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신동들 대추적
어려서부터 놀라운 음악적 재능을 보여준 특별한 인물들이 있다. 장난감이나 가지고 놀 나이에 교향곡을 작곡했고 오페라를 작곡한 그런 어린이들이다. 작곡뿐만 아니라 연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아직 열살도 되지 않았는데 피아노 또는 바이올린을 귀신처럼 연주한 아이들이라면 분명 대단한 아이가 아닐수 없다. 이렇듯 어린 시절부터 특별한 음악적 재능을 보여준 사람들은 우리는 음악의 신동(Prodigy)이라고 부른다. 어린 천재들이다. 하기야 위대한 음악가로서 어릴 때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여주지 않은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그 중에서 특별히 어린 시절부터 신동 소리를 들은 몇몇 사람들을 소개한다. '그건 알아서 무엇하냐?'라고 말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클래식 음악을 애호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면 클래식 음악에 관한 아무 것이라도 흥미를 가지고 읽을 것이므로 그분들을 위해서 적어 두는 바이다. 또한 별로 할 일도 없어서 심심한 중에 이런 글이라고 읽으면 심심치 않을 사람들도 있을것 같아서 정리하는 바이다. 음악분야에서 신동이라고 하면 12세 이하의 어린이들로서 작곡 및 연주 분야에서 놀라은 재능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말한다. 옆집에 사는 서너살 짜리 아이가 우연히 피아노를 두들기면서 노래인지 뭔지를 불렀다고 해서 아기 엄마가 박수를 치면서 '우리 애가 신동이어요, 신동!'이라고 외친다고 해서 음악의 신동이라고 부를수는 없는 노릇이다. 음악의 신동이라고 불려졌다가 나중에는 별 볼일이 없이 된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런 사람들은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아무튼 주로 작곡에 재능을 보인 음악 신동들의 면모를 이름의 알파벳 순서로 소개한다.
○ 조이 알피디(Joey Alfidi). 원래 이름은 조셉 알피디(Joseph Alfidi)이다. 어릴 때의 애칭이 조이이다. 조이라고 불릴 때에 놀라운 음악적 재능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조이 알피디로 기억하고 있다. 조이는 1949년에 뉴욕의 이탈리아 이민자의 후손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코디온 연주자로서 음악학원을 운영했다. 조이는 세살 때부터 아버지의 음악학원에서 재미로 악기들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네살 때에는 피아노로 즉흥곡을 연주했다. 나중에 그 피아노 즉흥곡을 악보로 옮겼더니 그럴 듯한 작품이 되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지휘에 놀라운 재능이 있어서 정말 놀랄 일이지만 6세 때에 플로리다의 마이아미교향악단을 지휘했다. 7세 때는 카네기 홀에서 Symphony of the Air(여러 교향악단을 대표하는 멤버들로 구성된 교향악단)를 지휘했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서곡, 로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 하이든의 '놀람 교향곡',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등을 지휘했다. 8세 때인 1957년에는 CBS의 I've Got a Secret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피아노, 바이올린 등 네가지 악기를 뛰어나게 연주해서 찬사를 받았다. 10세 때에 교황 요한 23세의 초청으로 바티칸을 방문해서 피아노 연주를 했다. 교황은 조이에게 '또 하나의 모차르트'라고 하면서 축복했다. 11세 때에는 앤트워프 필하모닉을 지휘했다. '모차르트 이후 최고의 신동'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나중에 피아노 협주곡 등을 작곡해서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조이 알피디는 2015년에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세상을 떠났다.
○ 후안 크리소스토모 아리아가(Juan Crisostomo Arriaga). 1806년에 스페인의 비스케이의 빌바오(Bilbao)에서 태어난 바스크 작곡가이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네살 때부터 오선지에 음표를 그리며 작곡을 시작했다. 다섯 살 때에는 노래를 작곡했고 여기에 피아노 반주 파트까지 거의 완벽하게 작곡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사람들은 후안을 '스페인의 모차르트'라고 불렀다. 실상 후안은 모차르트가 태어난 날인 1월 27일에 태어났다. 그것도 인연이면 인연이라고 할수 있다. 다만, 꼭 50년의 시간차가 있을 뿐이지만 말이다. 후안은 12세가 될 때가지 실로 여러 작품을 만들어서 발표했다. 14세 때에는 오페라에 도전했다. 2막의 '행복한 노예들'(Los esclavos felices)이라는 오페라였다. 후안의 아버지는 후안의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위해 16세 때에 파리로 보내어 파리음악원에서 작곡을 공부하도록 했다. 후안은 파리음악원에서 '성모애상'(Stabat Mater)을 작곡해서 학교음악회를 통해 발표했다. 당시 음악원장은 루이지 케루비니였다. 케루비니는 '성모애상'을 듣고서 '아니, 도대체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누가 작곡했단 말이냐?'면서 놀라워했다. 후안이 작곡한 것을 알고는 후안에게 '놀라운 일이다. 자네는 사람이 아니라 음악 그 자체이네'라면서 격려하였다. 후안은 파리음악원에서 교향곡, 현악4중주곡, 기타 여러 작품을 작곡했다. 후안은 안타깝게도 20세인 1826년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후안은 모차르트 이후 진정한 음악의 신동이었다.
