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카타니아의 벨리니

라 스칼라의 해적

정준극 2015. 8. 7. 17:19

라 스칼라의 해적

 

일반적으로 이탈리아 반도는 남부와 북부로 구분할수 있다. 남부는 시실리와 나폴리 등을 포함한다. 북부는 베니스, 밀라노, 토리노, 피렌체 드리고 로마도 북부에 포함한다. 북부는 상업과 공업이 발달하였고 남부는 농업이 경제활동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남부보다도 북부의 생활수준, 문화수준, 경제수준이 높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오페라에 있어서도 북부에서의 활동이 활발하다. 북부의 피렌체(플로렌스)에서 오페라가 처음 시작되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수 있는 일이다. 남부의 시실리 출신인 벨리니는 남부지역의 나폴리에서 음악가로서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으나 '말은 어디로 보내고 사람은 어디로 보내라'는 말과 같이 벨리니도 어차피 북부에 가서 활동을 해야 했다. 그런 중에 나폴리에서 '비안카와 제르난도'가 발표되었을 때 마침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장이 구경을 왔었고 벨리니의 재능에 탄복하여 벨리니와 오페라 계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벨리니는 26세 때인 1827년에 밀라노로 갔다. 벨리니는 밀라노에서 1831년까지 4년 동안 네 편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을 완성했다. 라 스칼라를 위해서 '해적'(Il pirata), '이상한 여인'(La straniera), '노르마'(Norma)를 작곡했고 밀라노의 카르카노극장을 위해서는 '몽유병자'(La sonnambula)를 작곡했다. 벨리니는 라 스칼라 또는 카르카노 극장에서 어떤 직책도 갖지 않았다. 밀라노에서 개인교사를 한다든지 등의 다른 직업도 갖지 않았다. 오로지 오페라 작곡만을 위해 전념했다. 벨리니는 오페라 작곡료만 받아서 충분히 생활을 하였다. 비록 젊은 나이였지만 당시의 어느 다른 작곡가들보다 더 높은 사례를 받았다.

 

벨리니가 밀라노의 라 스칼라를 위해 처음 작곡한 '해적'(일 피라타). 테너 프랑코 코렐리와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 라 스칼라.

 

벨리니는 밀라노에 도착하자 사베리오 메르카단테를 만나게 되었다. 마침 라 스칼라에서 메르카단테의 '일 몬타나로'(Il Montanaro)가 리허설 중이었다. 메르카단테와 벨리니는 모두 나폴리의 산세바스티아노음악원 출신이므로 서로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얼마후 메르카단테는 벨리니에게 프란체스코와 마리안나 폴리니(Francesco & Marianna Pollini) 부부를 소개했다. 프란체스코 폴리니는 은퇴한 피아노 교수였고 마리안나 폴리니는 아마추어 이상의 음악가였다. 노부부는 벨리니의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었다. 벨리니는 밀라노에서 대본가인 펠리체 로마니(Felice Romani)도 만났다. 펠리체 로마니는 벨리니를 위해서 '해적'(일 피라타)의 대본을 쓰겠다고 제안했다. 대본을 읽어본 벨리니는 스토리가 열정에 넘쳐 있으며 드라마틱한 상황도 자주 등장하므로 대만족하다고 말했다. 라 스칼라에서의 '해적'은 대성공이었다. 그로부터 로마니와 벨리니는 음악적으로 굳건한 관계가 되었다. 로마니는 벨리니를 위해서 여섯 편의 대본을 제공했다. 물론 펠리체 로마니는 토털 100편에 이르는 오페라 대본을 써서 당대의 내노라하는 수많은 작곡가들에게 제공한바 있다. 벨리니를 위해서는 앞서 말한 '해적' 이외에도 '비안카와 페르난도'('비안카와 제르난도'의 수정본), '이상한 여인', '차이라', '캬퓰레티가와 몬테키가', '몽유병자', '노르마', '텐다의 베아트리체'의 대본을 썼다. 결국 벨리니의 오페라들은 거의 모두 펠리체 로마니의 대본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훗날 베르디는 벨리니에 대하여 '벨리니만큼 한 사람의 대본가에게 모든 것을 의지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벨리니는 로마니의 대본에 대하여 '우아하고 물흐르는 듯한 시이다'라며 찬사를 아까지 않았다. 로마니는 수많은 오페라 대본을 써서 수많은 작곡가들에게 제공했지만 성격이 까다롭기로 유명해서 혹시라도 어떤 작곡가가 대본을 이리저리 고쳐 달라고 요구할 것 같으면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나 원 참..'이라면서 무시하기가 일수였다. 그래서 작곡가들로서는 로마니의 대본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그의 성격때문에 가까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그런 로마니이지만 벨리니에 대하여는 어쩐 일인지 관대하고 순종하기를 기꺼이하였다. 그래서 벨리니가 대본의 수정을 요청하면 두말하지 않고 벨리니의 마음에 맞게 얼른 수정해 주었다. 그런 로마니에 대하여 벨리니는 한없는 존경을 보냈다. 벨리니는 밀라노에서 상류사회에 쉽게 동화되었다. 젊고 핸섬하게 생긴 뛰어난 재능의 작곡가는 어디를 가던지 환영을 받았던 것이다. 벨리니는 밀라노의 상류사회 중에서 특별히 투리나 가족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 집에 가서 한두달씩 머물기도 했다. 벨리니는 투리나 집안의 영애인 주디타와 특별히 사귀는 관계에 있었다. 벨리니가 밀라노에 온지 1년이 지나서의 일이었다. 그때 벨리니는 제노아에서 '비안카와 페르난도'의 공연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물론 벨리니의 첫번째 연애상대인 나폴리의 마달레나 푸마롤리스와 마찬가지로 밀라노의 주디타 투리노와의 관계도 결론을 내지 못하고 흐지브지되었다.

