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오페라 작곡가 일화

위대한 작곡가들의 뿌리를 찾아서 - 2

정준극 2015. 8. 27. 23:07

 

○ 프란츠 폰 주페는 크로아티아 출신이다.

 

비엔나 오페레타의 왕자인 프란츠 폰 주페(Franz von Suppe: 1819-1895)는 거의 1백편에 이르는 오페레타를 작곡했지만 어쩐 일인지 오늘날 거의 공연되지 않고 있어서 유감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몇몇 오페레타의 서곡들은 콘서트의 스탠다드 레퍼토리로서 아직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예를 들면 '시인과 농부'(Dichter und Bauer) 서곡, '경기병'(Leichte Kavallerie) 서곡, '아름다운 갈라테'(Die schöne Galathée) 서곡, '보카치오'(Boccaccio) 서곡, '비엔나의 아침, 점심, 저녁'(Ein Morgen, ein Mittag und ein Abend in Wien) 서곡 등이다. 그런 주페는 어느나라 사람인가? 사전에는 오스트리아의 오페레타 작곡가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그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한 지역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현재 그가 태어난 달마티아(Dalmatia)는 크로아티아(Croatia)에 속하여 있다. 그래서 크로아티아는 위대한 프란츠 폰 주페가 자기 나라 출신이라면서 자랑하고 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는 '만일 크로아티아가 그런 식으로 주장한다면,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하여 있던 지역 출신의 모든 음악가들이 이제와서 각각 제 나라로 돌아가야 한다는 얘기이니 그것은 이미 돌아가신 양반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며 아울러 살아 있는 우리들이 그렇게 편협하게 주장해서도 안될 일이다'라면서 반대 의견을 내세웠다. 아무튼 출신국 문제는 동구 지역일수록 더욱 복잡해 진다. 보헤미아, 모라비아,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카린티아, 몰다비아 등등...

 

주페가 태어난 크로아티아의 스플리트(달마티아의 스팔라토)

 

주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 있던 달마티아 왕국의 스팔라토(Spalato)에서 태어났다. 스팔라토는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스플리트(Split)이다. 주페의 아버지는 이름이 상당히 길어서 프란체스코 에체키엘레 에르메네질도 카발리에레 디 주페 데멜리(Francesco Ezechilele Ermenegildo Cavaliere di Suppe-Demelli)이다. 벨기에계의 이탈리아인이다. 벨기에에 살고 있던 주페의 선조들이 이곳 크로아티아로 이민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프란츠 폰 주페를 크로아티아의 작곡가라고만 주장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오리진을 따지면 벨기에이기 때문이다. 주페의 할아버지는 달마티아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다. 주페의 할아버지는 이탈리아 여인과 결혼했다. 그 이탈리아 여인은 도니체티와 먼 친척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주페의 아버지는 벨기에-이탈리아계라고 볼수 있다. 주페의 아버지는 주페의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달마티아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다. 주페의 어머니는 비엔나에서 태어난 순수 비엔나 여인이었다. 주페의 원래 이름은 프란체스코 카발리에레 디 주페 데멜리였다. 그러다가 비엔나에 있을 때에 독일식으로 고쳐서 프란체스코 대신에 프란츠라고 했고 '카발리에레 디'를 '폰'(von)으로 바꾸었다.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프란츠 폰 주페가 되었다. 그러나 독일어를 사용하지 않는 지역에서의 오페레타나 콘서트 프로그램을 보면 주페의 이름을 프란체스코 주페 데멜리(Francesco Suppe-Demelli)라고 적은 것을 볼수 있다. 그러니까 프란츠 폰 주페와 프란체스코 주페 데멜리는 같은 사람이다.

