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와 리소르지멘토
로시니와 벨리니도 오페라로서 이탈리아의 통일을 염원
이탈리아어의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는 부활 또는 재생이라는 뜻의 단어이지만 이탈리아에서는 일반적으로 19세기의 이탈리아 국가통일 운동을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1820년경 카르브나리당의 활동을 시작으로 1870년 경에 마무리된 국가통일 운동을 말한다. 오페라의 황제 주세페 베르디는 그의 오페라를 통해서 조국 이탈리아의 리소르지멘토 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후원했다. 대표적인 작품이 '나부코'이다. 오페라 '나부코'의 3막에는 Va, pensiero(바, 펜시에로: 날아라, 상념이여)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일명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나온다. 바벨론에 노예로 잡혀온 히브리 백성들이 바벨론의 강가에서 고국을 생각하며 부르는 노래이다. 가사의 내용 중에는 O mia patria, si bella e perduta(오 나의 조국이여,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그러나 빼앗겼도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탈리아의 통일을 염원하여 리소르지멘토 운동을 펼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구절은 그들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 주는 것이었다. '나부코'가 나온 이후 이탈리아의 모든 사람들은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함께 부르며 조국 통일의 그날을 열망하였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마치 이탈리아 통일 운동을 위한 상징적인 노래가 되었고 나아가 통일 후에는 제2의 이탈리아 국가처럼 불려지게 되었다.
'나부코'에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장면
오페라 '나부코'는 1842년 3월 9일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초연되었다. 베르디가 29세의 청년 때였다. 베르디는 이미 그때부터 이탈리아의 통일에 대한 염원을 가슴에 묻고 있었다. 사실 베르디에게는 그만한 사연이 있었다. 베르디는 이탈리아의 북부 롬바르디 지방의 르 론콜레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때에 러시아 군인들이 마을을 쳐들어와서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였다. 이때 베르디의 어머니는 아직도 아기인 베르디를 데리고 마을 교회의 종탑에 올라가 숨어 있었다. 그래서 다행히 비극적인 참화를 면할수 있었다. 그러한 경험이 있는지라 베르디는 어린 시절부터 이탈리아가 외세에 의해 억압 당하고 있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베르디는 '나부코'를 작곡하게 되자 조국에 대한 히브리 노예들의 염원을 이탈리아 국민들의 염원으로 표현했다. '나부코'는 이탈리아 국민들의 심정과 맞물려서 큰 환영을 받았다. '나부코'는 베르디의 첫번째 성공작 오페라였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났다. 베르디는 '가면무도회'를 완성하고 당국의 공연허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그때 베르디는 대단한 저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오스트리아제국이 북부 이탈리아를 통치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제국은 신하가 국왕을 암살하는 내용의 '가면무도회'를 불온하다고 하여 공연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감히 당국이 위대하신 베르디 선생의 작품을 공연금지한 처사에 대하여 항의하였다. 사람들은 거리마다 VIVA VERDI(베르디 만세)라는 포스터를 붙이고 '비바 베르디'라는 구호를 연호하며 시위했다. 잘 아는대로 '비바 베르디'라는 구호는 애국주의자인 베르디를 찬양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실은 당시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빅토르 에마누엘 2세를 찬양하는 말을 줄여서 부른 것이다. 즉, VIVA VERD를 풀이하면 Viva Vittorio Emanuele Re D'Italia(만세 이탈리아의 왕 빅토르 에마누엘)가 된다. 이탈리아 통일에 대한 염원을 베르디를 통해서 분출코자 했던 것이다. 이처럼 이탈리아 통일에 대한 베르디의 직접 간접적인 관여는 지대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가면무도회'가 나온 때로부터 몇 년 후인 1861년에는 마침내 이탈리아가 독립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이탈리아의 국가는 일찍이 리조르지멘토 운동이 한창이던 때인 1847년에 고프레도 마멜리(Goffredo Mameli)가 작사하고 미켈레 노바로(Michele Novato)가 작곡한 Il Canto degli Italiani(이탈리아의 노래)를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6년에 국가로 채택한 것이다. (Canto)라는 단어는 노래라고 하기 보다는 찬가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가사를 쓴 마멜리는 1827년에 제노아에서 태어난 공화주의자였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과 싸우기 위해 가리발디 장군의 부대에 들어갔다. 당시 프랑스는 로마에 수립된 가톨릭 국가를 지지하고 있었다. 마멜리는 오늘날 이탈리아 국가의 가사인 애국적인 시를 쓰고 나서 2년후에 세상을 떠났다.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해서였다. 그가 22세의 청년때였다. 마멜리의 시와 죽음은 이탈리아 통일을 염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명을 주었고 리조르지멘토를 앞 당기게 했다.
이탈리아의 애국자이며 시인인 고프레도 마멜리. 22세의 젊은 나이에 전투에서의 부상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탈리아 국가의 가사를 썼다.
고프레도 마멜리의 애국시를 소개한다.
