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 작곡가/시작하면서

위대한 작곡가들의 아버지 대점검

정준극 2017. 4. 24. 18:44

위대한 작곡가들의 아버지 대추적

어떤 사람들이었나?


위대한 작곡가들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들이었나? 아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끼쳤기에 아들이 세계적인 작곡가가 되었을까?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제대로 밀어주지 못해서 후회한 아버지는 또 얼마나 있을까? 베토벤이나 슈베르트 처럼 자녀가 없는 작곡가들은 있지만 아버지가 없는 작곡가들은 없다. 위대한 작곡가 60인의 아버지들을 추적해 본다.


- 조반니 피에르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1525-1594).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작곡가로서 교회 전례음악에서 위대한 작품들을 남긴 팔레스트리나는 로마학파의 대표적 인물이다. 팔레스트리나는 로마 인근의 팔레스트리나 지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가졌다. 팔레스트리나 지역은 당시 교황청 관할이었다. 팔레스트리나의 집안은 그의 아버지도 그렇지만 대대로 팔레스트리나에서 교회음악을 담당했다.

-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1567-1643). 오페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몬테베르디는 밀라노 공국에 속한 크레모나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롬바르디에 속한 도시이다. 아버지 발다사레(Baldassare)는 의사 겸 약사 겸 아마추어 외과의사였다. 클라우디오는 다섯 자녀 중에서 첫번째였다.

- 헨리 퍼셀(1659-1695). 영국의 위대한 바로크 작곡가인 헨리 퍼셀은 런던의 한 구역인 웨스트민스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헨리 퍼셀 1세(Henry Purcell Sr)는 왕실채플에 봉사하는 높은 신분으로서 챨스 2세의 대관식에서는 축하 노래까지 불렀던 사람이다. 헨리 퍼셀 1세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가 헨리 퍼셀이며 셋째인 다니엘 퍼셀도 유명한 작곡가였다.

- 장 바티스트 륄리(1632-1687). 프랑스 오페라의 초석을 놓은 장 바티스트 륄리는 투스카니 대공국의 플로렌스(피렌체)에서 태어났으며 원래 이탈리아식 이름은 조반니 바티스타 룰리(Giovanni Battista Lulli)였다. 륄리는 파리에서 루이 14세를 위해 봉사하여 대단한 신임을 얻으며 지냈다.  륄리의 집안은 이탈리아에서 대대로 방앗간을 운영하였다. 아버지 로렌조 디 말도 룰리(Lorenzo di Maldo Lulli)도 플로렌스에서 방앗간을 운영하였다. 어머니는 카테리나 델 세라(Caterina del Sera)였다. 헨델의 할아버지인 발렌틴 헨델은 구리세공사였다.

헨델은 둘째 아들이었지만 형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큰아들이나 마찬가지였다.

- 프랑수아 쿠프랭(1668-1733). 쿠프랭은 유럽에서 잘 알려진 음악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샤를르(Charles)는 파리 생 제르베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였다. 그보다도 쿠프랭의 삼촌인 루이(Louis)는 당대의 이름난 오르가니스트였으며 작곡가였다. 쿠프랭의 아버지인 샤를르는 쿠프랭이 11살 때인 1679년에 세상을 떠났다. 교회는 어린 쿠프랭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오르가니스트로 임명코자 했으나 너무 어려서 18세가 되는 해까지 기다리도록 했다.

- 안토니오 비발디(1678-1741). 이탈리아 바로크 음악의 거장인 안토니오 비발디의 아버지인 조반니 바티스타 비발디(Giovanni Battista Vivaldi: 1655-1736)는 여러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이발사였으나 그후에는 전문 바이올리니스트로 활약하였다. 어린 비발디는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 교육을 받았고 마침내 뛰어난 비르투오소가 되었다.


비발디의 아버지 조반니 바티스타 비발디. 처음에는 이발사였으나 나중에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 게오르그 필립 텔레만(1681-1767). 독일 바로크 작곡가이면서 여러 악기에 능통했던 게오르그 필립 텔레만(Georg Philipp Telemann)의 아버지 하인리히 텔레만은 마그데부르크 성령교회를 관리하는 집사였다. 마그데부르크는 마그데부르크공국의 수도로서 텔레만은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텔레만의 아버지는 텔레만이 4살 때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텔레만이 음악적 재능을 보였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살림을 생각해서 반대하였다. 어린 텔레만은 혼자서 은밀히 음악공부를 하였고 12살 때에는 오페라를 작곡하기도 했다.

- 장 필립 라모(1683-1764). 오페라 '플라테'로서 유명한 라모는 디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장(Jean)은 디존지역 여러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한 사람이었다. 어머니 클로댕(Claudine)은 공증인의 딸이었다. 두 사람은 11자녀를 두었는데 라모는 일곱번째이다. 라모는 글을 읽기도 전에 음악부터 공부했다.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 '고전음악의 아버지'로서 존경받고 있는 바흐는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바흐의 자녀들만이 음악에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흐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뛰어난 음악가였다. 아버지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Johann Ambrosius Bach: 1645-1695)는 궁정 오케스트라의 트럼펫 연주자였고 마을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다. 요한 바흐는 여덟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에서 네명이 이름을 떨친 음악가로 성장하였다. 네명의 음악가 아들 중에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가장 위대하였다.


