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현대의 쇤베르크

쇤베르크 연표 1

정준극 2017. 7. 28. 13:45

쇤베르크 연표 1

아놀트 쇤베르크의 생애를 연도별로 정리해 보았다. 쇤베르크를 좀 더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참고가 될 것으로 믿어서이다. 첫번째 파트는 비엔나에서 태어나서부터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의 약력이다. 언제 어떤 곡을 작곡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되도록 생략하였다. 중요한 작품만 일부 지적하였고 나머지는 다른 항목에서 참고토록 했다.


1874년: 9월 13일 현재의 비엔나 제2구 레오폴드슈타트의 오베레 도나우슈트라쎄(Obere Donaustrasse) 5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사무엘 쇤베르크는 구두장인이었다. 어머니 파울리네는 결혼전 성이 나호드(Nachod)로서 보헤미아 사람이었다. 오베레 도나우슈트라쎄 5번지는 당시에 비엔나 교외의 브리기테나우 393번지였다. 이 해에 아놀트 쇤베르크의 누이인 아델레가 뇌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델레는 1872년에 태어났으므로 2살이었다.


1876년: 비엔나 18구 배링의 테레지엔가쎄(Theresiengasse) 5번지로 이사했다. 당시에는 레오폴드슈타트 894번지였다. 아놀트 쇤베르트의 누이동생인 오틸리(Ottilie)가 태어났다.


쇤베르크 생가. 붉은 원으로 표시된 곳에 그에 대한 기념명판이 부착되어 있다.

쇤베르크 생가의 기념명판. '이 집에서 아르놀트 쇤베르크가 1874년 9월 13일애 테어났다'는 내용이다.


1880년: 비엔나 2구 타보르슈트라쎄(Taborstrasse) 48번지로 이사하였다. 클라이네 파르가쎄(Kleine Pfarrgasse) 33번지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1882년: 남동생 하인리히가 4월에 태어났다. 8살의 아놀트는 바이올린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1883년: 쇤베르크가 1949년에 쓴 '나의 네 사중주곡 입문서'(Introduction to My Four Quartets)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아홉살도 채 안된 나는 작은 것이지만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후에는 두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규모가 큰 작품을 썼다. 대체로 내가 바이올린 선생님과 또는 사촌과 연주했던 음악을 모방한 작품들이었다. 나중에 비오티(Giovanni Battista Viotti: 1755-1824)와 플라옐(Ignaz Pleyel: 1757-1831)의 작품을 연주할수 있게 되자 이들의 스타일도 모방하였다.' 그런 것을 보면 쇤베르크는 어릴 때부터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났었음을 알수 있다.


1884년: 사무엘 쇤베르크는 당국으로부터 클라이네 파르가쎄 31번지에 작은 상점과 함께 상품을 중개할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1885년: 페어라인가쎄(Vereingasse)에 있는 제국중등학교(k.k. Imperial Secondary School)에 입학하였다. 11세인 쇤베르크는 행진곡과 폴카 등을 작곡해서 주위사람들을 기쁘게 했다.


1889년: 아버지 사무엘이 폐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15세의 쇤베르크가 사실상의 가장이 되었다.  


1891년: 학교를 그만두고 사립은행인 베르너 은행에 도제로 들어갔다 . 다시 쇤베르크의 말을 들어보면 '열일곱살이 될 때까지 작곡이라고 했던 것은 실은 내가 알고 있던 다른 사람들의 작품들을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이올린 듀엣이 그렇고 오페라의 노래를 듀엣으로 편곡한 것이 그러하며 공원에서 연주하는 군악대 레퍼토리가 그렇습니다.'


1892년: 2구의 그로세 슈타트구트슈트라쎄(Grosse Stadtgutstrasse) 10번지로 이사. 주문했던 음악백과사전인 마이어스 콘페르자치온스렉시콘(Meyer's Konversationslexikon)이 배달되어서 작곡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얘기를 했다. 예를 들면 현악4중주곡의 첫 악장을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배운것이다. 이제 성년인 18세가 되었다고도 적었다. 