Fratelli d'Italia, (이탈리아의 형제들이여)
L'Italia s'è desta; (이탈리아는 깨어났도다)
Dell'elmo di Scipio (스키피오의 투구를)
S'è cinta la testa. (머리에 썼도다)
Dov'è la Vittoria? (빅토리아는 어디에 있는가?) 1)
Le porga la chioma; (그에게 머리칼을 바치노라) 2)
Ché schiava di Roma (로마의 노예들은)
Iddio la creò. (신이 창조했기 때문이로다)
(후렴)
Stringiamci a coorte! (우리 모두 합하자)
Siam pronti alla morte;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도다)
Italia chiamò. (이탈리아가 부르도다)
Noi siamo da secoli (우리는 수세기동안)
Calpesti, derisi, (짓밟히고 조롱당하였도다)
Perché non siam popolo, (우리가 하나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Perché siam divisi. (우리가 갈라졌기 때문이다)
Raccolgaci un'unica (하나로 합하자)
Bandiera, una speme; (하나의 깃발과 하나의 꿈 아래로)
Di fonderci insieme (서로에게 녹아들자)
Già l'ora suonò. (이미 때는 되었도다)
L'unione e l'amore (연합과 사랑은)
Rivelano ai popoli (백성들에게 보여주시는)
Le vie del Signore. (주님의 길이로다)
Giuriamo far libero (해방하기로 맹세하자)
Il suolo natio: (조국의 땅을)
Uniti, per Dio, (합하자, 신을 위해서)
Chi vincer ci può? (그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Dall'Alpe a Sicilia, (알프스로부터 시실리까지)
Dovunque è Legnano; (모든 곳이 레냐뇨로다) 3)
Ogn'uom di Ferruccio (페루치오의 모든 병사들은) 4)
Ha il core e la mano; (뜨거운 마음과 일할수 있는 손을 가지고 있도다)
I bimbi d'Italia (이탈리아의 어린이들은)
Si chiaman Balilla; (발릴라의 부름을 받도다) 6)
Il suon d'ogni squilla (성당마다 종이 울려)
I Vespri suonò. (저녁 기도를 드리도록 하도다)
Son giunchi che piegano (저들은 구부러지는 나뭇가지로다)
Le spade vendute; (팔려간 병사들이여) 7)
Già l'Aquila d'Austria (오스트리아의 독수리는)
Le penne ha perdute. (이미 깃털을 잃었노라)
Il sangue d'Italia (이탈리아가 흘린 피와)
E il sangue Polacco (폴란드가 흘린 피를) 8)
Bevé col Cosacco, (코사크와 함께 마셨도다)
Ma il cor le bruciò. (그러나 이들의 마음은 불타오르도다)
[주해]
1) 빅토리는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를 말함
2) 고대 로마에서는 여노예들의 머리칼을 잘라 로마를 위해 승리의 여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관습이 있었다. 여노예들은 신들의 신성한 뜻에 의해 로마의 노예로 주어졌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3) 레냐뇨는 1176년에 유명한 전투가 벌어졌던 이탈리아 북부의 지명이다. 이탈리아의 여러 지방들이 연합하여 이탈리아를 지배코자 했던 독일의 프레데릭 바바로사(신성로마제국 황제)에 대항하여 싸운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4) 페루치오는 1530년에 스페인의 샤를르 5세(신성로마제국 황제)가 플로렌스를 침공하자 용감하게 방어한 부대장이다.
5) 발릴라는 제노아에서 온 어린아이의 이름이다. 원래 이름은 잠바티스타 페라소이다. 1746년 제노아에서 오스트리아에 항거하는 시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함께 시민군과 함께 싸운 소년이다.
6) 팔려간 병사(원래는 팔려간 칼들)라는 것은 프랑스가 이탈리아 공화주의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돈을 주고 사들인 이탈리아 용병들을 말한다.
7) 폴란드가 흘린 피라는 것은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와 연합하여 폴란드를 침공하였을 때 풀란드 백성들이 흘린 피를 말한다.
베르디는 1862년 런던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을 때에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연주회를 지휘했다. 이때 베르디가 선정한 곡목이 마멜리의 시와 노바로의 곡에 의한 '이탈리아의 노래'였다. 이처럼 베르디는 외국에 나가서까지 조국 이탈리아의 완전한 통일을 위해 노력하였다. 베르디 이외에도 오페라를 통해서 리조르지멘토 운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한 작곡가들이 있다. 자코모 로시니와 빈첸초 벨리니이다. 로시니는 '알제리의 이탈리아여인'(L'italiana in Algeri)에서 이탈리아의 통일을 지지하는 내용의 음악을 만들었다. 이사벨라의 아리아 Pensa alla patria, e intrepido il tuo dover adempi(조국을 생각하라. 용감하게 의무를 다하라. 온 이탈리아가 용기와 덕성으로서 탄생하는 것을 보라)가 그것이다. 당시 '두 시실리 왕국'은 검열에서 이 아리아가 불온하다고 판단하여 공연을 허락하지 않았었다. 빈첸초 벨리니는 그 자신이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결사인 카르보나리(Carbonari)의 회원이었다. 벨리니의 걸작인 I puritani(청교도)의 2막 마지막 파트는 이탈리아의 통일을 비유한 장면이다. 벨리니의 또 다른 걸작인 Norma(노르마)가 1859년 밀라노에서 공연될 때에 2막에서 Guerra, guerra! Le galliche selve(전쟁을, 전쟁을, 골의 숲이여)라는 합창이 끝나자 관중들이 모두 일어나서 뜨거운 박수를 보녀며 Guerra(전쟁을)이라고 외쳤다. 당시 극장 안에는 오스트리아 장교들이 여러명이나 있었다. 관중들은 특히 이들 오스트리아 장교들을 향해 Guerra를 외쳤다.
벨리니의 '노르마'에서 골족들이 로마와의 전쟁을 외치고 있는 장면
* 2011년에 로렌초 페레로(Lorenzo Ferrero)라는 작곡가가 Risorgimento라는 제목의 오페라를 만든 것이 있다. 이탈리아 통일 150 주년을 기념해서이다. 오페라에는 베르디의 얘기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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