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오페라 작곡가 일화

위대한 작곡가들의 뿌리를 찾아서 - 3

정준극 2015. 8. 28. 19:44

위대한 작곡가들의 뿌리를 찾아서 - 3

 

○ 오페라의 황제 베르디는 프랑스 국적으로 태어났다.

 

'오페라의 황제'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가 이탈리아의 음악가라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고 이것도 알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런 베르디가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사연인즉, 당시 베르디가 태어난 이탈리아의 북부 지역은 프랑스 제1제국에 속한 영토였기 때문이다. 프랑스 제1제국이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음에서 1804년 12월 2일 파리의 노트르 담 대성당에서 황제로 즉위함으로서 출범한 제국이다. 나폴레옹의 황제 취임으로 혁명에 의해 만들어진 프랑스공화국은 막을 내렸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제국의 황제가 되고나서 막강한 군사력으로 유럽의 지도를 새로 그려가며 프랑스의 영토를 넓혀갔다. 그런데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 하여튼 나폴레옹은 욕심이 과하여서 제정러시아까지 자기의 수중에 넣으려고 군대를 몰아 모스크바로 진격하였고 결국은 모스크바를 점령하였으나 얼마후 추운 날씨에 먹을 것도 없어서 총퇴각 할수 밖에 없었다. 그때 은인자중하며 그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제정러시아군이 대반격을 하는 바람에 나폴레옹군은 사정없이 패배하였으니 그것이 저 유명한 1812년의 사건이었다. 훗날 차이코브스키가 작곡한 '1812년 서곡'은 바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과 쿠츠토프 장군이 이끄는 제정러시아군의 전투를 그린 작품이다.

 

이탈리아의 북부 부세토 인근의 론콜레 베르디 마을에 있는 베르디의 생가. 베르디가 1901년 세상을 떠나자 이탈리아 정부는 이 집을 Casa Natale del Maestro 라고 하여 국가문화재로 지정하였다.

 

그건 그렇고 다시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하기 이전의 프랑스공화국으로 돌아가면 나폴레옹은 그때부터 영웅의 면모를 과시하고 싶어서인지 우선 평소 프랑스와 앙숙에 있었던 오스트라아를 공략하였다. 나폴레옹군은 1800년 6월의 북부 이탈리아의 마렝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크게 물리쳤으며 이어 그해 12월에는 호엔린덴 전투에서 또 다시 오스트리아군을 물리침으로서 신성로마제국을 주관하고 있는 오스트리아에게 대단한 낭패를 주었다. 두 전투에서 승리한 프랑스공화국은 이듬해인 1801년 2월에 오스트리아로 대표되는 신성로마제국과 이른바 뤼네비유 조약(Treaty of Luneville)을 체결하고 그동안 신성로마제국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토스카나대공국(Grand Duchy of Tuscany)을 프랑스가 차지하였다. 이어 1808년에는 프랑스제1제국이 뤼네비유조약의 후속조치로서 이탈리아 북부의 파르마-피아첸자-구스탈라(Parrma-Piacenza-Gustalla) 공국을 프랑스 제1제국에 합병하였다. 그리하여 베르디가 태어난 마을은 파르마공국에 속한 지역이었으므로 당연히 프랑스제1제국에 속한 영토가 되었고 주민들은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속담처럼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전투로 인하여 뜻하지 아니하게 프랑스 국적의 백성들이 되었다. 이에 따라 베르디가 태어난 마을의 명칭도 프랑스식으로 르 론콜르(Le Roncole)가 되었다. 베르디는 태어난 직후 마을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그때의 기록을 보면 프랑스 국적으로 되어 있었다. 나폴레옹이 1812년에 모스크바에서 크게 패배하였고 이어 계속해서 다른 나라와의 전투에서도 패배하여 1814년에는 완전히 힘도 쓰지 못하게 되자 유럽의 군주들은 1815년 비엔나에 모여서 회의를 열고 나폴레옹 이후 유럽의 영토 문제를 협의하였으니 그것이 유명한 '비엔나 회의'이다. 비엔나 회의의 결과, 프랑스제1제국의 소속이 되었던 파르마와 피아첸자는 공국으로 원대복귀하였다. 그래서 베르디는 다시 파르마공국의 시민이 되었고 나중에 이탈리아가 통일이 되자 당연히 이탈리아 국민이 되었다.  오늘날 '르 론콜레' 마을은 베르디를 기념하여서 '론콜레 베르디'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의 마렝고 전투. 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가 패배하여 결과적으로 이탈리아 북부의 파르마, 피아첸자 공국은 프랑스 제1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마렝고는 이탈리아 북부 피에드몽 지역에 있는 넓은 평야지대이다.

