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카타니아의 벨리니

벨리니의 여인들

정준극 2015. 8. 9. 08:33

벨리니의 여인들

 

벨리니는 결혼을 하지 않고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벨리니는 생전에 세명의 여인에게 마음을 두고 상당히 가깝게 지냈다. 벨리니가 결혼까지 생각했던 첫 여인은 나폴리의 맛달레나 푸마롤리스(Maddalena Fumarolis)였다. 두번째 여인은 무려 5년이나 깊은 관계에 있었던 주디타 투리나(Giuditta Turina)였다. 주디타 투리나는 실상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리니와 뜨거운 관계를 유지하며 지냈다. 세번째 여인은 파리에서 이름 모를 어떤 여인이었다. 벨리니가 결혼을 생각했지만 병마와 싸우느라고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런데 혹자들은 벨리니가 혹시 게이가 아니었느냐는 의구심을 표명한 일도 있다. 상대방은 나폴리에서 음악원을 다닐 때부터 붙어 다니던 프란체스코 플로리모(Francesco Florimo)라는 청년이었다. 벨리니는 생전에 프란체스코 플로리모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내어 자기의 모든 일을 얘기하고 의논하였다. 그리고 서로 떨어져 지내게 되자 보고싶다고 하면서 애틋한 심정을 토로하기까지 했다. 플로리모는 훗날 벨리니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된 사람이다. 이제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전개해보자. 하기야 연모의 정을 가지고 있던 여인들이 있었으면 있었지 그게 무어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소개하느냐고 하겠지만 유명 인사들의 애정사는 아무래도 관심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소개하는 바이다.

 

벨리니의 평생 친구였던 프란체스코 플로리모. 벨리니보다 1년 먼저 태어나서 벨리니보다 50여년을 더 살았다.

 

우선 남친 이야기. 벨리니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심에 있었던 상대방은 나폴리음악원에서부터 알게 된 프란체스코 플로리모(Francesco Florimo: 1800-1888)였다. 플로리모와 가깝게 된 것은 그가 카타니아 옆 마을 출신이라는 것이 큰 작용을 했다. 고향을 떠나 나폴리에 온 벨리니로서 같은 학교에서 고향 사람을 만났다는 것은 의지할 데가 있다는 즐거운 일이었다. 나폴리음악원(산세바시티아노음악원)을 졸업한 벨리니는 당분간 나폴리에서 지냈으나 그후 밀라노로 가서 지냈고 이어 런던과 파리를 비롯한 여러 곳을 전전하며 지냈다. 벨리니는 그 어느 곳에 있던지 플로리모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지냈다. 벨리니는 자기에게 처한 무슨 일이던지 소상하게 편지에 적어서 플로리모에게 전했다. 오늘날 벨리니가 플로로미에게 보낸 편지들은 벨리니 학자들이 벨리니를 연구하기 위해 참고로 삼고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나폴리음악원을 나온 벨리니는 오페라 작곡가로서 여러 곳에서 지냈지만 플로리모는 계속 나폴리에 머물러 있었고 원래는 작곡이 전공이었지만 나폴리음악원에서 도서실장을 지냈다. 두 사람이 얼마나 가까웠느냐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보낸 편지의 서두를 보면 짐작할수 있다. '너의 존재는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라고 적은 경우가 많았다. 이렇듯 가까웠으면서도 벨리니가 나폴리를 떠난 후에 플로리모를 다시 만난 일은 한번 밖에 없었다. 1832년 하반기에 벨리니가 애인 주디타 투리나와 함께 나폴리를 다시 찾아와서 며칠 지낼 때에 만났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리니는 '플로리모야 말로 나의 유일한 벗이다. 나는 그에게서 유일하게 안식을 찾는다'라고 선언하였다. 벨리니가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은 벨리니의 유산을 지키고 정리할 사람은 플로리모 뿐이라고 말하며 그를 벨리니의 정신적인 상속자로 간주하였다. 그리하여 플로리모가 벨리니와 관련된 모든 자료의 관리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벨리니와 플로리모가 주고 받았던 수많은 편지들은 현재 거의 모두 카타니아의 벨리니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카타니아의 벨리니기념관 전시실