○ 사무엘 바버(Samuel Barber). 1910년에 미국 펜실베이니어주 웨스트 체스터에서 태어난 바버는 미국이 자랑하는 음악의 신동이었다. 아버지는 의사였지만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6세 때에는 대중들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했고 7세 때에는 작곡을 시작했다. 첫 작품은 솔로 피아노곡이었다. 그로부터 계속 작곡에 전념하였으면 12세 때에는 첫 오페라인 '장미나무'(The Rose Tree)를 작곡했고 이어 웨스트 체스터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봉사했다. 14세 때에는 커티스음악원에 입학하였는데 당시로서는 최연소였다. 훗날 사무엘 바버는 오페라 '바네사'(Vanessa)와 '현을 위한 아다지오'로서 퓰리처 음악상을 받았으며 198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무엘 바버만큼 어린 시절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랜 기간동안 호평을 받고 작곡가로서 엔조이한 작곡가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 조르즈 비제(Georges Bizet). 1838년에 태어난 비제는 괴테가 극히 감탄한 음악의 신동이었다. 비제는 9세 때에 파리음악원에 입학하였다. 당시로서는 최연소의 학생이었다. 원래 파리음악원에 들어갈수 있는 최소 연령은 10세였다. 그런데 음악원의 조셉 레이트레드 교수가 비제를 인터뷰하면서 비제의 재능에 감탄한 나머지 비록 아직 10세는 되지 않았지만 규정을 어기면서 비제를 입학시켰다. 비제는 10세 때에 솔페즈(solfége)를 작곡하여서 여러 교수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비제는 파리음악원 재학시절에 여러 상을 받았다. 1857년에 받은 최고의 영예인 프리 드 롬(Prix de Rome)을 비롯해서였다. 비제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에메(Aimée)로부터 어릴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아서였다. 그러나 비제는 자기의 피아노 재능을 내보이기를 싫어했다. 그래서 일반 콘서트에서는 거의 연주한 일이 없다. 피아노 보다는 오로지 작곡에만 전념하였다. 괴테는 당시의 세 천재 음악가로서 비제와 멘델스존과 생 상스를 거론하였다.
○ 프레데릭 쇼팽(Frédéric Chopin). 쇼팽도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다. 쇼팽은 폴란드에서 1810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원래 프랑스의 로레인에서 살았었는데 뜻한바 있어서 청년 시절에 바르샤바로 와서 프랑스어 교사를 했다. 그러다가 폴란드 여인을 만나 결혼하였는데 어머니가 피아니스트였다. 당연히 쇼팽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아버지도 음악적인 재능이 있었다. 플루트를 잘 불었고 바이올린도 연주했다. 그래서 집에서는 간혹 가족 음악회가 열리기도 했다. 쇼팽은 7세 때부터 음악적인 재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일곱살 때에 사람들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했고 작곡도 시작했다. 폴로네이스 G 장조와 Bb 장조를 작곡했다. 그후 바르샤바에서 보이치크 치브니(Wojciech Zywny)라는 피아노 교사로부터 본격적인 피아노 수업을 받았다. 11세 때에 작곡한 폴로네이스 Ab 장조는 피아노 스승인 치브니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헌정한 작품이다. 당시에 폴란드는 제정러시아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쇼팽은 러시아에서 임명한 폴란드 총독 콘스탄틴 대공의 아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래서 총독궁에 자주 갔었고 어느 때는 총독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다. 쇼팽은 콘스탄틴 총독을 위해 행진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소년 쇼팽은 신동이라는 찬사와 함께 바르샤바 귀족사회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쇼팽은 13세 때에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오르간과 작곡을 공부했다. 쇼팽이 연주자 겸 작곡가로서 완성된 경지를 보여주기 시의 시작한 것은 15세 때부터였지만 그 이전에도 뛰어난 피아니스트로서, 또한 작곡가로서 재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 알마 도이처(Alma Deutscher). 알마 엘리자베스 도이처는 현대의 음악신동이다. 알마에게는 여러 수식어가 붙어 있다.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작곡가, 그리고 천재소녀, 심지어는 '걸 모차르트'라는 호칭 등등이다. 알마는 2005년 2월에 영국 햄프셔 지방의 대도시인 베이싱스토우크(Basingstoke)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스라엘 언어학자였다. 알마는 두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세살 때부터는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알마가 얼마나 음악적이냐는 것은 세살 때의 에피소드로 알수 있다. 어느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자장가를 듣더니 주위 사람들에게 '너무나 아름다운 음악이어서 감동했어요'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알마의 음악적 재능은 연주에 있어서도 일취월장하였지만 작곡에 있어서 더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었다. 설마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네살 때에 피아노 즉흥곡을 만들어 연주했고 다섯살 때에는 오선지에 자기가 작곡한 것을 옮겨 적을수 있었다. 여섯 살 때에 첫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했다. Eb 장조 피아노 소나타였다. 또한 '바이올린을 위한 안단테'도 작곡했다. 일곱 살 때에는 비록 초보적이긴 하지만 첫 오페라인 '꿈을 지우는 사람'(The Sweepter of Dreams)를 완성했다. 9세 때에는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을 작곡했다. 이 작품은 2015년에 초연되어서 호평을 받았다. 10세 때인 2015년에는 첫 본격 오페라인 '신데렐라'(Cenderella)를 완성했다. '신데렐라'는 2016년 12월 29일에 비엔나에서 주빈 메타의 주선으로 초연되어서 역시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2017년, 12세 때에는 첫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하여 직접 연주했다. 그날 저녁에는 그 피아노 협주곡을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만들어서 직접 연주했다. 2018년으로 알마는 13세가 된다. 지금까지도 여러 작품을 작곡했는데 앞으로도 더욱 많은 작품을 작곡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아무튼 금세기 최고의 음악신동이다.
