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현대의 쇤베르크

결혼과 죽음

정준극 2017. 7. 25. 06:24

1차 대전과 12음 기법의 개발


쇤베르크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조지 거슈윈. 두 사람 모두 아마추어의 경지를 넘어선 화가들이었다.


쇤베르크가 40세 때에 1차 대전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으로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지날 수록 유럽 전역의 전쟁으로 확산되었다. 1차 대전은 쇤베르크의 음악 발전에 장애가 되었고 심지어 위기였다. 오스트리아 국민인 쇤베르크도 군대에 가야 했다. 쇤베르크는 42세 때인 1916년에 입대하여 군인으로서 복무하였다. 이 기간 동안 쇤베르크는 온전히 작곡에 전념할수가 없었다. 그 결과 이 기간 동안 그가 만든 작품 중에는 상당수가 미완성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아마도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 때문인듯 싶다. 그렇지만 쇤베르크는 독일의 우수성을 은근히 마음 속에 담아 두고 있었다. 쇤베르크는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한 것을 그가 부르조아들의 예술적 가치관을 공격한 것과 같은 것이 아니겠느냐고 비교했다고 한다. 그는 전쟁이 나던 해인 1914년 8월에 비제와 스트라빈스키와 라벨의 음악을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음악이라고 비난하면서 심지어 독일의 프랑스 침공은 이들에게 독일 정신을 존경하도록 가르쳐 주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쇤베르크와 뜻을 같이 하는 작곡가들과 일반 대중들과의 관계는 상당히 문제가 있었다. 그러자 쇤베르크는 전쟁이 끝난 해인 1918년 비엔나에서 '개인음악공연협회'(Verein für musikalische Privataufführungen: Society for Private Musical Performances)이라는 그룹을 창설했다. 그는 현대음악 작품들은 일반이 생각하는 것처럼 유행이나 따르고 상업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고 신중하게 준비되고 많은 연습을 거치며 정당하게 공연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 협회는 창설 이래 1921년까지 모두 353회의 공연을 가졌다. 협회는 연주회의 입장 수입이 있던지 없던지 연주자들에게 정당한 출연료를 지급했다. 그러는 바람에 미안하게도 협회는 재정난 때문에 설립 3년 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한가지 특별한 사항은 쇤베르크가 주도한 협회이고 그가 주관한 음악회이지만 그 자신의 작품은 프로그램에 올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신에 스크리아빈, 드비시, 말러, 베베른, 베르크, 막스 레거 등 20세기를 주도하는 현대작곡가들의 작품들을 프로그램에 올렸다. 아무튼 쇤베르크는 현대음악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이해 증진을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쇤베르크가 그린 '레드 게이즈'(붉은 응시)


그후 쇤베르크는12음 기법을 개발하여서 현대음악의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작곡기법을 전파하였다. 쇤베르크가 처음에 발전시킨 12음 기법은 원래 독일어로 Reihe(라이에) 또는 Tonreihe(톤라이에)라고 불렀다. 음렬(音列)이라고 번역할수 있다. 그러나 학술적으로는 Dodecaphonic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1947년에는 폴란드 출신으로 프랑스에 귀화한 르네 라이보비츠(Rene Leibowitz: 1913-1972)와 영국의 험프리 설(Humphrey Searle: 1915-1982)이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을 음렬주의(Serialism)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은 그의 제자들이 많이 사용해서 더욱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들이 바로 제2 비엔나학파에 속한 사람들이다. 즉, 안톤 베베른, 알반 베르크, 한스 아이슬러 등이 주축을 이루었는데 이들의 작품들은 말할 나위도 없이 근본적으로 쇤베르크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쇤베르크는 자기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더욱 펼치기 위해 여러 저서들을 남겼다. 대표적인 저서는 '하모니 이론'(Harmonielehre: Theory of Harmony)와 1967년에 내놓은 '작곡의 기본'(Fundamentals of Musica Composition)이다. 이들 저서는 오늘날 까지도 많은 작곡가들이 필수 참고서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쇤베르크는 그의 아이디어와 그에 따른 새로운 작곡기법 개발을 하나의 자연적인 진전으로 보았으며 혁신적인 산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현재의 음렬주의 작품이 초기의 후기 낭만파적 작품의 연장이라고 보았다. 쇤베르크는 그러한 작풍의 변화와 발전을 사람들이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랬다.


