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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음악 총점검

정준극 2017. 11. 21. 07:27

올림픽 음악 총점검


올림픽을 위한 음악으로서는 어떤 것들이 있나? 어떤 음악들이 올림픽을 위해 작곡되었으며 올림픽에서 가장 자주 연주되었나? 올림픽 찬가들은 어떤 배경으로 작곡되었는가? 이런 궁금증들을 2018년 2월 평창 동계 올림픽을 계기로 알아본다. 올림픽을 위한 클래식 음악으로서는 다음 열 곡을 꼽아 본다.


서울에서의 88올림픽 개회식


○ 역대 올림픽에서 하계와 동계를 막론하고 가장 널리 연주된 곡은 그리스의 스피로스 사마라스(Spiros Samaras 또는 Spyridon Samaras: 1861-1917)가 35세 때에 작곡한 합창환상곡인 '올림픽 찬가'(Olympic Hymn: 그리스어로 Olympiakós Ymnos)이다. 가사는 그리스의 시인 코스티스 팔라마스(Kostis Palamas)가 썼다. 작곡가 사마라스와 시인 팔라마스에게 올림픽 찬가를 제정하도록 의뢰한 사람은 초대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인 그리스의 데메트리우스 비켈라스였다. 사라마스의 '올림픽 찬가'는 1896년 아테네 하계 올림픽, 즉 첫번째 근대 올림픽의 개회식에서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사마라스의 '올림픽 찬가'는 그후 몇번의 수정작업을 거쳐서 오늘에 이르렀다. 1896년 하계 올림픽을 주최한 나라인 그리스에서 자국의 작곡가와 시인을 통해서 올림픽 찬가를 만들자 그후 다른 나라들도 자국의 작곡가와 시인을 내세워서 올림픽 찬가를 만들었다. 대표적인 예로서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에 나치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올림픽 찬가'를 제정해서 개회식에서 연주토록 한 것이다. 하지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올림픽 찬가'는 잊혀져 있고 지금까지의 여러 올림픽에서는 사마라스의 '올림픽 찬가'가 공식적인 올림픽 찬가로서 자주 연주되었다. 사마라스와 팔라마스의 '올림픽 찬사'는 처음 아테네에서 소개된 후 거의 60년만인 1958년에 국제올림픽위원회에 의해 올림픽의 공식 찬가로 선언되었다. 그래서 1960년도 미국의 스쿼 밸리 동계 올림픽 이후 매번 올림픽의 개회식에서, 특히 올림픽기가 게양될 때, 그리고 폐회식에서 올림픽기가 내려질 때에는 사라마스의 '올림픽 찬가'가 연주되는 것을 하나의 관례로 삼았다. 사마라스의 '올림픽 찬가'는 여러 소절로 되어 있고 가사도 여러 버전이 있지만 가장 많이 통용되는 영어가사의 첫 구절을 소개한다.


Olympian flame immortal(올림픽의 성화는 불멸이어라)

Whose beacon lights our way(그 횃불이 우리의 길을 비추도다)

Emblaze our hearts with the fires of hope(성화는 우리의 마음에 희망의 불이 타오르게 하도다)

On this momentious day(이 중요한 날에)


1896년의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당연히 그리스어로 노래를 불렀지만 영어권의 국가에서 올림픽을 개최할 때에는 거의 모두 영어 버전의 가사를 사용했다. 그리스어나 영어 이외의 언어로 노래를 부르게 될 때에는 그리스어 원본을 번역한 가사로 부르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예를 들어서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그리스어 오리지널을 우리 말로 번역한 가사로 '올림픽 찬가'를 불렀다. 그런데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중국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중국어 가사로 만들어서 부르지 않고 그리스어로 불렀다. 2016년 리우 데 자네이루 올림픽에서는 자국어인 포르투갈어 대신에 영어 가사로 불렀다.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서는 영어 버전의 가사를 사용했는데 캐나다가 영어와 불어를 모두 공용어로 사용하기 때문에 가사의 어떤 부분은 프랑스어로 번역한 가사를 사용한 일도 있었다. 2018년 2월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도 사마라스의 '올림픽 찬가'가 한국어 가사로 울려 퍼질 예정이다.