 

○ '마르타'의 프리드리히 폰 플로토우도 프랑스 국적으로 태어났다.

 

오페라 '마르타'(Martha)로 유명한 프리드리히 폰 플로토우(Friedrich von Flotow: 1812-1883)는 독일의 작곡가이지만 프랑스 작곡가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의 이름만 보더라도 Flotow는 플로토브로 발음해야 하는데 프랑스식으로 플로토우라고 부른다. 플로토우는 분명히 독일 출신이다. 1812년 독일 북단의 메클렌부르크(Mecklenburg)의 토이텐도르프(Teutendorf)에서 태어났다. 플로토우가 태어날 당시의 토이텐부르크는 뤼베크(Lübeck) 인근의 작은 마을에 불과하였다. 현재는 독일 북부 메클렌부르크 포아폼멘(Mecklenburg-Vorpommem)주의 로스토크(Rostock)지방에 속한 자니츠(Sanitz) 도시의 한 구역이다. 프랑스와는 지리적으로 한창 떨어져 있는 뤼베크의 토이텐부르크는 도대체 프랑스와 어떤 관계이 있기에 플로토우를 프랑스 국적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가? 그건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건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스스로 프랑스제국(제1제국)의 황제가 되고 이어서 유럽을 프랑스의 수중에 두기 위해 틈만 나면 다른 나라들을 공략하여 프랑스의 영토로 편입하던 때였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연맹을 구성하여 나폴레옹에 대항코자 했다. 그러나 제1차 연맹에서도 실패했고 제2차, 제3차 연맹에서도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기고만장한 나폴레옹은 1806년에 프러시아와의 블뤼허(Blücher)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독일 북부의 한자연맹 도시로 유명한 뤼베크를 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진군시켰다. 이에 뤼베크를 방어하고 나폴레옹의 세력을 더 이상 확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제4차 연맹이 구성되었다. 제4차 연맹에는 프러시아, 러시아, 작소니, 스웨덴, 영국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프러시아가 나폴레옹의 전격작전에 의해 패배하자 제4차 연맹도 큰 힘을 쓰지 못하였다. 프랑스 제1제국은 1811년에 자유도시인 뤼베크를 프랑스에 공식적으로 합병하였다.

 

토이텐도르프의 플로토우 생가. 플로토우는 부유한 지주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하여 뤼베크와 일대의 주민들은 잠시뿐이지만 불시에 프랑스 국적을 가지게 되었다. 이듬해인 1812년에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세력을 완전히 넓히고자 제정러시아를 공격하여 모스크바를 점령했으나 겨울이 다가오자 추위와 굶주림에 견디지 못하고 퇴각하였고 그로 인하여 결국은 날개가 꺾인 독수리가 되었다. 바로 그러한 역사적인 해인 1812년에 플로토우가 뤼베크의 인근인 토이텐도르프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나폴레옹이 세력을 잃게 되자 반나폴레옹 연합이 구성되어 1813년에 뤼베크의 프랑스군을 몰아내고 뤼베크 일대를 해방하였다. 그러므로 플로토우는 태어났을 당시에는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이듬해에 다시 뤼베크의 시민, 즉 독일 국민이 되었던 것이다. 뤼베크는 1815년 비엔나 회의의 결과 독립된 자유도시로 다시 인정을 받았다. 한편, 정치와 음악은 연관지을 필요가 없으므로 플로토우는 음악가로서의 꿈을 이루기 위해 15세에 파리로 가서 파리음악원에 입학하였고 이어 파리에서 여러 음악가들과 교류를 가지면서 작곡활동을 하였다. 파리에서 오래 지내다보니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플로토우라고 불렀다. 플로토우는 그후 파리와 비엔나에서 지냈으며 말년에는 독일 다름슈타트에서 지내다가 그곳에서 향년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플로토우의 대표작인 '마르타'는 그가 비엔나에서 지낼 때인 1847년 지금은 철거된지 오래인 비엔나의 캐른트너토르극장(Theater am Kärntnertor)에서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다. 캐른트너토르극장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자허호텔이 들어서 있다.

 

오페라 '마르타'의 한 장면.

 

○ 영국의 작곡가 프레데릭 들리어스는 원래 독일인이다.

