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대학도시 비엔나

비엔나 의과대학교(Medical University of Vienna)

정준극 2015. 3. 11. 10:42

비엔나 의과대학교(Medizinische Universität Wien: Medical University of Vienna)

 

비엔나 의과대학교의 종합병원(AKH). 9구 알저그룬트에 있다.

 

오스트리아는 세계적으로 의학으로도 유명하다. 그 중심에 비엔나 의과대학교가 있다. 보통 메드우니(MedUni)라고 불리는 비엔나 의과대학교는 일찍이 1365년 루돌프 4세 치하에서 설립되었다. 루돌프 4세가 비엔나 의과대학교만을 설립했다는 것이 아니라 실은 비엔나대학교를 설립했고 그 산하에 의과대학이 있었으나 나중에 분리독립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비엔나 의과대학교는 비엔나대학교와 함께 올해 2015년으로서 설립 650주년을 맞이한다.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렇듯 비엔나 의과대학교는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는 가장 역사가 긴 의과대학교로서 존경을 받고 있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는 가장 오래된 의과대학이지만 신성로마제국으로 보면 프라하의 샤를르대학교 다음으로 가장 오래된 의과대학교이다. 비엔나 의과대학교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의학연구 및 진료 기관이다. 비엔나 의과대학교의 부속 병원인 비엔나종합병원(Algemeine Krankhaus: AKH)를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 규모로 보아서는 유럽 전체에서 가장 큰 의과대학교이며 아울러 가장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의과대학일 것이다. 비엔나종합병원의 의료진은 거의 모두 비엔나 의과대학교 출신이다. 종합병원은 모두 31개 임상과가 있으며 12개의 의학이론연구 부서가 있다. 비엔나종합병원은 1년에 4만 8천회의 수술을 시행한다. 비엔나종합병원은 1년에 10만 명의 입원환자를 받아 들이고 있으며 외래 환자는 60만 5천명에 이른다. 비엔나에 사는 사람으로서 비엔나종합병원의 신세를 진 일이 없다고 하면 의외이다.

 

배링거 슈트라쎄의 비엔나 의과대학교 건물

 

비엔나 의과대학교의 교수진으로서 현재까지 노벨의학상을 받은 사람만 7명이나 된다. 비엔나대학교  전체 노벨상 수상자가 15명인 것에 비하면 의과대학교의 노벨상 수상자가 7명이나 되니 의과대학교의 수준이 얼마나 막강한지를 알수 있다. 노벨의학상 수상자로서 우리가 잘 아는  인물로서는 로베르트 바라니(Robert Barany), 율리우스 바그너 야우레그(Kulius Wagner-Jauregg), 혈액형이 ABO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어 RH 인자(Rhesus factor)를 규명하여 안전한 수혈을 가능케 한 칼 란트슈타이너(Karl Ladsteiner) 등이다. 칼 란트슈타이너는 소아마비 바이러스도 처음으로 발견했다.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도 의대 교수로서 활동했다. 그는 물론 정신분석학의 선구자이지만 대뇌마비 증상, 실어증, 현미경적 신경해부학 등의 연구를 심도있게 수행하였고 임상도 하였다. 비엔나 의과대학에는 의학부와 치의학부가 있다. 의과대학에 입학하려면 국가에서 시행하는 메드아테(MedAT) 시험을 보아야 한다. 그라츠와 인스부르크의 의과대학교에 입학하려고 해도 의 시험을 보아야 한다. 비엔나 의과대학교는 1년에 660명의 의학부와 80명의 치의학부 학생을 받고 있다.