'올림픽 찬가'의 작곡자인 그리스의 스피리돈 사마라스


○ 미국의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 1932-)가 작곡한 '올림픽 팡파레와 주제'(Olympic Fanfare and Theme)도 올림픽에서, 특히 미국이 주최한 올림픽에서 자주 연주되는 곡이다. 존 윌리엄스는 영화음악으로 유명한 작곡가이다. 얼마나 유명한가 하면, 아카데미상 후보자로 50번이나 올랐었던 것을 보면 알수 있다. 월트 디즈니가 62회나 후보자로 올라갔고 그 다음이 존 윌리엄스였다. 그리하여 존 윌리엄스는 다섯번이나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았다. 뿐만이 아니다. 그레미상 23회, 영국아카데미영화상 7회, 골든 글로우브상 4회 등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그만큼 유명한 작곡가이다. 그가 음악을 맡은 대표적인 영화로서는 '스타 워스' 시리즈,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해리 포터' 시리즈, '나 홀로 집에' 시리즈, '수퍼맨' 시리즈, '지붕위의 바이올린', '죠스'. '쉰들러 리스트', '주라기 공원', '라이언 일병 구하기' 등등 헤아릴수 없을 정도이다. 로스안젤레스 올림픽조직위원회는 1984년도 하계올림픽을 위한 음악을 윌리엄스에게 부탁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그때까지 미국에서는 프랑스의 레오 아르노가 작곡한 '나팔수의 꿈'을 올림픽 음악의 대명사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특히 ABC 방송이 1968년도부터 올림픽 게임을 중계하면서 아르노의 '나팔수의 꿈'을 시그널 음악으로 사용하여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므로 윌리엄스로서는 아르노에게 도전할만한 음악을 만들어 내야 했다. 로스안젤레스 올림픽준비위원회는 윌리엄스가 작곡한 음악을 올림픽 개회식에서 팡파레로서, 그리고 메달 수여식에서도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윌리엄스는 금관악기에 의한 팡파레를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감동적인 음악을 만들어야 했다. 그리하여 1984년 봄에 '올림픽 팡파레와 주제'라는 작품이 완성되었다. LA 올림픽 개회식은 7월 28일이었다. 윌리엄스는 그 전에 이 곡을 발표해서 반응을 보고 싶었다. 6월 12일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가 처음으로 연주했다. 대단한 반응이었다. 이어 올림픽 개회식으로부터 하루 전날인 7월 27일에는 헐리우드 보울에서 '올림픽 전주곡'이라는 타이틀의 연주회를 통해 다시한번 소개되었다. 뜨거운 반응이었다. 그래서 다음날 로스안젤레스 콜리세움에서 열리는 23회 올림픽 개회식에서 마침내 역사적인 연주가 이루어졌다. 윌리엄스는 나중에 '이 작품은 협동의 정신, 영웅적인 위업 뿐만 아니라 올림픽을 가능케 한 모든 사람들의 봉사 정신을 표현코자 했다'고 말했다.


존 윌리엄스. 2018년으로 86세이지만 아직도 활동하고 있다.