'고전음악의 아버지' 바흐의 아버지인 요한 암브루시우스 바흐


- 조지 프리데릭 헨델(1685-1797). 대부분 음악가들이 아버지는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보고 어릴 때부터 음악교육을 강요하다시피 하지만 헨델의 아버지 게오르그 헨델(Georg Handel: 1622-1697)은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알고는 있었지만 법을 공부해서 변호사가 되는 것을 바랬다. 그래서 어린 헨델이 악기를 연주하는 것 조차 금지하였다. 아버지 게오르그는 작세 봐이센펠스와 브란덴부르크의 궁정 이발사 겸 외과의사였다. 당시에는 이발사가 간단한 외과의사 역할도 했다.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은 영국으로 귀화하여서 이름을 영국식으로 조지 프리데릭 헨델(George Friderick Handel)로 바꾸었다. 영어에는 ä 라는 글자가 없기 때문에 그냥 Handel로 쓰기 시작했다.


헨델의 아버지 게오르그 헨델. 지체 높은 궁정이발사 겸 외과의사였다.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게오르그가 모자를 벗으라면 벗고 고개를 이리 돌리라고 하면 돌렸다.  


-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1714-1787). 글룩은 바바리아의 에라스바흐(Eerasbach)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알렉산더(Alexander)는 에라스바흐의 삼림관이었고 나중에는 보헤미아 전지역의 숲을 관리하는 삼림관이었다.

- 요제프 하이든(1732-1809).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f Haydn)은 오스트리아의 헝가리 국경지대에 있는 로라우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마티아스 하이든(Mathias Haydn)은 로라우 마을의 촌장(Marktrichter) 비슷한 자격으로 마을을 위해 봉사하였으나 원래 직업은 마차바퀴 수리공이었다. 어머니 마리아(Maria Koller)는 그 지역을 관장하는 하르나흐백작 집안의 요리사였다. 마티아스는 악보도 볼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민속음악에 열중하여서 나중에 결혼하고 나서는 가족들과 함께, 또는 이웃들과 함께 노래도 부르고 악기도 연주하며 지냈다. 마티아스는 청년시절 도제기간 중에 하프를 배워서 잘 연주했다.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트(Leopold Mozart: 1719-1787)는 잘츠부르크 대주교궁의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던 뛰어난 재능의 음악가였다. 레오폴드는 독일 아우구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독일 사람들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도 독일 출신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무리 아버지 레오폴드가 독일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아들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것은 어쩔수 없는 사실이다. 레오폴드는 딸 난네를과 아들 볼피(볼프강)에게 일찍부터 음악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가족이 함께 유럽의 여러 곳을 순회연주하였다. 레오폴드는 작곡도 하였지만 바이올린 교습서를 저술했다. Versuch einer gründlichen Violinschule 라는 것으로 당시에는 대단히 훌륭한 바이올린 교과서였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트. 독일 아우구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 루드비히 반 베토벤(1770-1827). 고전음악의 역사를 새롭게 쓰게 만든 베토벤의 아버지 역시 음악가였다. 베토벤의 아버지 요한 반 베토벤(Johann van Beethoven: 1740-1792)은 본 궁전의 테너였고 음악교사였다. 어린 루드비히 반 베토벤이 처음으로 음악 교육을 받은 것도 아버지 요한으로부터였다. 그러나 심한 알콜 중독자였고 성격이 과격하여서 어린 베토벤이 제대로 연주를 하지 못하면 격한 성격을 참지 못하였다. 술을 마시고 난리를 펴서 경찰서에 끌려가면 어린 베토벤이 경찰서로 가서 사정을 해서 데려나온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베토벤의 아버지 요한 반 베토벤. 독일 쾰른 대주교 채플에서 노래를 불렀다. 대주교 궁은 본에 있었다.


- 칼 마리아 폰 베버(1786-1826).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의 대표적 작곡가인 베버는 뤼베크 대주교령의 오이틴()에서 태어났다. 당시 뤼베크는 신성로마제국에 속해 있었다. 아버지 프란츠 안톤 폰 베버()는 홀슈타인 공국의 장교로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재능이 있어서 군대를 그만두고 여러곳에서 음악감독 생활을 하며 지냈다. 그는 1787년에 함부르크에 가서 극단을 창설하기도 했다. 베버의 어머니는 아버지 프란츠 안톤의 두번째 부인인 제노베파()로서 비엔나의 소프라노였다. 프란츠 안톤의 이복 동생인 프리돌린()은 세실리아 슈탐()과 결혼해서 네 딸을 두었다. 요제파, 알로이지아, 콘스탄체, 조피이다. 그중에서 셋째 딸인 콘스탄체가  모차르트와 결혼하였다. 원래 모차르트는 알로이지아와 결혼하고 싶어서 여러 음악작품을 만들어서 헌정하였고 청혼까지 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베버의 아버지 프란츠 안톤은 재능있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래서 아들 칼 마리아 폰 베버를 모차르트처럼 천재음악가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런데 칼 마리아 폰 베버는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엉덩이 뼈에 이상이 있어서 네살 때까지 걷지도 못했다. 그러나 어머니로부터 간간히 노래와 피아노를 배웠다. 그래서 건강을 되찾고 나서는 노래도 잘 불렀고 피아노도 잘 연주했다.

