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현대의 쇤베르크

비엔나를 빛낸 또 하나의 별 쇤베르크

정준극 2017. 7. 21. 08:13

아놀트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 - 아놀드 쇤버그(Armold Schoenberg)

12음 기법의 창시자. 음렬주의의 발판 마련. 현대음악의 기수

비엔나를 빛낸 또 하나의 커다란 별


아놀트 쇤베르크


음악의 도시 비엔나를 빛낸 위대한 작곡가라고 하면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요한 슈트라우스, 구스타브 말러 등을 우선 생각하게 된다. 모두 고전음악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위대한 작곡가들이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와서 비엔나를 빛낸 또 하나의 커다란 별이 있다. 아놀트 쇤베르크이다. 조성음악의 해체에 기여하였고 12음 기법을 창시하여 음렬주의 음악이 발전되도록 했다. 현대음악 작곡가들이라고 하면 쇤베르크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없을 정도이다. 쇤베르크는 음악의 역사에 있어서 진정으로 뛰어난 업적을 쌓은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별로 연주되지 않고 있다. 아직도 사람들은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를 선호하기 때문이며 쇤베르크의 현대음악에 대하여는 친밀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쇤베르크는 어떤 사람인가? 현대음악의 발전에 어떤 기여를 했는가? 그의 작품 세계는 무엇인가? 그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설명하기 전에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는 비엔나에서 태어났고 세상을 떠나서도 비엔나에 영원한 안식처를 정하였다.


우리는 보통 아놀트 쇤베르크라고 부르지만 그의 풀 네임은 아르놀트 프란츠 발터 쇤베르크(Arnold Franz Walter Schönberg)이다. 쇤베르크는 유태인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나치의 핍박이 있을 것 같아서 이를 피해서 1934년에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미국에서 있으면서도 몇년 동안이나 오스트리아의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가 1941년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마침내 미국시민이 되었다. 미국시민이 된 쇤베르크는 이름도 영어식으로 Schoenberg라고 썼고 아르놀트 쇤베르크가 아닌 아놀드 쇤버그라고 발음했다. 쇤베르크가 원래의 독일어 알파벳에 의한 이름을 고친 것은 이제 미국 시민이 되었는데 미국 영어의 알파벳에는 ö가 없기 때문이었다. 본 블로그에서는 쇤버그 대신에 쇤베르크라고 표기하겠는데 그것은 본 블로그가 그가 비엔나에 있으면서 활동했던 일들을 주로 다루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쇤베르크라는 이름은 글자그대로 본다면 '아름다운 산'이라는 뜻이다. 어느 산을 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만일 유태인으로서의 전통을 따른다면 아름다운 산은 예루살렘의 시온산일수도 있고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시나이산일수도 있다. 아무튼 유태인의 이름에는 베르크(버그) 또는 슈타인(돌)라는 단어가 많이 들어가는데 쇤베르크의 경우도 그에 속한다. 예를 들면 골드버그, 슈타인버그, 슐로스버그 등이다. 쇤베르크는 직업이 작곡가이다. 그러면서 음악 이론가이며 아마추어 화가이다. 그림을 썩 잘 그렸다. 쇤베르크의 사상은 독일 시단과 화단에서 일어났던 표현주의(expressionism) 운동과 관련이 있다. 쇤베르크는 이른바 제2 비엔나학파(Zweite Wiener Schule: Neue Wiener Schule: Second Viennese School)의 리더였다. 여기서 Schule(School)이라는 단어는 학교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그룹, 무리, 단체라는 뜻이다. 한편, 1938년에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이후 쇤베르크의 음악은 그가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퇴폐음악'(Degenerate music: Entartete Musik)으로 규정되어 연주가 금지되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쇤베르크는 그보다 앞서서 1934년에 미국으로 건너갔었다.


