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작곡가들의 뿌리를 찾아서 - 4
○ 하이든은 크로아티아인?
독일에서 발행한 하이든 기념 우표. 하이든은 1809년 5월(V) 31일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요제프 하이든이 오스트리아 사람이 아니라 크로아티아 사람이라는 주장이 있다. 지금은 그런 논란이 별로 관심꺼리가 되지 않지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른바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 때에는 나라마다 세계적인 유명인사 모모씨가 자기 나라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일이 심심찮게 있었다. 그래야 자기 나라의 위상이 높아진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이든에 대한 논란도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크로아티나 사람이라는 주장이 있었고 독일 사람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가만히 있었다. 19세기 말에 크로아티나의 민족학자인 프라뇨 쿠하츠(Franjo Kuhac)라는 사람은 크로아티아 민속음악을 수집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쿠하츠는 하이든의 작품들에 나오는 주제들과 크로아티아의 민속음악이 너무나 흡사해서 놀랐다는 것이다. 그는 하이든이 이미 크로아티아의 민속음악을 잘 알고 있어서 그것들을 자기의 작품에 인용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반대의견도 많았다. 하이든의 음악은 해가 지나갈수록 민속적인 요소를 보인 것일 뿐이며 크로아티아 민속음악을 인용한 것은 아니라는 반론이었다.
아이젠슈타트의 하이든이 살던 집. 요제프 하이든가쎄 12번지
하이든은 크로아티아을 한번도 방문한 일이 없다. 하지만 하이든이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을들은 대체로 크로아티아에서 멀지 않았으며 당연히 크로아티아 사람들도 상당히 살았다. 그래서 하이든이 어린 시절에 크로아티아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쿠하츠는 한 술 더 떠서 하이든의 작품들 중에 크로아티아의 민속음악들이 자주 나오는 것은 다름아니라 하이든이 크로아티아계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이든의 선조들이 크로아티아에서 추방당해 헝가리-오스트리아쪽으로 이주해 왔음이 틀림없다는 얘기였다. 이와 함께 쿠하츠는 하이든(Haydn)이라는 이름이 크로아티아어의 하이딘(Hajdin)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하이든의 어머니인 마리아 콜러(Maria Koller)도 크로아티아식 이름이라고 내세웠다. 쿠하츠는 이런 주장을 크로아티아어로 써서 남겼다. 당시에는 크로아티아어에 대한 관심들이 없어서 쿠하츠의 논문도 영어나 독일어로 번역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영국의 음악학자인 헨리 해도우(Henry Hadow)가 쿠하츠의 논문을 번역함으로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헨리 해도우는 '하이든: 크로아티아 작곡가'(1897)라는 제목의 책까지 펴냈다.
로라우에 있는 하이든 생가. 요제프 하이든과 미하엘 하이든의 생가라는 안내석이 세워져 있다.
한편, 1930년대에 나치가 발호할 때에 독일의 음악학자인 에른스트 프리츠 슈미트(Ernst Fritz Schmid)라는 사람이 하이든의 오리진에 대한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했다. 그가 하이든의 조상들의 출생에 대한 교구교회들의 자료들을 조사해 보았더니 하이든의 조상들은 독일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물론 Haydn 또는 Koller 라는 이름은 분명히 독일식 이름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에른스트 프리츠 슈미트의 이같은 연구결과에 대하여 일부 학자들은 어느정도 공감하면서도 다만 그것이 나치의 선전목적으로 이루어진 연구조사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신뢰성이 떨어진다고들 얘기했다. 슈미트의 연구보고서의 서문에 보면 나치 선정장관인 요제프 괴벨스(Joseph Geobbels)와 괴벨스의 수석이론가인 알프레드 로젠버그가 슈미트의 연구를 후원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다른 음악학자들도 슈미트의 주장에 동조하는 논문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음악학자들인 미셀 브레네(Michel Brenet) 등도 슈미트와 의견을 함께 했다. 덴마크의 음악학자인 옌스 페터 라르센(Jens Peter Larsen)도 슈미트의 의견에 동조했다. 덴마크의 라르센은 뉴 그로우브에 쓴 글에서 '이제 더 이상 하이든의 오리진 문제로 논란을 벌이지 말자. 독일 오리진임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나저나 하이든 자신은 크로아티아인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하이든의 제자이면서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인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칼크브렌너(Friedrich Kalkbrenner)는 그의 비망록에서 '하이든은 코사크, 시베리안, 칼무츠, 크로아티아인들을 모두 야만인처럼 보았다'고 썼다.