 

주페가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음악활동을 시작했던 크로아티아의 차다르

 

주페는 어린 시절을 차라(Zara)에서 보냈다. 현재의 크로아티아 차다르(Zadar)이다. 주페의 아버지는 주페가 가문의 전통인 철밥통의 공무원이 되기를 바랬다. 그런데 스팔라토(스플리트) 대성당의 악단 지휘자가 주페의 음악적인 재능을 높이 평가해서 주페가 음악공부를 할수 있도록 주선했다. 그러는 중에 비엔나의 요제프슈타트극장(Theater in der Josefstadt)의 프란츠 포코르니라는 사람이 주페의 재능을 보고 비엔나로 초청해서 요제프슈타트극장의 지휘자로 일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무급이었다. 그렇지만 주페는 자기의 오페레타를 요제프슈타트극장의 무대에 올릴수 있었기 때문에 월급을 받지 못해도 그대로 있었다. 주페는 비엔나에 있으면서 거의 1백편에 이르는 오페레타를 만들었다. 대부분이 요제프슈타트극장에서 공연되었고 더러는 3구 네스트로이플라츠에 있었던 칼테아터(Carltheater)에서 공연되었다. 칼테아터는 지금은 없어진지 오래이다. 주페는 1885년 5월 21일에 비엔나에서 요단 강을 건너갔고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의 음악가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러고보면 주페는 비엔나의 작곡가임에 틀림없다.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첸트랄프리드호프)의 음악가 묘역에 있는 주페의 묘비

 

○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국적이 오스트리아가 아니라 독일의 작센-코부르크-고타였다.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나치는 비엔나 출신의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위대한 독일인이라면서 한껏 치켜세웠다. 역시 위대한 음악가는 독일인이라는 것을 세계에 내세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요한 슈트라우스는 나치가 그렇게도 증오하던 유태계였다. 기록에 의하면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고조할아버지가 헝가리의 유태인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자손들도 유태계임인 틀림없다. 그런데 헝가리에서 살았던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증조할아버지인 요한 미하엘 슈트라우스(Johann Michael Strauss: 1720-1800)는 유태인으로 사는 것 보다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여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이후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할아버지인 프란츠 보르지아스 슈트라우스(Franz Borgias Strauss: 1764-1816), 아버지인 요한 슈트라우스 1세(Johann Strauss Vater: 1804-1849), 그리고 우리의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형제들, 그 자손들은 모두 로마 가톨릭이었다. 다만,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62세라는 고령에 뜻한바 있어서 세번째 결혼을 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에서 개신교(루터교)로 다시한번 개종했던 사실이 있기는 하다. 아울러서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로마 가톨릭으로서는 두번째 부인과의 이혼이 여의치 않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시민권을 포기하고 독일의 작은 공국인 작센-코부르크-고타(Sachsen-Coburg-Gotha)의 시민이 되었다. 그러므로 아무튼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의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실은 유태계라는 사실도 놀랍거니와 비엔나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사람으로서 로마 가톨릭이 아니라 개신교로 개종하였다는 것도 새로운 사실이고 더구나 말년에 국적도 오스트리아가 아니라 작센-코부르크-고타라고 하는 지금은 흔적도 찾아보기 힘든 작은 공국의 시민으로 지내다가 세상을 따났다는 것도 놀라운 사실이 아닐수 없다.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은 1826년에 수립되어 1차 대전이 끝난 해인 1918년에 막을 닫은 나라이다. 아무튼 나치 독일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유태계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였지만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 되었다. 작센-코부르크-고타는 오늘날 독일의 바바리아와 투링기아 지방에 걸쳐 있는 지역이다.

 

19세기의 코부르크

 

