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오페라의 장르

멜로드라마도 오페라

정준극 2015. 8. 2. 13:59

멜로드라마도 오페라

 

장 자크 루소의 '피그말리온'. 한 사람만이 출연하는 모노드라마이다.

 

우리가 보통 멜로드라마라고 하면 울고 짜는 신파조의 연극을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근래에 들어와서 라디오나 텔리비전을 통해 방송되는 청춘물 등의 드라마를 연상하게 된다. 대개의 경우에 좋은 가정의 청년이 환락가의 여인 또는 낮은 신분의 여인을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시련을 겪지만 결국에는 사랑이 승리를 거둔다는 내용이다. 또는 법 없이도 살수 있는 순진한 사람이 사악한 사람의 모함으로 온갖 난관을 겪지만 마침내는 사필귀정이요 권선징악으로 막을 내린다는 내용이다. 그런 멜로드라마에서는 센세이셔널한 사항이 중심을 이루어서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런데 반드시 그런 스타일의 연극만을 멜로드라마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오페라의 하나의 장르로서 멜로드라마가 있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멜로드라마라는 용어는 19세기 초 프랑스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멜로드람(mélodrame)에서 비롯한 것으로 이 단어는 그리스어에서 음악이라는 뜻의 멜로스(melos)와 프랑스어에서 드라마를 말하는 드람(drame)을 합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프랑스어의 드람이라는 단어도 따지고 보면 그리스어의 드란(dran), 즉 행동하다(do), 공연하다(perform)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멜로드라마라는 용어는 '음악과 함께 공연한다'는 뜻으로 보면 될 것이고 그러다보면 오페라의 한 식구로서 간주해도 무리가 없게 되었다.

 

오페라의 한 장르로서 멜로드라마는 18세기에도 있었다. 공연에서 대사에 음악 반주를 곁들이는 경우를 말했다. 그렇다고 반드시 대사에만 음악을 곁들이는 것은 아니었다. 판토마임에서도 음악 반주가 있도록 했다. 아무튼 대사에 음악 반주를 붙이던, 판토마임에 음악 반주를 붙이던 모두 멜로드라마라고 불렀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기록으로 보면 1753년에 공연되었다는 요한 에른스트 에벌린(Johann Ernst Eberlin: 1702-1762)이 음악을 붙인 '시기스문두스'(Sigismundus)가 멜로드라마의 효시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다가 그로부터 거의 10년 후인 1762년에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가 '피그말리온'(Pygmalion)이라는 모노드라마를 내 놓은 것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최초의 풀 스케일 멜로드라마로 여겨지고 있다. 장 자크 루소의 '피그말리온'은 1762년에 완성되었지만 사정이 있어서 무대 공연은 1770년 리옹에서였다. 장 자크 루소는 작곡에도 재능이 있어서 이 연극의 서곡과 극중에 나오는 안단테 음악을 직접 작곡했다. 그러나 나머지 음악들은 리옹에서 활동하던 호레이스 코이그네트(Horace Coignet: 1735-1821)가 작곡했다. 장 자크 루소와 호레이스 코이그네트의 합동 작품인 '피그말리온'은 대성공을 거두어 유럽 전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피그말리온'은 모노드라마였다. 출연자가 한 명인 드라마였다. 간단한 공연이기 때문에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18세기에 독일에서만 30여편의 모노드라마가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만 보아도 알수 있는 일이다.

 

두 명이 출연하는 멜로드라마는 두오드라마(duodrama)라고 불렀다. 체코의 이리 안토닌 벤다(Jiri Antonin Benda: Georg Benda: 1772-1795)는 특별히 두오드라마에 재능이 있었다. 대표작으로는 '낙소스의 아리아드네'(Ariadne auf Naxos: 1775)와 '메데아'(Medea: 1778)가 있다. 벤다의 멜로드라마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모차르트도 벤다의 멜로드라마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나중에 모차르트는 그의 '차이데'(Zaide)에 벤다의 멜로드라마에 나오는 두개의 긴 멜로드라마적인 독백을 인용하기까지 했다. 또 다른 멜로드라마적인 스타일로서는 베토벤의 '휘델리오'(1805)에서 묘지를 파는 장면을 들수 있다. 그리고 베버의 '마탄의 사수'(1821) 중에서 마법의 주문을 외는 장면도 멜로드라마적인 스타일이었다. 영국에서는 사정이 좀 달랐다. 영국은 17세기 초반에 청교도가 통치하는 중에 어떠한 무대 공연도 금지하였다. 질질 짜는 연극이던, 음악을 곁들인 간단한 연극이던 모두 공연금지였다. 그러다가 1660년에 챨스 2세에 의해 왕정복고의 신호탄이 올라가고 나서부터는 그런 제한조치들이 상당히 완화되었다. 물론 당분간은 '순수 연극'(serious drama)의 공연이 금지되었지만 음악을 곁들인 코미디나 연극은 허용되었다. 얼마후 챨스 2세는 런던에서 단 두 군데의 극장만이 순수연극을 공연할수 있도로 허락했다. 드러리 레인의 왕립극장과 링컨스 인 필드에 있는 리슬스 테니스 코트 공연장이었다. 리슬스 테니스 코트 공연장은 1720년에 코벤트 가든의 왕립극장으로 자리를 옮겼으니 그것이 오늘날 로열 오페라 하우스이다. 두 극장은 여름철에는 문을 닫았다. 사람들은 구경꺼리를 원했다. 그래서 헤이마켓의 왕립극장이 순수연극도 하는 곳으로 허가를 받았다. 얼마후에는 다시 제재조치가 완화되어 영국의 모든 도시나 마을에서 한 군데 극장만은 음악을 곁들인 연극을 공연할수 있도록 되었다. 그런 연극을 프랑스 용어를 빌려와서 멜로드라마라고 불렀다. 영국에서 어떤 극장이던지 멜로드라마를 공연할수 있다는 조치는 1843년에 가서야 내려졌다.