1893년: 테레지엔가쎄 5번지로 다시 이사했다. 여름에 비엔나 근교의 킬링()에 머물면서 첫번째 완성된 작품을 작곡했다. 성악과 피아노를 위한 '생생한 꿈속에서 나는 간혹 당신을 봅니다'(In hellen Träumen hab ich Dich oft geschaut)이다. 가사는 알프레드 골트(Alfred Gold)인데 쇤베르크가 친구이며 멘토인 데이비드 요제프 바흐를 통해서 알게된 사람이다.


1894년: 딜레탕트 오케스트라인 폴리힘니아(Polyhymnia)의 멤버가 되었고 이를 통해서 나중에 처남이된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를 처음 만났다. 테레지엔가쎄에서 레오폴드가쎄 9번지로 이사했다. 딜레탕트는 아마추어 음악 애호가들이란 뜻이다. 쇤베르크는 폴리힘니아로부터 '파피루스의 노래'(Schilflied: Bulrush Song)으로 상을 받았다. 10월에는 세개의 피아노 소품을 작곡했다.


1895년: 베르너은행에서의 도제 생활을 사임하고 뫼들링합창연맹인 '프라이진'(Freisinn)의 지휘자, 마이들링남성합창연맹의 지휘자, 슈토케라우금속노동자합창단의 지휘자를 맡았다. 네성부를 위한 아카펠라 합창곡인 Ei du Lütte를 작곡했다.


1896년: 오페레타 작곡가 리하르트 호이버거(Richard Heuberger)의 권유로 네손을 위한 여섯개의 피아노 곡을 작곡했다. 또한 스몰 오케스트라를 위한 세레나데의 작곡을 추진했으나 미완성으로 남겨놓았다.

1897년: 현악기 오케스트라를 위한 가보트와 뮤제트의 작곡을 착수하였다. 이밖에 현악4중주를 위한 스케르쪼, 성악과 피아노를 위한 '소녀의 봄'(Mädchenfrühling)도 작곡했다. 알렉산더 쳄린스키에게 4중주곡을 제출했다.


1898년: 유태교에서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첫 제자를 두게 되었다. 빌마 베버 폰 베베나우(Wilma Weber von Webenau)였다. 작곡중이던 교향시 '봄의 죽음'(Frühlings Tod)의 작곡을 중단했다. 니콜라우스 레나우의 시를 텍스트로 삼은 것이었다. Warum, o Lüfte, flüstert ihr so bang(바람아 어찌하여 그렇게도 무섭게 속삭이느냐)로 시작하는 가사이다. 바리톤과 피아노를 위한 두편의 노래를 완성했다. 쳄린스키가 쇤베르크의 사중주곡 Op 0를편곡했다. 12월 20일에 비엔나악우회에서의 연주를 위해서였다.


1899년: 하일리겐슈타트 남성합창단인 '베토벤'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쳄린스키의 여동생인 마틸데(Mathilde Zemlinsky: 1877-1923)와 사귀기 시작했다. 성악과 피아노를 위한 '두사람'(Die Beiden)와 '5월의 노래'(Mailied), 남성 솔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겟세마네'(Gethsemane: 미완성), 성악과 피아노를 위한 네개의 노래를 작곡했다. 쳄린스키와 그의 여동생 마틸데와 함게 니더외스터라이히의 한적한 마을인 파에르바흐(Payerbach)에서 여름휴가를 보냈다. 현억6중주인 '정화의 밤'(Verklarte Nacht: Op 4)를 작곡했다. 리하르트 데멜의 시를 가사로 삼았다.


마틸데와 결혼한 쇤베르크

1900년: 노동자합창단 지휘자가 되었다. 구스타브 말러의 장래 부인이 될 알마 마리아 쉰들러를 처음 만났다. 비엔나작곡가연맹이 상을 내걸고 작곡을 응모하자 이에 '구레리더'(Gurre-Lieder)의 작곡에 착수했다. 다른 작품들도 작곡했다.