현악 4중주 연주를 지도하는 하이든
○ 하이든의 조상들은 대대로 마차바퀴수리장인이었다.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하는 요제프 하이든(Joseph Haydn: 1732-1809)의 아버지 마티아스 하이든(Mathias Haydn)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접경지대에 있는 작은 마을인 로라우(Rohrau)에서 마차바퀴수리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하이든의 할아버지인 토마스 하이든(Thomas Haydn)도 로라우 인근의 작은 마을인 하인부르크(Hainburg)에서 마차바퀴를 수리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인근 로라우 마을로 가족과 함께 이사를 와서 살았던 것이다. 하이든의 아버지 마티아스는 로라우 마을의 이장과 비슷한 직분도 겸하고 있었다. 마르크트리히터(Marktrichter)라는 직분이었다. 말하자면 마을 재판관이었다. 하이든의 어머니 마리아(Maria: 결혼전 성은 Koller)는 로라우 지방을 소유하고 있던 하라흐 백작의 저택에서 요리사 보조로 일하던 여인이었다. 마리아 콜러는 21세 때에 마티아스 하이든과 결혼하여 12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그중에서 6명은 어릴 때에 사망했고 나머지 6명만이 그럭저럭 별 탈 없이 자라났다. 그중에서 하이든의 동생인 미하엘 하이든도 나중에 뛰어난 작곡가가 되었다. 하이든의 어머니 마리아는 47세 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이든의 아버지인 마티아스는 그 이듬해에 19세 연하의 마리아 안나 제더(Maria Anna Seeder)와 재혼하였다. 하이든의 새머머니인 마리아 안나는 하라흐 백작가의 하녀였다. 하이든의 아버지는 재혼하여서 다섯 자녀를 두었으나 모두 어릴 때에 세상을 떠났다. 아무튼 음악과는 거리가 먼 집안에서 역사에 길이 남는 위대한 음악가가 나온 경우는 하이든이 처음은 아니지만 대표적이기는 하다.
로라우의 하이든 생가
○ 프란츠 리스트는 헝가리가 아니라 오스트리아 사람이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피아노의 거장인 프란츠 리스트의 국적을 두고 헝가리인이냐 아니면 오스트리아인이냐에 대한 논란이 사실상 아직까지도 꺼지지 않고 있다. 헝가리는 당연히 헝가리 사람인데 왜 그러냐고 말하고 있으며 오스트리아는 리스트가 헝가리가 아니라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것이 정확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주장은 리스트가 태어난 라이딩(Raiding)이라는 마을이 리스트가 태어날 당시에는 헝가리 왕국에 속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헝가리 왕국이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오스트리아에 속해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라이딩은 현재 오스트리아 부르겐란트(Burgenland)주의 오버풀렌도르프(Oberpullendorf)에 속한 마을이다. 라이딩은 오스트리아에 있지만 헝가리와의 접경지대에 있다. 역사적으로 보아서 라이딩은 900년부터 1921년까지 헝가리 왕국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헝가리 왕국은 1918년 1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처음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해 있었고 1867년부터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가 1차 대전 후에 생제르망 조약에 따라 서부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에 귀속되는 바람에 오스트리아의 영토가 되었다. 이렇게하여 오스트리아로 귀속된 서부 헝가리가 현재의 부르겐란트주를 형성하는 발판이 되었다. 오스트리아에 이관된 서부 헝가리 지역은 1차 대전이 끝나기 전까지 헝가리 왕국에 속해 있었지만 주민의 상당수가 독일어를 말하는 오스트리아인들이었다. 실제로 리스트도 헝가리 왕국의 라이딩에서 태어났지만 학교에서는 독일어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리스트는 평생을 헝가리인이라고 내세우면서도 헝가리어는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이름 정도만 쓸줄 알았으며 말은 할줄 몰랐다. 라이딩 마을은 헝가리어로 도보르얀(Doborjan)이라고 하며 크로아티아어로는 라이노프(Rajnof)라고 부른다.