- 자코모 마이에르베르(1791-1864). 마이에르베르는 베를린 근교의 타스도르프(현재는 뤼더스도르프의 한 구역)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야콥 리브만 베르(Jacob Liebmann Beer)였다. 아버지는 부유한 재정가인 유다 헤르츠 베르(Judah Herz Beer: 1769-1825)였다.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야콥 베르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작곡 공부를 할수 있었다. 그러는 중에 1811년에 할아버지 리브만 마이어 부프(Liebmann Meyer Wuff)가 세상을 떠나자 할아버지의 이름 중에서 Meyer를 물려 받고 아버지의 성인 Beer와 합하여 Meyerbeer가 되었다. 그의 이름인 자코모는 1817년경 이탈리아에서 작곡을 공부할 때에 이탈리아식으로 고친 것이다.

- 조아키노 로시니(1792-1686). 로시니는 이탈리아의 페사로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페사로에서는 유명한 로시니 페스티발이 열리고 있다. 로시니는 음악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주세페(Giuseppe)는 혼 연주자이면서 도축검사관이었다. 어머니 안나는 빵집 딸이었지만 재능있는 소프라노였다. 아버지 주세페는 프랑스혁명 동조자였다. 이탈리아 북부에 나폴레옹 군대가 진주하자 이들을 환영하였다. 그러다가 오스트리아 군대가 점령하자 체포되어 1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 '가곡의 왕'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의 아버지는 프란츠 테오도르 슈베르트(Franz Theodor Schubert: 1763-1830)이다. 비엔나의 알저그룬트에 있는 교구학교의 교장이었다. 슈베르트의 할아버지는 모라비아의 농부였다. 슈베르트의 어머니인 엘리자베트 카타리나 비에츠는 질레지아에서 자물쇠공인 사람의 딸로서 비엔나에 와서 어떤 집의 하녀 생활을 하다가 슈베르트의 아버지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14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 중에서 하나는 사생아였다. 14명의 자녀 중에서 9명은 어릴 때에 사망하였다. 당시에는 유아 사망율이 대단히 높았었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비록 전문 음악가는 아니더라도 음악을 애호하였다. 아버지 프란츠는 어린 슈베르트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피아노는 형 페르디난트로부터 배웠다. 그러다가 슈베르트는 일곱살 되던 해에 좀더 집중적인 음악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마을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인 미하엘 홀처로부터 음악 기본을 배우기 시작했다.


슈베르트의 아버지 프란츠 테오도르 슈베르트. 알저그룬트 학교 교장이었다.


- 게타노 도니체티(1797-1848). 도니체티는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의 베르가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안드레아(Andrea)는 음악과는 거리가 먼 마을 전당포 직원이었다. 도니체티가 독일의 오페라 작곡가인 시몬 마이르(Simon Mayr)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시몬 마이르는 베르가모 대성당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으며 베르가모에 음악학교를 설립하고 주로 대성당의 어린이 성가대원들을 교육시켰다. 도니체티도 그렇게 해서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 빈첸조 벨리니(1801-1835). 이탈리아 벨칸토 오페라의 주도적 작곡가인 빈첸조 벨리니는 당시 시실리 왕국의 수도인 카타니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로사리오 벨리니(Rosario Bellini: 1776-1840)는 카타니아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 겸 음악교사였다. 어머니 아가타는 평범한 가정 출신이었으나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빈첸조는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서 생후 18개월 때에 발렌티노 피오라반티(Valentino Fioravanti)가 작곡한 노래를 불렀으며 두살부터는 어머니로부터 음악기초를 배웠고 세살 때에는 피아노를 연주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 엑토르 베를리오즈(1803-1869). 베를리오즈는 프랑스 남부 그레노블 인근의 라 코트 생 안드레(La Cote-Saint-André)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루이 베를리오즈(Louis Berlioz)는 그 지방에서 존경받는 의사였다. 루이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침술을 이용하는 실험을 하였다. 어머니 마리 안투아네트(Marie Antoinette)는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 두 사람은 여섯 자녀를 두었으나 3명만이 생존하였다. 


- 미하일 글링카(1804-1857). 러시아 고전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미하일 이바노비치 글링카는 스몰렌스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반(Ivan)은 육군장교로  퇴역하였으며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하였다.

-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1809-1847). 멘델스존은 명문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모제스는 우태인 사회에서 크게 존경받는 철학자였고 아버지 아브라함(Abraham Mendelssohn: 1776-1835)은 함부르크의 이름난 은행가이며 자선가였다. 어머니 레아 살로몬(Lea Salomon) 역시 유태인으로서 함부르크 궁정고관의 딸이었다. 멘델스존 가족은 베를린으로 이사가서 지냈는데 이때 그의 저텍은 여러 예술가, 과학자, 문인들의 살롱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멘델스존의 살롱을 '유럽이 이곳에 모였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멘델스존의 누이인 패니(Fanny)도 뛰어난 피아니스트 겸 아마추어 작곡가였다. 멘델스존의 아버지는 원래 딸 패니를 음악가로 키우고 아들 펠릭스는 법률가로 만들 생각이었으나 펠릭스의 음악적 재능이 너무나 뛰어나서 음악가로서 집중 교육시켰다.

