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오페라의 황제 베르디

베르디 생애의 주요 사건 요약

정준극 2018. 4. 11. 21:00

오페라의 황제 베르디에 대하여 알고 싶은 사항을 다음 20가지로 요약하여 정리해 보았다. 이런 사항들만 알고 있어도 베르디 세미나에 가서 한마디 거들수가 있을 것이다.


1.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프랑스인

주세페 포르투니노 프란체스코 베르디(Giuseppe Fortunino Francesco Verdi)는 1813년 10월 9일 또는 10월 10일에 북부 이탈리아의 부세토 인근에 있는 론콜레(Le Roncole)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이 지역은 프랑스 제1제국의 지배를 받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베르디는 프랑스 국적으로 태어난 셈이었다. 그래서인지 베르디의 출생증명서에는 프랑스식으로 조셉 포르투닌 프랑수아(Joseph Fortunin Francois)라고 적혀 있었다. 론콜레는 베르디가 태어난 곳임을 기념하여서 오늘날 론콜레 베르디라는 지명이 되었다.


2. 독학으로 공부한 베르디

베르디는 어릴 때에 부세토의 예수회 학교에 있는 도서실에 가서 음악책을 보며 혼자서 공부하기를 좋아했다. 베르디는 정규 음악대학을 나오지 못했지만 대신에 부세토에서 스스로 작곡 공부를 해서 세계적인 작곡가가 되었다. 형설지공이다.


3. 전도가 유망한 청년음악가

베르디는 20세 때에 음악공부를 더 하기 위해 밀라노로 갔다. 그러나 학비가 넉넉하지 못해서 정규 음악원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베르디는 저명한 작곡가를 찾아가서 마치 도제처럼 지내면서 개인 레슨을 받았다. 베르디는 작곡 레슨을 받으면서 시간만 있으면 오페라와 콘서트를 관람하며 작곡에 대한 감각을 익혔다. 베르디는 특히 독일 작곡가들의 작품을 선호하여 감상하였다. 베르디가 음악가로서 처음으로 공식 활동을 한 것은 1830년 부세토의 바레찌 집에서였다. 부세토의 음악애호가인 바레찌는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를 조직해서 집에서 연주하기를 좋아했다. 청년 베르디는 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활동했다.


4. 마르게리타와의 인연

베르디는 부세토의 음악애호가인 바레찌의 부탁으로 그의 딸 마르게리타의 음악 선생이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깊이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서 결국 결혼했고 두 자녀까지 두었다. 비르지니아와 이칠리오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두 자녀는 모두 어릴 때에 세상을 떠났다. 베르디가 밀라노에서 그의 첫 오페라를 작곡하기 위해 열심이었던 때였다. 얼마후 사랑하는 아내 마르게리타도 세상을 떠났다. 그때 마르게리타는 26세였다. 베르디의 상심은 말할수 없이 컸다. 베르디는 작곡가로서의 길을 거의 포기하려고까지 생각했었다.


5. 라 스칼라와의 계약

베르디의 첫번째 오페라인 '오베르토'는 1839년 11월에 라 스칼라에서 제작되었다. 무명의 베르디였지만 '오베르토'는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라 스칼라는 베르디에게 세 편의 오페라를 더 작곡해 달라고 요청했다.


베르디의 첫 오페라 '오베르토'. 라 스칼라 무대


6. 떠오르는 스타

베르디가 라 스칼라의 요청으로 두번째 오페라인 '왕궁의 하루'(Un giorrno di regno)를 작곡하고 있을 때에 부인 마르게리타가 세상을 떠났다. '왕궁의 하루'는 실패였다. 베르디는 다시는 작곡을 하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했다. 그러나 라 스칼라의 간곡한 설득으로 '나부코'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나오는 '나부코'는 대단한 성공이었다. 1842년 3월의 '나부코' 초연은 베르디를 떠오르는 스타로 만들어 준 것이었다.


7. 베르디에게 영향을 준 작곡가들

베르디에게 영향을 준 작곡가들은 로시니, 벨리니, 마이에르베르, 그리고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으로는 도니체티와 메르카단테가 있다. 그러나 바그너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다'와 '오텔로'는 바그너의 영향을 받았다는 얘기도 있다. 베르디와 바그너는 같은 해에 태어났다.