○ 올림픽에서 자주 들을수 있었던 팡파레 스타일의 음악으로서 프랑스의 레오 아르노(Leo Arnnaud: 1904-1991)가 작곡한 '나팔수의 꿈'(Bugler's Dream)이 있다. 작곡은 프랑스 사람이 했는데 오히려 미국에서 많이 알려진 곡이다. ABC와 NBC가 올림픽 게임을 중계하면서 오랫동안 시그날 음악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아르노의 '나팔수의 꿈'은 마치 영웅의 개선처럼 당당한 작품이다. 팀파니의 우렁찬 소리로 오픈하며 이어 금관악기의 독특한 청아함이 뒤따른다. '나팔수의 꿈'의 음악적 주제는 프랑스의 작곡가이며 트럼펫 연주자인 조셉 데이빗 불(Joseph-David Buhl)의 Salut aux etendards에 바탕을 둔 작품이다. 나팔을 불어대는 나폴레옹 시대의 전형적인 기병대 진격 음악이다. '나팔수의 꿈'은 1958년에 완성된 작품이다. 지휘자인 펠릭스 슬라트킨(Felix Slatkin)이 부탁해서 작곡한 것이다. 미국의 ABC가 1964년 인스부르크 동계 올림픽을 중계하면서 '나팔수의 꿈'을 시그날 음악으로 사용하기 시작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NBC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중계권을 가지면서 '나팔수의 꿈'을 시그널 음악으로 사용키로 결정했다. 하지만 NBC는 실제로 1992년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부터 시그널 음악으로 사용했다. 1984년 로스안젤레스 올림픽에서는 존 윌리엄스의 '올림픽 팡파레와 주제'와 '나팔수의 꿈'을 메들리로 연주되었다. 실은 윌리엄스가 아르노의 '나팔수의 꿈'을 편곡해서 사용하였다. 미국에서는 대학교 졸업식 때에 아르노의 '나팔수의 꿈'을 연주하는 곳이 많다. 레오 아르노는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에서 활동했으며 주로 영화음악을 작곡했다. 아르노는 리옹과 파라에서 작곡과 피아노 공부를 했다. 모리스 라벨과 뱅생 댕디가 스승이었다. 미국에는 1931년에 이민을 갔다. 그리하여 1936년부터 1966년까지 30년을 할리우드에서 영화음악에 종사했다. 대표적인 영화음악으로는 '라이언의 딸'(Ryan's Daughter), '7인의 신부'(Seven Brides for Seven Brothers), '로우스 마리'(Rose Marie), '오즈의 마법사'(Wizard of Oz) 등이다.


레오 아르노. '나팔수의 꿈'의 작곡자이다.


○ 아론 코플란드(Aaron Copland: 1900-1990)의 '보통사람을 위한 팡파레'(Fanfare for the Common Man)도 올림픽에서 간혹 사용되는 음악이다. 특히 1984년 로스안젤레스 올림픽 때에 방송의 시그날 음악으로 많이 사용되어서 우리에게 친숙한 음악이다. 본 블로구에서는 음악을 재생해서 들을수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아서 어떤 음악인지 궁금할지 모르지만 듣고 나면 '아하, 이 음악이구나'라며 금방 알수 있는 음악이다. 코플란드는 이 작품을 올림픽을 위해 작곡한 것이 아니다. 1942년에 신시나티교향악단을 위해서 작곡한 것이다. 당시 신시나티교향악단의 지휘자인 유진 구슨스(Eugene Goossens)는 코플란드에게 '1차 대전 때 영국에서 보니까  연주회를 시작하기 전에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원하면서 팡파레를 연주하더이다. 우리 미국도 이제 곧 2차 대전에 참전할 것인데 영국처럼 연주회를 시작하기 전에 연주할 팡파레를 작곡해 주면 고맙겠소'라고 부탁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루즈벨트였고 부통령은 헨리 월레이스였다. 월레이스 부통령은 미국인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주기 위해 '보통 사람들의 시대'(Century of the Common Man)가 도래함을 선포하였다. 코플란드를 그로부터 영감을 얻어서 '보통 사람들을 위한 팡파레'를 작곡했다. 신시나티의 유진 구슨스는 처음에 팡파레를 '병사들을 위한 팡파레'(Fanfare for Soldiers)로 제안했지만 코플란드는 과감하게 '보통사람들을 위한 팡파레'로 제목을 붙였다. 신시나티교향악단은 '보통사람들을 위한 팡파레'를 미국시민들에게 세금을 잘 내야 전쟁에서 승리할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 연주키로 했다. 그래서 1943년 3월 12일 '소득세의 날'에 즈음애서 초연키로 했다. 코플란드는 '소득세 납부를 하는 모든 보통 사람들을 존경하는 일'이라면서 찬성했다. 그후 코플란드의 이 음악은 방송국에서 여러 프로그램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멕시코 올림픽 때에 CBS 스포츠 스펙터큘라 시간의 시그날 음악으로 사용하여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호주 등 다른 나라에서도 이 음악을 올림픽 음악으로 사용하였다. 한편, 1990년대에는 미국 정부가 해군과 해병을 모병하면서 이 음악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했다. 많은 지원자가 있었다. 1992년에는 빌 클링턴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연주되었고 이어 2009년 1월에는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연주되었다. 2014년 5월에는 맨하튼에 마련한 9.11 기념관의 개관식에서 연주되었다. 이밖에도 수많은 기념행사에서 연주되었지만 일일히 소개할 여유가 없어서 생략코자 한다.