알마 도이처. 6세 때에 첫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해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 루스 깁스(Ruth Gipps). 루스 도로시 루이사 깁스(Ruth Dorothy Louisa Gipps)는 1921년에 영국 동남부 이스트 서섹스의 벡스힐 언 시(Bexhill-on-Sea)라는 어촌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집안이었다. 그런 루스가 20세기 영국에서 가장 뛰어난 작곡의 한 사람으로서 추앙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루스는 작곡가이면서 오보이스트, 피아니스트, 그리고 유능한 임프레사리오였다. 루스는 어릴 때부터 주변 도시에서 열리는 음악콩쿠르에 나가서 피아노로서 입상하기 시작했다. 콩쿠르에서 상을 받을 때마다 보면 루스가 가장 나이가 어렸다. 사람들은 루스를 신동이라면서 놀라워했다. 8세 때에는 자기가 작곡한 작품을 직접 연주해서 발표했고 이 작품을 영국의 유명한 악보출판사가 출판하는 바람에 루스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어 루스는 헤이스팅스 오케스트라와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여 찬사를 받았다. 루스는 음악을 전공하기 위해 16세 때에 왕립음악원에 입학하여 작곡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루스는 학생 시절에 여러 작품들을 발표해서 많은 찬사를 받았다. 루스는 그후 더햄(Durham)대학교에 진학하여 본 윌리엄스 등에게서 사사했다. 루스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피아니스트로서, 오보에 연주자로서 많은 활동을 했고 또한 많은 작품을 작곡했다. 그러다가 33세 때에 손을 크게 다치는 바람에 모든 연주는 포기해야 했고 오로지 작곡에만 전념하였다. 루스는 남성지배적인 음악계에서 여성의 위상을 높인 인물이었다. 루스는 1999년에 향년 78세로 작고했다.
○ 모튼 굴드(Morton Gould). 모튼 굴드라고 하면 2차 대전 중에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너무나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모튼 굴드는 팝과 클래식을 혼합한 감미로운 음악으로 유명했다. 그런 모튼 굴드는 어린 시절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뉴욕의 리치몬드 힐(Richmond Hill)이란 곳에서 태어난 그는 여섯 살 때에 첫 작품이 출판되어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모튼 굴드는 특히 피아노 즉흥곡으로 유명했다. '어린 나이에 어쩌면 저렇게 피아노를 잘 친단 말인가?'라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다. 그는 뉴욕예술원(Institute of Musical Art)에 들어가서 피아노와 작곡을 전공했다. 그는 대공황 시절에 아직 10대인데도 불구하고 뉴욕의 영화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경력을 쌓아갔다. 그는 또한 보데빌에서도 피아노를 연주했다. 얼마후 라디오 시티 뮤직 홀이 오픈하자 그는 스태프 피아니스트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이어 여러 방송국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는 1996년에 향년 83세로 세상을 떠났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모튼 굴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그리워하고 있다.
○ 제이 그린버그(Jay Greenberg). 2004년에 제이 그린버그는 CBS 뉴스 프로그램인 '60 Minutes'체 출연했다. 사회자는 '우리는 지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의 신동 중의 한 사람을 만나고자 하고 있다. 그 사람은 뛰어난 작곡가입니다. 모차르트, 멘델스존, 생 상스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천재 작곡가입니다.'라고 말했다. 제이 그린버그는 CBS 방송 출연으로 일약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되었다. 제이는 1991년에 코넥티커트의 뉴 헤이븐에서 태어났다. 제이는 어려서부터 작곡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서 12세가 되던 2004년에 이미 교향곡은 5편을 완성했고 아울러 현악4중주곡, 소나타, 기타 작품들을 완성했다. 제이는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제이의 부모는 음악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제이의 음악적 재능은 온전히 스스로 깨우친 결과였다. 제이는 작곡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머리속에서 음악이 들린다. 다른 작곡가들도 그렇겠지만 머리속에서 음악이 연주되고 있다. 간혹 몇개의 소절들이 동시에 들리기도 한다. 그러면 그 음악들을 정리해서 그 중에서 필요한 음악을 악보에 적으면 된다.' 시살싱 그렇게 해서 제이가 악보에 적은 음악들은 거의 수정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다. 제이는 컴퓨터를 사용해서 작곡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Music Notation Program 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작곡을 했다. 대표적인 작품은 'Overture to 9-11'(9. 11에 붙이는 서곡)이다. 2001년 9월 11일 테러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다. 제이는 어린 시절에 '음악의 신동'이라고 불리기에 충분히 합당한 인물이었다.