아르놀트 쇤베르크


쇤베르크의 아이디어는 하모니와 발전이라는 두가지 명제를 놓고 볼때  20세기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영향력있는 것이었다. 쇤베르크가 12음 기법을 창안한 이래 적이도 3세대에 걸쳐서 유럽뿐 아니라 미국의 작곡가들은 그의 아이디어를 계숭하고 확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물론 쇤베르크의 아이디어에 심하게 발반하는 작곡가들도 없지 않았다. 쇤베르크가 작곡가로서 활동을 시작할 때에는 주로 바그너 또는 브람스와 같은 독일 낭만주의에 반대하는 전통적인 스타일의 작곡을 하였다. 그러다가 훗날에는 개혁적인 무조음악(Atonality)의 작품들을 지향하였다. 그런데 쇤베르크 자신쇤베르크은 무조주의라는 용어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쇤베르크는 1920년대에 들어와서 12음 기법을 개발하였다. 한편, 그때까지의 음악에는 중심되는 멜로디가 있어서 주제가 되었는데 쇤베르크는 중심되는 멜로디가 없는 모티프를 개발하여 작곡에 인용한 첫번째 현대 작곡가였다. 쇤베르크는 당시 비엔나에서 대단히 영향력있는 작곡 교사였다. 많은 신진 작곡가들이 쇤베르크의 아이디어에 호응하여 그로부터 새로운 작곡기법을 배웠다. 대표적인 제자로서는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베른, 한스 아이슬러, 에곤 벨레츠, 니코스 스칼코타스, 그리고 훗날에는 존 케이지, 루 해리슨, 얼 킴, 로베르토 게르하르트, 레온 키르흐너 등등이다. 쇤베르크의 작곡기법은 20세기의 아방 갸르드의 발전에 크게 영향을 주는 것이었다. 쇤베르크에 관한 자료들은 비엔나에 있는 아놀트 쇤베르크 센터의 자료실에 보존되어 있다.


아놀트 쇤베르크 자화상

 

아놀트 쇤베르크는 1874년 9월 13일 현재는 비엔나의 2구인 레오폴드슈타트의 오베레 도나우슈트라쎄(Obere Donaustrasse) 5번지에서 태어났다. 레오폴드슈타트가 비엔나의 구역으로 되기 전에는 브리기테나우(Brigittenau) 393번지였다. 레오폴드슈타트는 과거에 유태인 게토가 자리잡고 있던 지역이었으며 현재에도 유태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구역이다. 쇤베르크는 중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사무엘은 원래 브라티슬라바에서 가게를 운영했던 사람이었다. 아마도 우리식으로 보면 구두상점을 경영한 것 같다. 왜냐하면 사무엘이 비엔나에 와서 등록한 기록에 의하면 직업을 구두만드는 사람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브라티슬라바는 당시에는 오스트리아제국에 속한 지역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슬로바키아 공화국에 속한 도시이다. 쇤베르크의 어머니 파울리네는 프라하 출신이었다. 어린 쇤베르크는 마땅한 음악학교가 없어서 음악이론과 작곡을 독학했다. 그리고 다행하게도 대위법에 대하여는 알렉산더 쳄린스키(Alexander Zemlinsky: 1871-1942)에게서 배울수 있었다. 쇤베르크는 쳄린스키보다 세살 아래였다. 나중에 쇤베르크는 쳄린스키의 여동생인 마틸데와 결혼하였다. 그러므로 쳄린스키는 쇤베르크의 처남이 된다.


쇤베르크가 태어난 비엔나 레오폴드슈타트의 오베레 도나우슈트라쎄 5번지. 아우가르텐에서 가깝다. 붉은 원이 표시된 곳에는 쇤베르크의 생가라는 내용의 명판이 부착되어 있다.