 

벨리니와 콤비를 이루었던 대본가 펠리체 로마니(1788-1865). 로마니는 벨리니보다 13세 연상이었지만 더 할수 없이 가까운 친구로서 지냈다.

 

벨리니는 '해적'이 성공을 거두자 밀라노에 계속 있으면 어디선가는 분명히 또 다른 오페라의 작곡을 의뢰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얼마후 그런 요청이 있었다. 그런데 밀라노가 아니라 제노아에서였다. 라 스칼라의 매니저인 바르톨로메오 메렐리를 통해서 요청이 들어왔다. 메렐리는 나중에 베르디에게 '나부코'를 작곡토록 적극 권유하여 결국 베르디를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로 데뷔시킨 인물이다. 제노아에서의 요청은 1828년 1월 말에 받았다. 그런데 그해 4월 초까지 완성해 달라는 것이었다. 더구나 어떤 역할을 어떤 성악가가 맡게 된다는 암시도 없었다. 벨리니는 처음에 내키지 않아했다. 그러나 라 스칼라로부터 아무런 작품 의뢰가 없으므로 무언가 해야하기 때문에 승낙하지 않을수 없었다. 다만, 문제는 그때부터 두어 달 안에 새로운 오페라를 완성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었다. 벨리니는 나폴리에서 발표했던 '비안카와 제르난도'를 대폭 수정하겠다고 제안했다. 다만, 제목은 원래대로 '비안카와 페르난도'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때에는 사보이 왕실에 페르난도라는 이름의 왕족이 없었기 때문에 페르난도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벨리니와 로마니는 '비안카와 페르난도'의 대폭 수정 작업에 들어갔다. 거의 모든 파트를 고쳤다. 다만, 유명한 듀엣인 로만짜 '일어나세요, 오 아버지'(Sorgi, o padre)는 그대로 두었다. 음악도 거의 모두 새로 썼고 대본도 거의 모두 새로 썼다. 다만, 줄거리만 변함이 없었다.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비안카와 페르난도'는 마침내 4월 7일에 제노아의 카를로 펠리체 극장에서 초연 아닌 초연을 갖게 되었다. 나폴리에서보다 더 큰 성공이었다. '비안카와 페르난도'는 초연 이래 같은 극장에서 21회의 계속 공연을 가졌다. 제노바의 신문들은 '벨리니의 음악을 들으면 들을수록 정말 감탄하지 않을수 없다'고 썼다.