1901년: 마틸데 쳄린스키와 비엔나 1구 도로테어가쎄 18번지의 루터교회(Lutheran City Church)에서 10월 18일 결혼식을 올렸다. 쇤베르크가 27세였고 마틸데가 24세였다. 결혼식을 올리기 전인 여름에는 구스타브 슈봐브()의 동명단편인 '바보'(Die Schildbürger)를 오페라로 만들기로 하고 작곡에 착수했다. 한편, '독일 샹송'(German Schasons) 명선집에서 시를 발췌하여 여덟곡의 노래를 작곡하고 이를 베를린의 문학캬바레인 위버브레틀(Überbrettl)의 창업자인 에른스트 폰 볼초겐에게 제시하였다. 볼초겐은 그 중에서 '몽유병자'(Nachtwandler)와 '자기 마음대로'(Jedem das Seine) 두곡을 선택하여 캬바레에서 연주토록 했다. 비엔나의 극장인 '사랑하는 아우구스틴'(Zum lieben Augustin)을 위해서는 에마누엘 쉬카네더의 '아르카디아의 거울'(Mirror of Arcadia)를 바탕으로 '수없이 많은 여인들을 보았네'(Seit ich so viele Weiber sah)를 작곡했다. 쇤베르크는 캬바레 노래들을 작곡한 것이 인기를 끌어서 그해 12월에는 베를린의 위버브레틀 캬바레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어서 베를린에 가서 살게 되었다. 캬바레 노래라는 명칭은 쇤베르크 사후에 붙여진 것이다.



1구 도로테어가쎄 18번지의 루터교회. 쇤베르크와 마틸데가 결혼식을 올린 교회이다. 쇤베르크는 유태교에서 개신교로 개종하였기 때문에 루터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릴수 있었다.


1902년: 쇤베르크는 1901년 10월에 결혼했는데 첫 아이는 3개월 후인 1902년 1월에 태어났다. 딸 게르트루데(거트루드)였다. 쇤베르크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추천에 의해서 베를린의 슈테른음악원에서 화성악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해 3월에는 비엔나악우회의 소연주회실에서 '정화된 밤'의 초연이 있었다. 쇤베르크는 오스카 슈트라우스(Oscar Straus), 빅토르 홀랜더(Viktor Holländer), 보구밀 체플러(Bogumil Zepler), 로베르트 피슈호프(Robert Fischhof) 등의 오페레타의 오케스트레이션을 맡아하는 바람에 이들과 친분있게 지내게 되었다.


1903년: 여름에 부인과 딸을 데리고 비엔나로 돌아왔다. 구스타브 말러를 만나서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리히텐슈타인슈트라쎄(Liechtensteinstrasse) 68/70의 보눙에 거처를 정했다. 2월에는 교향시 '플레아와 멜리상드'를 완성했다. 1901년에 시작한 여섯 곡의 노래들 중에서 세곡을 완성했다. 그 중에는 '결혼노래'(Hochzeitslied)도 포함된다. 마틸데와의 결혼을 기념하여서 작곡한 노래이다. 다른 사람의 작품을 두개의 손, 또는 네개의 손을 위한 피아노곡으로 편곡하는 일도 했다. 예를 들면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 로르칭의 '갑옷장이'(Das Wappenschild), 슈베르트의 극음악 '로자문제' 등을 네 손을 위한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것이다.


1904년: 처남인 쳄린스키와 함께 '창작작곡가협회'(Vereinigung schaffender Tonkünstler)를 창립하였다. 가을부터 알반 베르크와 안톤 베베른이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겨울에는 콜마르크트의 봘너슈트라쎄에 있는 '슈봐르츠발트 학교'에서 작곡기법을 가르쳤다.


마틸데는 1923년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6세였다.