- 프레데릭 쇼팽(1810-849). 프레데릭 쇼팽(Frédérick Chopin)은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첼라조바 볼라(Zelazowa Wola)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에 바르샤바는 나폴레옹이 폴란드내의 별도의 공국으로서 설립하고 프랑스의 영향을 받도록 한 곳이었다. 아버지 니콜라스 쇼팽(Nikolas Chopin: 1771-1884)은 프랑스 로레인 지방에서 태어난 프랑스인이었는데 16세 때에 일자리를 찾아 바르샤바 공국에 온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프랑스에서 폴란드로 이민 온 사람이었다. 니콜라스는 바르샤바에서 어떤 폴란드 귀족 집의 아이들의 가정교사로서 프랑스어 등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니콜라스는 주인 귀족의 친척이 되는 사람의 딸인 유스티나 크르치자노브스카(Justyna Krzysanowska)와 결혼하였다. 아주 가난한 집안의 딸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네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쇼팽의 폴란드식 이름은 프리데릭(Fryderyk)였다. 프리데릭은 유일한 아들이었고 나머지는 딸들이었다. 아버지 니콜라스는 프리데릭이 생후 6개월 되던 대에 바르샤바의 왕실학교에 프랑스어 교사의 자리를 얻어 바르샤바로 이사하였다.


쇼팽의 아버지 니콜라스 쇼팽. 프랑스의 로레인 지방에서 태어났다. 쇼팽과 비슷하게 생겼다.


- 로베르트 슈만(1810-1856). 독일 낭만주의 음악의 가장 뛰어난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인 로베르트 슈만은 작소니 왕국의 츠비카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우구스트 슈만(August Schumann: 1773-1826)은 작가로서 소설도 썼던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요한나 크리스티아네였다. 로베르트 슈만은 이들의 다섯 자녀 중에서 막내였다.

- 프란츠 리스트(1811-1886). 프란츠 요제프 리스트(Franz Joseph Liszt)의 아버지 아담 리스트(Adam Liszt: 1776-1827)는 악기 연주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림이었다. 아담은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기타를 전문가처럼 연주할수 있어서 에스터하지 가문의 니콜라스 2세에 봉사하였다. 그때 개인적으로 하이든, 베토벤, 훔멜 등과 교분을 가지며 지냈다. 어린 리스트는 일곱살 때부터 아버지 아담으로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아담은 182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프란츠의 훌륭한 선생이었다. 그때 프란츠는 16세였다.


리스트의 아버지 아담 리스트. 연주 못하는 악기가 없을 정도로 재능이 많았다.


-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8). 바그너의 생부는 칼 프리드리히 바그너(Carl Friedrich Wagenr)였다. 라이프치히 경찰서의 서기였다. 바그너의 어머니는 요한나 로지네 패츠(Johanna Rosine Paetz)였다. 두 사람은 결혼후 아홉 자녀를 두었는데 바그너가 망내였다. 바그너의 아버지 칼은 바그너가 생후 6개월일 때에 장질부사로 세상을 떠났다. 바그너의 어머니 요한나는 남편 칼이 세상을 떠나자 여러 사정으로 남편의 친구로서 드레스덴에 살고 있지만 라이프치히에서 잠시 활동하고 있던 배우 겸 극작가인 루드비히 가이어(Ludwig Geyer: 1779-1821)와 동거하기 시작했고 1년 후인 1814년에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후 새남편의 집이 있는 드레스덴으로 가족들 모두를 데리고 이사하였다. 바그너는 14세가 되던 때까지 아버지가 루드비히 가이어인줄 알고 지냈다고 한다.


바그너의 계부 루드비히 가이어. 바그너는 14세 되던 때까지 루드비히 가이어가 진짜 아버지인줄로 알았다.


- 주세페 베르디(1813-1901). 베르디는 이탈리아 북부 부세토 인근의 르 론콜레 마을에서 태어났다. 르 론콜레는 오늘날 베르디 론콜레 마을이다. 아버지 카를로 주세페 베르디(Carlo Giuseppe Verdi: 1785-1867)는 르 론콜레에서 여관을 운영하였고 어머니 루이지아 우티니(Luigia Uttini: 1787-1851)는 물레 일을 하였다. 베르디에게는 여동생 주세피나가 있었으나 17세 때에 세상을 떠났다.

- 자크 오펜바흐(1819-1880). 프랑스 오페레타의 새로운 장을 연 자크 오펜바흐는 독일 라인강변의 쾰른에서 태어났다. 당시 쾰른은 프러시아에 속한 지역이었다. 자크 오펜바흐의 원래 이름은 야콥(Jakob) 오펜바흐였으나 프랑스에서 활동하면서 이름도 프랑스 식으로 자크로 고쳤다. 아버지 이삭  유다 오펜바흐(Issac Juda Offenbach: 1779-1858)는 쾰른에서 책제본공이었으나 그만두고 유태교 회당의 칸토로서 독일내 여러 유태교 회당을 순회하며 지냈다. 그리고 여가에는 카페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오펜바흐라는 이름은 자크 오펜바흐의 선조들이 독일 마인(Main)의 오펜바 마을에 정착해서 살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어머니는 마리안네(린드스코프)였다.