○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Erich Wolfgang Korngold). 코른골트는 '제2의 모차르트'라는 별명을 들었다. 그만큼 천재적인 음악신동이라는 뜻이었다. 모차르트와 코른골트는 한 두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차르트는 비엔나에서 활동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브로노(당시는 브륀)에서 태어난 코른골트도 비엔나에서 활동했다. 모차르트의 첫 이름이 볼프강인데 코른골트의 가운데 이름도 볼프강이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작곡가였다. 코른골트의 아버지는 저명한 음악평론가이며 피아니스트였다. 모차르트는 어릴 때에 집에서 아버지와 누이 난네를과 함께 연주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코른골트도 어릴 때에 아버지와 형 한스 로베르트 코른골트와 함께 집에서 연주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코른골트는 누가 피아노를 치면 한번 들은 멜로디와 코드를 하나도 틀림없이 그대로 연주할수 있었다. 코른골트는 12세 때에 구스타브 말러를 위해 칸타타 '황금'(Gold)를 작곡한 일이 있다. 말러는 그 칸타타를 들은 후에 코른골트에게 '진짜 음악의 천재이다'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말러는 코른골트의 작곡 재능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로부터 레슨을 받도록 주선해 주었다. 코른골트는 11세 때에 발레 Der Schneemann(눈사람)의 음악을 작곡했다. 비엔나의 호프오퍼(슈타트오퍼)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직접 참석해서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코른골트의 '눈사람'은 비엔나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코른골트는 이어서 13세 때에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했다. 이곡은 당대의 피아니스트인 아르투르 슈나벨(Artur Schnabel)이 유럽 전역을 순회하는 연주회를 가졌을 때 프로그램에 넣어서 유명해졌다. 코른골트는 유태인이어서 나치의 핍박을 받게 되자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헐리우드에서 영화음악을 작곡해서 대인기를 끌었다. 대표적인 영화음악으로는 '로빈 후드' '인간의 굴레'(Of Human Bondage) 등이다. 코른골트는 1957년에 미국 로스 안젤레스의 톨루카 레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 루드 랑가르드(Rued Langgaard). 덴마크에도 음악 신동이 있었다. 루드 랑가르드이다. 풀 네임은 루드 임마누엘 랑가르드이다. 1893년에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음악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지그프리트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였다. 왕립실내악단의 피아니스트였다. 어머니 엠마도 피아니스트였다. 루드는 다섯살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았고 얼마후에는 아버지로부터 레슨을 받았다. 그래서 7세 때에 대중 연주회에서 슈만의 무곡과 쇼팽의 마주르카를 연주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루드는 그 즈음부터 작곡도 시작했다. 비록 소품에 불과하지만 지금보면 완벽한 피아노 작품이었다. 루드는 10세 때에 오르간과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11세 때에는 코펜하겐의 유서 깊은 프레데릭스키르켄에서 오르간 연주를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13세 때에는 첫 작품들인 2곡의 피아노 소품들, 2곡의 노래가 코펜하겐에서 출판되었다. 루드는 10대 때에 부모와 함께 계속 연주여행을 다녔다. 사람들은 '또 다른 모차르트'라면서 놀라워했다. 10대를 활발한 연주활동과 작곡활동으로 보낸 그는 그 이후로도 연주와 작곡을 계속하였다. 그는 많은 작품들은 남기고 1952년 덴마크의 리베(Ribe)라는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작품들은 교향곡 16편을 비롯해서 수많은 현악4중주곡, 바이올린 소나타, 관현악곡, 종교음악, 그리고 오페라 '적그리스도'(Antikrist)이다.
○ 로린 마젤(Lorin Maazel). 로린 마젤은 금세기 최고의 마에스토 중의 한 사람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왔었고 평향에도 갔었다. 평양 방문은 2008년이었다. 뉴욕필 상임지휘자로 있을 때 미국과 북한의 문화교류를 위해 평양에 가서 뉴욕필을 지휘했다. 앙코르로 '아리랑'을 지휘한 것은 두도두고 기억에 남은 일이었다. 로린 마젤은 비엔나 신년음악회도 여러번 지휘하였다. 1996년에는 지휘를 하면서 직접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해서 깊은 감동을 주었던 것이 생각난다.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Die Nasswalderin을 연주했다. 로린 마젤은 1930년 프랑스의 뉠리 쉬르 센(Neuilly-sur-Seine)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링컨 마젤은 성악가로서 성악과 피아노 레슨을 했다. 어머니 마리온 마리 슐만은 전문 연주가는 아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로린은 어릴 때에 가족과 함께 프랑스를 떠나서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로린은 어릴 때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오린 로린을 신동이라고 불렀다. 로린은 7세때부터 지휘를 공부했다. 어린아이가 무얼 알까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로린은 천부적인 지휘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로린은 8세 때인 1938년에 지휘자로서 첫 데뷔를 하였다. 로스 안젤레서에서 아이다호대학교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이었다. 11세 때에는 NBC 방송교향악단의 객원지휘자가 되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는 15세 때에 데뷔하였다. 사람들은 로린 마젤을 금세기 최고의 음악천재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로린 마젤은 그후 201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야말로 전설적인 지휘자로서 그리고 작곡가로서 세계의 존경과 명성을 한 몸에 받았었다.
○ 프레드레그 마울러(Frederik Magle). 덴마크의 프레드레그 마울러도 어린 시절에 음악신동이라고 불렸다. 1977년 덴마크의 활스터 섬의 동북부의 작은 해안마을인 스투베쾨빙에서 태어난 프레드레그는 아버지가 화가이면서 오르가니스트였고 어머니가 배우 겸 작가여서 예술적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서너살 때부터 음악에 깊은 관심을 보여준 프레드레그는 여섯살 때부터 음악이론, 독보법, 피아노를 공부했다. 주변 마을에서는 음악신동이 태어났다면서 기뻐했다. 첫 작품은 1985년 4월 7일 부활절 아침에 스투베쾨빙 교회의 어린이 성가대가 부른 부활절 찬송이었다. 프레드레그가 8세 때였다. 그후 그는 찬송가를 주로 작곡했다. 그래서 10세 때인 1987년에는 그동안 작곡한 찬송가 중에서 여섯 칸타타 '우리는 두려워합니다'(We are afraid)와 미니 뮤지컬인 '크리스마스 어린이'(A Christmas Child)가 코펜하겐에서 초연되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찬송가의 가사는 거의 모두 그의 어머니인 미미 하인리히(Mimi Heinrich)가 작사한 것이다. 프레드레그는 16세 때에 코펜하겐의 왕립덴마크음악원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그후 그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작품들을 남겼으며 또한 콘서트 오르가니스트로서 수많은 연주회를 가졌다. 1993년, 그가 16세 때에 실험극장의 연극 Der Die Das를 위해 작곡한 음악은 뮌헨에서 열린 제4회 국제댄스페스티벌에서 초연되어 찬사를 받았다.
