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카타니아의 벨리니

나폴리, 카타니아, 베르가모

정준극 2015. 8. 8. 10:05

나폴리, 카타니아, 런던 그리고 파리

 

카타니아대성당(산타아가타)의 벨리니 묘소

 

밀라노에서 '몽유병자'와 '노르마'로 대성공을 거둔 벨리니는 다른 도시에서 자기의 오페라가 무대에 올려지는 것을 들여다보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나폴리에서는 그가 다녔던 산세바스티아노음악원을 방문하여 후배들과 스승인 칭가렐리를 만났다. 벨리니는 '노르마'를 스승인 칭가렐리에게 헌정한바 있다. 나폴리의 산 카를로에서는 '캬퓰레티가...'가 공연되었다. 벨리니가 밀라노에 처음 왔을 때 호의를 가지고 사귀고자 했던 주디타 투리나도 마침 나폴리를 방문하고 있어서 함께 산 카를로의 공연에 갔다. 산 카를로의 '캬퓰레티가...' 공연에는 나폴리의 왕 페르디난드 2세가 영광스럽게도 참석하였다. 공연이 끝나자 페르디난드 2세는 관례를 깨고 박수를 보내었고 벨리니는 이에 응답하여 무대까지 올라가서 인사를 해야 했다. 나폴리 시민들의 벨리니 환영은 따듯한 것이었다. 벨리니는 이어 메시나로 향하였다. 메시나에는 벨리니의 아버지와 식구들이 살고 있어서 오랫만에 식구들과 재회하는 기쁨을 가졌다. 메시나에서는 테아트로 델라 무니치오네에서 '해적'이 공연되었고 벨리니는 두말하면 잔소리이지만 말할수 없이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그후에는 고향인 카타니아를 방문하였다. 카타니아의 시장을 비롯한 수많은 시민들이 벨리니를 환영하였다. 카타니아는 벨리니를 위해 테아트로 코무날레에서 연주회를 마련했다. '몽유병자'와 '해적'의 음악이 연주되었다. 테아트로 코무날레가 오늘날의 테아트로 마씨모 벨리니(Teatro Massimo Bellini: 벨리니대극장)이다. 벨리니는 약 한달동안 카타니아에 머물렀다. 그후에 팔레르모를 거쳐 나폴리로 돌아갔다. 나폴리에는 그가 연모의 정을 가지고 있는 주디타 투리나가 머물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로마로 향하고 이어 밀라노로 갔다. 벨리니는 로마에 잠시 머무를 때에 단막의 '과거와 현재'(Il fu ed it sara)를 작곡했다고 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벨리니는 이어 베르가모와 피렌체를 방문했다. 두 곳에서는 '몽유병자'가 성공적으로 공연되었다.

 

소프라노 마리아 말리브란. '몽유병자'에서 아미나를 맡았을 때의 모습

 

그때 쯤해서 벨리니는 베니스의 라 페니체로부터 새로운 오페라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벨리니는 로마니와 협의하기 위해 밀라노로 돌아갔다. 처음에는 알렉산더 뒤마의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Christina regina di Sevenzia)를 오페라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벨리니는 별로 내키지 않아 했다. 결국 카를로 테달디 포레스(Carlo Tedaldi-Fores)의 '텐다의 베아트리체'(Beatrice di Tenda)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텐다의 베아트리체'는 1833년 3월 베니스의 라 페니체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벨리니는 곧이어 주디타 파스타, 조반니 바티스타 루비니 등과 함께 런던으로 향했다. 런던에서는 '해적'등 벨리니의 오페라들이 공연되었다. 그래서 벨리니의 명성은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몽유병자'는 주디타 파스타가 아미나의 역할을 맡아했고 '이상한 여인'의 타이틀 롤은 주디타 그리시가 맡아했다. 주디타 파스타가 타이틀 롤을 맡은 '노르마'는 그야말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마침내 7월에는 '캬퓰레티가...'가 런던 초연을 가졌다. 벨리니의 명성은 그야말로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그러나 런던에만 계속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벨리니는 1833년 8월 중순에 런던을 떠나 파리로 향했다.

 

소프라노 주디타 파스타. '텐다의 베아트리체'에서 타이틀 롤을 맡았을 때의 모습

 

