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오페라 작곡가 일화

위대한 작곡가들의 뿌리를 찾아서 - 1

정준극 2015. 8. 25. 20:51

믿거나 말거나...위대한 작곡가들의 뿌리를 찾아서

 

○ 헨델은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영국으로 귀화하여 영국인이 되었다.

 

바로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인 조지 프리데릭 헨델(George Frideric Handel: 1685-1759)이 독일에서 태어난 독일 작곡가이지만 나중에 뜻한바 있어서 영국으로 건너거 정착하고 마침내 영국으로 귀화하여 영국시민이 되었으므로 영국 작곡가로서 알려져 있다는 것은 대개가 잘 아는 사항이다. 음악가 중에서 국적을 바꾼 경우는 허다하다. 특히 나치를 피해서 미국이나 제3국으로 망명하여 국적을 바꾼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들은 대체로 정치적인 국적변경이지만 헨델의 경우는 그냥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헨델은 독일 마그데부르크 공국의 할레(Halle)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게오르그 헨델은 이발사 겸 외과의사였다. 당시에는 이발사가 외과의사를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잘 드는 가위를 들고 일하기 때문인것 같았다. 아무튼 헨델의 아버지 게오르그 헨델은 상딩히 명망있는 이발사여서 작세 봐이센펠스 궁전과 브란덴부르크 영주의 궁전에서 봉사했다. 아버지 게오르그 헨델은 원래 변호사가 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게오르그 헨델이 14살 때에 아버지 발렌티네 헨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변호사가 되려는 꿈을 접고 먹고 살기 위해 이발사가 되었다. 그러나 게오르그 헨델은 남들처럼 정식으로 의학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의사로서 행세는 하였으나 사람들이 그를 '의사 선상님'이라고 부르면 그러지 말라고 막았다. 그레서인지 게오르그 헨델은 나중에 아들 헨델에게 '음악은 무슨 얼어죽을 음악이냐? 나는 못했지만 너는 법학을 공부해서 변호사가 되어라'라고 강요했다고 한다.

 

독일 할레에 있는 헨델의 생가

 

헨델의 아버지인 게오르그 헨델은 21세 때인 1643년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12년 연상의 과부인 안나 카테(Anna Kathe)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비록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금슬이 좋아서 슬하에 6자녀를 두었으며 할레의 남쪽에 있는 잘크라이스(Saalkreis) 마을에서 오붓하게 살았다. 그러다가 1657년에 작세 봐이센펠스 공작인 아우구스트의 주치의로 임명되어 그로부터 생활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거의 10년 후에 게오르그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여관을 하나 샀다. '황금 사슴'이라는 간판의 여관이었다. 또 몇 년 후에는 영주로부터 포도주 판매 허가를 받았다. 그건 상당히 수지가 맞는 사업이었다. 생활을 나아졌지만 게오르드의 첫번째 부인인 안나 카테는 나이가 점점 많아짐에 따라 건강도 여의치 않아서 1682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안나 카테가 72세였고 게오르그 헨델이 60세였다. 아버지 게오르그는 뜻한바 있어서 첫번째 부인 안나가 세상을 떠난 다음해에 재혼을 하였다. 상대는 인근 기비헨슈타인(Giebichenstein) 마을의 루터교회 목사님의 딸인 도로테아 파우스트(Dorothea Taust: 1651-1730)였다. 도로테아는 게오르그 헨델보다 거의 30년 연하로서 결혼할 때 31세였다. 아무튼 게으로그와 도로테아는 결혼 후에 자녀 생산에도 주력하여 결혼 이듬해인 1685년에 우리의 헨델이 태어났고 이어 딸 둘을 더 두었는데 망내 딸은 어릴 때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의 헨델이 태어 났을 때 아버지 게오르그의 나이는 우리식으로 보면 환갑이 훨씬 지난 63세였다. 노익장!

 

헨델의 아버지 게오르그 헨델. 이발사 겸 외과의사였다.

