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카타니아의 벨리니

카타니아의 백조

정준극 2015. 8. 6. 10:26

카타니아의 백조

벨 칸토 오페라의 천재 벨리니

 

빈첸초 벨리니

 

벨리니는  로시니, 도니체티와 함께 19세기 이탈리아 벨 칸토 오페라의 3대 거장 중의 한 사람이다. 오페라를 애호한다는 사람으로서 이런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그런 벨리니가 33세의 참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우리는 보통 오페라의 세계에서 가장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라고 하면 의례 모차르트를 떠 올리며 안타까워하지만 모차르트는 벨리니보다 2년이나 더 살아서 35세에 세상을 떠났으니 최단수의 작곡가의 반열에 올리기에는 어색하다. '카르멘'의 비제도 요절했다. 36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보다도 슈베르트는 31세에 세상을 떠났다. 너무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작곡가이다. 하지만 '가곡의 왕'인 슈베르트는 당시에 남들은 다 만드는 오페라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서 한두편의 징슈필을 제외하고는 이렇다할 작품을 남기지 않았다. 그라므로 오페라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슈베르트가 몇살 때에 세상을 떠났는지 등에 대하여 별로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입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벨리니야말로 오페라 작곡가 중에서 가장 짧은 생애를 살다가 세상을 떠난 불멸의 인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벨리니가 오페라 작곡가들 중에서는 요절했다고 해서 유명하다는 것은 아니다. 벨리니는 가장 아름다운 멜로디의 오페라를 만들어 낸 작곡가여서 유명하다. 그의 오페라에 나오는 아리아들은 너무나 아름다운 멜로디여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과연! 벨리니의 오페라 아리아들은 애절하도록 아름답다. 가슴이 저리도록 아름답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멜로디를 만들어 낼수 있다는 말인가? 게다가 그 멜로디들은 짧지도 않다. 아주 긴 아리아들이다. '노르마'에서 Casta Diva는 10분에 걸친 아리아이며 '몽유병자'에서 Ah non credea mirarti...Ah non giunge도 거의 10분이 걸리는 아리아이다. 그리고 '청교도'에서 광란의 장면인 Qui la voce sua soave mi chiamava 는 무려 15분이나 걸리는 아리아이다. 이렇듯 아리아들이 길지만 도무지 길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모두 아름답다. 만일 벨리니가 10년만 더 오래 살았다면 더 많은 오페라들을 만들었을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더 아름다운 멜로디를 들으면서 감동했을 것이다. 아무튼 벨리니는 이런 아름다우면서도 긴 멜로디 때문에 '카타니아의 백조'라는 별명을 들었다. 벨리니가 세상을 떠나고나서 몇 년 후에 베르디는 벨리니의 아리아에 대하여 '비록 긴 아리아이지만 어느누구도 만들수 없는 뛰어난 멜로디'라며 찬사를 보냈다. 아무튼 벨리니야 말로 베르디 이전에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을 쓴 작곡가이다. 

 

벨리니의 고향인 카타니아 구시가지와 흰눈에 뒤덮인 유명한 에트나산.

                                               