 

'비안카와 페르난도'에서 비안카역의 카티아 펠레그리노

 

벨리니는 4월 말까지 제노아에 머물다가 더 이상 별로 할 일도 없어서 밀라노로 돌아왔다. 그러나 라 스칼라 또는 다른 극장으로부터 오페라 작곡 의뢰가 말처럼 쉽게 오지 않았다. 벨리니는 '오페라 작곡에 대한 의뢰가 들어오지 않으면 무얼 먹고 산단 말인가?'라며 걱정을 했다. 그러다가 마침 라 스칼라로부터 카니발 시즌을 위한 오페라를 작곡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때 쯤해서 벨리니는 더 이상 무명의 작곡가가 아니었다. 벨리니는 라 스칼라와 협상을 잘 해서 상당한 액수의 작곡료를 받을수 있었다. '해적'은 150 듀카를 받았는데 새로운 작곡을 위해서는 무려 1천 듀카를 받았던 것이다. 그 정도면 당분간 걱정 없이 지낼수 있었다. 그렇게 하여 나온 것이 '이상한 여인'(La straniera)이었다. 역시 펠리체 로마니가 대본을 맡았다. 원래는 1828년 12월 26일의 시즌 오픈에 공연될 예정이었으나 로마니가 뜻하지 아니하게 잠시 병마와 싸우는 바람에 지연되어서 이듬해인 1829년 2월에 가서야 공연될수 있었다. 라 스칼라에서의 '이상한 여인'은 그야말로 떠들석한 성공이었다. 대성공을 이룰수 있었던 것은 음악도 좋고 대본도 좋았던 것도 이유였지만 출연 성악가들이 정말로 열심을 다하여 노래를 부르고 연기를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출연 성악가들이 형편없이 공연하면 실패로 돌아갈수 밖에 없는 일는 노릇이었다.

 

벨리니의 다음 작품은 볼테르 원작의 '자이라'(Zaira)였다. 파르마의 공작극장(Teatro Ducale: 현재는 왕립극장: Teatro Regio)의 오프닝을 위한 작품이었다. 1829년 5월 16일에 초연되었다. 그런데 '자이라'는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은 벨리니 자신이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작곡을 했기 때문이다. 원래 계획은 파르마를 위해 '보르고냐의 카를로'(Carlo di Borgogna)라는 제목의 오페라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런데 볼테르의 '자이르'(Zaire)가 유럽 전역에서 상당한 관심을 끌게 되자 이 작품을 바탕으로 오페라로 만들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시간도 부족한 입장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 같았다. 또 하나의 이유는 당시 파르마 사람들은 로시니에 열광하고 있었다. 로시니에 대한 열광은 비단 파르마 뿐만이 아니라 전 이탈리아를 뒤덮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 때문에 벨리니라는 젊은이가 파르마에 '자이라'를 가지고 오자 별로 반가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대본을 맡은 로마니는 볼테르의 원작 극본을 오페라 대본으로 만드는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토로했다. 로마니는 혹시나 사람들이 '아니, 전에 만든 대본들은 내용이 훌륭하던데 이번에 만든 자이라인지 뭔지는 신통치 않습니다'라고 말할 것 같아서 미리 '대본가의 변'이라는 유인물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유인물에는 역시 볼테르의 원작을 오페라 대본으로 만드는데 어려움이 많았다는 변명 아닌 변명이 설명되어 있었다. 한편, 연습도 대단히 부족했다. 벨리니는 파르마에 초연 예정일로부터 56일 전에 도착했다. 그때부터라도 리허설을 해야 무대에 올릴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몇몇 주연급 성악가들은 자기들의 스케줄로 인해서 초연 14일 전에야 파르마에 온다는 것이다. 벨리니와 로마니는 가능한한 초연의 날짜를 연기하려고 애썼지만 극장 사정상 도무지 연기가 가능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정사정해서 겨우 4일을 연기했다. 이러니 리허설이 부족하여서 제대로의 공연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초연 이후 신문들은 '음악이 취약했다'고 떠들어 댔다. 그래도 몇몇 아리아와 중창들은 박수를 많이 받았다. 작곡자는 박수를 받지 못했지만 성악가들은 박수를 많이 받았다. '자이르'는 파르마에서 8회의 연속 공연을 가진후 막을 내렸다. 그후 1836년에는 플로렌스에서 리바이발 되었는데 아쉽게도 별로 뜨거운 반응을 받지 못했다. 그후 '자이르'는 자취를 감추었다가 거의 150년이 지난 1976년에 나타났다.

