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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미술대학교(Akademie der bildenden Künste Wien)

정준극 2015. 3. 8. 18:36

비엔나 미술대학교(Akademie der bildenden Künste Wien: Academy of Fine Arts Vienna)

비엔나조형예술아카데미

 

비엔나 중심지역에 있는 비엔나 미술아카데미(대학교)

 

1907년에 린츠에 있던 히틀러는 미술공부를 하기 위해 비엔나에 와서 이 학교에 입학원서를 냈다. 학교당국은 히틀러의 작품을 보고 아직 실력이 안되니 좀 더 실력을 쌓은 후에 입학원서를 다시 내라고 말하고 입학을 거절했다. 무일푼인 히틀러는 고아로 등록하여 정부에서 보조금을 받아 겨우 연명하며 지냈다. 히틀러는 그렇게 1년을 지낸후 다시 비엔나 미술대학교에 입학원서를 냈다. 또 다시 거절당했다. 먹고 살 길이 막막했던 히틀러는 수채화를 그려 팔아서 겨우 생활을 하였다. 주로 그림엽서 같은 것이었다. 두번이나 미술대학교에 낙방한 히틀러는 실망한 나머지 뮌헨으로 가서 1913년 5월에 군에 입대하였고 이어 제대 후에 정치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만일 비엔나 미술대학교가 히틀러를 학생으로 받아 들였으며 어떻게 되었을까? 상당히 재능있는 화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화가로서 설마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6백만명에 이르는 유태인들을 학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역사는 아이러니컬한 것이어서 비엔나 미술대학교가 화가 지망생인 히틀러를 받아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전세계는 참혹한 전화에 휩싸이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을까?

 

1751년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를 알현하는 비엔나미술아카데미 원장 이하 관계자들

 

비엔나 미술대학교는 어떤 학교인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미술학교이다. 일찍이 1692년에 비엔나미술아카데미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으니 2015년으로 3백 20년이 넘는 연륜을 지니고 있는 학교이다. 비엔나에 처음으로 미술 아카데미를 설립할 때에 모델로 삼은 학교는 이탈리아의 산 루카 아카데미(Accademia di San Luca)와 파리의 아카데미 드 펭튀르 에 드 스퀼튀르(Academie de peinture et de sculpture: 회화조각아카데미)였다. 비엔나미술아카데미는 당시 황실화가인 페터 슈투르델(Peter Strudel)이 주도하여 비엔나 미술아카데미를 설립했다. 1692년이면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조 숙종시대이다. 페터 슈투르델은 미술 아카데미의 학장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요셉 1세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페터 슈투르델의 공로를 치하하여서 남작에 해당하는 작위인 프라이헤르(Freiherr) 작위를 주었다. 그러나 미술 아카데미는 1714년에 슈트르델이 작고하는 바람에 어쩔수 없이 유명무실한 기관으로서 지지부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10년도 넘은 1725년 1월에 샤를르 6세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야콥 반 슈펜(Jacob van Schuppen)을 비엔나로 초청해서 비엔나미술아카데미의 원장으로 임명하고 비엔나미술아카데미의 명칭도 회화, 조각, 건축 궁정아카데미(k.k. Hofakademie der Maker, Bildhauer und Baukunst)라고 변경하였다. 미술아카데미가 활력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지내다가 1740년에 샤를르 6세 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아카데미도 사양길로 접어 들었으나 얼마후 샤를르 6세의 뒤를 이어 실질적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역할을 했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1751년에 새로운 법령을 만들어서 미술아카데미를 발전적으로 개편하였다.