쇤베르크는 20대 청년일 때에 주로 오페레타를 오케스트레이션해서 돈을 벌어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자기가 생각했던 음악들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현악6중주곡 '정화된 밤'(Verklärte Nacht)은 그가 25세 때에 완성한 작품이다. 쇤베르크는 나중에 현악6중주곡을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만들었다. 오케스트라 버전의 '정화된 밤'은 쇤베르크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서 오늘날 콘서트에서 자주 연주되고 있을 정도로 인기있는 작품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구스타브 말러는 작곡가로서의 쇤베르크를 높이 평가하였다. 슈트라우스는 쇤베르크의 '구레 리더'(Gurre-Lieder)의 악보를 듣고나서 감탄을 금치 못하였으며 말러는 쇤베르크의 다른 몇몇 작품들을 보고 나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1909년 이후부터 좀 더 보수적인 작풍을 유지하였다. 슈트라우스는 그 시점에 쇤베르크를 더 이상 제자로 삼지 못하겠다고 양해하였다. 말러가 쇤베르크를 받아 들였다. 말러는 마치 쇤베르크의 후견인처럼 행동하였다. 쇤베르크는 처음에 말러의 음악을 경멸하고 조롱하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말러의 '교향곡 3번'을 듣고서는 완전히 생각을 고쳐먹고 그로부터 말러 신봉자가 되었다. 쇤베르크는 말러의 교향곡 3번을 천재가 아니면 쓰지 못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인연 때문인지 쇤베르크는 특히 말러를 높이 존경하였다. 심지어는 말러를 성자로 여길 정도였다. 말러는 쇤베르크를 문하생으로 두고 돌보아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말러는 자기의 생애가 얼마 남지 않을 것을 짐작하고는 자기가 세상 떠나고 나면 쇤베르크를 돌보아 줄 사람이 없을것 같아서 걱정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쇤베르크는 1898년, 즉 그가 24세 때에 유태교 신앙으로부터 루터교회를 통해서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쇤베르크가 개신교로 개종한 것은 일방으로는 서구 문화에 좀 더 익숙하자는 의도에서였고 다른 일방으로는  당시의 반유태 정서에서 자기방어를 하기 위한 한가지 방편에서였다. 그러다가 1933년에 오랜 숙고끝에 다시 유태교로 돌아갔다. 왜냐하면 쇤베르크는 아무리 무어라고 해도 자기가 유태인이라는 정체성은 어쩔수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로부터 쇤베르크는 유태인으로서 생애의 마지막까지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레오폴드슈태터 템플. 그림. 크리스탈나하트에 파손되었고 지금은 상징적으로 기둥들만 새로 만들어 세웠다. 템펠가쎄. 쇤베르크도 부모와 함께 이 회당을 찾아갔을 것을로 생각된다.


 

[참고자료] 표현주의(expressionism)는 20세기 초반에 독일로부터 비롯한 현대적 예술사조의 하나이다. 표현주의는 처음에는 시와 미술분야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연극, 무용, 영화, 그리고 음악의 장르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표현주의는 실증주의(positivism) 그리고 자연주의와 인상주의와 같은 예술 스타일에 이견을 갖는 예술사조였다. 표현주의는 표현적 측면이 미학적인 측면, 또는 객관적인 측면에 비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예술가들은 물리적 본질보다는 감정적 경험의 의미를 표현하고자 노력하였다. 표현주의는 1차 대전 전에 아방 갸르드 스타일의 하나로 발전해 왔다. 표현주의는 독일의 봐이마르 공화국에서, 그 중에서도 특히 베를린에서 인기가 있었다. 표현주의라는 용어는 간혹 불안한 심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에드바르 뭉크의 작품을 보면 알수 있다. 아마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의 후유증이라고도 할수 있다. 표현주의 작가라고 하면 18세기나 19세기의 마티아스 그뤼네봘트(Matthias Grünewald)와 엘 그레코(El Greco)부터 생각할수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20세기 현대작가들의 작품들에 대하여 표현주의라는 용어를 적용한다.   


표현주의라는 단어는 일찍이 1850년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 미술작품에 처음 모습을 보인 것은 아마도 1901년 파리에서 전시를 가진 줄리앙 오귀스트 에르베(Julien-Auguste Hervé)의 작품부터일 것이다. 평론가들은 에르베의 작품을 표현주의(expressionismes)라고 추켜 세웠지만 실상 에르베는 잘 알려지지 않은 화가이기 때문에 에르베가 시도한 표현주의가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후 1910년에 체코의 예술사학자인 안토닌 마테이체크는 인상주의에 대응하는 용어로서 표현주의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함으로서 표현주의라는 말이 점차 알려지게 되었다. 마테이체크는 '표현주의자는 모든 것에 우선해서 자기 자신을 표현코자 한다. 표현주의자들은 즉각적인 인식을 거부한다.'라고 정의했다. 대표적인 표현주의 화가로서는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바실린 칸딘스키(Vasily Kandinsky), 폴 클레(Paul Klée),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흐너(Ernst Ludsig Kirchner) 등이다.