 

벨리니는 나폴리음악원을 졸업하고 그 학교에서 예비음악교사로 있을 때에 우연히 맛달레나 푸마롤리스라는 아가씨를 알게 되었다. 맛달레나는 나폴리에서 상당히 상류층에 속한 가정의 여식이었다.  벨리니는 어느날 마달레나 푸마롤리스의 집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벨리니도 잘 생겼지만 맛달레나도 무척 예쁘게 생긴 여자였다. 맛달레나의 아버지는 벨리니가 피아노도 잘 치는 음악가인것을 알고는 벨리니에게 맛달레나의 음악 가정교사가 되어 달라고 부탁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다. 벨리니와 맛달레나는 어느덧 사귀는 입장이 되었다.  맛달레나의 부모는 두 사람이 사귄다는 것을 알자 벨리니가 더 이상 맛달레나를 만나지 못하도록 했다. 결국 벨리니는 가정교사 자리에서 쫒겨났다. 벨리니는 오페라를 작곡해서 유명해지면 맛달레나 아버지로부터 호감을 얻어서 맛달레나와의 결혼을 허락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하여 만들어 낸 것이 비록 일반극장이 아니라 음악원 극장에서 공연된 것이지만 '아델손과 살비니'였다. 아델손과 살비니'는 너무나 재미있기 때문에 그후부터 그해가 저물도록 매주 토요일에 학교 극장에서 의례껏 공연되는 작품이 되었다. 그후 벨리니는 친구를 통해서 맛달레나의 아버지에게 결혼을 허락해 달라는 요청을 넣었다. 맛달레나의 아버지는 결혼을 허락하기는 커녕 그동안 벨리니가 맛달레나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두 찾아서 벨리니의 사절로 갔던 친구에게 던져주면서 '우리 딸은 피아노나 치는 가난한 사람과 절대로 결혼할수 없다'고 선언했다. 기록에 따르면 맛달레나 아버지는 벨리니를 suonatore di cembalo(쳄발로의 소음을 내는 사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벨리니는 더 유명해져야 겠다고 마음 먹고 '비안카와 제르난도'를 열심히 작곡했다. '비안카와 제르난도'는 나폴리의 산 카를로에서 공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로써 벨리니의 이름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얼마후 맛달레나의 아버지는 벨리니가 '비안카와 제르난도'로서 성공을 거두었고 그만하면 상당히 관찮은 청년이라는 소리를 들었던지 생각을 달리했다고 한다. 그래서 벨리니의 친구에게 '벨리니가 다시한번 청혼해 온다면 생각은 해 보겠다'라고 넌지시 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맛달레나 아버지의 그런 언질은 너무 늦게 벨리니에게 전달되어서 어떤 액션이 취해지지는 못했다.

 

벨리니의 '비안카와 페르난도'. 스위스 바젤 오페라 무대. 벨리니의 두번째 오페라이다. 벨리니는 맛달레나와 결혼하기 위해 이 작품도 열심히 썼다.

 

벨리니는 밀라노에서 '해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벨리나의 이름은 이탈리아의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얼마후 제노아에서 '비안카와 페르난도'를 공연하겠다는 요청이 왔다. 벨리니가 밀라노에서 제노아로 가려고 할때에 나폴리에서 맛달레나의 아버지로부터 편지가 왔다. 벨리니의 청혼을 거절했던 것을 철회하였으니 그리 알아달라는 내용이었다. 결국 다시 청혼하면 받아 들이겠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그때 벨리니는 이제 겨우 오페라 작곡가로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기 때문에 연애고 결혼이고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더구나 나폴리와 밀라노는 거리적으로 너무나 떨어져 있었다. 바야흐로 밀라노에서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한 벨리니로서 자기를 거부했던 맛달레나에게만 신경을 쓸수는 없었던 노릇이었다. 벨리니는 나폴리에 있는 친구 플로리모를 통해서 맛달레나 아버지의 새로운 제안을 거절한다고 전했다. 이유는 경제적으로 아직 안정이 되지 않아서 맛달레나와 결혼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후 맛달레나가 직접 세번이나 편지를 보내서 제발 그러지 말고 자기와 결혼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벨리니의 마음을 돌리는 데에는 실패했다.