벨리니는 11편의 오페라를 남겼다. 첫 오페라는 그가 24세 때에 발표된 '아델손과 살비니'(Adelson e Salvini)라는 것이었다. 그때만해도 벨리니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2년 후인 1727년에 '해적'(Il pirata)로 인하여 비로소 오페라 작곡가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도니체티는 '안나 볼레나'로서 비로소 이름을 떨치기 전에 무려 30편의 오페라를 작곡해야 했는데 이에 비하면 벨리니는 오페라 작곡가로서 데뷔한지 얼마 안되어서부터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고 볼수 있다. 이어 1830년에 베니스에서 발표한 '캬퓰레티가와 몬테키가'(I Capuleti e i Montecchi)와 이듬해인 1831년 밀라노에서 발표한 '몽유병자'(La sonnambula)로서 마치 개선장군과 같은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벨리니는 1835년 9월 23일에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오페라는 그해 1월에 파리의 이탈리아극장에서 선을 보인 '청교도'(I puritani)였다. 대성공이었다. 벨리니에 대한 기대가 더욱 높아진 작품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9개월 후에 병마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여 그만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일반적으로 벨리니의 대표작은 '노르마'라고 한다. 1831년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초연되었다. 그러나 '노르마'는 초연에서 별로 환영을 받지 못했고 후속 공연에서도 그러했다. 대신에 '청교도'는 비록 이탈리아가 아닌 프랑스에서 초연되었지만 대성공을 기록했다. 따라서 '청교도'를 벨리니의 대표작으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으나 '노르마'가 더 널리 알려지고 더 많이 공연되었다. 도니체티가 70편에 이르는 오페라를 남겼지만 오늘날 세계 무대에서 자주 공연되고 있는 작품들은 '사랑의 묘약' '람메무어의 루치아' '라 화보리타' 등 서너편에 불과하다. 로시니가 40편에 이르는 오페라들을 남겼지만 오늘날 스탠다드 레퍼토리로서 자주 공연되고 있는 작품들은 '세빌리아의 이발사' '라 체네렌톨라' 등 역시 서너편에 불과하다. 그러나 벨리니는 비록 10여편에 이르는 작품들을 남겼을 뿐이지만 '노르마' '몽유병자' '해적' '캬퓰레티가와 몬테키가' '텐다의 베아트리체' '청교도' 등 여러 편의 오페라들이 스탠다드 레퍼토리에 올라가 있다. 그렇다고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리니의 오페라들은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감동을 느끼게 된다.

 

카타니아의 피아짜 산 프란체스코 다씨시에 있는 팔라쪼 데이 그라비나 그루야스. 벨리니가 태어난 집이다.

 

벨리니는 19세기가 막 시작되는 1801년 11월 3일에 시실리의 카타니아에서 태어났다. 당시에 시실리는 이탈리아와는 별도의 시실리왕국이었다. 벨리니가 태어난 집은 카타니아의 중심지의 피아짜 산 프란체스코 다씨시(Piazza San Francesco d'Assisi)와 비아 빅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Via Vittorio Emanuele II)거리에 있다. 팔라쪼 데이 그라비나 그루야스(Palazzo dei Gravina Gruyas)라는 명칭의 이 건물은 현재 카타니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외부의 벽면에는 벨리니의 생가라는 것을 설명해 주는 명판이 설치 되어 있다. 우리는 간단히 벨리니라고 부르는 사람의 풀 네임은 빈첸초 살바토레 카르멜로 프란체스코 벨리니(Vincenzo Salvatore Camelo Francesco Bellini)이다. 당시에 시실리는 시실리 왕국에 속한 지역이었다. 시실리 왕국은 1130년에 설립되어 1816년까지 존속했던 왕국이었다. 시실리 왕국의 영토는 시실리 섬에만 국한했던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 반도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남부 지역을 포함했었다. 벨리니가 태어날 당시의 시실리 왕국의 수도는 반도에 있는 팔레르모였으나 벨리니가 태어난 카타니아도 한때 시실리 왕국의 수도였었다. 벨리니가 태어날 당시의 시실리 왕국은 스페인의 부르봉 왕조가 통치하고 있었다. 벨리니는 상당히 수준 높은 음악가정에서 태어났다. 일곱 자녀 중에서 맏이였다. 그의 아버지 로자리오 벨리니(Rosario Bellini: 1776-1840))는 카타니아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 겸 음악교사였다. 벨리니의 할아버지인 토비아 벨리니(Tobia Bellini)는 나폴리음악원을 나왔으며 역시 카타니아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 겸 음악교사였다. 그렇기 때문에 벨리니는 어릴 때부터 음악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더구나 벨리니는 어린 시절부터 천재적인 음악재능을 보여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카타니아의 벨리니 생가에 설치되어 있는 기념 명판

 