평생 친구였던 바실리 칸디스키가 그린 쇤베르크 초상화. '붉은 응시'(The Red Gaze)


[참고자료] 제2 비엔나학파(Der Zweite Wiener Schule: The Second Viennese School)

20세기 초에 비엔나의 아놀트 쇤베르크를 중심으로 그의 문하생들 그리고 가까운 관련자들로 구성된 작곡가 그룹을 제2 비엔나학파라고 말한다. 제2 비엔나학파가 있으므로 제1 비엔나학파도 있어야 하는데 제1 비엔나학파는 후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을 뿐, 구체적으로 구성된 모임은 아니다. 제1 비엔나학파에 속한다는 작곡가들은 18세기-19세기에 활동했던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등이다. 제1 비엔나학파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학자들은 쇤베르크를 리더로 삼는 그룹을 제2 비엔나학파라고 부르지 말고 신비엔나학파(Neue Wiener Schule)라고 부르자고 주장했다. 제2 비엔나학파 사람들의 활동시기는 대체로 1903년부터 1925년까지의 약 20년간으로 보고 있다. 쇤베르크를 중심으로 한 제2 비엔나학파의 작곡가들은 처음에는 후기 낭만주의적인 작품을 썼지만 나중에는 쇤베르크의 개혁적인 스타일 즉, 전통적인 조성은 무시하고 무조적인 반음계의 표현주의적인 작품을 추종하였다. 그리고 그후에는 쇤베르크의 음렬주의에 입각한 12음기법의 음악으로 발전시킨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쇤베르크 이외에 제2 비엔나학파의 중심되는 작곡가들로는 알반 베르크(Alban Berg)와 안톤 베베른(Anton Webern)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쇤베르크의 작곡제자였다. 


  

쇤베르크의 처남인 쳄린스키. 쇤베르크의 제자인 알반 베르크와 안톤 베베른


그 외의 제자들로서는 에른스트 크레네크(Ernst Krenek), 하인리히 얄로베츠(Heinrich Jalowetz), 에르빈 슈타인(Erwin Stein), 에곤 벨레스(Egon Wellesz), 그리고 그 후의 인물들로서는 에두아르드 슈토이어만(Eduard Steuermann), 한스 아이슬러(Hanns Eisler), 로베르토 게르하르트(Roberto Gerhard), 노르베르트 폰 한넨하임(Nobert von Hannenheim), 루돌프 콜리슈(Rudolf Kolisch), 파울 피스크(Paul A. Pisk), 칼 란클(Karl Rankl), 요제프 루퍼(Joseph Rufer), 니코스 스칼카타스(Nikos Skalkottas), 빅토르 울만(Viktor Ullmann), 그리고 빈프리트 칠리히(Winfried Zillig)를 꼽을수 있다. 나중에 쇤베르크의 처남이 된 알렉산더 쳄린스키(Alexander Zemlinsky)도 제2 비엔나학파에 포함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쳄린스키는 쇤베르크의 제자가 된 일이 없고 전통적인 조성에 의한 작곡을 거부한 일도 없다. 제2 비엔나학파에 속하는 작곡가들 중에서 칠리히, 카탈라니아의 게르하르트, 트란실바니아의 한넨하임, 그리스의 스칼코타스 등은 비엔나에서 공부한 일이 없지만 일부는 베를린에서 쇤베르크의 마스터클라스에 참석한 일이 있다. 쇤베르크는 1934년에 미국으로 떠났고 미국에서 제자들을 가르쳤지만 이들은 일반적으로 제2 비엔나학파에 넣지 않고 있다. 예를 들면 존 케이지(John Cage), 레온 키르흐너(Leon Kirchner), 제랄드 슈트랑(Gerald Strang) 등이다. 또한 제2 비엔나학파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지만 제2 비엔나학파의 작풍으로 작곡한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면 캐나다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인 글렌 굴드(Glenn Gould)이다. 그리고 쇤베르크로부터 2대의 작곡가들, 즉 베르크의 제자인 한스 에리히 아포스텔(Hans Erich Apostel)이나 베베른의 제자인 르네 라이보비츠(René Leibowitz), 레오폴드 슈핀너(Leopold Spinner), 루드비히 첸크(Ludwig Zenk) 등은 제2 비엔나학파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쇤베르크의 제자들이라고 해서 쇤베르크의 12음 기법 주장과 음열주의 노선을 반드시 따른 것은 아니다. 이들은 쇤베르크의 가르침을 따르기는 했지만 나중에는 독자적인 작곡 스타일을 추구하였다.