오스트리아 부르겐란트 주의 라이딩 마을. 포도밭이 많은 조용하고 아름다운 농촌마을이다. 프란츠 리스트가 태어난 마을이다.
프란츠 리스트는 1811년 10월 22일 라이딩에서 태어났다. 라이딩의 리스트 생가는 현재의 주소가 리스트슈트라쎄(Lisztstrasse) 46번지이다. 현재 리스트 생가는 리스트 기념관(Liszt Museum)이다. 리스트 기념관은 3월 19일부터 5월 31일까지는 월요일에만 문을 닫지만 6월 1일부터 11월 11일까지는 월요일도 문을 연다. 그 나머지 기간동안에는 문을 닫는다. 이같은 스케줄은 2015년의 경우이며 다른 해는 그때 보아야 한다. 우선 리스트의 가족 상황을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리스트 국적에 대한 논란을 잠재울 실마리가 될수도 있기 때문이다. 리스트는 이름이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이지만 그건 독일식 표기이며 헝가리어로는 리스트 페렌츠(Liszt Ferenc)이다. 예전에는 Ferenz 를 Ferencz라고 표기했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헝가리에서는 우리나라처럼 성이 앞에 오고 이름이 나중에 온다. 그래서 Liszt Ferenc 라고 쓴다. 헝가리와 우리나라는 여러 면에서 동질성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이들의 마쟈르어는 우랄 알타이어족에 속하므로 우리나라와 같은 줄기의 언어라고 한다.
라이딩의 리스트슈트라쎄의 길가에 있는 화단
리스트의 증조할아버지인 세비스티안 리스트(Sebastian Liszt: 1703-?)는 원래 헝가리 왕국의 모손(Moson) 구역에 있는 라이카(Rajka: Ragendorf) 마을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좋게 말해서 소작농이었고 그저 그렇게 말해서 날품팔이 농부였다. 세바스티안 리스트는 18세기 초반에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헝가리 농부 수천명과 함께 도나우 슈봐비아 지역으로 이주해 와서 정착했다. 당시 슈봐비아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였으며 현재는 니더외스터라이히주와 헝가리로 분할되어 있다. 뭐 이런 것까지 시시콜콜하게 설명하느냐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도 있겠지만 리스트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리스트의 직계 선조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아는 것도 흥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잠시 설명을 이어나가는 바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그렇게 해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슈봐비아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지만 리스트의 할아버지는 이름은 잘 모르겠는데 사람이 성실하고 음악에 대한 재능도 있어서 에스터하지 가문의 재산 관리인 중의 하나로 취직을 하여 지냈다. 리스트의 할아버지는 피아노도 잘 쳤고 바이올린과 오르간도 잘 연주했다. 리스트의 할아버지는 자녀를 여럿 두었는데 그중에서 아들인 아담 리스트(Adam Liszt)가 리스트의 아버지이다. 리스트의 삼촌들이나 고모들은 슈봐비아에서 태어나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각지로 흩어져 살게 되었는데 그런 후로는 서로 연락들이 안되어서 어디서 누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수가 없다.