○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멘델스존이 모차르트 이후에 등장한 최대의 음악신동이라고 하는데에는 누구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괴테도 어린 멘델스존을 보고 '이만한 음악 천재는 보지 못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멘델스존은 1809년 함부르크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에 함부르크는 독립된 도시국가였다. 멘델스존 가정은 유태인 사회에서 크게 존경받는 집안이었다. 멘델스존의 할아버지 모제스 멘델스존은 모두가 존경하는 철학자였다. 아버지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명망있는 은행가였다. 어머니 레아 잘로몬도 교양있는 여성으로서 모두로부터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다. 펠릭스 멘델스존의 형제자매는 네명으로 첫째가 패니이고 둘째가 펠릭스였다. 멘델스존의 가족들은 펠릭스가 두 살 때에 함부르크를 떠나 베를린으로 이사를 갔다. 멘델스존의 부모는 네명의 자녀에게 아이들에게 최고의 교육을 받도록 하느라고 노력하였다. 큰딸인 패니는 어려서부터 피아니스트로서 널리 알려졌다. 또한 아마추어 작곡가였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펠릭스보다는 딸 패니를 음악가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는 여자가 음악가로서 경력을 가지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큰 아들 펠릭스 멘델스존을 음악가로 키우기로 했던 것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베를린의 저택을 예술가는 물론이고 과학자들도 수시로 드나들수 있는 살롱으로 개방하였다. 그래서인지 멘델스존은 어려서부터 여러 저명인사들을 알고 지낼수 있었다. 멘델스존은 여섯 살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좀 더 좋은 선생으로부터 레슨을 받기 위해 1년 동안 파리에 가서 마리 비고라는 훌륭한 선생으로부터 레슨을 받기까지 했다. 9세 때에는 처음으로 대중 콘서트에서 피아노 연주를 했다. 10세 때부터는 대위법과 음악이론을 배웠고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 12세부터 14세까지 무려 12편의 현악교향곡을 작곡했고 기타 실내악 등도 작곡했다. 사람들은 멘델스존을 신동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15세 때에는 완성된 교향곡을 작곡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Op 11인 C 단조 교향곡이었다. 16세 때에 작곡한 현악4중주 Eb 장조는 그의 천재적인 작곡 실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17세 때에는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위한 극음악으로서 서곡을 작곡했다. 어린 시절에 이미 대단한 재능을 보여주었으므로 장성하여서는 말할 나위도 없기에 이만 생략한다.
음악적으로 깊은 감정을 나누었던 소년 펠릭스 멘델스존과 누이 패니 멘델스존
○ 지안 카를로 메노티(Gian Carlo Menotti). 크리스마스 오페라인 '아말과 밤에 찾아온 손님들'(Amahl and the Night Visitors)를 비롯해서 많은 오페라를 작곡한 이탈리아계 미국인 메노티는 어려서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음악적 재능이 남달랐다. 1911년에 북부 이탈리아, 스위스와의 국경지대에 있는 카델리아노 비코나고(Cadegliano-Viconago)에서 태어난 메노티는 어려서 부터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나서 7세 때에 이미 노래를 작곡하였고 11세 때에는 첫 오페라인 '피에로의 죽음'(The Death of Pierrot)의 대본과 음악을 완성했다. 사람들은 '어떻게 어린 아이가 오페라를 만들수 있단 말인가?'라면서 그저 놀라워했다. 12살 부터는 밀라노에 가서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모두 여덟 자녀를 두었으며 그중에서 지안 카를로는 일곱번째였다) 콜럼비아로 가서 커피 사업을 하기시작했다. 그러나 사업은 실패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지안 카를로만이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으므로 미국으로 데려가서 전문교육을 받도록 했다. 그리하여 필라델피아의 커티스음악원에 입학하였다. 그때 지안 카를로는 17세였다. 함께 공부한 사람으로서는 레너드 번슈타인과 사무엘 바버가 있다. 지안 카를로는 사무엘 바버와 평생 친구로 지냈다. 지안 카를로는 바버의 대표적 오페라인 '바네사'(Vanessa)의 대본을 써주기도 했다. 훗날 지안 카를로는 풀리처 음악상을 두번이나 받았다. 한번은 1950년 오페라 '영사'(The Consul)로였으며 다음은 1955년 오페라 '블리커가의 성자'(The Saint of Bleecker Street)로였다. 지안 카를로는 1950년에 이탈리아 스폴레토(Spoleto)에 '두 세계의 페스티발'(Festival dei Due Mondi)을 설립했고 이 페스티발의 미국 카운터파트인 '스폴레토 페스티발 미국'(Spoleto Festival USA)을 1977년에 설립했다. 지안 카를로 메노티는 2007년에 모나코의 몬테 칼로에서 향년 95세로 타계했다.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음악의 역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음악신동은 누가 무어라고 해도 모차르트일 것이다. 1756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모차르트는 네살 때(혹은 다섯 살 때)에 피아노를 위한 C장조 안단테(K 1a)와 역시 피아노를 위한 C장조 알레그로(K 1b)를 작곡했다. 어머니는 평범한 여인이었지만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대주교궁의 바이올리니스트였으며 또한 작곡도 했던 재능있는 음악가여서 어린 모차르트는 아버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을수 없다. 어린 모차르트는 아버지와 함께, 혹은 누이인 난네를도 포함해서 유럽의 이곳저곳을 그야말로 쉬지 않고 방문하면서 연주를 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모차르트를 신동이라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아버지로서는 왕족이나 귀족들 앞에서 연주를 해서 사례비를 받는 것도 중요했지만 아들 모차르트의 재능을 보여주어서 앞으로 좋은 자리에 좋은 조건으로 취직을 하도록 만드는 목적이었다. 모차르트의 어린 시절 에피소드에 대하여는 지면상 생략코자 하며 다만, 모차르트는 35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면서 주옥과 같은 작품들을 무려 6백여곡이나 작곡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바이다. 모차르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블로구의 '비엔나의 음악가들' 편에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7세 때인 1763년의 모차르트