부인 마틸데와 딸 거트루트. 리하르트 게르스틀(Richard Gerstl: 188301908)작.


1923년은 쇤베르크의 생애에서 중요한 변화가 있었던 해였다. 22년동안 부부로서 지내왔던 마틸데가 10월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듬해인 1924년 8월에 쇤베르크는 게르트루데 콜리슈(Gertrude Kolisch: 1898-1967)와 재혼하였다. 게르트루데는 쇤베르크의 제자인 바이올리니스트 루돌프 콜리슈의 여동생이었다. 게르트루데는 문학에 재능이 있어서 극본이나 오페라 대본을 썼다. 게르트루데는 막스 블론다(Max Blonda)라는 예명으로 대본을 썼다. 쇤베르크의 단막 오페라인 '오늘부터 내일까지'(Von heute auf morgen)의 대본은 게르트루데가 쓴 것이다. 게르트루데는 쇤베르크에게 본격적인 오페라를 만들어 보라고 권유하였다. 쇤베르크는 오페라 대신에 오라토리오로서 '야곱의 사다리'(Jakobsleiter)를 착수했다. 대본은 쇤베르크 자신이 마련했다. 그러나 '야곱의 사다리'는 쇤베르크의 건강이 악화되는 바람에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미완성인 오라토리오 '야곱의 사다리'는 게르트루데의 요청에 의해서 쇤베르크의 제자인 빈프리트 칠리히(Winfried Zillig: 1905-1963)가 완성했다. 1958년에는 일부가 연주되었으며 전체가 처음으로 공연된 것은 쇤베르크가 세상을 떠난지 10년 후인 1961년 6월 비엔나에서였다. 지휘는 거장 라파엘 쿠벨리크가 맡았다. '야곱의 사다리'가 오페라처름 무대 연출로서 처음 공연된 것은 1968년 미국 산타페에서였다. 이 공연은 '야곱의 사다리'의 미국 초연이기도 했다. '야곱의 사다리'는 쇤베르크가 12음 기법을 사용한 오라토리오였다.


쇤베르크와 두번째 부인인 게르트루데 콜리슈의 다정한 한때


1924년에 베를린의 프러시아예술아카데미 작곡마스터클래스를 책임맡고 있던 작곡가 페루치오 부소니()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에 쇤베르크가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쇤베르크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2년 후인 1926년에야 그 직분을 맡았다. 로베르토 게르하르트, 니코스 스칼코타스, 요제프 루퍼 등은 쇤베르크가 마스터 클라스를 책임맡은 후에 레슨을 받은 제자들이다. 쇤베르크는 1930년대에 한편으로는 무조음악을 작곡하면서도 조성음악도 작곡했다. 그의 '남성합창을 위한 여섯 곡' Op 35 중에서 4번째와 6번째 곡은 조성작품이다. 나머지는 12음 기법에 의한 무조작품이었다. 쇤베르크는 베를린예술아카데미의 직책을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을 때까지 유지하였다. 그해에 쇤베르크는 프랑스 여행 중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만일 독일로 돌아가면 나치의 반유태인 정책 때문에 신변이 위험할수 있으니까 돌아가지 말라고 당부했다. 쇤베르크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파리의 유태인 회당에서 공식적으로 유태교를 다시 받아들이는 의식을 가졌다. 그리고 가족들을 데리고 이듬해인 1934년에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 도착한 쇤베르크는 보스턴의 말킨음악원에서 교수의 자리를 맡았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가진 교수직이었다. 얼마후 그는 로스 안젤레스로 가서 UCLA(LA의 캘리포니아대학교)와 USC(남가주대학교)의 초빙교수가 되었다. 훗날 이 두 대학교는 쇤베르크를 기념하여서 각각의 음악당 건물을 쇤베르크 홀이라고 명명했다. 쇤베르크가 UCLA의 초빙교수가 된데에는 지휘자 오토 클렘페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오토 클렘페러는 당시 로스 안젤레스 교향악단의 음악감독 겸 지휘자였다. 이어 이듬해에는 정교수가 되었고 연봉도 5천 1백불을 받게 되었다. 쇤베르크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UCLA 캠퍼스에서 머지 않은 브렌트우드 팍에 있는 스페인식 저택을 1만8천불을 주고 샀다. 쇤베르크의 집 길건너 집은 아역 배우로서 유명한 셜리 템플의 집이었다. 쇤베르크는 이곳에 살면서 조지 거슈윈가 친하게 지냈다. 두 사람은 작곡가이면서 아마추어 화가였고 또한 테니스 파트너로서 뜻이 맞았다.