라이딩의 리스트 생가 겸 기념관
리스트의 아버지인 아담 리스트는 라이딩에서 태어났다. 당시 라이딩은 헝가리 왕국의 소프론(Sopron) 지역에 속한 도보르얀이었다. 아담 리스트도 그의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피아노를 잘 쳤고 첼로, 바이올린, 기타 연주에도 재주가 있었다. 리스트의 아버지는 리스트의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에스터하지 가문에 봉사하였는데 당시 에스터하지 가문은 니콜라우스 2세 공자가 가문을 대표하고 있었다. 아담 리스트가 음악적으로 재능이 많다보니 에스터하지 가문과 관련이 있는 여러 음악가들과도 친분을 다지며 지냈다. 하이든은 물론이고 훔멜, 베토벤과도 자주 만나며 지냈다. 아담 리스트는 마리아 안나 라거(Maria Anna Lager)라는 여인과 결혼했다. 리스트의 어머니이다. 그리하여 리스트가 1811년에 라이딩에서 태어났다. 리스트도 할아버지,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어려서부터 음악적인 재능을 보였다. 아들 리스트가 음악적인 재능이 많은 것을 알아차린 아버지 아담 리스트는 '그래 피아노나 잘 쳐서 먹고 살아라'라는 생각에 어린 리스트가 일곱이 되자 정식으로 피아노 레슨을 시작했다. 아마 피아노를 고추가루 정도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리스트는 여덟살 때에 간단한 작곡을 했다. 그리고 아홉살 때에는 인근의 대도시인 소프론과 프레스부르크(Pressburg)까지 나가서 피아노 연주를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프레스부르크는 현재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Bratislava)이다. 리스트의 피아노 솜씨를 본 귀족들은 '아하 저 아이를 잘 키워서 우리 집의 전속 음악가로 삼아야지'라는 생각에 리스트를 후원키로 했다. 그래서 비엔나에 가서 음악공부를 본격적으로 할수 있었다.
헤렌가쎄 13번지. 리스트가 비엔나에 와서 고작 11살의 나이로 피아노 연주회를 가졌던 장소이다. 니더외스ㅓ라이히 주청사로 사용되었던 건물의 호프(내정)이다.
비엔나에 온 어린 리스트는 고작 11살 때에 피아니스트로서 데뷔하였다. 리스트는 비엔나에서 체르니에게서 피아노 레슨을 받았으며 작곡은 궁정음악감독인 살리에리로부터 받았다. 어린 리스트는 1822년 12월 1일, 헤렌가쎄 13번지의 란트슈탠디셔 잘(Landstandischer Saal: Landhaussaal)에서 독주회를 가졌다. 란트슈탠디셔 잘은 니더외스터라이히주 청사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열한 살의 리스트는 이날 요한 네포무크 훔멜의 협주곡 A 단조, 조아키노 로시니의 오페라 첼미라(Zelmira)에 나오는 아리아를 바탕으로 삼은 즉흥 변주곡,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의 알레그레토를 연주하였다. 사람이 아니라 피아노 귀신이었다. 넉달 후인 1823년 4월 13일에는 호프부르크(Hofburg)의 클라이네 레도우텐잘(Kleine Redoutensaal)에서 독주회를 가졌다. 이번에는 훔멜의 협주곡 B 단조, 모셀레스의 변주곡, 그리고 어린 리스트 자신이 만든 즉흥곡이 연주되었다. 베토벤이 이날 연주회에 왔었다. 베토벤은 너무 감동하여서 연주가 끝나자 스테이지로 올라와서 리스트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이런 놀라운 피아니스트는 내 생전에 다시 볼수 없을 것이다. 열심히 해라'면서 찬사와 격려의 말을 했다. 어린 리스트는 아버지와 함께 비엔나에 와서 두번의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다시 헝가리로 돌아갔다. 에스터하지 공자가 아버지를 오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리스트의 아버지는 리스트를 그냥 헝가리에서 평범하게 공부하도록 하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하여 에스터하지 집안일을 사임하고 바로 몇 달 후에 다시 비엔나로 돌아왔다.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프란츠 요제프 황제 앞에서 연주하는 리스트. 황제의 옆은 아무래도 엘리자베트 황비인 것 같고 그 옆은 딸 발레리, 그리고 소년은 루돌프 황태자같다.