멀리 올라갈 것도 없이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버지인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가정사부터 설명코자 한다. '라데츠키 행진곡'으로 유명한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1804년 비엔나 교외의 레오폴드슈타트에서 태어났다. 레오폴드슈타트는 예나 지금이나 유태인들이 집단으로 많이 살던 곳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아버지, 즉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할아버지는 프란츠 보르지아스 슈트라우스(1764-1816)라는 사람이며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어머니, 즉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할머니는 오스트리아의 바르바라 돌만(Barbara Dollmann: 1770-1800)이라는 여인으로 두 사람은 결혼해서 레오폴드슈타트에서 '성플로리안'(Zum heiligen Florian)이라는 여관을 운영했다. 그런데 사는 것이 왜 그렇게도 힘든지 아무튼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어머니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일곱 살 때에 이유를 알수 없는 열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아버지는 부인을 잃은 슬픔 때문이었는지 또는 다른 이유 때문이었는지 알수 없지만 그로부터 5년 후에 도나우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자살이라고 말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었다. 어린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친척의 도움으로 책제본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음악적인 재능이 있어서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바이올린을 켜고 작곡 비슷한 것을 하여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러더니 결국은 책제본공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여관이나 주점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먹고 사는 직업을 택하였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21세 때인 1825년에 마리아 안나 슈트라임(Maria Anna Streim)이라는 여인과 결혼하였다. 결혼식은 리히텐탈(Liechtenthal) 교구교회에서 거행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마리아 안나 슈트라임은 여관과 주점을 겸해서 운영하고 있는 집의 딸이었다고 하며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그 여관 겸 주점에서 연주하면서 사귀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풀 네임은 요한 밥티스트 슈트라우스이다. 세례자 요한의 이름을 가져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풀 네임도 요한 세바스티안 슈트라우스인데 어떤 경우에는 아버지의 풀 네임대로 요한 밥티스트 슈트라우스라고 쓰기도 한다.

 

레오폴드슈타트의 거리 옛 모습. 프라터슈트라쎄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마리아 안나는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다. 우리의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장남이며 그 아래로 아들만 요제프, 에두아르드, 페르디난트를 두었고 딸로서는 테레세와 안나를 두었다. 사람들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에게 남동생으로 요제프와 에두아르드만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누이동생도 두명이나 있고 또 페르디난트라는 남동생도 더 있지만 페르디난트는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 그건 그렇고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연주를 위해 사방을 돌아다니는 일이 많아서 집에 차분히 눌러 붙어 있는 경우가 없었다. 게다가 명색이 인기 직업이라서 여인들의 관심을 많이 받기도 했다. 그러자니 자연히 부인인 마리아 안나와 사이가 멀어지지 않을수 없었다. 얼마후에 공공연하게 알게된 사실이지만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숨겨놓은 애인을 하나 두었다. 내연의 처였다. 그런데 에밀리 트람푸슈(Emilie Trampusch)라는 이름의 그 내연의 처는 실상 유부녀였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내연의 처 에밀리는 거의 15년 이상이나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냈다. 은밀하다고 하지만 사실상 공공연한 비밀이어서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무려 8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본부인인 마리아 안나와의 사이에 4남 2녀를 두었는데 정부 겸 내연의 처에게서는 8명의 자녀를 두었으니 정력이 대단하기는 대단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내연의 처인 에밀리가 1844년에 딸을 낳자 그때까지 잠자코 있었던 에밀리의 본남편이 그 딸이야말로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딸이 아니라 자기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문제는 상당히 흥미있는 것이어서 결국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러자 당사자인 에밀리는 문제의 그 딸이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딸이라고 강조하였다. 결국 본남편은 에밀리에게 이혼을 요구하였고 비록 엄격한 로마 가톨릭 사회였지만 당국은 본남편의 손을 들어 주어서 이혼하게 해 주었다. 1849년의 일이었다. 에밀리는 본남편과 이혼하고 이제는 아무 거리낄 것이 없으므로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정식으로 살림을 차려야 겠다고 나섰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여러가지고 골치가 아파서 고민하다가 결국 그해에 성홍열이 덧나는 바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향년 45세였다.

 

비엔나의 무도회장에서 연주하고 있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 그 옆은 요제프 란너.