 

비엔나의과대학교 요제피눔 건물. 현재는 의학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앞에 있는 기념상은 치료의 여신인 하이지에이아(Hygieia)이다. 요제피눔은 요제프 2세 황제가 설립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를 위대한 군주로 보고 크게 존경한다. 실제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치하에서는 군사, 외교, 정치, 사회, 문화의 모든 면에서 놀라운 발전을 이룩했다. 의학에서도 그러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비엔나의과대학교의 발전을 위해 외국의 유명한 의학자들을 초청해서 활용하기도 했다. 그 중의 하나가 네덜란드의 제라르 바 스비텐(Gerard van Swieten)을 초청해서 비엔나의과대학교를 크게 발전시키도록 했다. 안톤 드 핸(Anton de Haen), 막시밀리안 슈톨(Maximillian Stoll), 로렌츠 가써Loreanz Gasse), 레오폴드 아우엔브루거(Leopold Auenbrugger) 등 다른 나라의 저명한 의학자들이 속속 비엔나의과대학교로 모여 들었다. 레오폴드 아우엔브루거는 역사상 처음으로 타진법을 개발한 인물이다. 비엔나의과대학교는 학업과 임상을 병행하는 기관으로서 세계의 인정을 받았다. 여기에 1784년 비엔나종합병원이 문을 열게 되었다. 비엔나의과대학교의 학문-임상 노력은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제2의 비엔나의과대학교 시대라 꽃을 피게 되었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의학자들로서는 칼 로키탄스키(Karl Rokitansky), 요제프 스코다(Josef Skoda), 페르디난트 폰 헤브라(Ferdinand von Hebra), 이그나즈 필립 젬멜봐이스(Iganz Philipp Semelweis) 등을 꼽을수 있다. 이로서 기초의학분야의 학문연구가 크게 진작되었으며 아울러 특수분야의 의료도 막을 열게 되었다. 예를 들면 이 시기에 피부과(Dermatology)가 처음으로 문을 열었고 마찬가지로 안과와 이인후학과(Otaolaryngology)도 세계에서 처음으로 비엔나의과대학교에 개설되었다.

 

비엔나의과대학교 입학시험 장면. 시험지를 기다리고 있는 수험생들

 

20세기에 들어와서 비엔나의과대학교는 절정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세계에서 가장 수준 높은 의학연구기관이며 임상병원으로 인정을 받았다. 클레멘스 폰 피르케(Clemens von Pirquet)는 알레르기와 혈청질환의 개념을 정립하였다. 에른스트 페터 피크(Ernst Peter Pick)는 면역학적 반응의 화학적 특성에 대한 실험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비엔나의과대학교의 치과학부는 1920년대에 세계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20세기에 들어와서 비엔나의과대학교의 로베르트 바라니, 율리우스 바그너 야우레그, 칼 란트슈타이너, 오토 뢰비가 각각 그들이 이룩한 연구결과로서 노벨의학상을 받았다. 이러한 전통은 1차 대전 중에도 계속되었다. 1930년대에는 비엔나의과대학교에서의 박사학위가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있는 것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다가 1938년 3월에 나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안슐르스)가 있었다. 의과대학교에도 반유태 바람이 불어닥쳤다. 전체 교수진의 거의 절반이 유태계라는 이유로 추방당했다. 비엔나 전체로 보면 65%의 의사들이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핍박을 받았다. 비엔나에서 의료혜택을 받는 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되었다. 유태계 의사들과 의과대학교 교수들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가서 죽임을 당하였다. 다행하게도 해외로 빠져 나간 유태계 의사들과 의학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1930년 노벨의학상을 받은 칼 란트슈타이너. 혈액형이 ABO인 것을 밝혀냈고 RH인자가 있음을 발견하여 수혈에 어려움이 없게 했다. 그래서 그를 '수혈학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2차 대전이 끝났지만 비엔나의과대학교는 과거의 빛나는 영광을 다시 얻기가 어려웠다. 많은 시설들이 파괴되어 제대로의 연구활동을 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이번에는 잔존하여 있는 의학교수진에서 거의 75%가 나치 정권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대학교를 떠나야 했다. 이렇게 떠난 교수자리는 세월을 두고 새로운 세대로 교체되기는 했다. 그러는 바람에 비엔나의과대학교가 다시 명성을 찾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흘러야 했다. 비엔나의과대학교가 과거의 영예를 갖도록 하는 몇가지 조치가 취해졌다. 우선 의과대학교를 비엔나대학교에 소속되어 있는 단과대학으로 운영하지 않고 독립적인 의과대학교로 운영하도록 했다. 의과대학교는 세계적은 명성을 얻고자 국제적인 공동연구에 박차를 가하였다. 결과, 비엔나의과대학교와 부속 종합병원은 세계에서도 유명한 생체재건기관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한쪽 팔을 잃은 영국 병사의 팔을 비엔나 종합병원의 외과에서 수술하여 정상처럼 만들어 놓았다. 또한 비엔나의과대학교와 부속 종합병원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폐이식 수술기관으로서의 명성을 쌓았다. 비엔나 부속 종합병원은 폐이식에 있어서는 미국 피츠버그대학교 부속병원 다음으로 가장 뛰어난 의료기관이 되었다. 비엔나의과대학교는 2009년까지 1천명 이상의 환자에게 폐이식 수술을 해 주었다. 오늘날 비엔나의과대학교는 자기공명 기기를 사용하는 지멘스의 우수 레퍼런스 센터가 되어있다. 우수자기공연(MR)센터는 신경과학, 근육골격 연구, 종양학 및 물질대사 연구를 특히 강조하고 있다.