8. 베르디의 제루살렘

베르디는 '나부코' 이후에 약 15년 동안 14편의 오페라를 완성했다. 베르디는 '너무 바뻐서 단 한 시간이라도 쉴 틈이 없었다'라고까지 말했다. 그러면서 '마치 15년 동안을 노예선에서 보낸 것 같다'고 말했다. 베르디는 1847년에 '롬바르디의 첫 십자군'을 수정해서 '제루살렘'이라는 새로운 제목을 붙였다. '제루살렘'은 파리 오페라에서 초연되었다.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 스타일로 작곡된 첫번째 작품이었다.


9. 주세피나 스트레포니

베르디의 생애에서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는 커다란 영향을 준 여인이었다.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는 유명한 소프라노였다. 베르디는 1840년대 중반에 스트레포니를 알게 되어 사랑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평생 반려자가 되었다. 베르디는 스트레포니와 당장 결혼하지 않았다. 거의 10년 동안 동거생활을 했다. 그래서 주위로부터 사람이 그러면 되느냐는 핀잔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1851년에 베르디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빌라노바 술라르다의 산타가타에 빌라 베르디를 장만해서 함께 살았다. 사람들은 '도대체 결혼도 하지 않고 동거하다니 말이 안된다'면서 수근거렸다. 베르디와 스트레포니는 마침내 1859년 8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탈리아에서가 아니라 멀리 스위스의 제네바에 가서 결혼식을 올렸다.


10. 리골레토

베르디의 최대 걸작이라고 하는 '리골레토'는 1851년 베니스에서 초연되었다. 베르디가 스트레포니와 함께 고향마을 부근에 정착한 해였다. '리골레토'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것이다. 내용은 천한 리골레토가 지체높은 만투아 공작을 저주하고 저항하는 것이다. 그런 내용으로는 당시 당국의 검열을 통과하기가 어려웠다. 베르디는 너무나 검열이 까다로워서 작곡을 하면서 몇번이나 포기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일단 검열을 통과하여서 무대에 올려지자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리골레토'. 라 스칼라 무대


11. 트로바토레와 트라비아타

1853년에 '일 트로바토레'는 로마에서, '라 트라비아타'는 베니스에서 초연되었다. 두 작품 모두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중에서도 '라 트라비아타'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자주 공연되고 있는 오페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라 트라비아타'는 알렉산드르 위마의 희곡 '카멜리아 여인'을 원작으로 삼은 것이다. 


12. 소나기 작곡

베르디는 1853년부터 1867년까지의 10년이 넘는 기간동안 중단이라는 말을 모르고 지냈다. 이 기간 동안에 '가면무도회'(1859), '운명의 힘'(1862), '막베스'(1865) 등이 완성되었다. 모두 음악사에 길이 남는 불후의 거작들이었다.


13. 비바 빅토리오 에마누엘레

이탈리아는 1861년에 그렇게도 염원하던 통일을 이루었다. 이탈리아의 통일이 실현되는 데에는 베르디의 오페라의 역할도 컸다. 베르디의 과거 오페라들은 대개가 그렇듯이 혁명이나 자유, 해방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860년대 초반에는 이탈리아에서 '비바 베르디'(VIVA VERDI)라는 말이 유행처럼 되어 있었다. 이 말은 '베르디 만세'라기 보다는 당시 사르디니아의 왕으로서 이탈리아 통일에 앞장 섰던 빅토르 엠마누엘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즉, Viva Victtorio Emanuele Re D'Italia의 첫글자를 모으면 VERDI가 되는 것이다.


14. 진혼곡

세계의 3대 진혼곡이라고 하면 모차르트, 가브리엘 포레, 그리고 베르디의 진혼곡을 말한다. 베르디의 진혼곡은 그만큼 위대한 작품이다. 베르디의 진혼곡(레퀴엠)은 1874년 5월 22일에 밀라노 대성당에서 초연되었다. 베르디가 세상을 떠나기 7년전이다. 베르디는 이 진혼곡을 그 전 해(1873년)에 세상을 떠난 위대한 시인이며 작가인 알레산드로 만초니(Alessandro Manzoni)를 추모하여서 작곡했다. 베르디를 '오페라의 황제'라고 하지만 이 진혼곡은 베르디가 오페라 이외의 장르에서도 대단히 훌륭한 작품을 작곡할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준 것이었다.