어린 벨리니가 얼마나 음악적인 재능이 있었느냐는 것은 카타니아의 벨리니아노 무세오(벨리니 기념관: Museo Belliniano)에 있는 자료를 보면 알수 있다. 태어난지 18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발렌티노 휘오라반티(Valentino Fioravanti)라는 사람이 작곡한 아리아를 노래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벨리니는 두살 때부터 음악 이론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세살 때부터는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섯살이 되어서는 피아노를 아주 잘 연주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벨리니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 기록물에 따르면 벨리니는 여섯 살 때에 작곡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곱살 때부터는 라틴어, 외국어, 수사학,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아무리 그래도 그럴리가 있나?'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에 대하여 벨리니의 전기작가인 허버트 봐인슈토크를 '이건 절대 신화가 아니다. 그리고 어느 누가 만들어 낸 얘기도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과연, 벨리니는 외국어에도 능숙했으며 철학적인 사고방식에서도 남들보다 뛰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리니는 제대로의 학교교육을 받은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음악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벨리니는 15세때부터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그때부터 할아버지로부터 작곡 등을 배웠다. 그때에 이미 작곡한 작품이 9곡의 Versetti da cantarsi il Venerdi Santo이다. 그중에서 8곡은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에 의한 것이었다. 벨리니는 정식으로 음악원에 다녀 공부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나폴리는 음악교육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정 형편상 나폴리의 음악원에 다닐수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산마르티노와 몬탈보의 공작 부부가 소년 벨리니를 만나보고 나폴리 유학을 후원하겠다고 나섰다. 그래서 벨리니는 나폴리의 산세바스티아노왕립학교(Real Collegio di Musica di San Sebastiano)에 다닐수 있게 되었다. 그로부터 청년 벨리니는 8년 동안 나폴리에서 살았다. 산세바스티아노왕립학교는 얼마 후에 산세바스티아노음악원(Conservatorio di San Sebastiano)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음악원은 산세바스티아노수녀원에 속해있던 건물을 사용했다. 이 음악원은 얼마후에 산 피에트로 아 마젤라 교회에 속하게 되었기 때문에 산피에트로 아 마젤라 음악원(Conservatorio di San Pietro a Majella)이라고도 불렀다. 현재의 주소는 비아 산 피에트로 아 마젤라 35번지이다. 이 음악원은 유서깊은 역사만큼이나 많은 인재들이 거쳐갔다. 작곡가인 니콜로 안토니오 칭가렐리, 프란체스코 파올로 토스티, 루이지 리치, 조반니 파이시엘로, 사베리오 메르카단테, 근년에는 베리스모 오페라 작곡가들인 프란체스코 칠레아와 루제로 레온카발로가 이 음악원 출신이며 그리고 세계적 지휘자인 리카르도 무티도 이 음악원 출신이다.

 

벨리니가 다녔던 나폴리의 산세바스티아노음악원. 구내의 베토벤 기념상은 유명하다

 

산세바스티아노음악원은 나폴리 정부가 운영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마치 군대와 같은 교육을 받았다. 학생들은 사관생도와 같은 옷을 입었고 매우 엄격한 시간표에 의해 학교생활을 해야 했다. 하루의 일과는 아침 5시 15분에 아침 미사를 드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밤 10시에나 끝났다. 벨리니로서는 아직 어린 나이에 입학하여서 모든 것이 힘들기만 했다. 더구나 입학하려면 10곡이나 되는 작품을 제출해야 했다. 벨리니로서는 그런 정도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일반학교와 다름없는 공부는 힘들었다. 작곡 공부는 주로 나폴리 학파의 유명 작곡가들의 작품을 공부하는 것이었고 여기에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오케스트라 작품들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중점은 이탈리아의 고전음악 시대에 활동했던 페르골레지, 또는 파이시엘로의 작품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작곡가인 로시니 등에 대한 것은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 벨리니가 이 음악원에 다닐 때에 프란체스코 플로리모(Francesco Florimo)를 만나 평생 우정을 다지며 지냈다. 벨리니는 특히 플로리모와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다. 이 편지들은 나중에 벨리니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사용되었다. 벨리니가 이 음악원에 다닐 때에 함께 공부했던 학생들로서 나중에 오페라를 작곡한 사람들로서는 프란체스코 스타빌레(Francesco Stabile), 루이지 리치와 페데리코 리치(Luigi Ricci - Federico Ricci) 형제, 사베리오 메르카단테(Saverio Mercadante) 등이 있다.

 

로시니의 '세미라미데'의 한 장면. 소프라노 조앤 서덜랜드와 메조소프라노 마릴린 혼. 벨리니는 이 오페라를 나폴리에서 처음 보고 대단한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나도 저런 오페라를 작곡해야지'라고 다짐하였다고 한다.