 

'자이라'의 한 장면

 

살다 보니까 별별 일도 다 있지만, 벨리니에게도 라이발이 있어서 속상하게 만든 일이 있었다. 상대방은 같은 고향인 카타니아 출신의 조반니 파치니(Giovanni Pacini: 1796-1867)였다. 벨리니가 밀라노에 근거를 두고 이리저리 활동하고 있을 때에 파치니도 밀라노에 정착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파치니의 '부적'(Il talismano 또는 La terza crociata in Palestina)이라는 오페라는 1829년에 라 스칼라에서 초연되어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부적'은 초연 이후 16회의 계속 공연을 가졌다. 파치니가 이곳저곳에서 오페라 주문을 받을수록 벨리니는 별로 할일도 없이 위축되어야 했다. 그래서 자연히 라이발 관계가 형성되었다. 파치니는 벨리니보다 다섯 살 위였다. 그러면 같은 고향 사람이고 하니 선배로서 후배를 좀 돌보아 주어야 할것이지 그렇기는 커녕 혹시라도 벨리니가 더 유명해지지나 않을까해서 경계였다. 파치니는 밀라노에서 '부적' 등으로 인기를 얻자 토리노와 베니스로부터 카니발 시즌을 위한 오페라 주문을 받았다. 그런데  베니스는 파치니와 계약을 맺으면서 '만일 무슨 일이 있어서 작곡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 벨리니에게 의뢰하겠다'는 내용을 넣었다. 이것도 역시 벨리니에게 있어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때 벨리니는 밀라노의 카노비아나 극장에서 '해적'을 리바이발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원래 라 스칼라에서 리바이발 하려고 했으나 라 스칼라가 대대적인 보수공사에 들어갔기 때문에  카노비아나에서 공연하게 되었던 것이다. 카노비아노에서의 '해적'은 대성공이었다. 연속 24회 공연을 가질 정도였다. 벨리니는 파치니의 '부적'이 연속 16회의 공연으로 마감한 것을 생각하고 마음 속으로 대단히 흡족하게 생각했다. '해적'이 카노비아나 극장에서 공연되고 있을 때 로시니가 관람을 왔었다. 그때 벨리니는 처음으로 로시니를 만났다. 두 사람은 어쨋든 서로 마음이 끌렸다. 그후 벨리니가 파리에 갔을 때 로시니와 대단히 친밀하게 지낸 것도 밀라노에서의 만남 때문이었다.  

 

벨리니가 로시니를 처음 만난 것은 1829년 여름 밀라노에서였다. 로시니는 벨리니의 '해적'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서 앞으로 훌륭한 작곡가가 될 것으로 믿었다. 나중에 벨리니가 파리에서 지낼 때에 로시니와 대단히 가깝게 지냈다. 로시니는 벨리니보다 아홉살 위였다.

 

베니스의 라 페니체의 임프레사리오가 느닷없이 벨리니에게 연락을 해 왔다. 파치니인지 파김치인지 아무래도 라 페니체와의 약속을 못 지킬것 같으니 대신 오페라 한편을 급히 준비해 달라는 전갈이었다. 벨리니는 로마니가 이미 대본을 써 놓츤 줄리에타 카펠리오(Giulietta Capellio)를 오페라로 만들 생각을 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한 스토리였다. 마침 로마니는 베니스에 가서 있었다. 베니스는 벨리니에게 나폴리 돈으로 325 금화를 주기로 했다. 이 돈이 요즘 돈으로 얼마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상당히 파격적인 조건임에는 틀림 없었다. 로마니는 곧바로 대본을 편집하기 시작했다. 제목은 '캬퓰레티가와 몬테키가'(I Capuleti e i Montecchi)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1830년 3월 11일 베니스의 카니발과 연계하여 '캬퓰레티가...'가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다. 대성공이었다. 마치 짙게 가렸던 구름이 걷히는 듯한 성공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캬퓰레티가...'는 연속 8회의 공연으로 막을 내려야 했다. 라 페니체의 시즌이 끝나야했기 때문이었다. 벨리니의 명성을 더 높아졌다.

 

'캬퓰레티가와 몬테키가'. 안나 네트렙코(줄리에타)와 엘리나 가란차(로메오). 로메오는 남자가 아니라 메조소프라노가 맡도록 되어 있다.

