너무 많은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이 약점이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다른 종교집단과 타협할 줄을 몰랐다. 오로지 기독교로서는 로마 가톨릭뿐이었다. 그래서 유태인들을 박해 했고 개신교를 억압했는지도 모른다. 대제국의 황제로서는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었다. 레오폴드가 유태인과 개신교인들을 핍박한 것은 아마도 그가 예수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설명이다. 예수회는 로마 교황청이 비엔나의 반종교개혁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한 단체이다. 레오폴드는 그런 종교적인 배타성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관찮은 사람이었다. 그는 대단히 부지런했고 또한 앞에서도 설명 했듯이 대단히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군대생활은 경험하지 못했지만 군인처럼 절도 있는 생활을 하려고 노력했고 운동에도 관심이 있어서 시간만 있으면 사냥과 승마를 즐겼다. 그는 키는 작았지만 대단히 건강했다.

 

레오폴드슈타트의 템펠가쎄에 있었던 레오폴드 템펠(시나고그). 1938년 11월의 크리스탈나하트 때에 나치 추종자들에 의해 파괴되었고 지금은 다른 건물이 들어섰다. 유태인들은 이처럼 레오폴드슈타트에서 번영하며 지냈지만 그것도 한 때였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람들은 신체적으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모습이다. 대체로 키가 작았고 말랐으며 얼굴엔 무슨 연유인지 병색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아랫 입술이 비정상적으로 두터웠고 턱도 대단한 주걱턱이었다. 그런 입술을 '합스부르크 입술'(Habsburg lip)이라고 불렀고 그런 턱을 '합스부르크 턱'(Habsburg jaw: Prognathism 또는 Habsburg chin)이라고 불렀다. 합스부르크 가문 중에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여튼 얼굴 모습이 기형에 가깝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것은 이들이 근친결혼을 밥먹듯이 해서 그렇다는 설명이다. 레오폴드야 말로 전형적인 합스부르크의 비정상적인 모습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랫 입술이 비정상적으로 두터웠고 턱이 대단히 길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중에 그를 '멧돼지입'(Hogmouth)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는 키가 작고 말랐으며 성격이 차가운데다가 사교적이지 못해서 대중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 주위에 맴돌고 있는 몇몇 사람들과는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레오폴드의 성격이 내성적이고 무슨 일이나 심사숙고하는 타입인 것은 아마도 그가 지나치게 종교적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는 설명도 있다. 위에 있는 그의 초상화를 보면 즉각적으로 '합스부르크 턱'과 '합스부르크 입술'이 어떤 것인지 알수 있다. 그런데 레오폴드의 아버지인 페르디난트 3세도 거의 같은 모습이다. 피는 속이지 못하는 모양이다.

 

1657년에는 아버지인 페르디난트 3세가 세상을 떠났다. 레오폴드는 그로부터 1년 후인 1658년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다. 합스부르크의 레오폴드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될 때에 가장 반대를 한 사람은 프랑스의 마자랭 추기경이었다. 마자랭은 프랑스의 장관으로서 프랑스를 대표하여 선거회의에 참석했다. 프랑스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왕관을 바바리아 선제후인 페르디난트 마리아에게 씌어주고 싶어했다. 합스부르크는 이제 그만 하고 합스부르크 이외의 사람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프랑스가 그렇게 나오자 레오폴드 측으로서는 프랑스와 타협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프랑스는 독일 여러나라에 여러가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독일 국가들의 연맹인 라인연맹(League of the Rhine)은 합스부르크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그래서 라인연맹이 힘을 써서 프랑스를 무마하여 레오폴드가 겨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선출될 수 있었다. 새로 황제로 선출된 레오폴드는 프랑스의 눈치를 보기 위해 당시 프랑스와 전쟁 중에 있는 스페인을 돕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스페인도 합스부르크에 속하였는데 그 스페인을 돕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레오폴드는 프랑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스페인을 돕지 않겠다고 했지만 마음 속에는 프랑스에 대한 적개심이 은연중에 피어 올랐다. 아무튼 그로부터 47년 동안 합스부르크는 프랑스의 군주들과 라이발로서 투쟁을 해야 했다. 그 중심에는 합스부르크의 레오폴드 1세와 부르봉의 루이 14세가 있었다. 그런데 레오폴드는 마음이 강하지 못하고 오히려 수줍어 하는 성격이었지만 루이 14세는 앞에 나서기를 좋아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배해야 만족하는 습성이었다. 그래서 레오폴드는 루이 14세의 그늘 밑에서 본의 아니게 피해를 보고 있었다. 레오폴드는 루이 14세 처럼 군대를 직접 앞장 서서 인솔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찬찬한 성격으로서 후방에서 전쟁을 위한 지원을 충실히 하여 그나마 전쟁이 무난히 치루어지도록 했다.