○ 올리 무스토넨(Olli Mustonen). 핀란드의 반타(Vantaa)에서 1967년에 태어난 올리 무스토넨은 2018년으로 50세가 지난 중견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이지만 어린 시절에는 신동으로서 널리 알려졌던 인물이다. 무스토넨은 13세 때에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디베르티멘토'를 작곡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1985년에는 '피아노와 현을 위한 환상곡'을 작곡했고 최근인 2012년에는 교향곡 1번 Tuuri(행운)을 작곡했다. 무스토넨은 아섯살 때부터 하프시코드와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너무나 음악성이 좋아서 한번 연습한 곡은 잊지 않고 기억해 냈다. 무스토넨은 아홉살 때부터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무스토넨은 정규학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전공했다기 보다는 저명한 음악교사들로부터 개인 레슨을 받아 자기의 재능을 발전시킨 케이스이다. 무스토넨은 20세 때에 청소년콘서트예술가 국제오디션에 입상하였고 이로서 뉴욕의 카네기홀에 데뷔할수 있었다. 데뷔 리사이틀의 레퍼토리는 쇼스타코비치와 샤를르 발렌탱 알간의 작품이었다. 무스토넨의 연주는 데카가 나중에 음반으로 내놓아서 음악애호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무스토넨은 이 음반취입으로 그라마폰상과 에디슨상을 받았다. 그는 1988년에 코르스홀름음악제 예술국장을 맡았으며 1990-92년에는 투르쿠음악제의 음악감독을 맡았었다. 올리 무스토넨은 핀란드가 자랑하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이다.
○ 디카 뉼린(Dika Newlin). 미국 오레곤주의 포틀랜드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미시간주의 이스트 랜싱에서 지낸 디카 뉼린도 음악신동으로서 자랐다. 총명하기가 이를데 없었던 디카는 세살 때부터 어려운 낱말이 들어 있는 사전을 술술 읽을 줄 알았다. 그게 무슨 신동소리를 들을 일이냐고 할수 있지만 8세 때에 교향곡 '크래들 송'(Cradle Song)이란 것을 작곡했으니 신동이라고 해도 절대로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디카는 여섯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워서 얼마 후에는 일반 콘서트에 나가서 연주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관심은 작곡이었다. 교향곡 '크래들 송'은 신시나티 오케스트라가 초연했다. 그로부터 10년후에 이 교향곡은 뉴욕에서 연주되었다. 이때 역시 신동으로서 소문난 로린 마젤도 같은 연주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디카는 1923년 포틀랜드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미시간주립대학교 영어과 교수로 임용되어서 미시간으로 가게 되었다. 디카는 열두 살 때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시간주립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아마 당시로서는 최연소 대학생이었을 것이다. 불문학을 전공했다. 한편, 여덟 살 때에 작곡한 교향곡을 신시나티 오케스트라가 연주했을 때 지휘자인 블라디미르 발카네이니코프는 디카의 작곡 재능을 높이 평가해서 '그러지 말고 지금이 아주 좋은 시기이니 저 멀리 로스 안젤레스에 가서 아놀드 쇤버그 교수에게 사사하는 것이 좋겠다'고 강력히 추천하였다. 그래서 대학교 3학년일 때에 미시간주립대를 휴학하고 UCLA에 등록하였다. 아놀드 쇤버그에게 작곡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쇤버그도 디카를 마치 한 가족처럼 잘 돌보아 주었다. 그래서 디카는 쇤베그를 '엉클 아놀드'라고 부르면서 따랐다. UCLA에서 작곡을 공부하던 중 1939년에 잠시 미시간으로 돌아가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불문학사 학위를 받은 후 다시 LA로 가서 작곡공부를 계속하였다. 디카는 쇤버그의 마지막 제자였다. 디카는 1978년부터 리치몬드의 버지니아연방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다가 2004년에 세상을 떠났다. 디카는 70대의 노년일 때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엘비스 프레슬리 스타일의 펑크 락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도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 니콜로 파가니니(Niccolo Paganini). 파가니니라고 하면 역사상 가장 뛰어난 테크닉의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물이다. 될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고 파가니니 역시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파가니니는 1782년 제노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안토니오는 무역업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여러 사정으로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아버지는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만돌린 연주를 했다. 어린 파가니니는 다섯 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만돌린을 배웠다. 그러다가 일곱 살 때에 바이올린으로 바꾸었다. 사람들은 파가니니의 놀라운 바이올린 재능을 보고 당장 제노아의 여러 바이올린 선생들로부터 레슨을 받도록 권면했다. 그리하여 조반니 세르베토, 자코모 코스타 등으로부터 배웠다. 그러나 어린 파가니니의 진도가 너무나 빨라서 도저히 더 가르칠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어린 파가니니를 데리고 인근 파르마로 가서 다른 레슨 선생을 찾았다. 알레산드로 롤라로부터 배우게 되었다. 그런데 롤라 선생은 어린 파가니니의 바이올린을 한번 듣고 나서는 '아이고 나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네요. 대신에 저의 스승에게 소개해 드리지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파가니니를 당대의 작곡가이며 바이올리니스트인 페르디난도 파에르(Ferdinando Paer)에게 보냈다. 파에르도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솜씨를 보더니 혀를 홰홰 내둘르면서 자기의 스승인 가스파로 기레티(Gasparo Ghiretti)에게 소개했다. 이것은 하나의 일화이지만 아무튼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재능은 열살 어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뛰어난 것이어서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악마의 제자', 또는 '사탄과 계약을 맺은 사람'이니 하면서 두려워하기 까지 했다니 그저 대단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파가니니는 1840년 58세로 온갖 루머를 뒤로 한채 타계했다.