리스트는 1824년 초에 디아벨리 변주곡에 참여했다. 리스트가 불과 열세살 때였다. 악보출판가인 디아벨리는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명 작곡가 50명에게 자기의 왈츠를 주제로 삼아서 변주곡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베토벤, 체르니, 훔멜 등 당당한 작곡가들이 그 작업에 참여했다. 리스트는 가장 어린 작곡가로서 참여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변주곡들은 '조국 예술가연맹'(Vaterländischer Künstlerverein)이라는 타이틀로 발간되었다. 리스트가 16세 때인 1827년에 아버지 아담 리스트가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리스트는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가서 힘들게 살았다. 세월이 흘러서 리스트는 세계가 알아주는 피아노의 거장이 되었다. 리스트는 지휘자로서도 훌륭했고 작곡가로서도 뛰어났다. 그후의 리스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하여는 생략코자 한다. 본 블로그의 별도의 항목을 찾아보면 자세히 나오기 때문이다. 다만, 리스트의 마지막에 대하여는 몇마디 언급코자 한다. 리스트는 말년에 로마 가톨릭의 성직자가 되고자 했다. 리스트는 프란체스코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사가 되었다. 하지만 완전히 속세를 떠나지 못하고 속적(俗籍) 있는 수도사로 지냈다. 이를 영어로 터티어리(Tertiary)라고 부른다. 리스트는 70세인 1881년에 봐이마르의 어떤 호텔에 묵고 있었는데 2층에서 내려오는 계단에서 헛발을 디뎌서 굴러 넘어졌다. 노인네라서 8주 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치료를 받았다. 거의 움직일 정도가 되었으나 아무래도 후유증이 있어서 완전히 회복되지는 못하였다. 여기에 오래전부터의 질병들이 가세하였다. 수종(드롭시)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얼굴에고 수종이 생길 정도였다. 천식(아스마)이 심해졌다. 불면증(인솜니아) 때문에 잠을 못 이루었다. 그리고 왼쪽 눈에 백내장(캐타랙트)이 생겨서 한쪽 눈을 쓸수 없었다. 또한 심장질환이 있었다. 심장질환은 리스트를 죽음으로 몰고간 원인이 되었다. 말년의 리스트는 절망과 고독,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다. 리스트는 1886년 7월 31일 바이로이트에서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공식적인 사인은 폐염이었다. 리스트는 유언에 따라 바이로이트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누가 리스트의 모습을 네 시기로 나누어서 정리했다. 왼쪽으로부터 소년시절, 청년시절, 장년시절, 노년시절의 모습이다.
리스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는 얘기다. 젊은 시절의 리스트는 훤출한 미남이었다. 여자들을 줄을 이어서 따라 다녔다. 섬싱이 없었을리가 없었다. 그 중에서도 마리 다구(Marie d'Agouldd) 백작부인과의 로맨스는 세상이 다 아는 대단한 것이었다. 마리 다구는 프랑스 귀족 가문의 여식으로서 아버지가 독일로 이민을 가는 바람에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마리 카테린 소피 드 플라비니(Marie Cathérine Sophie de Flavigny: 1805-1876)이었다. 마리는 22세 때인 1827년에 프랑스의 귀족인 샤를르 루이 콩스탕 다구(Charles Louis Constant D'Agoult) 백작과 결혼하였다. 그래서 다구백작부인이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다. 마리는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서 작가로서 널리 알려졌다. 마리는 다니엘 슈테른(Daniel Stern)이라는 필명으로 작가생활을 했다. 다니엘 슈테른의 대표작은 '1848년 혁명사'(Geschichte der Revolution von 1848)로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리스트의 부인이라고 할수 있는 마리 다구
