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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돕기 못박기(Kriegsnagelungen)

정준극 2015. 9. 26. 22:40

전쟁돕기 못박기(Kriegsnagelung)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그리곡 독일 및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는 예전부터 전쟁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전쟁터에 나가면 후방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병사 모양의 목상을 만들어서 그 목상에 못을 촘촘히 박는 관습이 있다. 자칫 잘못 생각하면 전쟁에 나가서 싸우고 있는 병사들의 몸에 못을 박는다는 것이 저주를 하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니라 그 못을 팔아서 전사한 병사의 가족들을 돕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못을 박는 관습을 크리그스나겔룽(Kriegsnagelung)이라고 한다. 크리그(Krieg)는 '전쟁'이란 뜻이고 나겔룽(Nagekung)은 '못박기'라는 뜻이다. 오스트리아에서 나무 기둥이나 나무 조각상에 못을 박는 관습은 실로 오래전인 중세부터 실행되어 온 것이다. 집을 떠나 여행을 가는 사람이 무사히 일을 마치고 속히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오라는 기원을 못에 담아 나무에 박았던 것이다. 오스트리아에서 그런 관습이 처음 기록에 나타난 것은 1533년이었다. 그러니 상당히 오래된 관습이다. 1구 슈테판스플라츠에서 캐른트너슈트라쎄를 따라 올라가는 초입에 슈토크 임 아이젠 플라츠(Stock-im-Eisen-Platz)라는 지명이 있다. 그라벤과 케른트너슈트라쎄가 갈라지는 곳이다. 그곳에 공정궁(Palais Equitable)이라는 화려하고 커다란 건물이 있는데 공정궁의 길가에 면한 모퉁이에 유리로 덮혀 씌운 나무그루터기가 있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나무에 못들이 박혀 있는 것을 알수 있다. 그것이 바로 슈토크 임 아이젠(Stock im Eisen)이다. 그 슈토크 임 아이젠에는 여러 전설이 담겨 있어서 유명하다. 특히 최근에는 나치와 관련된 전설까지 포함되어서 비엔나에서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옛날에는 마을을 떠나서 먼데로 여행가는 사람들이 동구밖의 나무에 못을 박는 일이 있었다. 그러면 무사하게 일을 마치고 속히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슈토크 임 아이젠이다. '쇠붙이가 박혀 있는 나무기둥'이라고나 할까? 나무에 못과 같은 쇠붙이를 박지 않고 가면 악마의 꾐에 빠져 곤란을 겪는다고 한다. 참으로 별별 관습도 다 있다.

 

나무에 못박기 행사는 1차 대전이 시작되자 갑자기 활발해 졌다. 원래 목적은 멀리 전쟁터에 나간 병사들이 안전하게 속히 돌아오라는 소원을 담아 못을 박았던 것인데 그것이 조금 발전하여서 못을 판 돈과 기타 기부금을 받아 후방에 있는 전쟁미망인이나 전쟁고아들을 도왔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1915년에 처음으로 비엔나에서 전쟁을 돕기위한 나무 그루터기에 못박는 행사가 추진되었다고 한다. 못이 많이 박히니까 당국에서 못을 빼내어 팔아서 돈을 마련하고 전쟁 미망인이나 전쟁 고아들을 돕는 일에 쓰기도 했지만 실은 못을 박는 일은 일반 시민들이나 그렇게 하는 것이고 돈많은 사람들은 못박는 시늉만 하고 기부금을 냈다. 아무튼 시민들은 기왕이면 못 한개라도 더 박아서 전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도돠주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을 단위로 그런 운동이 추진되었고 친목단체 단위로도 추진되었다. 그런가하면 학교에서도 그런 운동이 추진되었다. 전국적으로 나무에 못박기 운동이 불처럼 타올랐다. 나무로 병사들의 모습을 조각하고 여기에 못들을 박았다. 그것을 Wehrmanns im Eisen 또는 Eiserner Wehrmann 이라고 불렀다. Wehrmann은 원래 소방수 또는 지역방위대원을 말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전쟁에 나간 병사들을 의미한다. 못을 박는 대상인 나무 기둥 또는 나무 조각상은 나겔피구르(Nagelfigur: 못형상), 나겔만(Nagelmann: 못사람), 나겔빌트(Nagelbild: 못조형물), 나겔브레트(Nagelbrett: 못판자), 나겔크로이츠(Nagelkreutz: 못십자가), 나겔조일레(Nagelsaule: 못기둥), 또는 베르쉴트(Wehrschild: 방패), 크리그스봐르차이헨(Kriegswahrzeichen: 전쟁상징물)이라고 불렀다.