 

'마을의 로미오와 줄리엣'(A Village of Romeo and Juliet)이란 오페라로 유명한 프레데릭 들리어스(Frederick Delius: 1862-1934 또는 딜리어스라고 발음함)는 영국 출신의 작곡가이지만 이름만 보아도 알다시피 독일계이다.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독일에서 살았는데 아버지대에 와서 영국으로 귀화했기 때문에 영국에서 태어난 프레데릭 들리어스도 영국의 작곡가로 분류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의 오리진이 독일이기 때문에 독일의 작곡가로 간주하는 경향이다. 하지만 따져보면 그의 조상들은 네덜란드계이다. 들리어스의 조상들은 더치에서 살다가 독일의 라인지대에 와서 정착했다. 그러고 보면 들리어스는 네덜란드(더치) 작곡가라고 볼수 있다. 들리어스는 영국의 북부 요크셔어의 브라드포드(Bradford)에서 태어났다. 세례 받을 때의 이름은 프리츠 테오도어 알버트 델리우스(Fritz Theodore Albert Delius)였다. Delius는 독일식으로 발음하면 델리우스인데 영국식으로 발음하면 들리어스이다. 들리어스는 이름인 프리츠를 40세가 될 때까지 유지하였다가 프레데릭으로 바꾸었다. 들리어스의 아버지인 줄리어스 들리어스(Julius Delius: 1822-1901)는 요크셔어에서 이름난 양모 거래상이었다. 그래서 상당히 부유해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들리어스의 아버지가 양모 거래상이 된 것은 들리어스의 할아버지의 영향 때문이다. 들리어스의 할아버지인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델리우스(Ernst Friedrich Delius)는 나폴레옹 전쟁 때에 프러시아군의 유명한 블뤼허 장군 휘하에서 참전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나자 양모 거래업에 손을 댔고 그것으로 어느정도 돈을 벌었다. 들리어스의 아버지 줄리어스는 독일 베스트팔리아 주의 빌레펠트(Bielefeld)에서 태어났다. 들리어스의 아버지도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장사를 하였는데 주로 영국으로부터 양모를 수입하여 팔아서 돈을 벌었다. 들리어스의 아버지는 아예 영국으로 가서 양모 거래업을 본격적으로 하면 돈을 더 많이 벌 것으로 생각해서 영국으로 건너갔고 이어 아예 1850년에 영국으로 귀화했다.

 

프레데릭 들리우스가 태어난 영국 북부 요크셔어의 브래드포드

 

들리어스의 아버지는 결혼도 해야 해서 기왕에 오래전부터 좋아 지내던 독일의 고향 아가씨인 엘리제 파울리네 크뢰니히(Elise Pauline Krönig: 1838-1929)와 1856년에 영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들리어스는 아들 넷 중에서 두번째로 태어났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들리어스의 부모가 아들 넷 이외에도 딸을 열명이나 두었다는 것이다. 들리어스의 부모는 마치 자녀 생산을 두 사람에게 부여된 하늘로부터의 의무처럼 생각했던것 같았다. 들리어스 아버지는 들리어스가 가업을 이어 받아 상인이 되거나 기업가가 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래서 음악공부를 하겠다는 아들의 간청을 무시하고 상업공부를 시켰다. 들리어스는 22세 때인 1884년에 실무경험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는 아버지의 주장에 따라 미국 플로리다로 가서 오렌지 농장의 경영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들리어스는 정말로 농장경영에 관심이 없었고 대신 플로리다에서 지내는 것을 기회로 삼아서 미국 흑인들의 영가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아무튼 이러저러하여 들리어스의 아버지는 하는수 없어서 아들 들리어스를 독일로 보내어 정식으로 음악공부를 하게 했고 그래서 영국이 자랑하는 프레데릭 들리어스가 등장하게 되었다. 들리어스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설명은 지면상 생략키로 하고 결론만 말하자면 그는 파리에서 부인과 함께 여생을 보내다가 1934년에 향년 72세로 파리 근교의 그레즈 쉬르 루앙(Grez-sur-Loing)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다가 가족들의 염원에 의해 영국 서리의 림프스필드(Limpsfield)에 있는 성베드로교회(St Peter's Church)요지에 안장되었다.