  

왼쪽으로부터 에른스트 크레네크, 하인리히 얄로베츠, 에곤 벨레츠,


[참고자료] 퇴폐음악(Entartete Musik, Degenerate music)

퇴폐음악은 1930년대에 독일의 나치정권이 어떤 특정 음악을 국가와 국민들에게 위해한 것이며 타락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여 금지한 음악들을 말한다. 나치는 사실상 예술 전반에 걸쳐 퇴폐작품을 규정하였으며 음악은 그 한 파트이다. 아무튼 음악이 되었던 또는 다른 예술 분야가 되었던 퇴폐작가로 분류되면 고립되고 차별을 받으며 비난을 받았도 아울러 이들의 작품은 전시되거나 공연되거나 연주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같은 정책에는 반유태적인 정사가 바탕이 되었고 또한 정신질환을 가졌던 사람의 작품도 문제가 되었다. 예를 들어서 멘델스존과 말러는 유태인 작곡가라고 해서 나치의 비난을 받았다. 그래서 심지어 라이프치히에 있는 멘델스존의 동상은 철거되었고 멘델스존의 작품 중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고 있는 극음악 '한여름 밤의 꿈'은 다른 작곡가의 작곡으로 대체되었다.


독일에서 나치가 정권을 잡은 이래 작곡가들은 적당한 직업을 갖기도 힘들었고 자기들의 작품을 연주할 기회도 갖기가 어려웠다. 나치는 자기 구미에 맞는 음악만을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사태가 그렇게 되지 상당수의 작곡가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다른 나라로 떠나야 했다. 쇤베르크가 그렇고 쿠르트 봐일, 파울 힌데미트, 베르톨트 골드슈미트(Berthold Goldschmidt) 등이 조국 독일-오스트리아를 떠났다. 다른 나라로 떠나지 못한 일부 작곡가들은 독일내에서 일종의 연금생활을 하다시피 했다. 칼 아마데우스 하르트만(Karl Amadeus Hartmann)이나 보리스 블라허(Boris Blacher)가 그러했다. 그렇지 않으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서 아까운 생애를 마무리해야 했다. 빅토 울만이 그렇고 에르빈 슐호프(Erwin Schulhoff)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1938년에 나치는 퇴폐음악으로 어떤 것이 있는지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나치는 음악이 퇴폐적으로 된 것은 유태주의와 자본주의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봐이마르국립극장장인 한스 제베루스 치글러는 뮌헨에서 퇴폐음악은 이러이러한 것이라는 전시회까지 열었다. 전시회는 일곱 파트로 나뉘어졌다. 1) 유태주의의 영향 2) 쇤베르크 3) 쿠르트 봐일과 에른스트 크레네크 4) 마이너 볼셰비키들(슈레커, 알반 베르크, 에른스트 토흐 등) 5) 1933년 이전에 제국의 음악교육 책임자였던 레오 케스텐버그 6) 힌데미트의 오페라와 오라토리오 7)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였다. 나치는 이들을 대표적인 퇴폐음악 작곡가로 간주하였다.


쇤베르크는 1901년 10월에 마틸데 쳄린스키와 결혼하였다. 마틸데는 지휘자이며 작곡가인 알렉산더 쳄린스키의 동생이었다. 쇤베르크는 대약 1894년부터 쳄린스키의 지도로 음악공부를 했다. 쇤베르크와 마틸데는 두 자녀를 두었다. 거트루트와 게오르크였다. 거트루트는 나중에 쇤베르크의 제자인 펠릭스 그라이슬레()와 결혼하였다. 1908년 여름에 마틸데는 쇤베르크를 떠나서 오스트리아 출신의 젊은 화가인 리하르트 게르스틀과 몇 달 동안 동거하는 일이 있었다. 이 기간이먀 말로 쇤베르크의 작품세계에 있어서 두드러진 변화를 보인 시기였다. 쇤베르크는 마틸데가 가출하고 없는 동안에 '은빛 버드나무에 기대어서'(Du lehnest wider eine Silberweide)와 13곡의 가곡으로 구성된 연가곡 '공중정원의 책'(Das Buch der Hängenden Gärten)을 작곡하였다. 이 두 작품이야말로 쇤베르크가 어떠한 조성에도 관련이 없이 작곡한 작품이었다. 또한 쇤베르크는 이 기간에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혁명적인 아이디어로 작곡한 현악4중주 2번을 완성했다. 이 현악4중주곡에는 예외적으로 소프라노 파트를 넣어서 관심을 끌었다. 쇤베르크는 1910년 여름에 현대음악 이론서로서는 가장 영향력있는 서적인 '하모니 이론'(Harmonielehre)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1911년에는 비엔나에서 영향력이 있는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의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 서클에는 화가인 레네 슈나이더 카이너(Lene Schneider-Kainer), 작가인 프란츠 베르펠(Franz Werfel), 표현주의 화가인 헤르봐르트 봘덴(Herwarth Walden), 그리고 헤르봐르트 봘덴의 부인으로 시인 겸 극작가인 엘제 라스커 쉴러(Else Lasker Schüler)가 가담되어 있었다. 이들은 거의 모두 유태인이었다.