15. 테레사 스톨츠

베르디는 그랜드 오페라인 '아이다'를 소프라노 테레사 스톨츠(Teresa Stolz)를 염두에 두고 작곡했다. 하지만 1871년의 카이로 세계초연에서는 테레사 스톨츠가 아이다 역할을 맡지 않았다. 대신에 이듬해인 1872년 2월 라 스칼라에서의 유럽 초연에서 아이다를 맡았다. 테레사 스톨츠는 베르디의 레퀴엠 초연에서도 소프라노 솔로를 맡았다. 테레사 스톨츠는 이른바 베르디 소프라노의 대명사였다. 강력하고 열정적인 음성을 지닌 소프라노였다. 그렇지만 그는 연기와 음성을 자제할수 있는 능력도 뛰어났다. 테레사 스톨츠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베르디 소프라노였다.


베르디와 소프라노 테레사 스톨츠(가운데)


16. 대라이발 바그너

베르디와 바그너는 같은 해에 태어났다. 두 사람 모두 19세기 유럽의 오페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었다. 두 사람은 생전에 서로 만난 일이 한번도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베르디는 바그너의 특별한 아리아도 없는 신화적인 뮤직 드라마를 비난했고 바그너는 베르디의 신파조 오페라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두사람을 라이발 관계에 있다고까지 말했다. 라이발도 대라이발(Arch-rival)이었다는 것이다. 베르디는 바그너에 대하여 '이성적인 보통 사람이라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뛰어가지 않고 착실하게 걸어가서 좋은 결과를 낸다. 그러나 바그너는 걷기보다는 날아가기를 선호하는 사람이다. 아직 한번도 가본 일이 없는 길을 꼭 필요하지도 않은데 그저 외골수로 가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바그너는 베르디에 대하여 어떻게 얘기했을까?


17. 오텔로

베르디는 1871년 '아이다'로서 성공을 거둔 후에 다시는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베르디의 악보출판사는 그런 베르디로 하여금 마음을 바꾸어서 다시 오페라를 작곡토록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다만, 그 설득기간이 거의 10년이나 걸렸던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출판사는 베르디에게 '선생님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무척 좋아하지 않습니까? 여기 셰익스피어의 또 다른 작품을 오페라 대본으로 만든 것이 있사오니 한번 살펴보아 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오텔로'였다. '오텔로'는 베르디의 비극 중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18. 활슈타프

베르디의 마지막 오페라인 '활슈타프'(Falstaff)는 셰익스피어의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The Merry Wives of Windsor)과 '헨리 4세'의 1부에 바탕을 둔 작품이다. '활슈타프'는 1893년 2월 라 스칼라에서 초연되었다. '활슈타프'는 지금까지 볼수 없었던 창의적인 작곡 스타일, 찬란하다고까지 말할수 있는 오케스트레이션, 뛰어난 대본으로 초연이래 세계로부터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역시 황제의 면모를 보여준 작품이었다. 그나저나 '활슈타프'는 베르디의 유일한 코믹 오페라이다. 물론 '왕궁의 하루'도 코믹 오페라이지만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한 작품이다.


19. 위대한 장례식

1901년 1월에 치루어진 베르디의 장례식은 여늬 황제의 장례식 보다도 더 장엄한 것이었고 이탈리아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한 경우였다. 베르디는 밀라노의 그랜드 호텔에 투숙하고 있을 때에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그로부터 며칠 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 며칠 동안 세계는 그의 상태에 대하여 시시각각으로 촉각을 세우고 어서 쾌차하기를 간절히 바랬다. 장례식에서는 토스카니니가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지휘했다. 이탈리아 각지에서 일부러 올라온 수많은 음악가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었다.


20. 마지막 안식처

베르디의 시신은 처음에 밀라노의 기념공동묘지(Cimitero Monumentale)에 안장되었다. 한 달후에 그의 시신는 '음악가를 위한 휴양의 집'(Casa di Riposo per Musicisti)의 내정으로 이장되었다. 베르디가 세상 떠나기 전에 은퇴 음악가들의 안식처로 마려한 집이다. 이 집의 설계는 '오텔로'와 '활슈타프'의 대본을 쓴 아리고 보이토의 형이 맡았다.


밀라노에서의 베르디 장례행렬. 집집마다 검은 휘장을 내걸었다. 이탈리아 역사상 장례식에 가장 많은 군중이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