젊은 시절의 파가니니. 유럽을 제패했을 당시의 파가니니
○ 알렉스 프라이어(Alex Prior). 알렉스 프라이어는 1992년 런던에서 태어난 지휘자 겸 작곡가이다. 아버지는 영국인이고 어머니는 러시아인이었다. 그래서인지 나중에 본격적인 작곡과 지휘 공부를 위해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갔다. 프라이어는 8세 때부터 작곡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40여 작품을 완성했다. 교향곡은 4편을 작곡했고 오페라는 푸쉬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삼은 '사막'(The Desert)을, 발레는 키플링의 정글 북'을 바탕으로 삼은 '모글리'(Mowgli)를 작곡했다. 이밖에도 협주곡, 합창곡, 피아노 솔로곡, 레퀴엠 등을 작곡했다. 프라이어는 10세 때에 왕립음악대학의 주니어부에 입학했다.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음악원에서 교향곡과 오페라 지휘로 2009년, 17세 때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로 그는 10대의 청소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유수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마에스트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작곡가로서 그의 첫 작품이 국제적인 인정을 받은 것은 14세 때인 2006년에 피아노 협주곡 1번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국제피아노페스티발에서 초연된 것이었다. 그해에 그는 오페라 '모글리'의 작곡을 의뢰받았다. 2011년에는 LA 오페라로부터 오페라 작곡을 의뢰받아서 '요나와 고래'(Jonah and the Whale)을 완성했다. 그는 현재 캐나다 알베르타주의 에드먼튼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이다.
캐다나 에드먼튼 교향악단 상임지휘인 알렉스 프라이어. 2018년 현재 25세이다.
○ 헨리 퍼셀(Henry Purcell). 퍼셀이라고 하면 작곡가 불모지인 영국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뛰어난 바로크 작곡가이다. 그래서 퍼셀 이후 2백년 동안 퍼셀을 능가하는 작곡가는 한 사람도 없었다라는 말을 들을 지경이었다. 퍼셀의 대표작인 오페라 '디도와 이니아스'(Dido and Aeneas)는 아직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그 퍼셀도 어린 시절에 신동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퍼셀은 9세 때부터 작곡을 시작했다. '국왕생일기념 찬가'였다. 혹자는 9세 때가 아니고 11세 때라고 주장했지만 아무튼 열살 남짓의 소년이 작곡한 노래가 왕궁에서 연주되었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다. 퍼셀의 아버지 역시 음악가였다. 아름답고 우렁찬 음성을 가진 성악가였다. 아버지 토마스는 챨스 2세의 대관식에서 축가를 부를 정도로 이름난 성악가였다. 퍼셀은 아마도 그런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퍼셀은 웨스트민스터 구역에 살았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소년합창단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17세 때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사보가(카피스트)로 임명되었다. 이후 많은 종교음악을 작곡했다. 주로 찬송가였다.
○ 요제프 라인버거(Josef Rheinberger). 유럽의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리히텐슈타인이라는 작은 공국이 있다. 인구는 2017년 현재 3만 7천여명이다. 유럽에서 네번째로 작은 나라이다. 하지만 엄연히 독립국가로서 유럽연합에도 가입하여 있다. 작은 나라이지만 훌륭한 인물이 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요제프 라인버거는 리하텐슈타인이 자랑하는 작곡가이며 오르가니스트였다. 1839년에 리히텐슈타인의 수도인 바두츠(Vaduz)에서 태어나서 1901년 뮌헨에서 세상을 떠났다. 라인버거은 어린 시절에 사람들이 말하는 음악신동이었다. 어려서부터 정말로 예외적인 음악적 재능을 보여주어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일곱살 때에 바두츠 교구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했다. 고작 일곱살이었다. 여덟살 때에는 첫 작품을 작곡했다. 10살 때에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위해 오스트리아 서쪽의 포아아를버그(Vorarlberg)에 갔다. 라인버거의 아버지는 음악과는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리히텐슈타인의 군주인 알로이스 2세의 재무담당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막을수가 없어서 라이번거가 12살 때에 뮌헨음악원에 가서 공부하도록 허락했다. 라인버거는 10대의 청소년이었지만 뮌헨음악원 졸업후 이 대학의 피아노/작곡 교수가 되었다. 그러다가 얼마후 뮌헨음악원이 사정에 의해 문을 닫게 되자 궁정극장의 직원이 되어 주로 악보를 사보하는 일을 했다. 그러면서 꾸준히 작곡을 하여 여러 작품을 남겼다. 라인버거는 브람스 스타일을 따랐으나 멘델스존, 슈만, 슈베르트로부터도 영향을 받았고 심지어는 바흐 스타일의 음악도 작곡했다. 라인버거는 우수하여서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고 영문학과 독문학도 마스터하였다.