 

레오폴드 1세와 평생 라이발이었던 프랑스의 루이 14세

 

이제 시간이 좀 있으므로 레오폴드의 재위 기간 중에 벌어졌던 세개의 큰 전쟁에 대하여 좀 더 설명코자 한다. 첫째는 북방 전쟁(Northern War)이다. 실은 제2차 북방 전쟁이라고 불리는 전쟁이다. 1655년부터 1660년까지 거의 5년간 일어났던 전쟁이다. 1655년이면 레오폴드가 왕세자이며 부왕인 페르디난트 3세는 아직 생존하여 있을 때였고 다만 15세의 어린 나이에 레오폴드가 헝가리 왕으로 선출되었던 해였다. 스웨덴의 샤를르 10세 왕이 폴란드 왕까지 겸하고 싶어했다. 샤를르 10세는 트란실바니아 공자인 기외르기 라코치 2세를 포함한 몇 몇 동맹국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레오폴드의 부왕인 페르디난트 3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폴란드의 얀 카시미르 바사 2세와 동맹관계에 있었다. 레오폴드는 혹시나 있을 스웨덴 동맹군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서 폴란드 군에 오스트리아 군을 포함하도록 했다. 단, 그렇게 합류한 오스트리아 군의 급료는 폴란드가 내도록 했다. 그리하여 폴란드-오스트리아 합동군은 트란실바니아 군을 물리치고 스웨덴을 격파하여 저 멀리 덴마크까지 쫓아냈다. 전쟁은 1660년 올리바(Oliwa) 협정으로서 마무리 되었다. 올리바는 폴란드의 그단스크에 속한 지역이다.


북방전쟁을 마무리하는 올리바평화협정이 체결횐 폴란드 그단스크의 올리바 궁전 

 

그 다음이 오토만 제국과의 전쟁이었다. 오토만 제국의 대군은 1863년에 비엔나를 공략하였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트란실바니아 문제에 간섭하고 군사력으로 합스부르크를 위협을 하였다. 이에 신성로마제국으로서는 가만히 앉아만 있을수 없어서 오토만 제국과 대결하였다. 오토만제국과 신성로마제국간의 전쟁다운 전쟁은 1663년부터 시작되었다. 레오폴드는 신성로마제국의 레겐스부르크 의회에 참석해서 여러 나라의 군주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프랑스도 군대를 파견했다. 1664년 여름에 신성로마제국의 라이몬도 몬테쿠콜리(Raimondo Montecuccoli)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이 세인트 고타르드에서 오토만 터키 군을 크게 격파했다. 이로써 레오폴드는 오토만 터키의 술탄과 향후 20년간 휴전을 보장하는 바스바르 평화협정(Peace of Vasvar)이 체결되었다. 바스바르는 헝가리에 속한 지역이었다.

 

바스바르 협정 체결 장면


한동안 평화가 유지되는가 싶었는데 프랑스와 전쟁을 하지 않을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프랑스와는 모두 세번에 걸친 전쟁이 있었다. 첫번째 전쟁은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덧치 공화국(Dutch Republic)을 공격하는 바람에 벌어졌다. 루이 14세는 상당히 적극적이고 호전적이어서 프랑스 북부의 덧치 공화국을 수중에 넣고 싶어했다. 일단 프랑스가 군대를 보내어 더치 공화국을 침공하자 유럽 전체가 긴장하게 되었다. 일부 나라들은 프랑스가 자기 나라를 침공할지도 모른다고 믿어서 그에 대비하는 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런 중에도 프랑스는 우선 독일내의 몇몇 군주들을 설득하여 동맹을 맺고자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저 멀리 서쪽에서 호시탐탐 서유럽 침공을 노리고 있는 오토만 터키를 부추켜서 우선 껄끄러운 상대인 오스트리아부터 공략하도록 공작을 꾸몄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레오폴드는 사실상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덤덤하게 있었다. 레오폴드는 프랑스의 루이와 친분이 깊다고 생각해서 설마 루이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자기에게 창을 내밀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더구나 스페인을 서로 나누어서 통치하자는 얘기까지 나눈 터였다. 그리고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평화를 위해서 1671년에는 서유럽에서 전쟁이 나면 서로 중립을 지키기로 한다는 조약까지 맺은바 있다.