- 세자르 프랑크(1822-1890). 프랑크는 리에즈()에서 태어났다. 당시에 리에즈는 네덜란드에 속하였으나 영국 영토였다. 리에즈는 1830년부터는 벨기에의 영토가 되었다. 아버지 니콜라스 조셉 프랑크(Nicolas Joseph Franck)는  은행원이었다. 원래 프랑크의 가족은 독일과 벨 기에의 국경지대에 살고 있다가 리에즈로 이주하여 왔다. 어머니 마리 캐서린 바르브(Marie-Catherine-Barbe)는 독일인이었다. 프랑크는 어릴 때부터 음악, 미술등 예술분야에 특별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 베드리치 스메타나(1824-1884). 베르디치 스메타나의 출생신고 이름은 프리드리히 스메타나였다. 프라하 동쪽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국경지대인 리토미슬(Litomysl: Leitmischl)에서 태어났다. 당시에는 오스트리아제국에 속해 있었다. 아버지 프란티세크 스메타나(Frantisek Smetana)는 상인이었다. 처음에는 맥주무역을 했다. 그러다가 나폴레옹 전쟁 때에 프랑스군에게 피복과 생필품을 공급해서 돈을 벌었다. 그리하여 리토미슬로 이전하기 전에 맥주공작을 몇개나 운영할 정도가 되었다. 베드리치 스메타나는 아버지 프란티세크의 세번째 부인인 바르보라 린코바()의 소생이다. 아버지 프란티세크는 두명의 전부인에게서 8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중에서 5명의 딸만 생존하였다. 세번째 결혼에서는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중에서 7명이 생존하였다. 베드리치 스메타나는 첫아들이었다.


베드리치 스메타나의 아버지 프란티세크 스메타나


- 안톤 브루크너(1824-1896). 요제프 안톤 브루크너(Josef Anton Bruckner: 1824-1896)은 오늘날 오스트리아 린츠의 교외인 안스펠덴(Ansfelden)에서 태어났다. 브루크너의 선조들은 대대로 농부였거나 기술공이었다. 그러는 중에 브루크너의 할아버지가 안스펠덴 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어서 브루크너의 아버지인 안톤 브루크너 1세도 안스펠덴 학교의 교장을 지냈다. 비록 봉급은 적었지만 존경받는 직분이었다. 어린 브루크너의 첫 음악교사는 아버지였다.

- 요한 슈트라우스 2세(1825-1899).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바이올리니스트이면서 작곡가였다. 대표적인 작품은 유명한 '라데츠키 행진곡'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주로 카페와 무도회장에서 가벼운 춤곡을 연주했다.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위해 지원했는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일반적으로는 아들도 자기와 같은 음악가로 만들기 싫어했다고 하지만 어린 아들에게 피아노 공부를 시켰다고는 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법과 대학에 보내어 변호사로 만들 생각이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아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세계적인 '왈츠 킹'이 되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작곡가였다.


- 알렉산더 보로딘(1833-1887). 알렉산더 포르피리예비치 보로딘은 평생을 화학자로 살았던 러시아의 작곡가이다. 그는 러시아 5인조의 한사람이다. 그는 그루지아 출신의 귀족인 루카 스테파노비치 게데바니슈빌리(Lika Stepanovich Gedevanishvili)의 사생아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당시 루카는 62세였고 러시아 여인인 어머니 에브도이카 콘스탄티노바 안토노바(Evdoika Constatinova Antonova)는 25세였다. 아버지 루카는 귀족 체면 때문에 아들 알렉산더를 농노인 프로피리 보로딘(Porfiry Borodin)의 아들로 출생신고를 하였다. 그로부터 그의 이름은 생부의 성을 따르지 못하고 농노의 성을 따라서 보로딘이 되었다. 그러므로 알렉산더도 농노의 신분이었다. 그러다가 알렉산더가 7살 되던 해에 루카가 알렉산더만 농노의 신분에서 사면을 시켜주었고 어머니에게 돈과 집을 주어서 별도로 살게 해주었다. 알렉산더는 남들 앞에서 어머니 에드보이카를 어머니로 인정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들의 앞날을 생각해서 사람들에게 알렉산더의 숙모라고 소개했다.

- 요한네스 브람스(1833-1897).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브람스는 독일 낭만주의 시대의 뛰어난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였다. 아버지 요한 야콥 브람스(Johann Jakob Brahms: 1806-1872)는 독일 홀슈타인 출신으로 식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음악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사람이었다. 1826년에 함부르크에 온 요한은 바이올린과 클라리넷을 배워서 연주자로 활동했다. 요한은 1830년에 17년 연상인 요한나 헨리카 크리스티아네 니센과 결혼하였다. 어머니 요한나는 바느질일을 하는 여인이었다. 브람스는 어릴 때에 아버지로부터 첫 음악교육을 받았다.

- 카미유 생상스(1835-1921). 카미유 생상스(Camille Saint-Saens)는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자크 조셉 빅토 생상스(Jacques-Joseph-Victor Saint-Saens: 1898-1835)는 정부의 내무성 관리였다. 이민업무 등을 관장하는 공무원이었다. 그러나 카미유가 태어난지 두 달 후에 아버지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 조르즈 비제(1838-1875). 오페라 '카르멘'으로 유명한 비제는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출생신고에는 알렉산드르 세자르 레오폴드(Alexandre Cesar Leopold)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세례명은 조르즈()라고 되어 있다. 비제는 생전에 법적인 이름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지냈다. 아버지 아돌프 비제(Adolphe Bizet)는 성악교사였다. 정식으로 음악교육은 받지 않았지만 성악적 재능이 있어서 교사가 되었다. 성악교사가 되기 전에는 헤어드레서 겸 가발 제조자였다. 아버지 아돌프는 노래도 몇편이나 작곡한 아마추어 작곡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비제의 음악성은 어머니로부터 전수받은 것이다. 어머니 에메 들사르트(Aimée Delsarte)는 음악가 집안 출신으로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 막스 부르흐(1838-1920). 독일을 대표하는 로맨틱 작곡가인 막스 브루흐는 오펜바흐와 마찬가지로 라인강변의 쾰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우구스트 칼 프리드리히 브루흐는 법학을 공부하여 변호사였으나 나중에는 쾰른 경찰서의 부서장을 지낸 사람이다. 어머니는 성악가인 빌헬미네였다. 막스 브루흐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음악을 배웠다.