 

헨델의 아버지인 게오르그는 어린 헨델에게 법학을 공부해서 훌륭한 변호사가 되거나 공무원이 되라고 강요했다. 자기가 이루지 못한 꿈을 아들이 이루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그래서 혹시라도 헨델이 악기를 가지고 연주를 한다든지 하면 당장 악기를 빼앗으며 '다시는 그러지 말라'면서 엄격히 경고하였다. 그러나 헨델에게는 법보다는 음악이 더 가까웠다. 작은 클라피어코드(Clavierchord) 하나를 구해서 다락방에 올라가서 혼자서 연습하기를 밥먹듯이 했다. 그리하여 헨델은 10살이 조금 넘은 소년 시절에 이미 재능있는 하프시코드 연주자, 파이프 오르간 연주가, 작곡가가 되었다. 그래도 아버지 게오르그는 헨델의 이런 음악성향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중 어느날 헨델은 아버지와 함게 봐이센펠스에 사는 이복 형제 칼과 조카 게오르그 크리스티나를 만나러 간 일이 있다. 이들은 봐이센펠스 공작궁에서 시종으로 봉사하고 있었다. 이리저리해서 헨델이 공작의 앞에서 오르간을 연주하게 되었다. 어린 헨델은 의자가 높에서 제대로 앉지 못하자 어떤 귀부인이 헨델을 들어 올려 의자에 앉혀 주었다. 놀라운 재능의 연주였다.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공작은 헨델의 아버지인 게오르그에게 '이런 재능이 있는데 왜 음악 공부를 시키지 않느냐?'면서 책망했다. 그리하여 헨델은 할레에 있는 마리아교회(Marienkirche)의 오르가니스트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차호프로부터 화성악과 대위법은 물론 오보에, 바이올린, 하프시코도, 오르간 등등도 배우기 시작했다. 세월이 흘러 헨델은 이탈리아에 가서 공부도 하고 오페라도 작곡하다가 아무래도 이탈리아보다는 영국에서의 밥벌이가 더 나을 것 같아서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마침내 1712년에 런던에 정착하였고 15년 후인 1727년에 영국 시민이 되고자 귀환신청을 하였다. 이때 이름도 Frederick(프레데릭)을 영국식으로 Frideric(프리데릭)으로 고쳤고 Händel이라는 단어의 움라우트가 영어에는 없으므로 그냥 Handel 로 사용키로 했다.

 

할레의 마리아교회(마리엔키르헤). 어린 헨델이 음악공부를 시작한 곳이다.

 

헨델이 런던에 정착하여서 활동할 때에 여러가지 사건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헨델의 이탈리아 오페라들이 대단한 환영을 받았으나 나중에는 영국 자체의 오페라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여 헨델의 오페라들은 인기를 끌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헨델은 오라토리오 등으로 방향을 돌렸던 것이다. 그때 런던에서는 헨델을 지지하는 축과 새로 만들어진 오페라단 간의 경쟁과 갈들이 심했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은 헨델에게 '당신은 독일 사람인데 독일에 가서 먹고 잘것이지 왜 런던에 와서 이 야단이냐?'면서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헨델을 후원해 주던 왕족들도 헨델로 부터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헨델로서는 왕의 신임을 다시 받기 위해 '수상음악' '왕궁의 불꽃 놀이'등을 작곡해서 관심을 되돌려 놓았다고 한다. 헨델은 영국 시민이 되고나서 32년을 더 살다가 1759년에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4세였다. 헨델의 묘소는 웨스스민스트 사원에 마련되었다. 영국인으로서 최고의 영예였다. 헨델은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 헨델은 유언에서 재산의 대부분을 조카인 요한나에게 주도록 했다. 그러나 또 다른 유언장(Codicil)이 나타나서 이에 따라 헨델의 재산은 친척, 하인, 친구, 자선단체에 골고루 배분되었다. 헨델이 수집했던 그림 등은 사후인 1760년에 경매에 붙여졌다. 그림 70점, 판화 10여점 등이었다.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내에 있는 헨델의 묘소. 헨델이 '메시아'를 작곡하고 있는 모습이다. 악보의 노래는 '메시아' 3부에서 '내 주는 살아 계시고'이다.