 

모차르트의 미완성 오페라인 '차이데'의 음반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어떻게 발전되었는가? 이탈리아에서 비롯한 오페라가 전 유럽에서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에 따라 연극에서도 서곡을 넣고 극중 음악(인시덴탈 뮤직)을 넣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작곡가들은 음악이 더욱 돋보이는 멜로드라마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1820년에 슈베르트는 '마술 하프'(Die Zauberharfe)라는 멜로드라마를 썼다. 이 작품은 슈베르트의 다른 무대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비록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당시에 멜로드라마라는 장르가 상당히 인기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후인 1826년에 펠릭스 멘델스존은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위한 서곡을 작곡했다. 그후 멘델스존은 이 연극을 위한 전체 극음악을 마련했다. 그래서 저 유명한 '결혼행진곡'(The Wedding March)도 빛을 보게 되었다.

 

셰익스피어 원작의 '한여름 밤의 꿈'의 한 장면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에서 비올레타는 알프레도의 아버지로부터 편지 한 장을 전해 받는다. 알프레도는 편지에서 비올레타가 어째서 자기를 떠났는지 이제 충분히 알게 되었으며 그렇게 떠난 것을 용서한다고 썼다. Teneste la promessa 이다. 이 장면에서 비올레타는 알프레도의 편지를 천천히 읽어 내려간다. 오케스트라는 1막에서 들려 주었던 두 사람의 사랑의 멜로디를 다시 연주한다. 이 장면은 멜로드라마이다. 잠시후 비올레타는 감정이 북바쳐 올라오는 듯 절망적인 아리아를 부른다. Addio, del passato이다. 이 장면은 오페라이다. 연극에서 대사를 할 때에 지난 날을 회상이나 하듯 처음에 사용했던 극음악을 추가하는 것은 당시 하나의 유행이었다. 하기야 그런 스타일은 베토벤이 이미 그의 '에그몬트'에서 사용했었고 슈베르트도 '로자문데'에서 사용했었다. 훗날 영화에서도 처음에 나왔던 음악을 나중에 다시 연주하는 방식이 자주 이용되었다. 아마도 새로 연주하려면 경비를 지출해야 하기 때문에 재탕을 선호했던 것 같다. 오페레타에서도 대사 중에 음악이 연주되는 멜로드라마 형식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면 설리반의 '루디고어'(Ruddigore) 2막에서이다. 자크 오펜바흐의 '지옥에 간 오르페'(Orpheus in the Underworld)의 경우에도 오프닝에서 '대중 의견'(Public opinion)이라는 출연자가 나타나서 대사를 낭독하고 여기에 음악이 붙는 멜로드라마 스타일을 볼수 있다. 레르너와 뢰베의 뮤지컬인 '브리가둔'(Brigadoon)에서는 몇 번에 걸친 긴 스피치가 나오는데 다만 다른 오페레타 또는 뮤지컬과 다른 점은 반주의 음악이 어떤 때는 마치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격렬하고 열정적인 음악이 나온다는 점이다. 스페인의 사르수엘라에서도 이런 테크닉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물론 오페라에서도 특수 효과로서 인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그림자 없는 부인'(Die Frau ohne Schatten)에서이다.

 

'라 트라비아타'에서 조르지오 제르몽(레오 누치)으로부터 알프레도의 편지를 전해 받고 절망 중에 있는 비올레타(마리나 포플라브스카야). 2011년 로열 오페라 하우스, 런던

 

19세기에 파리에서는 멜로드라마가 대유행이었다. 극장마다 멜로드라마를 공연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특히 불르바르 뒤 크램(Boulevard du Crime)에 이어져 있는 극장에서 그러했다. 유명한 게테(Gaite) 극장은 대표적이었다. 그러다가 1862년에 하우스만 남작에 의해 파리가 크게 재건축 될 때에 불르바르 뒤 크램의 극장들도 도시계획에 따라 철거되었고 그로부터 멜로드라마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 말에 가서는 멜로드라마라는 용어가 소규모 살롱  공연을 표현하는 용어로 축소되었다. 살롱 공연에서는 반주도 피아노가 맡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후 20세기에 들어와서 대사와 실내악이 혼합되는 크로스 오버 장르가 선을 보이게 되자 전통적인 멜로드라마는 그야말로 하루 아침에 자취를 감추는 신세가 되었다. 아놀드 쇤버그의 '피에로 뤼네어'(Pierrot Lunaire: 1912)은 대표적인 새로운 도전이었다. 이 작품에서는 리듬을 타서 말하는 대사보다는 보통 말하는 대로의 이른바 슈프레헤게장(Sprechgesang)이 도입되었다. 스토리에 있어서도 종전의 판에 박은 듯한 감성에 호소하는 것들은 지양되고 대신 자유스러운 주제들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20세기에 있어서는 멜로드라마가 국민주의적 양상을 띠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특히 체코에서 그러했다. 체코국민음악의 리바이발과 어울려서 여러 작곡가들이 멜로드라마로서 국민들의 마음을 한데 묶고자 했다. 체코의 작곡가들인 츠데네크 휘비크(Zdenek Fibich)와 조세프 수크(Josef Suk) 등은 대표적이었다.

 

쇤버그의 '피에로 뤼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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