아놀트 쇤베르크와 딸 거트루트, 아들 게오르크


쇤베르크는 LA에 정착하고나서 저택에서 일요일 오후 티파티를 자주 열었다. 멜랑즈 또는 아인슈팬너와 같은 비엔나 커피와 비엔나 토르테는 모두 좋아하는 기호품이었다. 단골 게스트로서는 지휘자 오토 클렘페러(1936년부터 쇤베르크로부터 작곡 개인 레슨을 받았다), 프랑스 출신의 작곡가 에드가 바레스(Edgard Varése), 러시아 출신의 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인 조셉 아크론(Joseph Achron), 러시아 출신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인 루이스 그륀버그(Louis Gruenberg),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곡가인 에른스트 토흐(Ernst Toch), 그리고 간혹 유명 배우들도 들렸는데 예를 들면 하르포 막스(Harpo Marx), 페터 로르(Peter Lorre) 등이었다. 이 시기에 레오나드 로젠만(Leonard Roosenman)과 조지 트렘블레이(George Tremblay)가 쇤베르크와 함께 작곡 공부를 했다. 쇤베르크는 미국으로 건너온 이후 그의 이름을 영어식으로 Schoenberg라고 고치고 발음도 쇤버그라고 했다. 영어 알파벳에는 ö가 없기 때문에 oe로 쓰기로 한 것이다. 쇤베르크는 로스 안젤레스에 정착하고서 생애를 마칠 때까지 살았다. 그러나 미국에 처음 왔을 때에는 과연 미국사회에 적응해서 살수 있는지 확실치 않아서 호주 시드니에 있는 뉴사우스 웨일스 주립음악원(New South Wales State Conservatorium)의 교수직을 신청했다. 그러나 원장인 에드가 베인턴이라는 사람이 쇤베르크가 유태인이며 또한 그의 작곡 아이디어가 지나치게 현대적이고 삼지어는 위험한 요소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거절했다. 한편 쇤베르크는 한때 미국이 아니라 뉴질랜드로 이민을 갈 생각도 했었다. 왜냐하면 비엔나에 있을 때 비서겸 학생인 리하르트 호프만이 뉴질랜드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하르트 호프만은 쇤베르크의 장모의 조카이기도 했다. 실상 쇤베르크는 소년시절에 뉴질랜드가 발행한 우표를 보고 뉴질랜드에 대하여 대단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에곤 쉴레가 그린 쇤베르크 초상화. 1917년