 

비엔나의과대학교 요제피눔

 

의학부이던 치의학부이던 일반적인 수학기간은 6년이다. 입학자격을 얻으려면 대단히 높은 성적이 필요하다.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에서는 마투라(Matura)가 이에 해당한다. 독일에서는 이바투르(Abitur)와 같은 자격이 있어야 하며 EU에 속한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자격을 얻어야 한다. 수업은 독일어로 진행되지만 학생들은 영어에 능숙해야 한다. 졸업논문은 독일어 또는 영어로 써야 한다. 소정의 교육을 마치면 의학부 졸업생들은  Dr. med. univ. 라는 학위를 받으며 치의학부 졸업생들은 Dr. med. dent 라는 학위를 받는다. 미국에서 주는 MD 와 같은 학위이다. 영국으로 치면 MBBS 또는 MBChB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비엔나의과대학교 졸업생들은 유럽연합의 어느 나라를 가도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

 

비엔나의과대학교의 또 하나의 자랑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해부학 박물관이다. 1785년에 완공을 본 요제피눔(Josephinum)이라는 건물에 자리잡고 있다. 요제피눔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인 요제프 2세 황제가 건설했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런 명칭을 붙인 것이다. 요제프 2세 시대에는 비엔나의과대학교를 k.k. medizinisch-chirurgische Josephs-Academie라고 불렀다. 요제피눔 건물은 원래 수술병동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이 건물의 여섯개 전시실에는 왁스로 만든 1,192점의 해부학적 모델과 산부인과 모델이 전시되어 있다. 이들 모델들은 1784년부터 1788년까지 이탈리아의 플로렌스에서 제작된 것이다.

 

요제피눔 해부학 박물관에 전시된 왁스 모델의 하나

 

비엔나 제1의 종합병원은 총 병상수 2천 1백개, 전문 의료진 1천 5백명 규모의 비엔나의과대학교 부속 종합병원(AKH)이지만 그 다음으로 유명한 종합병원은 루돌프너하우스(Rudolfinerhaus)이다. 1882년에 설립된 루돌피너하우스는 비엔나 최대 규모의 개인병원으로 고급 호텔과 같은 서비스와 환경으로 유명하다. 여기에 최첨단 의료장비와 최고급의 서비스를 받을수 있어서 외국으로부터도 환자들이 찾아온다. 19구 오버되블링 전차역에서 가까운 빌로트슈트라쎄(Billrothstrasse) 78의 건물이다. 루돌피너하우스는 특히 산부인과가 유명하다.

 

되블링에 있는 루돌피너하우스 종합병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