 

다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잘 아는대로 그는 세번이나 결혼했다. 첫번째 부인은 헨리에타 트레프즈(Henrietta Treffz)로서 예티라는 예명으로 불리는 소프라노였다. 1862년, 즉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37세 때에 결혼하여 16년간을 함께 살았다. 더 살려고 했는데 예티가 갑자기 심장마비가 걸렸는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사별하였다. 혹자들은 예티가 전에 낳은 아들이 나타나서 돈을 달라고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심장마비에 걸렸다는 얘기를 하지만 근거가 확실한 얘기는 아니다. 더 나아가서 어떤 사람들은 예티의 아들이 누구냐하면 예티와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관계하여 태어난 아이라는 얘기를 했다. 그렇다면 어쨋든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아버지가 관계했던 여인과 결혼한 셈인데 그 사실을 예티가 까맣게 숨기고 있어서 몰랐었던 것이라고 하며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심히 괴로워했다고 한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예티가 세상을 떠난지 6주 후에 여배우인 안젤리카 디트리히(Angelika Dittrich)와 재혼하였다. 그런데 안젤리카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음악활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방해만 되었고 더구나 배우의 기질을 십분 살려서인지 방탕하고 사치스러워서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어렵게 번 돈을 마음대로 탕진했고 게다가 다른 남자들과 스캔들만 일으켰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그런 안젤리카가 지겨워서 이혼하려고 했으나 로마 가톨릭에서는 이혼이 어려웠다. 그러는 사이에 요한 슈트라우스 2세에게는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 아델레 도이치(Adele Deutsch)라는 조신하고 지성적인 여인이었다. 그리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런데 유태계였다. 아델레는 유태계였지만 진작에 개신교로 개종한 여자였다. 그리고 당시에는 나치시대가 아니어서 유태계라고 해서 특별히 차별을 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안젤리카와 어서 이혼하고 아델레와 속히 결혼하기 위해서 두가지 용단을 내렸다. 하나는 이혼이 까다롭기가 말할수 없는 오스트리아를 떠나서 이혼이 쉬운 다른 나라의 시민권을 갖는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기왕에 오스트리아 시민권을 포기한다면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개신교로 개종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택한 곳이 독일의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이었다. 이윽고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안젤리카와 결혼한지 9년만인 1887년에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으로부터 이혼을 승락받았다. 이어 개신교인 루터교로 개종하였다.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본 블로구 '비엔나와 음악'편의 '슈트라우스 왕조'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세번째 부인인 아델레.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의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묘소에는 아델레가 합장되어 있다. 아름다운 묘비에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아델레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 '메리 위도우'의 프란츠 레하르는 슬로바키아 출신이다.

 

오페레타 '메리 위도우'(Die lustige Witwe: The Merry Widow)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란츠 레하르(Franz Christian Lehár: 1870-1948)라고 하면 오스트리아 작곡가로 알고 있고 조금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그가 헝가리 작곡가라고 알고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슬로바키아 작곡가이다. 그리고 히틀러가 '메리 위도우'를 비롯해서 그의 오페레타들을 좋아했으며 히틀러로부터 직접 두번에 걸쳐 공로 훈장을 받았기 때문에 레하르를 친나치적인 인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상 레하르는 그의 부인이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부인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치에 협조하는 척 했던 것이고 속으로는 나치를 증오하였다. 프란츠 레하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한 헝가리 왕국의 북쪽 코마롬(Komárom)에서 태어났다. 오늘날 슬로바키아의 코마르노(Komárno)이다. 당시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이 통합한 형태였다. 당시 코마롬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50보병연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레하르의 아버지 프란츠 레하르(1838-1888)는 이 보병연대의 군악대장이었다. 레하르의 아버지는 독일계 체코 출신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코마롬에 살게 되었으며 레하르가 태어나게 된 것이다. 레하르의 어머니 크리스티네 노이브란트(Christine Neubrandt: 1849-1906)는 헝가리 출신의 독일계 여인이었다. 아무튼 레하르는 헝가리 왕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12살때까지 헝가리어밖에 말할줄 몰랐다. 레하르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두 아들을 더욱 큰 도시에서 교육받게 되기를 소망했다. 레하르는 어릴 때부터 음악적 소질이 있어서 프라하음악원에 들어가도록 했다. 레하르는 바이올린을 공부했으나 음악원장인 안토닌 드로브작이 레하르에게 작곡에 전념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하여 작곡가로서의 길을 걷기로 했다. 한편 레하르의 동생 안톤은 군인이 되기 위해 비엔나에 있는 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프란츠 레하르가 태어난 코마르노의 중심가. 전에는 헝가리왕국의 코마롬이었으나 현재는 슬로바키아의 코마르노.