 

○ 모차르트의 조상들을 독일 바바리아의 아우구스부르크 출신들이다.

 

'음악의 신동'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는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순수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곡가로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모차르트의 아버지와 그 선조들은 대대로 독일 바바리아의 아우구스부르크에 정착해서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모차르트를 오스트리아의 음악가라기 보다 독일의 음악가라고 주장해도 할 말은 별로 없다. 잘 아는대로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레오폴드 모차르트(Leopold Mozart: 1719-1787)이다. 바바리아의 아우구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즉 모차르트의 할아버지는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책제본 일을 했던 요한 게오르그 모차르트(Johann Georg Mozart: 1679-1736)였다. 모차르트의 할아버지인 요한 게오르그 모차르트는 일찍이 상처하여서 안나 마리아 줄처(Anna Maria Sulzer)라는 여인과 재혼하였는데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레오폴드 모차르트, 즉 모차르트의 아버지이다. 레오폴드 모차르트는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음악적 재능이 있었던지 어릴 때부터 교회 찬양대원으로 활동하였고 예수회 학교에 다녔다. 그러다가 24세의 청년일 때에 잘츠부르크 대주교인 레오폴드 안톤 폰 피르미안 백작이 운영하는 오케스트라의 제4 바이올리니스트로 취직이 되어 잘츠부르크로 왔고 잘츠부르크에 온지 4년 후에 안나 마리아 페르틀(Anna Maria Pertl)이라는 여자를 알게 되어 잘츠부르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7남매를 두었다. 그중에서 5명은 어릴 때에 세상을 떠났고 모차르트와 누이 마리아 안나(난네를: 1751-1829)만이 생존하였다. 한편, 모차르트의 증조 할아버지인 프란츠 모차르트는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석공일을 했고 모차르트의 고조 할아버지인 다비드 모차르트는 역시 아우구스부르크에서 벽돌공의 일을 했다. 그리고 이분들의 선조들은 저 멀리 폴란드에서 독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확실한 기록은 없다. 하기야 벽돌공이라고 하면 폴란드 사람들을 따라갈 사람들이 없는 처지이므로 모차르트의 먼 조상들이 폴란드로부터 독일로 와서 벽돌공 일을 했다는 것은 이해가 된다. 아무튼 모차르트가 폴란드에 뿌리를 둔 인물이라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 아닐수 없다. 아우구스부르크는 오늘날 독일 남서부의 바이에른 주에 속한 도시로서 일찍이 로마시대에 조성된 유서 깊은 고도이다.

 

독일 바이에른주의 아우구스부르크. 모차르트의 선조들이 살았던 곳이다. 사진은 아우구스부르크 시청.

 