 

그런데 그 모든 우호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루이 14세가 덧치 공화국을 공격한 것이다. 레오폴드는 1672년에 신성로마제국을 보호하기 위해, 구체적으로는 덧치 공화국을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에 대항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수 없었다. 우선 그는 독일내 각 나라의 군주들과 덧치 동맹을 맺었다. 그런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레오폴드의 동맹을 배신했다. 브란덴부르크는 레오폴드의 동맹과는 달리 별도의 동맹을 만들었다. 레오폴드 동맹보다 더 오래 계속될수 있고 더 유대가 강화되는 새로운 동맹이었다. 독일의 영향력있는 몇 몇 군주들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주도하는 동맹에 참여했으며 심지어 스페인의 왕까지 가담했다. 따라서 프랑스와 덧치 공화국의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지 않을수 없었다. 신성로마제국은 말이 제국이지 실은 각각의 나라들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그리고 각각의 군주들은 전보다 더욱 독자적인 입장을 견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고 해도 이들을 규합하여 전쟁을 치루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국에 속한 어떤 국가는 심지어 프랑스의 편에 서서 덧치 공화국과 싸우고자 했으며 또 일부 국가들은 어떤 편에 서는 것이 더 유리한지 저울질 하며 미지근한 태도로서 중립을 지켰다. 프랑스와 덧치 공화국의 전쟁은 1678년에 가서야 겨우 창검을 내려 놓는 것이 되었다. 전쟁을 마무리 짓는 니메겐 조약(Treaty of Nijmegen)은 프랑스에게 유리한 것이었다.


니메겐 조약. 1678-79

 

니메겐 조약이 맺어진지 얼마 후 프랑스는 가만히 있으려니까 좀이 쑤셔서 그런지 이번에는 독일 국경지대를 침공하였다. 루이 14세의 주장에 의하면 현재는 비록 독일 국경 안에 있지만 원래 프랑스에 기울어져 있는 나라들을 재연합 토록 한다는 것이었다. 프랑스와의 평화는 겨우 4년 정도 유지되었다. 그후에 유럽은 또 다시 전화에 휩싸이게 되었다.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이었다. 스페인의 샤를르 2세는 합스부르크의 일원이었다. 게다가 합스부르크 계열의 여자와 결혼하였다. 그런데 샤를르 2세는 프랑스 왕조와도 인척관계에 있었다. 그러니 그가 무자식으로 세상을 떠나자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와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가 서로 연고권을 주장하고 스페인의 다음 왕위는 자기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전에 심약한 성격의 샤를르 2세는 가장 평화적인 방법으로서 스페인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합스부르크가 통치하고 다른 하나는 부르봉이 통치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페인은 영토가 넓기 때문에 둘 아니라 셋으로 나누어도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샤를르 2세가 1700년에 세상을 떠났다. 문제는 샤를르 2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유언으로 스페인의 왕관을 당주 공작(Duc d'Anjou)인 프랑스의 필립에게 넘겨 주었다. 왕위 계승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의도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당장 프랑스에 반대하는 동맹이 생겼다.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왕인 오렌지 공 윌렴 3세가 주도한 '대동맹'(Grand Alliance)이었다. 물론 레오폴드 1세는 이 동맹의 핵심 멤버로 가담했다. 그리하여 1703년 레오폴드 1세는 자기의 아들인 샤를르(나중에 샤를르 6세)에게 스페인의 왕관이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쟁은 초기에는 프랑스에게 유리했다. 그러나 블렌하임 전투에서 동맹군이 대승을 거두어 전세가 역전되었다. 레오폴드 1세는 1705년 5월에 세상을 떠났다.

 

샤를르 6세 기마상. 상아제품. 비엔나 미술사박물관 소장. 마티아스 슈타이늘 제작


레오폴드 1세는 재위 동안에 여러번의 전쟁을 경험하였지만 제국의 내부적인 문제로도 상당한 시련을 겪었다. 헝가리가 가장 골치 아픈 문제였다. 헝가리는 합스부르크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번 항쟁을 벌였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항쟁은 레오폴드가 헝가리의 개신교를 분쇄하려고 하자 발생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합스부르크 세력을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에서 축출하려는 비밀 쿠테타였다. 독실한 가톨릭인 레오폴드는 헝가리에서 종교개혁의 여파로 개신교가 확산되자 이러면 안되겠다고 생각하여서 군대를 보내어 개신교를 분쇄코자 했다. 이로 인하여 헝가리에서의 개신교는 커다란 타격을 받았지만 마찬가지로 레오폴드의 통치에도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세력을 몰아내려는 쿠테타 시도는 레오폴드가 1664년에 오토만 터키와 맺은 바스바르평화협정이 헝가리에게 대단히 불평등하게 만들어 진 것이라고 하여 일어난 일종의 봉기이다. 이 쿠테타는 레오폴드에게는 다행스럽게 사전에 발각되어 진압되었다. 이를 '귀족들의 음모'(Magnate Conspiracy)라고 부른다. 아무튼 합스부르크는 헝가리에서 봉기가 일어날 때마다 군대를 동원하여 강압적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1671년에 또 다른 봉기가 일어났다. 합스부르크는 봉기가 일어날 때마다 지나치게 강압적으로 진압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상당한 온건정책으로 대처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헝가리인들의 합스부르크에 대한 저항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옆에서 헝가리의 봉기를 지켜보았고 그때마다 합스부르크가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것을 바라본 오토만 터키의 술탄은 이참에 헝가리를 지원해서 과거에 합스부르크로부터 받은 수모를 갚아보려고 했다. 그래서 1683년 초에 그동안 은인자중하던 군대를 오스트리아에 대규모로 투입하였다. 술탄 술라이만이 친히 이끈 터키군은 헝가리의 평원을 거쳐 그야말로 무풍지대를 달리는 것처럼 오스트리아로 진격하였다. 터키군은 그해 7월부터 9월까지 비엔나를 포위하고 비엔나를 함락시킬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다. 겁에 질린 레오폴드는 가족들을 데리고 파사우로 피난의 길을 떠났다. 이것이 저 유명한 1683년의 제2차 비엔나 공성이다.