벨리니는 1833년 8월부터 1835년 1월까지 파리에 머물렀다. 원래는 3주 정도만 머물다가 밀라노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파리 오페라와의 협상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해서 더 머물렀던 것이며 얼마후 새로운 작품을 파리 오페라극장이 아닌 이탈리아극장에서 공연하게 되어 그것을 마무리 짓느라고 상당기간을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파리의 이탈리아 극장은 벨리니에게 새로운 오페라를 만들어 주는 대가로 상당액을 제시하였다. 벨리니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탈리아에서 받았던 작곡료보다 훨씬 많은 액수'라고 밝혔다. 벨리니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게 되자 파리에 더 머물면서 그의 마지막 오페라가 되는 '청교도'(I puritani)의 작곡과 공연 준비에 매진하였다. 벨리니는 파리에 있으면서 살롱 생활을 엔조이하였다. 당시에 파리의 사교계는 살롱을 중심으로 펼쳐졌었다. 벨리니가 자주 출입하였던 살롱은 이탈리아 망명자인 벨지오조소(Belgiojoso) 공주의 살롱이었다. 벨지오조소 공주는 오스트리아의 이탈리아 통치를 반대하여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다. 벨지오조소 공주의 살롱은 이탈리아 혁명주의자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이 곳에는 또한 여러 예술가들도 출입하였는데 벨리니가 빅토르 위고, 조르즈 상드, 알렉상드르 뒤마 페레, 그리고 하인리히 하이네와 교분을 가지게 된 것도 이 살롱 덕분이었다. 그리고 음악가로서는 미켈레 카라파(Michele Carafa)와 루이지 케루비니(Luigi Cherubini)도 이곳을 자주 찾아왔었다.

 

파리의 이탈리아극장의 오디토리엄과 무대

 

벨리니는 파리에 머물면서 로시니와는 특별한 문제 없이 친하게 지냈지만 도니체티에 대하여는 긴장하며 지냈다. 왜냐하면 도니체티는 1834-35년 시즌에 파리의 이탈리아극장으로부터 역시 작곡 의뢰를 받았기 때문에 혹시라도 경쟁이 되지 않을까해서였다. 그래서인지 도니체티의 추종자들이 공연히 벨리니를 비난하는 일도 있었으니 재주가 뛰어나서 사람들이 인기를 차지하게 되면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었던 것인데 혹시 벨리니가 도니체티를 공연히 오해해서 자기를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는 얘기도 있다. 왜냐하면 벨리니는 로시니도 한때 자기를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었다. 오페라 '청교도'는 영국의 크롬웰 시기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크롬웰은 잘 아는대로 챨스 1세를 처형한 인물이다. 대본은 카를로 페폴리(Carlo Pepoli) 백작이 썼다. 페폴리 백작은 오페라 극장을 위해 대본을 쓴 경험은 거의 없는 사람이었지만 벨리니를 위해서 과감히 대본작성에 도전했다. 페폴리 백작은 볼로냐의 귀족 가문 사람으로서 오스트리아가 롬바르디 지역을 지배하는 것에 반대하여 파리로 망명의 길에 올랐던 사람이다. 벨리니는 '청교도'를 구상하면서 그가 평소에 애착을 가졌던 성악가들인 소프라노 줄리아 그리시, 테너 조반니 바티스타 루비니, 바리톤 안토니오 탐부리니(Antonio Tamburini), 베이스 루이지 라블랑셰(Luigi Lablanche) 등이 모두 파리에 있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염두에 두고 작곡을 진행하였다. '청교도'의 극본은 자크 프랑수아 앙슬로(Jacques-Francois Ancelot)와 조셉 사비에르 생탱(Joseph Xavier Saintine)이 공동으로 완성한 것이다. 파리에서는 벨리니가 오페라로 만들기 반년 전에 이미 연극으로 공연되어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 연극의 제목은 '둥근머리들과 기사들'(Tetes Rondes et Cavalieres)였다. 영국의 내전 때에 의회당원들인 개혁파와 왕당파를 의미하는 단어들이다. 이 극본은 월터 스콧의 '묘지기 노인'(Old Mortality)를 바탕으로 삼았다는 주장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벨리니는 아직 오페라의 제목을 '청교도'라고 정하지는 않고 오로지 작곡에만 전념하기 위해 파리 시내에서 불과 반시간 정도 걸리는 곳인 퓌토에 있는 영국인 친구 사뮈엘 레비스(Samuel Levys)의 집에 머물기로 했다. 결국 벨리니는 이 집에서 병마와의 싸움에 이기지 못하고 요단강을 건너고 말았다.

 

'청교도'의 엘비라(안나 네트렙코). 메트

 