마리는 다구 백작과 결혼해서 두 딸을 두었다. 큰 딸은 불행하게도 여섯 살 때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한 때에 마리는 파리의 어느 저택에서 있었던 콘서트에서 리스트를 처음 만났다. 당시에 리스트는 21세의 꽃미남이었고 마리도 비록 유부녀로서 두 딸을 낳은 여인이지만 미모가 관찮았었다. 마리는 리스트보다 6년 연상이었다. 두 사람은 사랑의 불길을 태웠다. 마리는 가출하여 리스트와 애정도피행각을 벌였다. 대단한 스캔들이었다. 하지만 리스트가 너무나 유명해서 마리와의 스캔들은 아름다운 로맨스로 평가되기가 일수였다. 리스트와 마리는 동거하다보니 1835년에 첫 딸 블란디네(Blandine)를 낳았다. 블란디네는 나중에 결혼해서 살았지만 오래 살지를 못하고 30세가 못되어서 세상을 떠났다. 리스트와 마리의 둘째 자녀가 유명한 코지마(Cosima)였다. 1837년에 태어났다. 코지마는 부모의 애정편력을 유전받아서인지 처음에는 피아니스트이며 지휘자인 유명한 한스 폰 뷜로브(Hans von Bulow)와 결혼했다가 두 딸을 둔 채 바그너에게 뛰어갔고 결국 나중에 한스 폰 뷜르브와 이혼하고 바그너와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마지막으로 리스트와 마리는 세번째 자녀로서 1839년에 아들 다니엘을 두었다. 그러나 흐지브지 되었다. 아무튼 이상이 역사상 가장 뛰어난 피아노의 거장 리스트의 가족상황이다. 리스트의 국적 문제를 논하다가 어찌하다보니 가족상황으로 확대되었음을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리스트와 마리 다구 백작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코지마. 나중에 바그너의 부인이 되었다. 사람들은 코지마가 리스트의 유일한 자녀인줄 아는데 실은 언니가 하나 있었고 남동생도 하나 있었다.
○ 도니체티는 프랑스 작곡가인가 오스트리아 작곡가인가? 대답은 이탈리아 작곡가이다.
게타노 도니체티(Gaetano Donizetti: 1797-1848)는 이탈리아의 벨칸토 작곡가이다. 그러나 도니체티 당시에 이탈리아를 둘러싼 유럽의 정세는 매우 복잡하여서 엄밀히 말해서 도니체티를 이탈리아의 작곡가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지경이다. 도니체티는 1797년 11월 29일 베르가모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당시 베르가모는 이탈리아와는 별도로 독립성을 지닌 치살피네 공화국(Cisalpine Republic)에 속한 도시였다. 치살피네 공화국은 프랑스 혁명 이후에 나폴레옹이 만든 공화국으로 이를 프랑스어로 Républiques sœurs(자매 공화국)이라고 불렀다. 프랑스와 자매와 같은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 돕는다는 뜻에서였다. 치살피네 공화국(프랑스어로는 시살팽 레푸블리크)은 1797년에 수립되었다. 바로 그 해에 도니체티가 태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도니체티는 이탈리아 시민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우산 아래에 있는 치살피네(시살팽) 공화국의 시민으로 태어난 것이다. 치살피네 공화국은 처음에는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만을 영토로 삼았으나 후에는 모데나와 볼로냐, 그리고 에밀리아까지 영토를 확대하였다. 돌이켜 보건대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 모데나, 밀라노 등은 국가간의 세력다툼으로 어느 때는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가 또 어느 때는 오스트리아 영토로서 존재하였다. 그러다가 훗날 이탈리아의 통일이 이루어지자 원래대로 이탈리아의 영토가 되었다. 도니체티는 1848년 4월 8일에 롬바르디의 베르가모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베르가모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그러므로 도니체티는 프랑스의 영향을 받는 지역에서 태어나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도니체티가 프랑스 또는 오스트리아 사람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도니체티는 이탈리아의 작곡가이다.
베르가모에 있는 도니체타 생가(Casa natale di G. Donizetti). 비아 보르고 카날레(Via Borgo Canale)에 있다. 도니체티는 이 집의 다락방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가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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