○ 바그너는 14세까지 계부를 친부인줄 알고 자랐다.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가장 특별한 작곡가인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는 태어난지 6개월만에 아버지를 잃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얼굴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자라났던 것이다. 라이프치히 경찰서의 서기로 일하던 리하르트 바그너의 아버지 칼 프리드리히 바그너(Carl Friedrich Wagner: 1770-1813)는 장티부스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어머니인 요한나 로지나 파에츠(Johanna Rosina Paetz)는 라이프치히에서 빵장사를 하는 사람의 딸이었다. 독일 작소니 안할트 지방의 봐이센펠스(Weissenfels)에서 태어난 바그너의 아버지 칼 프리드리히 바그너는 청년시절에 뜻한바 있어서 라이프치히로 와서 경찰서 직원이 되었다. 두 사람은 9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 중에서 두명은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9 자녀 중에서 막내였다. 그런데  어머니 요한나 로지나는 아버지가 장티부스로 세상을 떠난지 1년 후에 세상 떠난 남편 칼 프리드리히의 친구로서 드레스덴 출신의 배우 겸 극작가인 루드비히 가이어(Ludwig Geyer)와 재혼하였다. 혹자는 정식으로 재혼한 것이 아니라 그냥 동거하기 시작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결혼을 했다는 주장이 더 신빙성을 가지고 있다. 아무튼 어머니 요한나 로지나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지 1년 후에 남편의 친구 루드비히 가이어와 함께 아마 쪽팔려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라이프치히를 떠나 남편의 직장이 있는 드레스덴으로 가서 살았다. 그리하여 두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리하르트 바그너는 다른 형제들과 함게 드레스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14세가 되던 해까지 계부인 가이어가 친부인줄 알고 지냈다. 그래서 이름도 계부의 성을 따서 빌헬름 리하르트 가이어(Wilhelm Richard Geyer)라고 했다. 그러다가 친부가 두살 때에 세상을 떠난 경찰서 직원 칼 프리드리히 바그너라는 것을 알고 이를도 바그너로 정식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리하르트 바그너는 그런 특이한 가정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다음의 생애는 본 블로그의 '바그너'편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19세기의 드레스덴. 바그너는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으나 겨우 두살때에 드레스덴으로 이사와서 줄곧 살았다. 그러므로 바그너의 고향은 드레스덴이나 마찬가지이다.

 

○ 베토벤의 조상들은 네덜란드 사람들이었다.

 

'음악의 성인'이라고 하는 루드비히 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지만 그 선조들은 오늘날의 벨기에, 당시에는 합스부르크의 네덜란드에서 생활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악성 베토벤은 국적으로 볼때 오스트리아 사람도 아니며, 독일 사람도 아니고 실은 네덜란드 출신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에 본은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쾰른 선제후국의 수도였다. 베토벤은 사랑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22세의 청년으로 단신 비엔나로 와서 활동하다가 향년 57세로 현재 비엔나의 9구 알저그룬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베토벤의 아버지인 요한 베토벤(Johann Beethoven: 1740-1792)은 본의 쾰른선제후궁에서 테너로 봉사하던 사람이었다. 요한 반 베토벤은 주로 쾰른 대주교 관할의 대성당(쾰른돔)에서 찬양을 했지만 그러면서 부수입을 위해 피아노와 바이올린 레슨을 했다. 베토벤의 어머니인 마리아 막달레나 케베리히(Maria Magdalena Keverich: 1746-1787)는 독일 트리어(Trier)의 대주교궁에서 주방장으로 일하던 사람의 딸이었다. 그러다가 베토벤의 아버지 요한이 트리어에 연주를 위해 갔을 때 만나서 좋아지내게 되었고 1767년에 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베토벤의 아버지는 그때 27세였고 어머니 마리아 막달레나는 19세였다. 두 사람은 3남 1녀를 두었으며 우리의 베토벤은 장남이었다. 그건 그렇고, 베토벤의 할아버지는 이름이 로데비크 반 베토벤(Lodewijk van Beethoven: Lodewyck van Beethoven: 1712-1773)인데 음악을 좋아해서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 불렀으며 결국 20세 때에 네덜란드의 메헬렌을 떠나서 독일의 본으로 와서 쾰른선제후궁의 베이스 싱거로 활동한 사람이다. 그헐게해서 베토벤은 할아버지 때부터 본에 연고를 두고 살았던 것이며 베토벤의 아버지도 음악적 재능이 있어서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쾰른선제후궁의 테너 싱거로서 활동했고 피아노와 바이올린도 연주할줄 알아서 부수입을 위해 피아노와 바이올린 레슨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술을 너무 좋아해서 탈을 낸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으니 그가 세상을 떠나자 쾰른 선제후는 농담으로 '아 이제 쾰른에서 주류세가 많이 걷히지 않겠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독일 본의 베토벤 생가