○ 니노 로타(Nino Rota). 이탈리아의 니노 로타라고 하면 영화음악으로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작곡가이다. 1911년에 밀라노에서 태어나서 1979년에 로마에서 세상을 떠난 니노 로타는 생전에 약 150편 영화의 음악을 작곡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3부작 영화인 '대부'(The Godfather)의 음악이다. 니노 로타는 대부 파트 2의 음악으로 1974년에 아카데미 최우수 음악상을 받았다. 사람들은 니노 로타라고 하면 무조건 영화음악만을 생각하는데 실은 그보다는 클래식 음악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였고 지휘자였다. 니노 로타는 밀라노의 음악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음악적인 분위기에서 자라서인지 어린 나이에 음악성이 대단히 뛰어났다. 다섯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일곱살 때부터는 작곡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1세 때에 첫 작품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오라토리오 '세례요한의 어린시절'(L'infanzia di San Giovanni Battista)였다. 이 오라토리오는 1923년, 그가 12세 때에 밀라노와 파리에서 연주되어서 찬사를 받았다. 13세 때에는 안델센 동화에 바탕을 둔 3막의 서정적 코미디인 '돼지치기 왕자'(Il Principe Porcaro)를 작곡했다. 니노 로타는 전문적인 음악 공부를 위해 밀라노 음악원에 들어갔다. 일데브란도 피체티(Ildebrado Pizzetti)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이어 로마의 산타 체칠리아음악원에 들어가서는 알프레도 카셀라(Alfredo Casella)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19세에 산타 체칠리아를 졸업한 그는 토스카니니의 적극 권유로 미국으로 건너가서 필라델피아의 커티스음악원에서 프리츠 라이너로부터 지휘 지도를 받았다. 1932년에 밀라노로 돌아온 그는 밀라노대학교에 들어가서 1937년에 문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니노 로타는 훗날 이 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했었다.(1950-1978). 니노 로타는 수많은 협주곡, 오케스트라 작품, 피아노곡, 실내악, 합창곡 들을 작곡했다. 오페라로서 아직도 공연되고 있는 작품으로서는 1955년에 작곡한 '플로렌스의 밀짚모자'(Il cappello di paglia di Firenze), 그리고 2005년에 작곡한 '알라딘과 마법 등잔'(Aladino e la lampada magica)이 있다. '알라딘...'은 그 해에 비엔나 슈타츠오퍼에서 초연되었다. 니노 로타는 피아니스트 마그다 롱가리와 로맨스를 가져서 딸 하나를 두었다. 니나 로타(Nina Rota)이다.
12세 때인 1923년의 니노 로타.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 율리안 스크리아빈(Julian Scriabin). 율리안 스크리아빈이 누구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만, 이름이 스크리아빈이니까 혹시 러시아의 특이한 작곡가인 알렉산드르 스크리아빈과 무슨 관계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율리안 스크리아빈은 알렉산드르 스크리아빈의 아들이다. 사연은 이러하다. 알렉산드르 스크리아빈(1872-1915)는 베라 이사코비치와 결혼하여 네 자녀를 두었다. 3녀 1남이었다. 알렉산드르는 뜻한바 있어서 베라 이사코비치와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타티아나 슐뢰처라는 여인과 내로남불의 관계를 가졌다. 두 사람은 2녀 1남을 두었다. 타티아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율리안이었다. 알렉산드르 스크리아빈과 타티아나가 스위스의 로잔에서 지낼 때인 1908년에 태어났다. 나중에 율리안은 부모를 따라서 우크라이나의 키에프에서 지냈는데 11살의 어린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원인은 아직까지도 분명치 않아서 사람들은 미스테리라고 말했다. 아무튼 율리안은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 대여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잘 쳤고 작곡에도 관심을 보였다. 율리안은 1919년 세상을 떠나기 전에 네편의 전주곡을 작곡했다. 아버지 스크리아빈의 스타일이었다. 율리안 스크리아빈의 네 편의 전주곡은 그가 세상을 떠난지 95년 후인 2014년에 비로소 출판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음악학자들은 율리안의 작품을 보고 1920년대 러시아/소련의 아방 갸르드를 선도한 작품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율리안 스크리아빈. 1919년 키에프에서. 열한살이던 그 해에 세상을 떠났다.
○ 빌헬름 슈텐함머(Wilhelm Stenhammer). 거의 20년 동안 스웨덴의 요테보리교향악단의 음악감독 겸 수석지휘자였던 빌헬름 슈텐함머는 어릴 때에 음악의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1871년 스톡홀름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 스톡홀름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지만 더욱 본격적인 공부를 위해 베를린으로 갔다. 그는 독일 작곡가들에 의한 독일적인 음악을 매우 흠모하고 선망했다. 특히 바그너와 브루크너의 교향곡에 대하여 말할수 없이 열광하였다. 그래서 그가 첫번째 교향곡인 F 장조를 완성하고나서는 '브루크너의 목가적인 작품'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다가 마음으로부터 북구에 대한 감정이 솟아나서 점차 북구풍의 작곡으로 선회하였다. 그는 덴마크의 칼 닐센과 핀란드의 장 시벨리우스를 작곡의 지표로 삼았다. 특히 장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2번은 그에게 말할수 없는 영향을 준 것이었다. 그로부터 그는 독일적인 스타일을 결코 표방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1906년부터 1922년까지 요테보리교향악단을 위해 일했고 1909년에는 잠시동안이지만 우프살라대학교 음악과장으로 재직했었다. 그는 1927년 베스터요틀란드의 욘세레드(Josered)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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