                

1906년: 9월에 아들 게오르그(Georg)가 태어났다. 7월에는 테게른제(Tegernsee)에 있는 로타흐 에게른(Rottach-Egern)에서 15명의 솔로 기악연주자를 위한 실내교향곡을 완성했다. Op 9번이다. 쇤베르크는 이 작품의 그의 제1 작곡시기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말했다.


1907년: 그림그리기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화가 리하르트 게르스틀과 친하게 지내기 시작했다. 아카펠라 혼성합창곡인 '땅에 평화'(Friede auf Erden: Op 13)을 완성했다.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Gerhard Hauptmann)의 소설 '유리집 동화'(Glashüttenmärchen)을 바탕으로 오페라 '피파가 춤을 추네'(Und Pippa tanzt)의 작곡을 착수했다. 이외에도 여러 작품들을 완성하거나 작곡에 착수했다.


1909년: 암슈테텐 부근의 슈타이나키르헨에서 가족들 그리고 알렉산더 쳄린스키,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베른, 막스 오펜하이머 등과 함께 여름 휴가를 보내면서 새로운 작곡기법에 대한 브레인 스토밍 미팅을 가졌다. 발명에도 재능이 있는 쇤베르크는 악보를 타자할수 있는 기보타자기(Notation Typewriter)에 대한 설계사항을 비엔나특히사무소에 제출하였다. 한편 이곳에서 젊은 의사이며 시인인 마리 파펜하임(Marie Pappenheim)을 만나서 교류하였다. 파펜하임은 모노드라마인 '기다림'(Erwartung)의 대본을 제공했다.


1910년: 히칭의 보눙으로 이사했다. 이 곳에서 작곡보다는 그림 그리기에 더욱 열중하였다. 그해에 비엔나의 헬러 화랑에서 첫 전시회를 가졌다. 작곡가의 전시회라서 관심을 끌었다. 1월 14일에는 구레 리더의 첫 악장이 초연되었다. 6월에는 오페라 '행운의 손'(Die Glückliche Hand)의 대본을 완성했고 이어 작곡'을 시작했다.  


1911년: 추상화가인 바실리 칸디스키를 만났다. 9월에는 베를린의 첼렌도르프에 있는 빌라 레프케로 이사하였다. 슈테른음악원에서 '작곡의 심미적 관점과 규칙'에 대하여 강의하였다. 뮌헨의 탄호이저 화랑에서 쇤베르크의 회화 4점이 전시되었다. '땅에 평화'가 12월 9일 비엔나에서 프란츠 슈레커 지휘와 필하모닉 합창단과 비엔나 작곡가 오케스트라(톤퀸스틀러 오르헤스터)의 연주로 초연되었다.


1912년: 쳄린스키의 초청으로 2월 하순에 프라하를 방문하였다. 교향시 '플레아와 멜리상드'의 연주를 지휘했고 구스타브 말러 1주기 기념 강연을 했다. 제자들과 친구들이 쇤베로크의 글들을 정리하여 '아놀트 쇤베르크'라는 책을 출판했다. 책은 뮌헨에서 출판되었다. 12월에는 암스텔담에 잠시 머문 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다. '플레아와 멜리상드'를 지휘하기 위해서였다. 3월에는 여배우 알베르티네 체메(Albertine Zehme)의 요청에 의해서 알베르 지로(Albert Giraud)의 '피에로 뤼네어'(Pierro lunaire)에 들어있는 시 중에서 21편을 바탕으로 실내 앙상블과 슈프레헤슈팀메를 위한 작품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슈프레헤슈팀메는 노래와 스피치의 중간에 해당하는 것이다. '피에로 뤼네어'의 세계초연은 10월에 베를린에서 있었다. 연말에는 오라토리오 3부작의 일환으로 '세라피타'(Seraphita)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1913년: '구레 리더'의 세계 초연이 2월 23일 비엔나 악우회의 대연주회장에서 거행되었다. 프란츠 슈레커가 지휘했다. 상당한 찬사를 받았다. 3월 31일에 다시 비엔나 악우회의 대연주회장에서 쇤베르크, 베르크, 베베른, 말러, 쳄린스키의 작품 연주회가 열렸다. 상당수 청중들이 이들의 현대음악에 거부반응을 보여서 결국 연주회장은 난장판이 되었다. 이날의 사건을 스캔달콘서트(Skandalkonzert)라고 부른다. 5월에는 베를린 쥐덴데(Berlin-Südende)의 베를리너슈트라쎄 17a로 이전하였다. 또한 이 해에 처음으로 말러지원금을 받았다. 지원금은 1914년에도 받았고 1918년에도 받았다. 9월에는 오케스트라 반주의 노래집인 '세라피타'를 완성했고 11월에는 '행복한 손'을 완성했다. 