오토만 터키의 2차 비엔나 공

 

독일의 제후들은 오토만 터키가 침공해 왔다고 하자 그러다가 물러 가겠지라고 태평하게 생각하고 있다가 비엔나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봉착하자 그제서야 이거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지원군을 편성하여 비엔나로 향하였다. 대표적으로 작소니와 바바리아의 선제후가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들 연합군을 지휘한 사람은 다름 아니라 레오폴드의 처남인 로레인의 공작 샤를르였다. 그보다도 레오폴드를 가장 든든하게 지원해 준 사람은 폴란드 왕 얀 조비에스키였다. 조비에스키라고 하면 터키군이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하던 사람이었다. 그 다음의 얘기는 본 블로그의 '비엔나와 터키'편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코자 한다. 결론만 말한다면 조비에스키의 폴란드 기병대와 로레인의 샤를르가 이끄는 연합군이 터키군을 기습하여 대승을 거두고 터키군을 오스트리아에서 쫓아 냈다.

 

앞에서 레오폴드가 헝가리의 백성들을 가차없이 억압했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는 폴란드에서도 무자비한 행동을 해서 비난을 받았다. 터키의 제2차 비엔나 공성이 있기 전의 일이다. 레오폴드는 1679년에 보헤미아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레오폴드는 보헤미아의 왕이기도 했다. 보헤미아의 백성들은 왕이 온다고 하자 이런 저런 사항들을 해결해 달라는 청원서를 산더미처럼 제출하였다. 주로 농민들이 청원서를 냈다. 레오폴드는 농민들이 자기를 우습게 여긴다고 생각했다. 레오폴드가 떠나자 보헤미아 당국은 청원서를 냈던 농민들을 모두 체포하고 감옥에 가두었다. 그런 사실이 알려지자 다른 농민들이 분개하여서 집단으로 봉기하였다. 그러자 당국은 약 100명에 이르는 봉기의 주도자들을 체포하여 모두 처형했다. 나중에 레오폴드는 농민들을 너무 지나치게 박해 했다고 생각하여 미안한 마음에 프로그마티카(Progmatica: 국사조치)를 발표하고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를 재정리하였다. 

 

그라벤 거리의 페스트조일레


너무 전쟁 이야기만 해서 미안한 심정이어서 이번에는 본 카테고리의 제목인 레오폴드와 유태인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자 한다. 레오폴드는 독실한 가톨릭으로서 유태인을 상당히 증오하였다. 그는 유태인들이 자기의 영역에 살고 있는 것이 못마땅했다. 특히 당시에는 임 베르트(Im Werd)라고 불렀고 지금은 비엔나의 제2구인 레오폴드슈타트에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임 베르트에서 유태인들을 모두 내쫓았다. 유태인들이 눈물을 머금고 서러운 심정으로 임 베르트를 떠나자 그곳에 살고 있던 오스트리아 주민들은 레오폴드가 훌륭한 일을 했다고 찬양하고 임 베르트를 레오폴드슈타트라고 변경했다. 그런데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 중에서 일부는 레오폴드가 추방한 유태인들을 오히려 받아주었다. 특히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인 프레데릭 빌헬름 1세는 임 베르트에서 추방 당한 50여 유태인 가족을 보살펴 주었다. 그리고는 레오폴드가 죽은 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다시 선출하게 되면 그때에는 합스부르크가 고생 좀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조치를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군주들도 있었으니 레오폴드로서는 속이 상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선제후에게 무어라고 말할 처지도 못되었다.

 

그라벤의 페스트조일레 중간 부분에 있는 감사기도하는 레오폴드 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