 

베토벤의 할아버지가 네덜란드의 메헬렌에서 살다가 청년 시절에 독일의 본으로 와서 살기 시작했지만 베토벤의 증조 할아버지와 고조 할아버지는 메헬렌에서 목수일을 하던 사람이었다. 당시에 메헬렌은 합스부르크의 네덜란드에 속한 지역이었고 현재는 벨기에의 플란더스 지방에 속한 도시이다. 그래서 합스부르크의 네덜란드에 살던 사람들은 거의 모두 독일어를 사용했다. 베토벤의 고조 할아버지의 이름은 코르넬리우스 반 베토벤(Cornelius van Beethoven)으로 1716년에 세상을 떠났다고만 기록되어 있고 베토벤의 증조 할아버지는 미하엘 반 베토벤(Michael van Beethoven: 1684-1749)으로 1707년에 메헬렌에서 결혼하여 로데비크를 낳았으니 그가 베토벤의 할아버지이다. 베토벤의 증조 할아버지인 미하엘 반 베토벤은 메헬렌에서 살다가 아들 로데비크가 본에서 자리잡고 정착하자 아들과 함께 살기 위해 본으로 와서 살다가 본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기왕에 얘기가 나온 김에 부연하자면, 베토벤의 이름 앞에 붙은 반(van)이라는 단어는 더치(네덜란드) 호칭으로 베토벤의 가족들은 짐작컨대 15세기부터 '반'이라는 호칭을 사용한것이라는 얘기다. 베토벤의 증조할아버지는 메헬렌에서 목수 일을 했는데 메헬렌으로 이사 오기 전에 그의 조상들은 지금은 벨기에에 속한 랭부르(Limbourg)와 리에즈(Liege)에서 살았다고 하며 그때부터 '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독일어의 '폰'(von)은 귀족 가문을 뜻하는 것이며 '반'(van)은 평민 가문을 뜻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반'은 더치식 호칭일 뿐이다. 그리고 Beethoven이라는 이름에서 Beet는 비트의 뿌리(beetroot)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며 hoven은 원래는 저택의 내정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농토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러므로 베토벤이라는 이름은 비트를 경작하는 농토라고 번역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벨기에의 메헬렌. 베토벤의 조상들이 살던 곳이다. 당시에는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에 속했었다.

 

○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모라비아 농부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실레지아 출신의 하녀였다.

 

'가곡의 왕'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는 비엔나 토박이이다. 비엔나 중심가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힘멜포르트그룬트(Himmelpfortgrund)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집은 현재 비엔나 9구 알저그룬트(Alsergrund)의 누스도르퍼 슈트라쎄 54번지로서 기념관으로 되어 있다. 슈베르트는 비엔나에서 자랐고 비엔나에서 활동하다가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슈베르트가 비엔나 4구 뷔덴의 케텐브뤼케가쎄에 있는 형 페르디난트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슈베스트의 묘지는 비엔나 남쪽 심머링이란 곳에 있는 중앙공동묘지의 예술가묘역에 베토벤, 모차르트,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 등과 함께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다. 슈베르트의 아버지인 프란츠 테오도르 슈베르트(Franz Theodor Schubert: 1763-1830)는 모라비아(현재의 체코공화국에 속한 지역)에서 농사를 짓던 칼 슈베르트(Karl Schubert)와 수잔나(Susanna)의 아들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현재의 체코공화국 알트슈타트 지방의 노이도르프(Neudorf)가 슈베르트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고향이다. 체코공화국에서는 올로무츠(Olomouc)의 숨페르크 지역 말라 모라바의 비소카(Vysoka) 마을이다. 청년 프란츠 테오도르 슈베르트는 뜻한바 있어서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로 와서 힘멜포르트그룬트 교구가 지원하는 학교의 선생님으로 취직했다가 나중에는 작은 학교를 운영하는 교장으로 일했다. 그 학교의 한 쪽에서 프란츠 슈베르트가 태어났다. 어머니 엘리자베트 비에츠(Elisabeth Vietz)는 실레지아에서 자물쇠공을 하던 사람의 딸로서 역시 비엔나에 와서 어떤 돈 많은 사람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었다. 실레지아는 당시의 영토 대부분이 현재의 폴란드에 속하여 있는 지역이다.