'행복한 손'의 한 장면


[참고자료] 스캔달콘서트는 1913년 3월 31일 비엔나 악우회 대연주회실에서 쇤베르크가 지휘하는 비엔나 콘서트협회(Wiener Konzertverein)의 연주회가 진행 중에 청중들이 소동을 벌이고 결국은 일부가 난투극까지 벌인 사건을 말한다. 상당수 청중들이 소동을 일으켰던 것은 이른바 제2 비엔나학파의 표현주의 및 실험주의 음악에 충격을 받아서였다. 결국 연주회는 중간에 막을 내려야 했다. 콘서트를 주관한 에르하르트 부슈베크(Erhard Buschbeck)가 난동을 일으킨 사람 중에서 가장 심했던 사람에게 날린 주먹이 문제가 되어 피해자는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는 바람에 문제는 더 커졌다. 현장에서 주먹 사건을 직접 목격했던 오페레타 작곡가 오스카 슈트라우스는 이날의 연주회에서 그나마 가장 화음을 이루었던 소리는 부슈베크가 주먹을 날릴 때 나는 소리였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왜 이런 소란이 벌어졌던 것일까? 쇤베르크의 '게레리더'가 2월 23일에 같은 장소에서 연주되었을 때에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비엔나 사람들은 쇤베르크가 과거에 보수적인 작품들을 내놓았는데 갑자기 근자에 이르러 표현주의니 무어니 하면서 이상한 음악을 내놓자 무슨 작품이 그러냐면서 비난하는 소리를 높였다. 쇤베르크는 그런 비난에 대하여 기분이 상해 있었다. 쇤베르크는 2우러 23일의 게레리더 연주가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청중들의 박수를 거절하였다. 비엔나 사람들은 박수를 거절한 쇤베르크에 대하여 어디 두고 보자하면서 복수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로부터 얼마 후인 3월 31일에 또 다시 쇤베르크 무리들의 연주회가 있자 일부러 입장권들을 사서 가서 난동을 부렸던 것이다.청중들만이 고함을 치고 난동을 부린 것이 아니라 쇤베르크를 따르는 사람들, 그의 제자들도 청중들을 향해서 고함을 질렀다. 그러다가 연주를 방해하는 것으로 부족해서 물건들을 집어 던지고 가구들을 부수는 등 폭력적으로 발전하였다. 비엔나에서 그런 소동이 벌어진 때로부터 두달 후인 5월 29일 파리에서도 비슷한 난동이 있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초연되었을 때 그런 난동이 있었다.


이날의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았다.

- 안톤 베베른: 오케스트라를 위한 여섯 작품들. Op 6

-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 매털링크의 시에 의한 네개의 오케스트라 노래들 Op 13

- 아놀트 쇤베르크: 실내 교향곡 1번. Op 9

- 알반 베르크: 페터 알텐버그의 그림엽서 글에 의한 다섯개의 오케스트라 노래 중에서 두 곡(2번과 3번). Op 4. 이 노래의 가사와 음악이 모두 도발적으로 간주되었던 것임.

- 구스타브 말러: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Kindertotenlieder).