 

베니스에서 '캬퓰레티가...'로서 대성공을 거둔 벨리니는 밀라노가 또 무슨 일을 맡기지 않을까해서 밀라노로 돌아왔다. 그때 라 스칼라는 경영상의 복잡함으로 두 파로 갈라져서 다투고 있었다. 리타 공작이 이끄는 그룹과 바르바자 등이 이끄는 그룹이 대결하고 있었다. 결국 종래의 바르바자 그룹이 우세하여 라 스칼라의 운영권을 유지하게 되었다. 쿠테타를 일으켰던 리타 공작 그룹은 밀라노에서 비교적 작은 극장에 속하는 카르카노 극장(Teatro Carcano)을 운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벨리니는 카르카노 극장과 계약을 맺는 한편, 라 스칼라와도 1831년 가을과 1832년 카니발 시즌을 위해 새로운 계약을 맺게 되었다. 카르카노 극장과의 계약으로 저 유명한 '몽유병자'가 탄생하게 되었고 라 스칼라와의 추가 계약으로 역시 저 유명한 '노르마'와 '텐다의 베아트리체'가 나오게 되었으니 이 즈음이야말로 벨리니로서는 전성기가 아닐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전성기에 들어선 벨리니였지만 병마와의 싸움에 있어서도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심한 위장장애였다. 벨리니가 적어 놓은 내용에 따르면 '뱃속이 불길에 타는 듯이 아팠다'는 것이었다. 젊은 사람이 무슨 고생인지 모를 일이었다. 벨리니는 아무 일도 못하고 집에 있었는데 마침 옛날 나폴리에서 벨리니를 친 자식처럼 여기고 돌보아주던 프란체스코 폴리니 부부가 찾아왔다가 '아니 이거 사람 죽게 생겼지 않은가!'라고 소리친후 벨리니를 그들의 집으로 데려가서 지극정성으로 간호해 주었다. 결과, 몇 달 후에는 벨리니의 건강이 회복되었다. 이제 벨리니는 코모 호수 인근에서 요양하면서 라 스칼라를 위해 과연 어떤 오페라를 만들어야 할지 고민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가지는 결정되었다. 주역 소프라노는 주디타 파스타(Giuditta Pasta)가 맡는다는 것이었다. 주디타 파스타는 카르카노 극장의 '몽유병자' 초연에서 아미나 역을 맡아서 대단한 박수갈채를 받은바 있다.

 

'몽유병자'에서 아미나역의 제니 린드

 

'몽유병자'의 초연에는 마침 러시아 국민오페라의 선구자인 마히일 글링카가 와서 보았다. 글링카는 '아미나를 맡은 파스타와 엘비노를 맡은 테너 조반니 바티스타 루비니는 그야말로 감동적인 노래와 연기를 선보였다. 2막에서 두 사람은 정말로 눈물을 흘리면서 노래를 불러서 모든 관중들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고 들어갔다'고 말했다. 신문들도 앞을 다투어서 '몽유병자'에 대하여 찬사를 보냈다. 1833년의 런던 초연에서는 아미나를 유명한 마리아 말리브란(Maria Malibran)이 맡았다. 그후 1840년대에는 스웨덴의 나이팅게일이라는 제니 린드가 아미나를 맡아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후에는 또 마리아 칼라스가 맡아서 다시한번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오늘날 아미나를 맡는 것은 모든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들의 간절한 소망이다. '몽유병자'로 성공을 거둔 벨리니-로마니 콤비는 곧이어 다음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노르마'가 결정되었다. 프랑스의 알렉산드르 수메(Alexandre Soumet)의 극본인 '노르마' 또는 '유아살해(L'Infanticidio)는 파리에서 연극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것을 주디타가 파스타가 보았던 모양이다. 파스타는 벨리니에게 '아, 정말 감동적이었어요...어쩌구 저쩌구'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했다. 그래서 벨리니와 로마니는 '노르마'(또는 유아살해: L'Infanticidio)를 오페라로 만들기로 작정했다. 라 스칼라에서의 초연에서는 주인공인 노르마를 당연히 주디타 파스타가 맡았고 또 다른 여주인공인 아달지사는 주디타 파스타의 여동생인 줄리아 그리시(Giulia Grisi)가 맡았다. 로마군 사령관인 폴리오테는 테너 도메니코 돈첼리가 맡았다. 그는 로시니의 여러 오페라에 등장하여 실력을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근자에는 '오텔로'에서 타이틀 롤을 맡았었다. '몽유병자'는 초연에서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관중들은 차가운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기 시작했다. 라 스칼라에서 초연 이후 39회의 연속공연을 기록한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노르마'의 한 장면. 캔사스시티 오페라. 폴리오네가 켈트족에게 사로 잡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