 

어떤 거리에 세워진 슈토크 임 아이젠. 아랫쪽에 자물쇠를 채어둔 것은 못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지방으로 갈수록 이런 슈토크 임 아이젠이 많다.

 

1차 대전 때에 크리그스나겔룽을 시작한 것은 우선은 전쟁 미망인이나 전쟁고아들을 돕기 위한 운동으로 시작하였으나 얼마후에는 범위를 넓혀서 부상병이나 전사자의 부모 등 후방의 어려운 가족들을 돕는데에도 사용할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냥 마을 한 가운데 나무 기둥을 세우고 못을 박도록 하는데에 만족하지 않고 각 회사, 공장, 직장, 학교, 교회 등으로 넓혀나갔고 결국은 당국이 주관이 되어 공식적인 행사로까지 연결하였다. 결과, 전국적으로 상당한 기부금이 나와서 많은 도움을 줄수 있었다. 정부가 주관이 되어 전쟁돕기 못박기 행사가 시작되자 레오폴르 살바토르 대공, 독일 대사 치르슈키 뵈겐도르프, 터키 대사 휘자인 파샤가 못 50만개를 상징적으로 희사하였다. 1차 대전에서 동맹국임을 보여주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시당국은 베르만 목제형상을 슈봐르첸버그플라츠에 전시해 놓고 시민들로 하여금 못박기 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당시의 신문보도를 보면 첫날에 1천 4백명의 시민이 동참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내부장관 독토르 프라이헤르 폰 하이놀트(Dr. Freiherr von Heinold)도 참여하였다. 10월까지 70만 크로네가 모금되었다. 하지만 당국은 1백만 시민의 비엔나로서 70만 크로네는 부족한 금액이라고 보았다. 특히 제정러시아와 대결하고 있는 갈리치아의 드로호비츠라는 도시에서 베르만은 시작한 첫날에 무려 40만 크로네가 기부되었던 것과 비교하면 창피할 정도라고 보았다. 당국은 시민들의 참여를 계속 권유하였는데 그후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왜냐하면 1916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그나마 버텨주었던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사회가 온통 그 일로 정신이 없었으며 전선에서는 계속 패배의 뉴스만 전달되어 왔기 때문이다. 1918년에 전쟁이 끝나자 비엔나시는 베르만 목조형상을 라트하우스 옆 현재의 위치로 옮겨서 그냥 전시용으로만 보관해 두었다.

 

라트하우스슈트라쎄와 펠더슈트라쎄에 있는 베르만 전쟁돕기 못박기 병사상

 

전쟁이 끝나도 못을 박는 전통은 계속되어서 심지어는 나라 안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들을 위해서, 또는 외국에 나가서 살고 있는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어려운 생활을 돕기 위한 자선사업으로 발전해 나갔다. 학자들은 전쟁돕기 못박기가 공동체 안에서의 결속을 다지고 애국적인 정신을 높이는 목적이 있다고 내세웠다. 어떤 사람은 허약한 체질의 사람들이 못을 박는 운동을 통해서 건강해 질수 있다고까지 약간 확대해석하였다. 참고가 될지 안될지는 모르지만, 1차 대전 중에 비엔나에서 전쟁돕기 못박기 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아드리아해에서 작전중인 오스트리아제국의 프리기트함의 함장인 테오도르 하르티히 백작이었다. 조국에서 멀리 떨어진 아드리하해에서 전함을 타고 전쟁을 수행하는 입장에서 조국으로부터의 정신적 응원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모양이었다.그리하여 민간차원에서 베르만 못박기 운동을 주도하여 성사를 시켰다는 것이다. 1934년에 비엔나 시당국은 다시한번 베르만 못박기 캠페인을 벌이기로 했다. 이번에는 헬덴플라츠에 전몰장병 기념비를 세우는 경비를 모금하기 위해서였다. 전사자 명단을 수록한 '명예의 명부'(Ehrenbücher)를 발간하는 사업도 포함되었다. '명예의 명부'는 부르크토르 지하에 있는 전몰장병 납골당에 비치되었다. 이 사업이 베르만 캠페인으로 마무리되자 베르만 목조형상은 다시 라트하우스슈트라쎄와 펠더슈트라쎄에 있는 지정장소로 옮겨졌다. 시인 오토 베른슈토크(Otto Bernstock)가 쓴 다음과 같은 문장이 기념명판에 수록되었다.