 

한편, 레하르의 아버지는 비엔나로 옮겨서 역시 군악대장을 맡고 있었다. 프라하음악원을 나온 레하르는 1888년에 아버지 군악대의 부군악대장으로 들어갔다. 레하르가 18세 때였다. 그해에 레하르의 아버지가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부군악대장의 자리도 내놓아야 했다. 레하르는 운이 좋아서 동부 슬로바키아의 로손츠(Losoncz)라는 곳에 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 부대의 군악대장으로 갈수 있었다. 레하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에서 최연소 군악대장이었다. 그후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32세 때인 1902년에 비엔나 강변극장(Theateer an der Wien)의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부임하였다. 레하르는 1924년에 유태인인 조피 메트 파슈키스(Sophie Meth Paschkis: 1878-1947)와 결혼했다. 레하르의 부인이 유태인이라는 것은 그후 권력을 장악한 나치에게 골치아픈 일이었다. 더구나 히틀러는 레하르의 음악을 좋아했다. 1941년에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였을 때 축하음악회의 레퍼토리는 레하르의 음악으로 장식된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레하르의 '메리 위도우'는 히틀러가 가장 좋아하는 오페레타였다. 나치는 레하르의 음악을 나치 선전용으로 활용하였다. 그런 레하르에게 유태인 부인이 있다는 것은 나치로서 받아 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나치의 선전장관인 괴벨스가 레하르의 편을 들어주었다. 레하르의 부인인 조피는 괴벨스의 주선으로 명예아리안(Ehrenarien)이라는 증서를 받았다. 유태인이 아니라 독일인으로 인정하겠다는 증명서였다. 사실상 조피는 레하르와 결혼식을 올리면서 유태교에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1947년 취리히에서 지낼 때 라이프지 표지에 실린 레하르와 조피 부부의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는 레하르에게 상당한 압박을 가하였다. 나치는 레하르에게 노골적으로 조피와 이혼하는 것이 신상에 좋겠다고 말했다. 심지어는 레하르가 집에 없는 사이에 조피를 체포하여 강제수용소로 보내려고 시도한 일도 있었다. 레하르는 조피와 결혼하기 전부터 유태인에 대하여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레하르의 오페레타를 보면 대부분의 대본을 유태인인 프리츠 뢰너 베다(Fritz Lohner-Beda)가 쓴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그리고 레하르의 오페레타에도 유태인의 문화와 전통을 반영한 부분이 많이 있다. 나치는 프리츠 뢰너 베다를 강제수용소로 보낼 계획이었다. 레하르는 당국을 찾아다니면서 그를 강제수용소로 보내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프리츠 뢰너 베다는 결국 아우슈비츠로 끌려가서 죽임을 당했다. 전쟁이 끝나자 연합군은 그런 레하르에 대하여 나치에 동조했다고 하며 조사를 했다. 돌이켜보면 히틀러는 레하르에게 1939년 베를린에서, 1940년에는 비엔나에서 공로 훈장을 주었다. 나치는 레하르에게 괴테 메달도 수여하였다. 괴테 메달은 위대한 독일인에게 주는 자랑스러운 메달이었다. 그리고 1938년에는 마침 '메리 위도우'가 50회 공연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히틀러는 자기 생일 기념으로 만든 특별 기념품을 레하르에게 주기도 했다. 연합군은 이런저런 사연을 들어서 레하르가 나치에 협조했다고 간주했다. 다행히 레하르를 아는 사람들이 그럴리가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람에 레하르는 나치협조자라는 누명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레하르는 만사가 싫고 귀찮아서 비엔나를 떠나 취리히로 가서 지냈다. 레하르의 부인 조피는 취리히에서 1947년에 세상을 떠났다. 혼자가 된 레하르는 오스트리아로 돌아와 바드 이슐에 저택을 마련하고 세상 떠날 때까지 지냈다. 레하르는 1948년 10월 23일 바드 이슐에서 세상을 떠났다.