 

영국 서리의 림프스필드에 있는 성베드로교회의 묘지에 있는 들리우스의 묘소

 

들리어스의 부인인 옐카 로젠(Jelka Rosen: 1868-1935)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을수 없다. 대단한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대단하다는 것은 그가 뛰어난 화가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남편인 들리어스가 천성이 그래서 그런지 허구헌날 바람만 피웠는데도 '필래면 피어봐라. 결국은 후회할테니'라고 생각하고 묵인 내지 방관했기 때문이다. 들리어스는 어찌하다보니 40세가 넘도록 미장가였다. 그러다가 1896년 어느날 파리에서 옐카 로젠(Jelka Rosen)이라는 상류층 여인의 집에서 열린 디너 파티에서 처음 만나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엘카 로젠이라는 이름은 헬레나 조피 에밀리 로젠(Helena Sophie Emilie Rosen)의 예명이었다. 옐카 로젠의 집안은 대대로 독일의 부유한 귀족이었다. 옐카 로젠은 유고슬라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베오그라드 주재 독일 총영사였기 때문이었다. 옐카 로젠의 어머니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이그나즈 모셀레스(Ignaz Moscheles)의 딸이었다. 옐카 로젠은 미술에 재능이 많아서 1892년부터 파리의 아카데미 콜라로시(Academie Colarossi)에서 그림 공부를 했다. 옐카는 독일에 있는 선조들의 재산을 상당히 물려받아서 대단히 부유한 생활을 하였다. 옐카는 파리 근교의 그레즈 쉬르 루앙(Grez-sur-Loing)에 넓은 정원이 있는 저택을 사서 지냈다. 들리어스가 옐카를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진 곳도 그레즈 쉬르 루앙에 있는 옐카의 저택이었다.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는 중에 서로 니체(Friedrich Nietsche)와 그리그(Edvard Grieg)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고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들리어스는 잠시 플로리다에 가야할 일이 있었고 이듬해인 1897년 파리로 돌아와서는 아예 옐카의 저택으로 보따리를 들고 들어가서 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결혼식은 올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동거한지 6년만인 1903년에 마을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파리근교의 그레즈 쉬르 루앙의 옐카 저택의 정원에서 산책하고 있는 들리어스. 옐카 로젠 그림(부분)

 

옐카는 들리어스에게 성실했다. 아내로서 그리고 예술가로서 들리어스의 음악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반면에 들리어스는 생기기는 멀쩡해서 자주 바람을 피웠다. 들리어스와 스캔들을 일으켰던 여자가 한두명이 아니었다. 들리어스의 여성편력에 대한 그런저런 이야기를 글로 쓰자면 열권의 책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결론만 말하자면 들리어스는 결국 매독에 걸려 심한 고생을 해야 했다. 들리어스는 72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거의 60세 때부터 매독의 영향으로 눈이 침침해져서 잘 보이지 않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마치 소아마비 환자처럼 손발에 마비가 오기 시작했다. 방탕의 결과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샘플이었다. 옐카는 그런 들리어스에게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고 옆에서 정성으로 보살펴 주었다. 그런데 얼마후부터는 옐카 자신도 대장암에 걸려서 들리어스를 보살피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수 없었다. 옐카는 암환자들이 들어가는 요양원에 들어갔고 들리어스에게는 24시간 간병인을 붙여 주었다. 옐카는 1934년 봄에 들리어스가 거의 소생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아픈 몸을 이끌고 그레즈의 집으로 돌아와서 그나마 들리어스의 곁을 지켰다. 들리어스는 1934년 6월 10일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들리어스는 유언으로 자기가 죽으면 옐카의 저택의 정원에 묻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법에 따르면 개인 집에는 묘지를 둘수 없었다. 들리어스는 그레즈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파리 남쪽 그레즈 쉬르 루앙 마을의 옛 다리. 들리어스와 옐카 부부가 살던 저택이 이 마을에 있다.

 

들리어스의 식구들은 들리어스가 영국에 묻히기를 희망했다. 옐카도 그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년 후인 1935년 옐카는 어느정도 건강이 회복되어서 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여행을 갈 정도가 되었다. 그리하여 들리어스의 유해는 영국으로 옮겨져서 1935년 5월 26일 서리의 림프스필드에 있는 성베드로교회의 교회묘지에 이장될수 있었다. 남편의 이장을 마치지마자 옐카의 병세는 극도로 악화되어 급히 런던의 켄싱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옐카는 남편을 이장한 이틀 후인 1935년 5월 28일 켄싱턴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67세였다. 옐카는 서리(Surrey)의 성베드로교회묘지에 들리어스와 합장되엇다. 옐카가 남긴 상당한 재산으로 들리어스 재단이 설립되었다. 들리어스의 작품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목적의 재단이다. 들리어스 재단은 평소 들리어스의 음악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던 지휘자 토마스 비참(Thomas Beecham)경이 맡았다. 훗날 토마스 비참 경은 세상을 떠난 후 들리어스의 묘지에서 가까운 곳에 안장되었다. 1968년에 영국에서 Song of Summer 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들리어스의 마지막 6년 생에를 그린 작품이다. 그 마지막 6년의 생애가 어떠했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이 영화에서 옐카 로젠의 역할은 영국의 여배우인 모린 프리요르(Maureen Pryor)가 맡았다. Song of Summer 라는 영화제목은 들리어스가 작곡한 음조시 중의 하나인 A Song of Summer에서 가져온 것이다.