 

Wehrmann Wiens gemahne an die Zeit

Da unerschöpflich wie des Kireges Leid

Die Liebe war und die Barmherzigkeit

 

베르만의 발에 너무 못을 많이 박는 바람에 나무가 깨졌다. 비엔나의 베르만

 

베르만 전쟁돕기 못박기 대상들은 비엔나의 여러 곳에 설치되어 효과를 보았다. 대부분 1915년에 마련된 것이지만 그후에 마련된 것도 있으며 지금까지 모습이 보관되어 있는 것들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혹시 만의 하나라도 베르만 못박기에 관심이 있어서 비엔나에는 그런 것들이 어디어디에 있는지 궁금해서 견딜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다음 장소들을 탐방한다면 '원 별 할 일도 없는 사람 다 보았네'라는 소리는 들을 지언정 마음 속에 품었던 궁금증은 다소 해소할수 있을 것이다.

 

독일의 어떤 도시에서는 목제 기사상을 만들어 놓고 못박기 용도로 사용토록 했다. 어떤 여인이 망치로 못을 박고 있다.

 

- 1구 인네레 슈타트의 아카데미 김나지움(Akademischen Gymnasium)에는 어떤 학부형으로서 식탁만드는 목공이 작은 베르만을 만들어서 학교에 걸어 놓은 것이 있다.

- 9구 알저그룬트의 젝스쉼멜가쎄(Sechsschimmelgasse) 24번지에 있는 '얘거하임'(Jägerheim)이라는 여관에는 '봘트만 인 아이젠'(Waldmann in Eisen)이 못박는 용도로 설치되어 있다. 주로 사냥꾼들이 사냥을 나가기 전에 무사귀환을 기원하면서 못을 박았다고 한다.

- 10구 화보리텐의 어떤 여관에는 '목제 잠수함'(Hölzernes U-Boot)이 있어서 못박는 용도로 설치되어 있다. 화보리텐에는 오스트리아 선박연합 사무실이 있으며 이 여관은 연합회와 연관이 있다고 한다. 전쟁에 나간 잠수함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못박기였다.

- 21구 플로리드스도르프의 플로리드스도르프 기차역 승강장에 베르쉴트(병사들의 방패)가 못박는 용도로 설치되어 있다.

- 역시 21구 플로리드스도르프에는 정원동호회(Gartenfreundeverein)인 '신 브라질'(Neu-Brasilien)이 1915년에 어떤 여관에 '회첸도르프 아이헤'(Hötzendorf Eiche)라는 못박기 용도의 참나무 형상을 설치해 놓았다.

- 비엔나의 대표적인 포도밭이 있는 그린칭에는 비엔나 미술학교의 바르비히 교수와 학생들이 1915년 7월에 못박기용 'Eiserner Weinstock'(철 조형물)을 설치했다.

- 12구 마이들링의 헤첸도르프 마을에는 로젠크란츠키르헤(Rosenkranzkirche) 옆에 'Kreuz in Eisen'(철십자가)가 못박기용으로 설치되어 있다.

- 13구 히칭의 하우프트플라츠(중앙광장)에 있는 'Zum weissen Engel'(흰옷입은 천사집) 식당에 1915년에 베르만 목조형상이 설치되었다.

- 11구 짐머링의 카이저에버스도르프()에 있었던 포병보충부대의 막사에는 1915년 10월에 'Doppeladler in Eisen'(철쌍두독수리)가 못박기 용도로 설치되었었다.

-  3구 란트슈트라쎄 구청의 대회의실에 1915년 8월에 'Deutschmeister in Eisen'(철제 도이치마이스터)가 설치되었다. 기타 등등....

 

독일의 어떤 도시에서는 아예 중앙 광장에 정자를 만들고 그 안에 베르만 못박기 병사를 세워놓았다. 그러면 사회각계 인사들과 시민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며 올라가서 못을 박았다. 이것은 애국적인 행사이기 때문에 만일 시민으로서 참여하지 않으면 '당신 뭔데 안 하는거요?'라는 따돌림을 받게 된다. 마치 우리나라가 IMF 때 금모으기 행사를 했던 것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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