 

모라비아의 아름다운 산

 

두 사람은 비엔나에서 우연히 만나 9구의 리히텐탈(Liechtental)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체코(모라비아) 출신이며 어머니는 폴란드(실레지아) 출신이므로 슈베르트도 동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슈베르트의 음악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조건의 하나이다. 슈베르트에게는 14명의 형제자매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아버지가 다른 여인과 좋아지내다가 낳은 사생아였다. 학교 선생님이 그러면 안되는데 아무튼 무슨 사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일설에 의하면 슈베르트의 형제자매는 모두 16명이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그중에서 우리의 슈베르트는 12번째 였으며 9명의 형제자매가 어릴 때에 이런저런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슈베르트의 어머니 엘리자베트는 56세에 세상을 떠났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점령했다가 후퇴한 1812년이었다. 그후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혼자 살기가 뭐해서 그랬는지 안나 클레겐보크(Anna Klegenbock)라는 여인과 재혼하였다. 그때쯤해서 슈베르트의 아버지인 프란츠 테오도르 슈베르트는 연로하여서 더 이상 자녀를 생산하는데 기여하지 못했다고 한다. 슈베르트의 아버지가 저 멀리 모라비아에서 농사나 짓던 사람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실레지아 시골 출신으로 비엔나에 와서 남의 집 하녀로 있던 사람이면 무슨 상관이 있는가? '가곡의 왕' 프란츠 슈베르트를 낳았으면 그것으로 존경받기에 충분하다.

 

슈베르트의 조상들이 살았던 체코공화국 동편의 모라비아.

 

○ 마이어베르는 독일인도, 프랑스인도, 이탈리아인도 아닌 유태인이었다.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를 정상으로 올려 놓은 자코모 마이어베르(Giacomo Meyerbeer: 1791-1864)는 당시 프러시아였던 베를린 근교의 타스도르프(Tasdorf)에서 태어났다. 타스도르프는 현재 브란덴부르크에 속한 뤼더스도르프(Rüdersdorf)이다. 마이어베르의 원래 세례명은 야콥 리브만 베르(Jacob Liebmann Beer)였다. 이름만 보더라도 유태인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그러다가 이탈리아에 가서 작곡을 공부하고 오페라 활동을 할때 이름을 이탈리아식으로 고칠것 같으면 편리할 것 같아서 자코모로 고치게 되었다. 그때가 1817년으로서 그가 26세 때였다. 자코모는 제임스(야고보) 또는 제이콥(야곱)의 이탈리아식 이름이다. 또한 마이어베르라는 성은 그의 할아버지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리브만 마이어 불프(Liebmann Meyer Wulff)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할아버지의 가운데 이름인 마이어를 가져다가 원래의 성인 베르와 합쳐서 마이어베르로 만든 것이다. 그런 자코모 마이어베르이지만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했기 때문에 프랑스의 작곡가로 분류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독일인도, 이탈리아인도, 프랑스인도 아닌 유태인으로 생애를 살았다. 마이어베르의 아버지 유다 헤르츠 베르(Judah Herz Beer: 1769-1825)는 프러시아에서도 알아주는 대단한 재력가였다. 금융업으로서 많은 부를 축적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독실한 유태교도였다. 자기의 저택에 별도의 회당(시나고그)을 설치하고 안식일마다 가족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정도로 독실한 유태교도였다. 마이어베르의 어머니 아말리아 말카(Amalia Malka: 1767-1854)는 프러시아의 부유한 가정 출신으로 사회적으로도 명망있는 집안이었다. 물론 개신교 출신이지만 결혼하고서 유태교로 개종하였다. 마이어베르의 형제자매가 몇 명이나 되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형제들인 빌헬름 베르(Wilhelm Beer)는 유명한 천문학자였고 미하엘 베르(Michael Beer)는 이름난 시인이었다. 그러고 보면 형제들 중에서 야콥 베르만이 이름을 자코모 마이어베르로 고쳤을 뿐이지 다른 형제들은 그냥 베르(Beer)라는 성을 유지하였다. 마이어베르의 어머니인 아말리아는 당시 프러시아 황실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래서 황비로부터 특별 훈장을 받기까지 했다. 우리의 마이어베르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직후에 유태인 사촌인 민나 모센(Minna Mossen: 1804-1886)과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다섯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에서 세 자녀만 장성할 때까지 생존하였다.