 

들리우스의 말년에 파리 근교 그레즈 쉬르 루앙의 옐카 저택에서 부인 옐카 로젠과 함게

 

○ 모차르트와 베버는 사촌처남 관계이다.

 

'마탄의 사수'로 유명한 칼 마리아 폰 베버(Carl Maria von Weber: 1786-1826)는 모차르트의 사촌처남이 된다. 모차르트의 부인인 콘스탄체와 베버가 사촌관계이기 때문이다. 콘스탄체의 어머니가 베버의 아버지의 동생, 즉 베버의 삼촌과 결혼했으므로 콘스탄체와 베버는 사촌간이다. 그러므로 콘스탄체와 결혼한 모차르트에게는 '마탄의 사수'의 베버가 사촌처남이 된다. 콘스탄체의 아버지, 즉 모차르트의 장인은 이름이 프리돌린 베버(Fridolin Weber: 1733-1779)이다. 베버의 아버지인 프란츠 안톤 폰 베버(Franz Anton von Weber: 1734-1812)와 콘스탄체의 아버지인 프리돌린 베버는 형제간이지만 이복형제간이다. 베버의 할아버지가 첫번째 부인과 사별했기 때문에 재혼하여서 프리돌린 베버를 낳았는지, 그렇지 않으면 내연의 관계를 유지하다가 프리돌린 베버를 낳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무튼 베버의 아버지와 콘스탄체의 아버지와는 이복형제간이다. 이복이던 어쨋든 형제간은 형제간이므로 콘스탄체의 아버지 프리돌린은 칼 마리아 폰 베버의 삼촌이다. 칼 마리아 폰 베버의 아버지인 프란츠 안톤 폰 베버는 독일 북부지역의 뤼베크에 있는 오이틴(Eutin)이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가구를 만들어 팔던 목공이었다. 칼 마리아 폰 베버가 되었든, 프란츠 안톤 폰 베버가 되었든, 이름에 폰(von)이라는 단어가 들어가기 때문에 혹시 귀족 집안이 아닌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아니다. 그냥 보기 좋고 듣기 좋으라고 붙인 단어라고 한다. 칼 마리아 폰 베버의 어머니는 비엔나에서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던 여인이었다. 이름은 제노베파(Genovefa)였다. 사실상 제노페바는 프란츠 안톤 폰 베버의 두번째 부인이었다. 베버의 아버지인 프란츠 안톤 폰 베버가 수단이 좋아서 그랬는지 또는 인연이 닿아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베버의 어머니인 제노베파는 프란츠 안톤 폰 베버의 두번째 부인이 된다. 이렇게 설명만 하면 도무지 복잡한 것 같아서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도표라도 그려서 설명하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지만 별것도 아닌 사항을 가지고 도표까지 그려가면서 설명하는 것이 좀스러운 것 같아서 그냥 설명을 진행하니 독자 제위께서는 정신을 바짝 차리시던지 그렇지 않으면 직접 도표를 그려가면서 설명문을 읽으시기 바란다.

 

베버가 태어난 독일 북단 홀슈타인의 오이틴

 