 

벨리니가 도니체티를 처음 만난 것은 1824년이었다.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에서 도니체티의 아홉번째 오페라인 '집시소녀'(La zingara)가 공연되었을 때였다. 벨리니는 극장에서 도니체티에게 인사를 건넬수 있었다. 벨리니는 도니체티의 오페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벨리니는 음악원의 졸업시험을 좋은 성적으로 통과했다. 그래서 프리모 마에스트리노(Primo maestrino)라는 타이틀을 듣게 되었다. '예비교사'라는 의미이다. 이로서 벨리니는 음악원에 방 하나를 가지게 되었고 신입 학생들을 가르칠수 있게 되었다. 또한 매주 목요일과 일요일에 오페라를 보러 갈수 있었다. 입장료는 음악원이 지원해 주었다. 이때 벨리니는 로시니의 오페라인 '세미라미데'(Semiramide)를 처음으로 보았다. 이로부터 벨리니는 로시니를 존경하는 인물로 삼았다. '세미라미데'를 보고 난후 친구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아무 말도 없던 벨리니는 갑자기'내가 무얼 생각하는지 알아? 세미라미데의 다음 작품이야.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해야할 일이야'라고 소리쳤다. 그만큼 로시니의 작품으로부터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벨리니에게는 '세미라미데'에 버금하는 작품을 쓰겠다고 도전한 것 이외에도 또 하나의 도전이 있었다. 맛달레나 푸마롤리스(Maddalena Fumarolis)의 사랑을 얻는 것이었다. 벨리니는 어느날 맛달레나 푸마롤리스의 집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벨리니도 잘 생겼지만 맛달레나도 무척 예쁘게 생긴 여자였다. 하여튼 벨리니는 마달레나의 부모에게 잘 보여서 맛달레나의 음악 가정교사가 되었다. 두 사람은 어느덧 사귀는 입장이 되었다.  맛달레나의 부모는 두 사람이 사귄다는 것을 알자 가난한 음악가인 벨리니가 더 이상 맛달레나를 만나지 못하도록 했다. 결국 당장 가정교사 자리에서 쫒겨났다.

 

벨리니의 첫 오페라인 '아델손과 살비니' 음반

                   

벨리니는 맛달레나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달레나 부모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자면 우선 훌륭한 오페라를 작곡해서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벨리니는 음악원에서 '예비교사'이기 때문에 음악원극장에서 공연할 오페라를 만들겠다고 제안하여 승낙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벨리니의 첫 오페라인 '아델손과 살비니'(Adelson e Salvini)였다. 나폴리 출신의 안드레아 레오네 토톨라(Andrea Leone Tottola)의 대본을 사용한 오페라 세미 세리아였다. 안드레아 레오네 토톨라는 도니체티의 '집시 소녀'의 대본을 쓴 사람이었다. '아델손과 살비니'는 벨리니가 24세 때인 1825년 초봄에 산세바스티아노음악원 극장에서 첫 공연되었다. 이 오페라는 여성은 한명도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음악원의 남학생들이 출연했다. 이 오페라는 너무나 재미있어서 그후로 1년 동안 음악원 극장에서 매일요일마다 공연되었다. 아무튼 이 오페라로 인하여 벨리니의 이름은 나폴리 극장가에서 알려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산 카를로 극장과 왕립극장인 테아트로 폰도(Teatro Fondo)는 벨리니에게 오페라 작곡을 의뢰하기에 이르렀다. 이상한 결론이지만 벨리니는 맛달레나와 결혼하기 위해 첫 오페라를 작곡했고 그것이 인기를 얻게 되자 나폴리의 극장들로부터 작곡 의뢰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영화 '가면속의 아리아'(원제목은 '음악교사'(Le maitre de musique)에서 두 명의 테너가 벨리니의 오페라 '비안카와 페르난도'에서 '아 탄토 두올'을 부르는 시합을 벌이고 있다.