 

비엔나미술아카데미의 1787년 소묘실 풍경

 

그로부터 미술아카데미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후원을 받으면서 성장해 갔다. 1767년에는 마리에 테레지아 여제의 딸 들인 마리아 안나와 마리아 카롤리나가 미술아카데미의 명예회원으로 가입한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1772년에는 당시 수상이던 벤첼 안톤 카우니츠가 비엔나의 모든 미술관련 기관들을 통합하여 황실조형예술아카데미(k.k. vereinigten Akademie der bildenden Künste)로서 발족시켰다. 얼마후 이 명칭에서 vereingten 이라는 단어는 사라졌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Akademie der bildenden Künste 로서 존속하게 되었다. 그후 1872년에 프란츠 요셉 황제는 조형예술아카데미를 제국의 최고 미술아카데미로 격상한다는 법령을 만들어 공포하였다. 이와 함께 링슈트라쎄를 조성하는 대대적인 계획에 맞추어서 미술아카데미 건물도 새로 짓도록 했다. 건설 책임은 미술아카데미의 교수였던 테오필 한젠(Theophil Hansen)이 맡았다. 그리하여 1877년 4월 3일에 현재의 비엔나미술대학교 건물이 링슈트라에서 장엄하게 개관식을 가졌다. 이 건물의 천정 프레스코는 거장 안젤름 포이어바흐(Anselm Feuerbach)가 제작하였다.

 

프리드리히 쉴러 기념상이 있는 미술아카데미 앞 광장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오스트리아는 나치 독일과 합병(안슐르쓰)되어 있었다. 이때 비엔나의 다른 분야들도 그렇지만 미술아카데미에서도 유태인들이 추방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직원뿐만 아니라 교수들, 그리고 학생들 중에서 유태인은 모두 쫓겨나야 했다. 전쟁이 끝나고 오스트리아가 독립국으로서 인정을 받은 1955년, 미술아카데미의 자주성을 보장해주는 법령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1998년에는 오랜 숙원이었던 대학교의 지위를 부여받게 되었다. 대학교로 인정을 받았지만 원래 명칭은 아카데미는 그대로 사용키로 했다. 아마 세계에서 대학교이면서 대학교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기관은 비엔나 미술아카데미 뿐일 것이다.

 

비엔나미술아카데미는 다음과 같은 여섯 부분으로 나뉘어 진다. 말하자면 각 단과대학이지만 여기서는 연구소(인스티튜트)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각 연구소에는 각 과가 있다. 현재 학생수는 9백여명이며 그중 4분의 1인 외국 학생이다. 도서실에는 11만권의 예술장서가 있으며 에칭 캐비넷(Kupferstichkabenett)이라고 하는 곳에는 약 15만 점의 소묘와 프린트 자료들이 있다. 에칭, 소묘, 프린트 자료들은 오스트리아 최대를 자랑한다. 그래서 간혹 일반 전시도 계획되고 있다. 

 

- 미술연구소(IBK: Institut fur Bildende Kunst: Institute for Fine Arts). 추상화 등 13개 전공 학과.

- 예술이론 및 문화연구연구소(IAT: Institut fur Kunst Theory und Kultur Studium: Institute for Art Theory and Cultural Studies).

- 보존 및 복구연구소(IKR: Institut fur Konservierung-Restaurierung: Institute for Conservation and Restoration)

- 예술과학연구소(INTK: Institut fur Naturwissenschaften und Technologie in der Kunst: Institute for Natural Sciences and Technologies in Art)

- 예술교육연구소(IKL: Institut fur Kunstlerisches Lehramt: Institute for Secondary School Teaching Degrees)

- 예술건축연구소(IKA: Institut fur Kunst und Architektur: Institute forArt and Architecture)

 

유명 졸업생들 중에는 오토 바그너(Otto Wagner), 에르빈 부름(Erwein Wurm), 빌리 주코프(Willi Soukop), 테오도르 조클(Theodor Sockl), 오트마르 쉼코비츠(Othmar Schimkowitz), 에곤 쉴레(Egon Schiele), 콘스탄틴 다니엘 로젠탈(Konstantin Daniel Rosenthal), 프란츠 사버 메서슈미트(Franz Xaver Messerschmidt), 고트프리트 린다우어(Gottfried Lindauer), 알프레드 흐르들리카(Alfred Hrdlicka), 한스 홀라인(Hans Hollein) 등이 있다.

 

IBK

IKA

IKL

IKR

IKW 

INT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