모차르트의 생애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에서도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므로 참조하시기를 바라며 이번에는 베버의 생애가 어떠했으며 어떤 가정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소개코자 한다. 베버의 원래 이름은 칼 마리아 프리드리히 에른스트 폰 베버(Carl Maria Friedrich Ernst von Weber)이다. 독일 북단, 덴마크에서 가까운 홀슈타인의 오이틴(Eutin)에서 태어났다. 당시에는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호흐슈티프트 뤼베크(Hochstift Lübeck)의 마을이었으며 오늘날에는 슐레스비히 홀슈타인(Schleswig-Holstein)주에 속한 도시이다. 호흐슈티프트라는 호칭은 신성로마제국 의회의 의원이라는 의미이다. 뤼베크에서는 제국의회의 의원을 낼수 있기 때문에 그런 명칭을 붙이게 되었던 것이다. 베버는 아버니 프란츠 안톤 폰 베버와 어머니 제노베파 사이에서 태어난 세 자녀 중에서 맏이이다. 앞에서 설명한대로 베버의 어머니 제노베파는 프란츠 안톤 폰 베버의 두번째 부인이다. 베버의 할아버지는 홀슈타인 공국의 군대에서 장교로 복무했었다. 그러나 군인으로서 충실치 못하다는 이유로 파면을 당했다. 그후 베버의 할아버지는 여러 도시를 다니며 극장의 음악감독을 맡았다. 베버의 할아버지는 1787년에는 함부르크에서 별도의 극단을 창단하기도 했다. 베버의 할아버지는 음악감독 겸 극단장 겸 배우 겸 등등이어서 연예계라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그렇듯이 아무래도 여자관계가 복잡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베버의 아버지인 프란츠 안톤에게 이복 동생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고 그 이복 동생이 훗날 바로 모차르트의 장인이 되었던 것이다.

 

베버의 아버지인 프란츠 안톤 폰 베버

 

아무튼 베버의 아버지인 프란츠 안톤 폰 베버는 할아버지를 닮아서인지 낭비벽이 심했으며 돈이 없으면 남들에게 약간의 사기를 쳐서라도 돈을 마련해서 허세를 부리며 지냈다. 베버도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또는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서인지 남들에게서 빚을 많이 져서 빚장이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베버는 21세 때부터 3년 동안 뷔르템버그 공국 프레데릭 1세의 동생인 루디비히 공작의 개인비서로 일했었다. 뷔르템버그에서의 생활은 문제가 많았고 베버의 얼굴에 먹칠을 한 것이었다. 우선 아버지 프란츠 안톤이 루드비히 공작의 집안 일을 돕는 척 하면서 공작의 돈을 남용하고 착복했다. 그것도 한두 푼이 아니라 막대한 금액을 착복했다. 공작은 베버도 한통속으로 가담했다고 해서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을 당국에 고발하였다. 공작의 형인 프레데릭 1세는 당장 두 사람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베버는 마침 '실바나'(Silvana)라는 오페라의 리허설을 하고 있는 중에 경찰들이 들이 닥쳐서 체포되었다. 베버의 아버지도 체포되었다. 프레데릭 1세는 베버에 대하여 상당히 못마땅해 하고 있던 터에 동생의 재산까지 착복했다고 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당장 체포토록하고 감옥에 넣었다. 프레데릭 1세가 베버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베버가 오페라 가수인 마르가레테 랑(Margarethe Lang)이라는 여자와 상당기간 동안 스캔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베버는 마르가레테와 사랑하는 사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말도 안되는 불륜이었다. 베버의 아버지와 베버는 재판을 받았다. 결과, 두 사람 모두 뷔르템버그 공국에서 추방당했다. 베버는 뷔르템버그에 있으면서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가톨릭 음악들을 열심히 작곡했다. 주로 미사곡이었다. 유명한 '축제미사곡'(Jubil Messe)도 이 당시에 작곡한 것이다. 베버는 가톨릭 전통의 전례음악을 복구한다는 의도아래 가톨릭 음악들을 작곡했지만 이것이 오히려 당시 개신교도들의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그래서 은근한 미움을 받고 있었던 터였다.

  

베버가 1817년부터 음악감독으로 있었던 드레스덴 오페라(젬퍼오퍼)

 

베버는 드레스덴 오페라의 감독으로 있을 때에 소프라노 카롤리네 브란트(Caroline Brandt)와 결혼하였다. 카롤리네 브란트는 오페라 '실바나'의 초연에서 타이틀 롤의 이미지를 창조한 소프라노였다. 카롤리네 브란트와의 결혼은 1826년 베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유지되었다. 1826년에 접어 들었을 때 베버는 영국 로열오페라하우스로부터 새로운 오페라를 작곡해 주고 이의 초연을 주관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래서 영국 여행을 감행하였고 '오베론'(Oberon)을 완성했다. 그러나 그때 쯤해서 베버는 이미 폐염으로 고생하기 시작했다. 베버는 결국 그해 6월 5일 새벽에 작곡가인 조지 스마트(George Smart: 1776-1867)경의 저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때 베버는 39세의 한창 나이였다. 베버는 런던에 매장되었다. 그로부터 18년후 베버의 유해는 가족들의 요구에 의해 드레스덴의 가족묘로 옮겨졌다. 이장식을 거행할 때에 바그너가 조사를 읽었다.

 

드레스덴의 베버 기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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