 

'아델손과 살비니'는 벨리니의 첫 오페라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학교에서의 공연을 위한 오페라였으며 일반 극장을 위한 오페라는 아니었다. 벨리니가 일반 극장에서의 공연을 위해 작곡한 첫 전문 오페라는 '비안카와 페르난도'라는 오페라였다. 벨리니가 25세 때인 1826년에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에서 처음 공연되어 대단한 찬사를 받은 작품이다. 당시에 나폴리에서는 나폴리왕국 정부에서 운영하는 산세바스티아노음악원과 나폴리의 왕립 극장들 사이에 일종의 계약이 맺어진 것이 있다. 매년 음악원에서 뛰어난 학생을 한 명 선발하여 칸타타 또는 오페라(주로 단막)를 작곡케 하여 그 작품을 왕립 극장 중에서 갈라 이브닝에 공연한다는 계약이었다. 음악원의 교수였던 니콜로 안토니오 칭가렐리는 자기에게 부여된 권한을 십분 사용하여서 벨리니를 계약에 의한 오페라 작곡가로 선정하였다. 벨리니로서는 큰 영광이었다. 벨리니는 대본가로서 도메니코 지랄도니(Domenico Giraldoni)를 선택하였다. 젊은 지랄도니는 시실리를 무대로 삼은 희곡인 '아그리젠토 공작 카를로 4세의 무덤에서 비안카와 페르난도'(Bianca e Fernando alla tomba di Carlo IV, Duca d'Agrigento)를 바탕으로 '비안카와 페르난도'라는 오페라 대본을 만들었다. 그런데 제목을 바꾸어야 했다. 왜냐하면 나폴리 왕국의 왕세자의 이름이 페르난도였기 때문에 왕립극장에서 왕세자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는 연극이나 오페라의 공연을 할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벨리니와 지랄도니는 오페라의 제목을 '비안카와 제르난도'(Bianca e Gernando)라고 바꾸었다. 벨리니의 두번째 오페라이면서 전문적으로 제작된 첫번째 오페라인 '비안카와 제르난도'는 1826년 5월 30일에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이날은 페르난도 왕세자의 명명일이었다.

 

'이상한 여인'(라 스트라니에)

 

'비안카와 제르난도'는 대성공이었다. 당시 관습에 따르면 왕을 비롯한 왕족들이 참석하는 공연에서는 박수를 칠수 없었다. 그런데 '비안카와 제르난도'만은 예외였다. 나폴리 왕의 승락을 받아서 박수를 칠수 있었다. 도니체티도 이 공연에 참석했다. 도니체티는 친구 시몬 마이르(오페라 작곡가)에게 '아름다워, 참으로 아름다워, 정말 아름답단 말이야'라면서 '비안카와 제르난도'의 음악에 대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 오페라는 나중에 '비안카와 페르난도'라는 제목으로 원상복귀되었다. 이 오페라에 나오는 테너 아리아인 '아 탄토 두올'(A tanto duol)은 테너에게 대단히 어려운 곡으로 정평이 나 있는 것이다. 영화 '가면 속의 아리아'(원래 제목은 '음악선생')에서 두 명의 테너가 노래 경연을 벌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때 부르는 아리아가 바로 '아 탄토 두올'이다. 높은 음은 하이 Eb을 넘어서 하이 F까지 나는 아리아이다. 한편, 나폴리의 신문인 Giornale delle Due Sicilie(두 시실리 저널)은 '벨리니의 아리아와 듀엣은 찬사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벨리니의 음악은 나폴리에서 오랫만에 들어보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라고 썼다. 산 카를로에서의 '비안카와 제르난도'로서 가장 혜택을 본 사람은 아마 밀라노에서 온 라 스칼라의 극장장인 도메니코 바르바자일 것이다. 바르바자는 뜻밖에도 놀라운 재능의 젊은 작곡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비안카와 제르난도'가 나폴리에서 공연된지 얼마 후에 밀라노의 라 스칼라는 정식으로 벨리니에게 오페라 작곡을 의뢰하였다. 그것이 '이상한 여인'(La straniera)이였다. 1829년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에 라 스칼라에서 초연을 가졌다. 벨리니는 '비안카와 제르난도'을 수정하여서 1828년 4월에 제노아의 카를로 펠리체 극장(Teatro Carlo Felice)에서 초연 아닌 초연을 가졌다.

 

나폴리에서 첫 오페라를 발표할 당시의 벨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