 

주디타 투리나

 

그 다음 여인은 밀라노의 주디타 투리나였다. 벨리니는 주디타와 1828년부터 5년 동안 뜨거운 관계에 있었다. 벨리니는 주디타를 그의 저택에서 열린 무슨 리셉션에서 만나 상호간에 호감을 갖게 되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그후 주디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리니를 잊지 못해서 마침 제노아에서 '비안카와 페르난도'의 공연이 계획되어 있어서 벨리니가 제노아에 가서 있게되자 일부러 시간을 내어 제노아로 가서 벨리니와 며칠을 함께 지냈다. 두 사람의 뜨거운 관계는 벨리니가 파리로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하기야 주디타의 결혼은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내키지 않는 결혼을 할수 없이 했던 것이다. 그러니 무어라무어라해도 주디타 부부의 관계는 무관심한 것이었다. 주디타의 남편은 주디타가 벨리니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묵인하였다. 벨리니는 친구 플로리모에게 주디타와 연인관계를 지속하는 것에 대하여 만족한다고 말했다. 결혼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벨리니는 결혼을 하게 되면 가정에 속박되어서 자기의 본업이 작곡에 소홀할수도 있다는 입장이었다.

 

밀라노의 라 스칼라극장. 벨리니의 오페라들이 주로 초연되었던 곳이다.

 

그러다가 1833년 5월에 벨리니가 런던에 있을 때에 예상되었던 문제가 생겼다. 주디타의 남편 페르디난도는 벨리니가 주디타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금 그대로의 관계로 지내자는 내용을 보고 이래가지고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주디타의 남편은 주디타에게 더 이상 부부로 지낼 필요가 없으니 이혼하자고 제안했고 이어서 당장 자기 집에서 나가라고 요구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벨리니로서는 어떤 단안을 내려야했다. 주디타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 입장일수도 있었다. 그러나 벨리니는 결혼에 대하여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그래서 주디타와의 관계를 냉냉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벨리니가 이듬해에 파리에서 친구인 플로리모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벨리니의 심정을 충분히 알수 있다. 벨리니는 '밀라노의 주디타로부터 파리로 오겠다는 위협을 계속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만일 주디타가 파리로 온다면 자기는 파리를 떠나겠다고까지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주디타와의 관계가 이렇게 고통스럽게 진행될 줄은 몰랐다'며 일종의 후회의 심정을 내비치기도 했다. 하여튼 이같은 사건이 있자 벨리니는 어느 누구하고도 장기간에 걸친 감정적 관계를 약속하 않게 되었다. 결국 결혼을 하지 않고 지내기로 한 것이다. 한편, 주디타는 플로리모를 통해서 계속적으로 벨리니와 연결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운명이 두 사람을 연결해 주지 않았다. 벨리니는 건강이 악화되어 1835년 9월에 세상을 떠났다. 주디타는 벨리니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계속 플로리모와 연락하며 지냈다. 그러다가 거의 40년이 지난 1871년에 밀라노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번째 여인은 무명의 여인이었다. 파리에서 벨리니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결혼이나 해 볼까라고 생각했던 여인이었다. 벨리니가 친구인 플로리모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벨리니는 만일 그 여인의 삼촌이 그 여인에게 결혼자금으로 상당액(20만 프랑)을 준다면 결혼해도 관찮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당장 일어나지 않아서 결국 결혼을 없던 일로 되었고 더구나 벨리니는 병마와 싸우고 있는 중이어서 결혼에 대한 생각은 점점 사라졌다.

 

오늘날의 쀼또. 벨리니가 파리에서 말년을 보낸 지역이다. 사진은 뽕 드 쀼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