아놀트와 마틸데 부부


[참고자료] 쇤베르크의 연가곡 '공중정원의 책'(Das Buch der Hängenden Gärten: The Book of the Hanging Garden). Op 15

15개 파트로 구성된 '공중정원의 책'은 쇤베르크가 1908년에 시작해서 이듬해인 1909년에 완성한 연가곡이다. 노래 가사는 독일의 서정시인인 스테판 게오르게(Stefan George: 1868-1933)의 시를 바탕으로 삼았다. 스테판 게오르게의 시 제목도 '공중정워의 책'이다. 두 젊은 연인이 정원에서 만나 사랑을 속삭이지만 여자가 떠나는 바람에 남자는 사랑의 실패를 맛보게 되며 그로부터 정원은 황폐해 진다는 내용이다. 이 연가곡은 소프라노와 피아노 반주로 되어 있다. 이 연가곡은 무조로 작곡되어 있어서 일반적인 음악 질서와는 판이한 것이다. 이 연가곡은 1910년 1월 14일 비엔나에서 오스트리아의 소프라노인 마르타 빈터니츠 도르다의 노래와 에타 베른도르프의 피아노 연주로 초연되었다.


쇤베르크는 1910년에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영국 음악저널리스트인 에드워드 클락을 만났다. 클라은 쇤베르크의 아이디어에 크게 동감하여서 쇤베르크를 스승으로 모셨다. 클락은 쇤베르크의 유일한 영국인 제자였다. 영국에 돌아가서 BBC의 음악 프로듀서가 된 클락은 쇤베르크의 작품을 영국에 소개하는 일에 많은 정성을 기울였다. 클락은 쇤베르크를 초청해서 방송에 출연토록 했으며 나중에는 쇤베르크의 제자들인 베르크와 베베른의 작품들도 소개하였다. 쇤베르크가 무조음악을 창출한 이후 또 하나의 가장 중요한 작품은 1912년에 완성한 '피에로 뤼네어'(Pierro Lunaire)이다. 벨기에-프랑스의 시인 알베르 지로(Albert Giraud)의 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가사로 삼은 일련의 표현주의 가곡집이다. '피에로 뤼네어'는 이른바 슈프레헤슈팀메(Sprechstimme) 기법을 사용한 작품이다. 가사를 멜로드라마틱하게 얘기하듯 낭송하는 스타일이다. 다섯 명으로 구성된 작은 앙상블의 연주와 여성 성악가가 짝을 이루도록 한 작품이다. 이 때의 앙상블을 '피에로 앙상블'이라고 부르는데 플루트(피콜로와 더블링), 클라리넷(베이스 클라리넷과 더블링), 바이올린(비올라와 더블링), 바이올린첼로, 피아노, 스피커로 구성되었다. 1912년에는 비엔나음악원의 교수로 오라는 초청을 받았으나 거절하였다. 이유 중의 하나는 '비엔나가 싫어서'였다. 비엔나가 유태인에 대하여 거부반응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마음에 상처로 남았었던 모양이었다.


[참고자료] 비엔나음악원(Vienna Conservatory)

1817년에 비엔나악우회(Gesellschaft der Musikfreunde)가 설립한 음악교육기관으로 오늘날 우리가 보통 MDW(엠데베)라고 말하는 비엔나음악-공연예술대학교(Universität für Musik und darstellende Kunst Wien)의 전신이다. 비엔나음악원은 창설 이후에 여러번 명칭이 바뀌었다. 비엔나 콘서바토리로 시작하여 비엔나 아카데미라고 명칭변경되었다가 1909년에는 제국음악공연예술아카데미(Imperial Academy of Music and the Performing Arts)라는 긴 이름으로 바뀌었고 1998년에는 마침내 종합대학교로서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오늘날 비엔나음대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음악예술대학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유수의 음악예술대락이 되었다. 학생수는 3천명에 이른다.


비엔나음대(비엔나음악공연예술대학교). 안톤 베베른 광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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