'청교도'는 1835년 1월 24일 파리의 이탈리아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청교도'는 대성공이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음악에 모두들 매료되었다. 특히 2막의 스트레타(stretta: 정교한 푸가)는 대단한 박수를 받은 것이었다. 프랑스 관중들은 모두 미친것 같았다.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벨리니 자신도 이토록 열광적인 환영을 받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벨리니가 무대에 올라섰을 때 관중들의 정말로 미친 듯이 환호를 했다. 벨리니는 줄리아 그리시가 마치 작은 천사와 같이 아름답고 애절하게 노래를 불렀다고 회상했다. 파리의 신문들은 이날의 '청교도' 성공을 '파리의 광란'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청교도'는 초연이후 17회의 연속 공연을 가졌다. 더 계속되어야 했지만 시즌이 3월 31일로 마감되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막을 내려야 했다. 벨리니는 '청교도'의 성공 직후 두개의 위대한 훈장을 받았다. 하나는 프랑스의 루이 필립 왕으로부터 레종 도뇌르 기사 훈장을 받은 것이었다. 두번째는 나폴리 왕국의 페르디난드 2세로부터 '프란체스코 1세 십자훈장'을 받은 것이었다. 벨리니는 '청교도'를 프랑스 왕비인 마리 에멜리(Marie-Emélie)에게 헌정하였다. '청교도'의 런던 공연도 대성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해 여름에 벨리니의 안색은 마치 검은 구름이 끼듯 우울하게만 보였다. 물론 명목상으로는 다음번 오페라 작곡에 대하여 어떠한 결정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실은 평소의 병이 악화되어서였다. 몸이 불편하니 정신적으로도 혼란스럽지 않을수 없었다. 벨리니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었다. 이때 쯤해서 벨리니는 어떤 여인과 결혼을 하여 파리에 정착할 생각을 했다. 누구인지 자세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평범한 가정의 여인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벨리니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만일 비교적 여유가 있는 그 여자의 삼촌이 그 여자에게 20만 프랑의 돈을 결혼지참금으로 줄것 같으면 결혼할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서두를 생각은 없다고 말한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별 일도 다 있었다.

 

벨리니가 '청교도'를 헌정한 프랑스의 마리 에멜리 왕비

 

1835년 초에 벨리니는 어떤 문학 모임에서 하인리히 하이네를 처음 만났고 이어 두어번 더 만나는 일이 있었다. 벨리니가 하이네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하이네는 벨리니에게 '당신은 천재올시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그 재능 때문에 일찍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위대한 천재들을 보세요.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모차르트가 그렇고 라파엘이 그렇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했다. 비교적 미신적인 것에 신경을 쓰는 벨리니는 하이네의 이 말에 상당한 자극을 받았다. 아니 자극이라기 보다는 충격이었다. 벨리니는 자기가 일찍 세상을 떠나야 할 운명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더욱 심적으로 고통을 받았었는지 모를 일이다. 한편, 하이네는 벨리니가 세상을 떠난 후인 1837년에 벨리니를 비유하여서 '플로렌스의 밤'(Florentinische Nächte)이라는 작품을 썼다. 이 작품에서 하이네는 역시 벨리니를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이며 한숨이나 쉬는 사람이라고 비유했다. 아무튼 하이네로부터 그런 소리를 들은 벨리니는 그 다음부터 하이네를 만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 사연이 있는 것을 알게된 벨지오조소 공주는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자리를 마련했지만 벨리니는 편지를 보내어 몸이 아퍼서 참석하지 못한다고 전했다. 실제로 벨리니는 1835년 여름부터 건강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카타니아에 있는 테아트로 마시모 벨리니(벨리니대극장)

                    

벨리니는 결국 병마와의 싸움에 이기지 못해서 1835년 9월 23일에 파리 근교의 쀼또(Puteaux)의 친구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파리에 머물고 있었던 로시니가 벨리니의 장례식을 주관했다. 벨리니의 시신은 프랑스 국왕의 지시에 의해 궁정의사가 부검을 했다. 급성대장염이 진행되었고 여기에 간종양이 생겼기 때문이라는 것이 사인으로 밝혀졌다. 벨리니는 내장에 염증이 생겨서 이로 인하여 오랜기간 동안 이질과 설사로 고통을 받아야 했다. 로시니는 파리의 음악가위원회를 구성해서 자금을 모아 벨리니 기념상을 세우기로 했다. 이어 10월 2일에는 로시니가 주관하여 앵밸리드에서 장례미사를 거행하였다. 로시니는 파리 시당국과 협의하여 벨리니의 시신을 우선 페레 라셰이스 공동묘지에 안치키로 했다. 왜냐하면 최종 안식처가 어디가 될지 몰라서였다. 그 임시묘소가 무려 40여년이나 지속되었다. 시실리의 카타니아는 벨리니의 유해를 카타니아로 가져 오기 위해 몇년에 걸쳐 노력을 기울였으나 여러 사정으로 성사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벨리니 사후 41년만인 1876년에 카타니아로 이장할수 있었다. 로시니의 유해는 현재 카타니아 대성당(Duomo di Catania: Cattedrale di Sant'Agata)에 안치되어 있다. 벨리니의 사후, 카타니아의 벨리니 생가는 벨리니 기념관(Museo Bemminiano)이 되었다. 악보들과 여러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카타니아에는 테아트로 마씨모 벨리니(Teatro Massimo Bellini)가 있다. 이탈리아 정부는 벨리니를 기념하여서 5천 리라 지폐에 벨리니의 초상화를 실었다. 지폐의 후면에는 오페라 '노르마'의 장면을 넣었다. 현재 이탈리아는 유로를 사용하기 때문에 더 이상 벨리니의 모습이 들어간 리라를 볼수 없게 되었다.

 

벨리니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카타니아 대성당(산타아가타대성당)

벨리니의 묘 근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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