-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1839-1881). 무소르그스키의 아버지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무소르그스키(Pyotr Alexeyevich Mussorgsky)는 귀족 가문의 사람으로서 부유한 지주였다. 어머니는 교양있는 율리아 이바노바 치리코바(Julia Ivanova Chirikova)는 피아니스트였다. 어린 모데스트는 6세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 표트르 일리이치 차이코브스키(1840-1893). 표트르 일리이치 차이코브스키(영어로는 피터 일리이지 차이코브스키)는 오늘날 우드무르티아(Udmurtia)인 비야트카주의 작은 마을인 보트킨스크(Votkinsk)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일리아 페트로부치 차이코브스키(Ilya Petrovich Tchaikovsky: 1795-1880)가 그 마을에 있는 철공소의 매니저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이코브스키의 집안은 대대로 군인집안이었다. 아버지 일리아도 육군 중령이었다. 일리아는 엔지니어여서 정부의 지시에 따라 보크킨스크 철공소의 관리를 맡았던 것이다. 차이코브스키의 할아버지는 육군 의무대에서 근무하다가 제대한 후 글라조브(Glazov)의 지사가 된 사람이었다. 차이코브스키의 어머니 알렉산드라 안드레예브나 다쎄에르(Alexandra Andreyevna d'Assier)는 일리아의 세 부인 중에서 두번째이다. 차이코브스키의 어머니 알렉산드라는 프랑스계로서 아버지 일리아보다 18년 연하였다. 차이코브스키의 아버지는 세번 결혼에서 여섯 자녀를 두었다.

- 안토닌 드보르작(1841-1904). 안토닌 레오폴드 드보르작(Antonin Leopold Dvorak)은 스메타나에 이어 체코의 음악을 세계에 알린 위대한 국민작곡가이다. 드보르작은 프라하 인근의 넬라호체베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란티세크(Frantisek Dvorak: 1814-1894)는 마을에서 여관을 경영했으며 도축인이이도 했다. 프란티세크는 음악을 좋아해서 치터는 전문연주자 이상으로 연주를 잘했다. 어머니 안나 츠덴코바는 로브코비츠 공자를 위해 봉사한 집사의 딸이었다. 프란티세크와 안나는 14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에서 8명만 생존했다. 드보르작은 첫 아들이었다.


- 에드바르 그리그(1843-1907). 에드바르드 하게루프 그리그(Edvard Hagerup Grieg: 1843-1907)는 노르웨이의 베르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알렉산더 그리그(Alexander Grieg: 1806-1875)는 베르겐의 상인이었고 나중에 시의회 의원으로도 활약한 사람이었다. 그리그의 음악성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어머니 게지느 유디트 하게루프(Gesine Judith Hagerup: 1814-1878)는 음악교사여서 아들 그리그가 여섯 살때부터 피아노를 가르쳤다. 그리그의 가문은 스코틀랜드가 오리진이다. 그리그의 증조할아버지(역시 알렉산더 그리그)는 여행과 탐험을 좋아해서 널리 여행을 다니다가 1770년경에 노르웨이의 베르겐에 정착하고 장사를 시작했다.


그리그의 아버지 알렉산더 그리그. 따지고 보면 노르웨이가 아니라 스코틀랜드 출신이다.


-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사코프(1844-1908).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동쪽 약 200km 떨어진 티크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안드레이 페트로비치(Andrei Petrovich: 1784-1862)는 노보고르드 부총독이었다가 후에는 볼리니아 총독이 되었다. 어머니 소피아 바실레브나(Sofya Vasilevan)는 평범한 소지주의 딸이었다.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집안은 대대로 군인 집안이었다. 특히 해군과 관련이 있었다. 그의 형인 보인(Voin)은 이름난 항해가 겸 탐험가였다. 형은 니콜라이보다 22세나 많았지만 청년 니콜라이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니콜라이의 작품 중에 항해에 대한 것이 많은 것은 그런 연유 때문이다.

- 가브리엘 포레(1845-1924). 가브리엘 우르뱅 포레(Gabriel Urbain Faure)는 프랑스 남부 파미에(Parmiers)에서 태어났다. 가브리엘 포레는 아버지 투생 오노레 포레(Toussaint-Honoré Faure)와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 엘렌(Marie-Antoinette Hèléne)의 여섯 자녀 중에서 다섯번째였다. 아버지는 파미에 학교의 교장이었다. 어머니는 귀족 출신의 여인이었다. 포레의 할아버지는 도축하는 사람이었다.

- 레오시 야나체크(1854-1928). 야나체크는 모라비아의 후크발디(Hukvaldy)에서 태어났다. 당시 모라비아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한 영토였다. 아버지 지리(Jiri)는 학교장이었다. 그래서 아들 레오시가 가족 내력인 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어머니 아말리에는 평범한 여인이었다.