콘서트는 베르크의 작품이 연주되는 중에 청중들 중에서 고함과 야유가 터져 나오는 바람에 중단되었다. 그래서 말러의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는 아예 연주되지도 못했다. 청중들은 베르크의 노래가 나오자 가사를 쓴 시인과 음악을 만든 작곡가 모두 정신이상자라면서 소리쳤다. 그런데 사실상 가사를 쓴 페터 알텐버그는 그 당시에 이미 정신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알텐버그는 저녁의 콘서트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오전의 리허설에는 병원당국의 허락을 받아서 참석했었다. 알텐버그는 시를 곁들인 스케치를 그렸는데 리허설을 참관하던 알마 말러의 모습도 스케치에 포함하였다. 베르크의 이날 작품은 논란이 계속되어서 1952년까지 연주된 일이 없다. 그리고 풀 스코어가 출판된 것은 1966년에 가서였다.


스칸달콘체르트를 비유한 캐리캐추어. 쇤베르크가 지휘하는 모습이다. 이날의 소동을 비엔나 신문들은 Watschenkonzert(봐첸콘체르트)라고 불렀다. 글자그대로 번역하면 '뺨 때리기 콘서트'이다.


1914년: 게레리더를 라이프치히에서 지휘했고 다섯개의 오케스트라작품을 런던에서 지휘했다. 1차 대전이 발발했다.

1915년: 4월에 비엔나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지휘했다. 베를린으로 돌아갔다가 10월에 비엔나로 다시와서 히칭의 글로리에테가쎄(Gloriettegasse) 43번지에 처소를 정했다. 1차 대전 중이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국민으로서 12월에 도이치마이스터 제4 연대에 신고하였다. 오라토리오 '야곱의 사다리'의 작곡을 시작했다.

1916년: 3월부터 5월까지 브루크()에 있는 예비장교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7월에는 호흡곤란증으로 대기부대로 발령을 받았다. 10월에는 비엔나작곡가연맹의 청원으로 임시조치이지만 군복무에서 제외되었다. 군대에 있는 중에 '철의 여단'(Die eiserne Brigade) 행진곡을 작곡했다. 제국척탄병행진곡과 오스트리아척탄병행진곡을 심포니 오케스트라로 편곡한 것이다.

1917년: 9월에 오스트리아군에 재입대하였다가 12월에 신체적으로 군복무가 곤란하다는 판정을 받아 영구 제대하였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에 의한 '사랑의 노래'의 작곡을 착수했다.

1918년: 뫼들링의 베른하르트가쎄(Bernhardgasse) 6번지로 이사했다. 슈봐르츠봘트학교에서 '작곡세미나'를 시행하였다. '개인연주자협회'(Society for Private Musical Performances)를 창립하였다.  

1919년: 우리나라에서 삼일독립운동이 일어난 해이다. 한스 아이슬러(Hanns Eisler), 루돌프 콜리슈(Rudolf Kolisch), 칼 랑클(Karl Rankl)이 쇤베르크의 제자가 되었다.

1920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제1차 말러페스티발에 참석했다. 암스텔담의 연주회에서 지휘했다. 국제말러연맹(International Mahler-League)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말러페스티발에서 말러의 교향곡 8번 연주. 지휘 샤일리. 루체른


1921년: 마트제 사건(Das Mattsee-Ereignis)이 일어났다. 쇤베르크는 여름휴가를 위해 잘츠부르크 인근의 마트제 호반에 갔지만 호텔은 그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투숙을 거절했다. 뿐만 아니라 마트제의 몇몇 주민들은 쇤베르크가 유태인인 것을 알고 마트제를 떠나라고까지 강요했다. 쇤베르크로서는 처음으로 경험하는 불쾌한 일이었다. 훗날 쇤베르크는 친구인 칸딘스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을 경험했다네. 내가 독일인이 아니라서, 유럽인이 아니라서, 아마도 극단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축에도 들지 않고 유태인이라서 이런 대우를 받은 모양이네'라고 말했다. 쇤베르크는 비록 25년 전에 개신교로 개종했지만 마트제 사건은 동료 음악인인 말러의 경험을 되새기게 해주는 것이었다. 말러는 '나는 세가지 이유로 집도 없고 고향도 없는 사람이다. 첫째는 오스트리아인 중에서 보헤미아 사람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독일인 중에서 오스트리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소 셋째는 전세계를 통해서 유태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곳을 가더라도 불청객이다. 아무곳에서도 나를 반겨주지 않는다'라고 말한 일이 있다.