쇤베르크는 생애의 말년에 여러 중요한 작품들을 완성했는데 어렵기로 유명한 바이올린 협주곡 Op 36과 유태인의 정서가 담겨 있는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콜 니드레(Kol Nidre: Op 39),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송가'(Ode to Napoleon Bonaparte: Op 41), 이상하게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 음악인 피아노 협주곡(Op 42),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위한 곡인 '바르샤바 생존자'(A Survivor from Warsaw: Op 46) 등이다. 쇤베르크는 오페라 '모세와 아론'(Moses und Aron)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 오페라는 완전히 12음 기법을 사용한 작품 중의 하나이다. 쇤베르크는 12음 기법에 의한 현대 작품들을 내 놓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성작품들도 내놓았다. '현을 위한 모음곡 G 장조'(1935), 실내교향곡 2번 Eb 단조(1939), '레시타티브에 의한 변주곡 D 단조'(1941) 등이다. 쇤베르크 말년의 제자들로서 대표적인 인물로는 존 케이지, 루 해리슨 등이 있다. 쇤베르크는 1941년, 2차 대전이 한창이던 때에 마침내 미국시민권을 가졌다. 쇤베르크는 이상하리만치 미신적인 생각이 많았다. 그런 미신적인 생각은 결국 그의 죽음을 앞당긴 요소 중의 하나가 되었다. 쇤베르크는 주지하는 대로 13이라는 숫자에 대한 공포심 내지 기피심이 대단했다. 이를 학술적으로는 Triskaidekaphobia라고 한다. 쇤베르크는 13일에 태어나서 13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것만 해도 대단히 이상한 일이 아닐수 없다. 쇤베르크는 그의 오페라인 '모세와 아론'이 독일어로 Moses und Aaron인데 알파벳을 전부 합하면 13이 되어서 두려워했다. 그래서 Aaron의 이름에서 a를 하나 빼어서 Aron으로 만들었다.


오페라 '모세와 아론'. 메트로폴리탄 무대

            

쇤베르크는 평소에 친지들에게 13 숫자의 배수가 되는 해에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65세 생일을 맞는 1939년에 죽을 것이라면서 두려워했다. 65는 13의 5배수이다. 그래서 친구 중의 한 사람이 점성술사를 찾아가서 과연 65세가 되는 1939년이 그렇게 위험한 해이냐고 묻자 그 점성술사는 위험하기는 해도 치명적은 아니라고 대답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1950년 그의 76회 생일 때에 어떤 천문학자가 쇤베르크에게 메모를 보내어서 76이라는 것은 7+6, 즉 13 이므로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그 얘기를 들은 쇤베르크는 너무나 낙담하여서 지내다가 76세가 되는 해가 무사히 지나가고 그 다음해가 되었어도 13이라는 숫자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나이에 숫자를 더하는 것을 기피하였다. 쇤베르크는 1951년 7월 13일 금요일에 세상을 떠났다. 자정을 15분 남긴 시각이었다. 몇 분만 더 버텼어도 13일이 지나고 14일이 되었을 것인데 말이다. 쇤베르크의 시신은 화장되었으며 유분은 1974년 6월 6일에 비엔나의 중앙공동묘지에 이장되었다.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첸트랄프리드호프)의 쇤베르크 묘소

  

쇤베르크는 상당한 재능의 화가였다. 그의 작품은 간혹 세계적 화가들인 프란츠 마르크 또는 바실리 칸딘스키의 작품들과 함께 화랑에서 전시되기도했다. 쇤베르크는 미술계에서 굳이 장르로 보자면 표현주의 블루 라이더(Blue Rider) 그룹에 속한다고 할수 있다. 쇤베르크는 호팔롱 캐시디 영화(Hopalong Cassidy films)에 관심이 지대했었다. 호팔롱 캐시디 또는 홉 얼롱 캐시디(Hop Along Cassidy)는 1904년에 작가 클레런스 멀포드(Clarence Mulford)가 만든 가상의 카우보이 영웅이다. 멀포드는 호팔롱 캐시디를 주인공으로 삼은 여러 소설을 썼는데 초기의 작품을 보면 호팔롱을 거칠고 위험한 인물로 설정하였다. 호팔롱의 한쪽 다리는 나무다리이기 때문에 걸어 다닐 때에 약간 탱고를 추는듯하다. 그래서 호팔롱(홉 얼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935년부터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주역은 윌리엄 보이드(William Boyd)가 맡아서 인기를 끌었다. 그래서 무려 66편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중에서 단지 몇 편만이 오리지널 말포드의 소설을 바탕으로 삼은 것이다. 영화에서 호팔롱은 말끔한 신사로서 사르사파릴라로 만든 술을 마시는 영웅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영화의 대본들은 폴 뷜레와 데이빗 왜그너가 쓴 것으로 알려졌는데 실상 이들은 좌익 극본가들이었다. 쇤베르크는 자신이 군주주의자에서 부르조아가 된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좌익작가들이 쓴 영화를 좋아했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었다.


TV 서부극인 홉 얼롱 캐시디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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