 

바드 이슐의 레하르 빌라. 레하르가 말년을 보낸 집으로 지금은 기념관이다.

 

○ '팔려간 신부'의 스메타나도 오스트리아 작곡가라고 할수 있다.

 

체코를 대표하는 오페라인 '팔려간 신부'를 작곡한 베드릭스 스메타나(Bedrich Smetana: 1824-1884)는 일반적으로 보헤미아의 작곡가, 또는 오늘날 체코공화국의 작곡가로 분류되지만 사실상 그가 활동할 당시의 보헤미아는 오스트리아제국에 속한 영토였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작곡가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스메타나의 조상들을 보면 우크라이나의 유태계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스메타나도 유태계라고 말할수 있다. Smetana 라는 말은 체코어와 우크라이나어가 합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크림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우유와 치즈 등 유제품 거래상이라는 뜻도 있다. 스메타나의 아버지가 장사에 능해서 돈을 많이 벌었던 것도 그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또한 스메타나는 1848년의 프라하 봉기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혁명적 기질의 인물이라는 것도 새로운 사실이다. 그리고 스메타나는 스웨덴의 요테보리에서도 상당기간 살면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스웨덴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스메타나는 말년에 육체적인 질병으로도 고통을 겪었지만 정신이상이 생겨서 프라하의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했었다. 그리고 가정생활을 보면 두번 결혼을 했으며 스웨덴의 요테보리에 있을 때에는 제자로서 어떤 젊은 유부녀와 뜨거운 관계이 있었다. 그러나 저러나 스메타나는 매독 때문에 결국 사망했다고 하는데 점잖은 양반이 혹시나 여자관계가 복잡했던 것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을 금치 않을수 없다.

 

프라하 시민회관의 스메타나 홀

 

스메타나의 이름은 베드리치라고도 부르지만 체코식 발음으로는 베드릭스가 맞다. 그런데 원래 스메타나의 이름은 베드릭스 스메타나가 아니고 독일어 식으로 프리드리히 스메타나였다. 당시 보헤미아는 합스부르크의 영토였으며 독일어를 공용어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스메타나가 태어난 도시는 프라하 동쪽 136Km 떨어져 있는 리토미슐(Litomysl)이다. 오스트리아제국 시절에는 라이토미슐(Leitomischl)이라고 불렀던 곳이다. 리토미슐은 현재 체코공화국에 속한 도시이다. 스메타나의 아버지는 이름이 프란티세크 스메타나(Frantisek Smetana: 1777-1857)였다. 스메타나의 할아버지는 보헤미아의 흐라데츠 크랄로베(Hradec Králové)에서 맥주와 같은 양조제품을 거래하며 살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아들인 스메타나의 아버지도 역시 양조제품의 거래상이었다. 그런데 스메타나의 아버지인 프란티세크는 나중에 나폴레옹 전쟁 때에 프랑스군에게 의류와 기타 생필품을 공급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 프란티세크는 그 돈으로 양조장을 몇개 사서 직접 맥주를 만들어 판매했다. 그러다가 1823년에 리토미슐로 와서 발트슈타인 백작가의 양조장 책임자로 왔다. 리토미슐로 온 스메타나의 아버지는 바르보라 린코바(Barbora Lynková: 1791-1864)라는 여인과 결혼했고 이듬해에 우리의 스메타나가 태어났다. 그런데 이런것 까지 밝혀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스메타나의 아버지가 바르보라 린코바라는 여인과 결혼한 것은 세번째 결혼이었다. 아마 그 전의 결혼했던 두 부인은 모두 사별한 것 같았다. 사별은 했을지언정 스메타나의 아버지는 그 전의 두번 결혼에서 8명의 자녀를 두었고 그 중에서 딸 다섯만이 생존했다. 바르보라 린코바와 세번째로 결혼한 스메타나의 아버지는 토탈 10명의 자녀를 더 두었다. 그중에서 프리드리히(베드릭스)가 첫 아들이었다. 스메타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열심히 노력해서 10명의 자녀를 생산했지만 나중까지 생존한 자녀는 일곱명이다. 스메타나의 가족들은 나중에 보헤미아의 남부에 있는 유인드루지에프 흐라데츠(Jindřichův Hradec)로 이사를 갔다. 이곳은 나중에 구스타브 말러가 성장한 지방이다.