휴양지로 유명한 마트제. 쇤베르크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마트제의 호텔에 투숙하는 것을 거절 당했다.


1922년: 프라하에서 '피에로 뤼네어'를 지휘했다. 다리우스 미요와 프란시스 풀랑크가 뫼들링의 쇤베르크 지택을 방문했다. '야곱의 사다리' 작곡을 중단했다. 이 오라토리오는 쇤베르크 사후 10년을 맞이하는 1961년 비엔나 악우회 대연주홀에서 초연되었다.


1923년: 마트제(Mattsee) 사건으로 오스트리아에서 반유태인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독일의 바우하우스(Bauhaus)가 반유태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자 쇤베르크는 1922년부터 봐이마르 바우하우스의 멤버로 활약하고 있는 바실리 칸딘스키와 교류를 끊었다. 또한 쇤베르크는 바우하우스 음악학교장이 되어 달라는 오퍼를 거절했다. 부인 마틸데가 10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1월에는 코펜하겐에서 쇤베르크 자신의 지휘로 '숲 비둘기의 노래'(Lied der Waldtaube)가 세계초연되었다. 12음 기법에 대한 서론을 발표했다. 12음 기법은 전통적인 하모니 개념을 혁명한 것이다.


1924년: 8월 28일에 게르트루트 콜리슈(Gertrud Kolisch)와 뫼들링의 루터교구교회에서 결혼하였다. 제자인 루돌프 콜리슈의 여동생이었다. 제자들이 쇤베르크의 50회 생일을 기념하는 특별 연주회를 마련했다. 비엔나 폭스오퍼(Volksoper)에서 10월 14일 '행복한 손'의 세계초연이 있었다. 지휘는 프리츠 슈티드리였다.


1925년: 10월 1일에 페루치오 부소니의 뒤를 이어 베를린예술아카데미 작곡 마스터 클라스 과장으로 임명되었다. 부소니는 1924년에 세상을 떠났다. 쇤베르크를 교수에 임명하자 음악신보(Zeitschrift fur Musik)은 반유태 운동의 일환으로 쇤베르크의 임명을 비난하였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황제 왈츠'를 피에로 앙상블의 스페인 순회연주를 위해 편곡했다.


1926년: 연초에 순회연주를 마치고 제자 로베르토 게르하르트, 빈프리트 칠리히, 요제프 루퍼 등과 함께 베를린에 도착했다. 부인 게르트루트와 함께 샬로텐부르크의 슈타인플라츠에 있는 펜지온 바바리아에 투숙해서 지냈다. 7월부터 11월까지 잠시 비엔나를 다녀왔다. 베를린에서의 첫 강의는 건강상 문제 때문에 11월에야 시작할수 있었다. 베를린예술아카데미에서는 교수로서 1년에 6개월 이상은 작곡 레슨을 해야 했고 또한 학교 평의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개인시간을 갖기가 힘들었다.


1927년: 베를린 방송국에서 자기 작품의 지휘자로 초대받았다. 여름에는 뵈르터제에 있는 푀르챠하에서 지냈는데 이때 몇년 동안 소원하게 지내던 칸딘스키와 다시 만나 교분을 새롭게 했다. 칸딘스키의 부인 니나도 함께 지냈다. 9월과 10월에는 비엔나를 다시 방문했다. 새로운 제자들이 들어왔다. 니코스 스칼코타스(Nikos Skalkottas), 알프레드 켈러(Alfred Keller), 페터 샤하트(Peter Schacht) 등이었다. 파리에서 쇤베르크를 기념하는 특별 연주회가 있었다. 미국의 예술애호가인 엘리자베스 스프라그(Elizabeth Sprague)의 요청으로 '세번째 현악4중주곡'(Drittes Streichquartett)의 작곡을 시작했다. 이 작품은 9월 19일 비엔나에서 콜리슈 4중주단(Kolisch Quartet)의 연주로 스프라그 여사가 참석한 가운데 초연을 가졌다.