 

마이어베르가 태어난 현재의 뤼더스도르프의 부두

 

○ 오펜바흐는 국적 때문에 수난이 많았었다.

 

 '샹젤리제의 모차르트'라는 별명을 들은 프랑스 오페레타의 거장 자크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 1819-1880)는 원래 독일인이다. 프러시아(현재의 독일)의 쾰른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14세때부터 파리에서 생활하였으며 41세 때인 1860년에 나폴레옹 3세 황제의 후의로 정식으로 프랑스로 귀화하여 프랑스인으로서 파리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오펜바흐의 묘소는 파리의 몽마르트 공동요지에 있다. 그러면 오펜바흐는 독일인이가 프랑스인인가? 이것저것 생각할 필요도 없이 뿌리를 보면 오펜바흐는 유태인이다. 그의 아버지는 유태교 회당(시나고그)의 독실한 칸토였다. 그래서 오펜바흐도 소년 시절에 유태교 회당을 위해 많은 봉사를 했다. 그러다가 25세 때에 스페인 계통의 프랑스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 유태교에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렇지만 유태인이라는 자부심을 평생동안 간직하며 지냈다. 그의 아버지도 아들 오펜바흐가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는 소식을 듣자 '겉으로야 그랬겠지만 속까지야 변할수 있겠는가?'라며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펜바흐는 프랑스를 국적으로 선택하였기 때문에 1870년에 프랑스-프러시아간의 이른바 보불전쟁이 일어나자 프랑스로부터는 비스마르크가 프랑스에 심어놓은 고정간첩이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반대로 프러시아로부터는 조국을 배반한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런 비난들을 친구들이 지나가는 소리로 했다고 하면 별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그게 아니라 신문에서 그런 내용을 대서특필하였으므로 아주 입장이 난처해졌던 것이다. 아무튼 오펜바흐는 프랑스로부터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가족들을 데리고 스페인으로 갔다가 다시 오스트리아로 가서 잠시 피난생활을 하였다. 스페인으로 갔던 것은 그의 부인인 에르미니 달라깽(Herminie d'Alacain: 1827-1887)이 스페인의 칼리스트 장군의 딸이었기 때문에 연고가 있었던 것이며 비엔나로 갔던 것은 비엔나가 그의 오페레타를 대환영했기도 하지만 프란츠 요제프 황제도 오펜바흐를 아주 호의적으로 대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오페레타만 지휘하던 오펜바흐가 어느날 프란츠 요제프 황제 앞에서 첼로를 연주하여 대단한 찬사를 받은 일이 있었던 것이 기회였다. 기왕에 얘기가 나온 김에 칼리스트(Carlist)가 무엇인지 간단히 설명하자면 스페인에서 프랑스 부르봉 왕조를 부흥시키자는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을 말한다.

 

쾰른의 오펜바흐플라츠(오펜바흐광장). 가운데 보이는 첨탑이 쾰른대성당(쾰른돔)이며 왼쪽의 분수는 오페른분수이다. 오펜바흐플라츠에 쾰른 오페라, 또는 오펜바흐 오페라 하우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