- 에드워드 엘가(1857-1937). '위풍당당한 행진곡'(Pomps and Circumstance March)로 유명한 에드워드는 영국의 워체스터 교외의 작은 마을인 브로드히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윌리엄 헨리 엘가(William Henry Elgar: 1821-1961)는 런던에 올라와서 음악출판사의 도제로 지내다가 고향 워체스터로 돌아와서 피아노 조율사가 되었다. 그후 그는 악기점과 악보사를 겸하는 상점을 운영하였다. 그는 1848년에 농부의 딸인 앤 그리닝(Ann Greening: 1822-1902)와 결혼하였다. 에드워드 엘가는 이들의 일곱 자녀 중에서 네번째였다.  

- 자코모 푸치니(1858-1917). 베르디의 뒤를 이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거장인 푸치니의 원래 이름은 상당히 길어서 자코모 안토니오 도메니코 미켈레 세콘도 마리아 푸치니이다.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등등의 이름을 모두 가져와서 붙였다. 무려 124년 동안 루카의 산 미르티노 대성당의 마에스트로 디 카펠라(Maestro di cappela)의 직위를 보유했다. 푸치니는 투스카니 공국의 루카에서 태어났다. 푸치니의 집안은 대대로 루카에서 음악활동을 해왔다.아버지 미켈레(Michele Puccini)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상당히 존경받는 음악가였다. 그래서 미켈이 세상을 떠나자 장례식 때에는 루카와 인근마을이 그날을 공휴일로 정하고 미켈레를 추모하였다. 미켈레의 장례식 때에는 당시 유명한 작곡가인 조반니 파치니가 진혼곡을 지휘하였다.  

- 구스타브 말러(1860-1911). 구스타브 말러는 보헤미아의 칼리스트()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칼리스트는 현재 체코공화국에 속한 곳이다. 칼리스트에서 구스타브의 아버지인 베른하르트 말러(Bernhard Mahler)가 작은 여관을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스타브의 어머니 마리(Marie Hermann)는 평범한 가정 출신이었다. 두 사람은 결혼하여서 14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구스타브는 두번째였다. 그러나 큰아들 이그나즈가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사실상 구스타브가 장남이었다. 구스타브의 가족은 멀리 동부 보헤미아에서 칼리스트로 이주하였다. 칼리스트는 보헤미아의 프라하와 모라비아의 브르노 중간 쯤에 있는 마을이어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었다. 구스타브의 할머니는 거리에서 좌판을 놓고 장사를 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들 베른하르트는 조금 신분이 향상되어서 마차의 마부 노릇을 했고 돈을 모아서 칼리스트에 작은 집을 사서 여관을 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한 베른하르트였지만 아들 구스타브의 음악적 재능을 높이 평가해서 구스타브를 비엔나음악원에 입학시켜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하도록 했다.


말러의 아버지 베른하르트 말러. 시골여관집 주인이었다.


- 클로드 드비시(1862-1918).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인 클로드 아쉴 드비시(Claude Achille Debussy: 1862-1918)는 파리에서 서쪽으로 가까운 곳에 있는 생제르망 앙라예(Saint-Germain-en-Laye)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아버지가 도자기 상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비시의 아버지 마누엘 아쉴 드비시(Manuel Achille Debussy: 1836-1910)는 방문판매원 노릇을 했고 인쇄소 직공으로도 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어떤 회사의 서기를 맡아했다. 드비시의 어머니 빅토랭 마누리(Victorine Manoury)는 의상실 재봉공이었다. 드비시는 두 사람의 다섯 자녀중 맏이로 태어났다. 드비시가 다섯 살 때에 보불전쟁이 일어났다. 어머니는 어린 드비시를 데리고 저 남쪽의 칸느로 피난을 갔다. 칸느에는 드비시의 고모가 살고 있었다. 드비시는 칸느에서 일곱살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레슨비는 고모가 모두 부담했다.


드비시의 아버지 마누엘 아쉴 드비시. 이것저것 안해본 것이 없으며 나중에는 어떤 상점의 서기였다.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뮌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란츠 슈트라우스(Franz Strauss: 1823-1905)는 뮌헨궁정오페라의 혼 수석주자였다. 프란츠는 바바리아왕국의 파르크슈타인(Parkstein)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요제피네 프쇼르(Josephine Pschorr)로서 평범한 여인이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음악교육을 받았다.

- 장 시벨리우스(1865-1957). 교향시 '핀란디아'로 유명한 시벨리우스의 원래 이름은 요한 율리우스 크리스티안 시벨리우스(Johann Julius Christian Sibelius)이다. 핀란드 대공곡의 하멜리나(Hameelinna)에서 태어났다. 당시 핀란드 대공국은 제정러시아에 속한 자치국 형태였다. 아버지 구스타프 시벨리우스(Gustaf Sibelius)는 의사였다. 그러나 시벨리우스가 세살 때에 장질부사에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다.

- 랄프 본 윌리엄스(1872-1958). 본 윌리엄스는 글라우체스터셔어의 다운 암프니(Down Ampney)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서 본 윌리엄스(Arthur Vaughan Williams: 1834-1878)는 교구 목사님(vicar)이었다. 어머니 마가레트 웻지우드(Margaret Wedgwood: 1812-1937)는 챨스 다윈의 조카가 된다.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12세 연상이었다. (영국에서는 목사님이 Rector라고 부르기도 하고 Vicar라고 부르기도 한다. Rector는 교구민들로부터 교구세를 받아서 생활하는 목사님이다. 교구가 흥성하면 그만큼 수입도 많다. Vicar는 교단으로부터, 또는 교회로부터 봉급을 받는 목사님을 말한다.)