1928년: 1월 말에 런던에서 게레리더 지휘를 맡았다. 3월에는 베를린 샬로텐부르크의 누스바움 알리(Nussbaum Allee)로 집을 옮겼다. 3월에는 암스텔담 콘세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를 위해서 캐논을 완성했다. 4월에는 독일작곡가협회 창립 25주년을 기념해서 세 성부의 캐논을 작곡했다. 쇤베르크는 오페라 '모세와 아론'의 작곡을 추진하면서 유태공동체에서 신앙이란 무엇인지, 유태주의는 무엇인지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29년: 오페라 '오늘부터 내일까지'(Von heute auf morgen)을 완성했다. 12음 기법을 사용한 첫번째 무대작품이다. 대본은 막스 블론다(Max Blonda)가 썼다. 막스 블론다는 쇤베르크의 두번째 부인인 게르트루트의 또 다른 이름이다. 결혼생활에 대한 풍자를 담은 내용이다.


1930년: 4월부터 5월까지 두달 동안 바덴바덴에서 요양을 했다. 7월부터 9월까지는 루가노(Lugano)에서 지냈다. 10월에는 베를린 뉘른베르거 플라츠의 새로운 집으로 옮겼다. 이어서 프라하에서 '새로운 음악, 최근 추세에 뒤떨어진 구식 음악, 스타일과 아이디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오페라 '오늘부터 내일까지'의 세계초연이 2월 1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있었다. 11월에는 Begleitungsmusik의 세계 초연이 오토 클렘페러 지휘아래 베를린의 크롤 오페라(Kroll Oper)에서 있었다.


1931년: 런던에서 지휘 활동을 했다. 3월에는 베를린 방송에서 강의를 했다. 5월부터 9월까지는 스위스의 몽트로 테리테에서 지냈다. 10월부터는 바르셀로나에서 지냈다. 건강상의 이유에서였다. 이렇게 여러 곳을 다니면서도 작곡에서 손을 놓은 일은 없었다. 주로 오페라 '모세와 아론'에 집중했다.


1932년: 바르셀로나에 있으면서 베를린으로 돌아가는 것을 연기했다. 정치상황 때문이었다. 프러시아 아카데미에서도 반유태 운동이 대두되었다. 쇤베르크에게 반유태의 화살을 돌리면서도 겉으로는 다른 문제처럼 포장하였다. 6월에는 속히 베를린으로 복귀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독일 전반에서의 상황은 유태인에게 어려운 것이기만 했다. 그러는 중에 딸 도로테아 누리아(Dorothea Nuria)가 바르셀로나에서 5월에 태어났다. '모세와 아론'은 3막의 경우, 대본은 되어 있지만 음악은 일부분만 스케치 되어 있었다. 결국 이 오페라는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게 되었다. '모세와 아론'은 종합예술작품(Gesamtkunstwerk)이다.


1933년: 나치에 의해 아카데미의 교수직에서 축출되었다. 베를린을 떠나 파리로 갔다. 7월에 파리에서 유태교로 다시 개종하였다. 파리에서도 더 이상 활동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여 미국행을 결심했다. 10월에 부인과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나 10월 31일에 뉴욕에 도착했다. 보스턴과 뉴욕의 음악학교에서 강의하기 시작했다. 파블로 카잘스의 요청에 의해서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을 작곡했다. 생일축하 캐논을 작곡해서 칼 엥겔에게 헌정했다. 콜리슈 4중주단의 요청에 의해서 현악4중주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을 작곡했다. 헨델의 콘체르토 그로소 7번 Op 6을 바탕으로 했다.  


그라츠에서의 '게레리더' 연주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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