 

오늘날의 체코공화국 리토미슐. 스메타나가 태어난 도시이다.

 

스메타나가 언제 첫 결혼을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스메타나가 20대 중반인 1850년경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결혼후 행복해야할 생활이 비통으로 점철되었다. 1854년에는 세살 짜리 둘째 딸 가브리엘라가 폐염으로 사망했다. 1년 후에는 네살 짜리 큰 딸인 베드리스카가 성홍열로 사망했다. 그 이듬해인 1856년에는 넷째 딸 카테리나가 태어났지만 두달후 사망했다. 이때에 부인 카테리나도 폐염 증세를 보였다. 이듬해인 1857년에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스메타나는 심적으로 너무나 힘들어서 보헤미아를 떠나서 스웨덴 요테보리로 갔다. 요테보리에서는 학생들을 모아서 음악을 가르치거나 피아노 연주를 해서 먹고 살았다. 그러다가 제자 중에서 젊고 예쁜 프뢰이다 베네케(Fröjda Benecke)와 뜨거운 관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프뢰이다는 결혼한 여자였다. 아마 부인 카테리나가 골골하니까 기분도 그렇지 않고 해서 바람을 피웠던 모양이다. 부인 카테리나는 1859년 4월에 독일 드레스덴에서 치료를 받다가 잘 안되어서 세상을 떠났다. 스메타나는 카테리나의 장례식을 치루고 난지 몇 달 후에 동생 카렐(Karel)의 집에 가서 지내게 되었다. 카렐은 고향인 리토미슐에서 결혼해서 살고 있었다. 동생 카렐에게는 바르보라 페르디난도바(Barbora Ferdinandova)라는 처제가 있었다. 스메타나는 동생의 처제인 바르보라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결국 이듬해인 1860년 여름에 스웨덴의 요테보리에 가서 결혼식을 올렸다. 바르보라는 스메타나보다 16년 아래였다. 스메타나는 스웨덴에서 2년 정도를 보낸 후에 아무래도 고국으로 돌아가서 음악활동을 계속해야 겠다고 생각하여 보헤미아로 돌아왔다. 연주회를 가졌으나 반응이 썩 좋지는 않았다. 스메타나는 성경말씀대로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는 법'이라고 말하고 식구들을 데리고 프라하를 떠나 야브케니체(Jabkenice)로 가서 지냈다. 스메타나는 이곳에서 '나의 조국'(Ma vlast)을 완성했다.

 

야브케니체의 스메타나 기념상. 스메타나가 '나의 조국'을 작곡한 곳이다.

 

스메타나만큼 비참하게 이 세상을 떠난 작곡가도 드믈 것이다. 말년의 스메타나는 처음에는 현기증, 갑작스런 복통, 손과 발의 경련 등의 증세를 보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극도의 좌절감에 빠지게 되었으며 불면증이 심해서 통 잠을 이루지 못했고 게다가 환각증세까지 보였다. 결국 정신이상을 보인 그는 폭력적으로 변했고 아울러 실어증에 걸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1884년 3월에는 스메타나의 60회 생일을 기념해서 프라하에서 갈라 콘서트가 열렸으나 스메타나는 병세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에 스메타나의 가족들은 이제 더 이상 집에서 병간호하기가 힘들어서 스메타나를 카테린스키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스메타나는 정신병원에 입원한지 한달도 못되어서 숨을 거두었다. 1884년 5월 12일이었다. 사망원인은 노인성 치매라고 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매독이 악화되어서 회복할수 없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