- 아놀드 쇤버그(1874-1951). 현대음악의 초석을 다진 아놀드 쇤버그(또는 아르놀트 쇤베르크: Arnold Scoenberg: Arnold Schönberg)는 오늘날 비엔나의 2구인 레오폴드슈타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사무엘 쇤베르크는 오늘날 체코공화국의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 출신으로 레오폴드슈타트에서 상점을 운영하였다. 어머니 파울리네는 프라하 출신이다.

- 모리스 라벨(1875-1937). 라벨은 스페인과 프랑스 국경지대의 바스크 마을인 시부르(Ciboure)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피에르 조셉 라벨(Pierre-Joseph Ravel)은 엔지니어로서 발명도 하였고 물품을 제작하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어머니 마리(Marie Delouart)는 바스크 출신이었다. 어머니는 부모를 모르는 사생아였으며 글씨도 읽지 못한 문맹자였지만 두 사람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였다.

- 벨라 바르토크(1881-1945). 바르토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한 헝가리 왕국의 바나티안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벨라 바르토크 1세는 마을에 있는 농업학교의 교장이었다. 어머니 파울라 보이트는 독일인으로 어린 바르토크에게 피아노를 처음 가르쳐주었다.

- 이고르 스트라빈스키(1882-1935). 스트라빈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교외의 오라니엔바움(Oranienbaum)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표도르(Fyodor Stravinsky)는 성악가였다. 우크라이나 키에프 오페라하우스에서 1873년부터 3년 동안 베이스로 활약하다가 그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리인스키 극장에서 활약했다. 어머니 안나 콜로도브스카(Anna Kholodovsky)는 키에프 출신으로 키에프 정부의 고위관리의 딸이었다.

-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1891-1953). 동부 우크라이나의 손초브카(Sontsovka)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세르게이 알렉세애비치 프로코피에프(Sergei Alexeyevich Prokofiev)는 토양 엔지니어, 즉 농경학자였다. 어머니 마리아 치트코바(Maria Zhitkova)는 우크라이나 소작농노의 딸이었다. 어머니는 피아노를 배웠다. 그래서 어린 세르게이는 어머니로부터 음악교육을 받았다. 


- 파울 힌데미트(1895-1963). 힌데미트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머지않은 하나우(Hanau)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능공이었고 어머니는 하나우 출신으로 남의 집의 하녀를 지냈다. 아버지 로베르트 루돌프 에밀 힌데미트(Robert Rudolf Emil Hindemith)는 원래 질레지아에서 태어났다. 어린 로베르트는 음악에 재능이 있어서 음악을 공부하고자 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내 가출하여서 처음에는 미술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래서 여러 기술을 배워서 일을 하며 지냈다. 어머니는 마리 조피 봐르네케(Marie Sophie Warnecke)로서 로베르트와의 사이에서 세 자녀를 두었다. 큰 아들이 파울이었다. 힌데미트 가족은 이사를 자주 다녔다. 하나우에서 니더로덴바흐로, 이어서 오펜바흐, 뮐하임 암 마인, 그리고 마침내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 정착하였다. 로베르트는 1차대전이 벌어지자 뜻한바 있어서 44세의 나이에 입대하였고 프랑스의 렝스 부근에서 프랑스군과 육탄전을 벌이다가 전사했다.  

- 조지 거슈윈(1898-1937). 대중음악과 클래식 음악의 다리를 놓은 작곡가인 조지 거슈인의 아버지는 러시아에서 반유태인 정서가 높아지자 미국으로 이민온 유태인이었다. 아버지 모이세 거쇼비츠(Moishe Gershowitz)는 뉴욕에서 여자구두 제혁공 일을 했다. 어머니 로자 브루스키나(Roza Bruskina)는 모이세보다 먼저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원래는 리투아니아의  빌뉴스에서 모피상을 하던 사람의 딸이었다. 조지 거슈인은 이들의 둘째 아들이다. 첫째 아들인 아이라(Ira) 거슈인은 유명한 작사가이다. 아버지 모이세는 미국에 와서 이름을 모리스(Morris)로 고쳤고 어머니도 로즈(Rose)라고 고쳤다. 아버지 모리스는 나중에 브루클린에 있는 여자구두 공장의 주임노릇을 했다. 그리고 성을 거쇼비츠가 아닌 거슈인으로 고쳤다.  

-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 쇼스타코비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드미트리 볼레슬라보비치 쇼스타코비치(Dmitri Boleslavovich Shostakovich)였고 어머니는 소피야 바실리에브나 코쿨리나(Sofiya Vasilievna Kokoulina)이었다. 아버지는 1875년 러시아 남쪽 톰스크 인근의 나림(Narym) 출신으로 상트페테르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전공했다. 그후 정부기관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어머니는 시베리아 출신이었다.

- 벤자민 브리튼(1919-1976). 20세기 영국 클래시컬 음악의 중심 인물인 벤자민 브리튼의 아버지인 로버트 빅터 브리튼(Robert Victor Britten: 1878-1934)는 청년시절에 농부가 되어서 자그마한 농장을 경영하는 것이 꿈이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다른 직업을 구하는 중에 치과의사가 되었다. 하지만 만족하지를 못했다. 로버트 빅터는 런던의 체어링 크로스 병원에서 근무할 때에 간호원이 에디스 로다 호키(Edith Rhoda Hockey)를 만나 결혼하였다. 에디스는 내무성 관리의 딸이었다. 두 사람은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두었다. 아들이 벤자민 브리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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