아론 코플란드. '보통사람들을 위한 팡파레'를 작곡했다.


○ '올림픽 승리 행진곡'(Marcia trionfale olimpica: Olympic Triumphal March)는 이탈리아의 리카르도 바르텔레미(Riccardo Barthelemy: 1869-1937)가 올림픽을 위해 작곡한 작품이다. 바르텔레미는 나폴리에서 피아노와 작곡 공부를 했다. 그는 나중에 세계적인 테너가 된 엔리코 카루소가 나폴리에서 활동할 때에 피아니스트로서 함께 일했었다. 그러다가 1912년에 극적이 일이 일어났다.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과 함께 예술 경연대회도 열렸다. 예술 경연대회는 건축, 문학, 음악, 회화, 조각의 다섯 분야에서 가장 우수한 작품을 낸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경연대회이다. 바르텔레미는 음악부문에서 '올림픽 승리 행진곡'을 제출하여서 금메달을 받았다. 은메달과 동메달은 없는 금메달이었다. 바르텔레미는 1912년도 스톡홀름 예술 경연대회에서 음악부문 금메달을 받았지만 문학부문에서는 프랑스의 쿠베르탕 남작이 금메달을 받았다. '스포츠 송가'(Ode to Sport)라는 작품으로였다. 잘 아는대로 쿠베르탕은 올림픽을 처음 조직한 프랑스의 피에르 드 쿠베르탕(1863-1937) 그 사람이다. 이름을 가장해서 문학 부문에 출전했던 것이다.


리카르도 바르텔레미.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 즈음해서 열린 예술 경연대회에서 음악부문 금메달을 땄다.


○ 요제프 수크(Josef Suk: 1874-2011)는 체코(보헤미아)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이다. 1920년에 '새로운 삶 속으로'(Into a New Life)라는 작품을 썼다. 이것을 1932년 LA 올림픽 예술경연대회에 출품하여 음악부문 은메달을 받았다. 요제프 수크는 체코의 위대한 작곡가인 안토닌 드보르작과 관계가 깊다. 드보르작은 요제프 수크의 스승이어서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요제프 수크는 드보르작의 딸인 오틸리(Otilie)와 결혼하였다. 요제프 수크와 오틸리의 결혼생활을 더 할수 없이 행복한 것이었으나 말년은 비참함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1905년에 스승이며 장인인 드보르작이 세상을 떠났고 몇 달 후에는 사랑하는 아내 오틸리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비통함을 작곡에 대한 열정으로 극복하였다. 수크는 주로 기악곡을 작곡했다. 하지만 간혹 다른 장르의 작품도 작곡했다. 오케스트라 작품들은 그의 재능을 십분 보여주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서 1892년에 완성한 '현을 위한 세레나데'(Op 6)는 뛰어난 오케스트라 곡이다. 체코4중주단의 연주는 성공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쩐 일인지 당시에 체코음악계의 일각에서는  반드보르작 운동이 있었다. 드보르작의 영향을 받은 수크의 작품도 함께 거부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드보르작이나 수크의 작품을 연주하는 체코4중주단도 비난을 받았다. 특히 좌익의 평론가인 츠데네크 네예들리는 체코4중주단이 공산주의 사상에 어긋나는 연주를 한다고 하면서 맹비난을 퍼부첬다. 수크는 1932년에 올림픽을 위한 작품을 발표한 후 이듬해인 1933년에 모든 공식활동에서 은퇴하였다. 그리고 1935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베네소프(Benesov)라는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josef suk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요제프 수크


○  후기 낭만주의와 초기 현대주의 작곡가인 독일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도 '올림픽 찬가'(Olympische Hymne)를 작곡했다. 우리나라의 손기정이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위해서 작곡한 찬가이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은 나치 히틀러가 주관한 것이다. 주관국인 독일의 영광과 능력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한 올림픽이었다. 독일올림픽위원회는 나치가 정권을 잡기 이전부터 베를린 올림픽을 준비해왔다. 독일올림픽위원회의 대표로서 베를린 올림픽 준비를 책임맡은 테오도르 레발트 박사는 1932년에 슈트라우스에게 올림픽 찬가를 작곡해 달라고 요청했다. 슈트라우스는 즉각적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회가 혼란하여서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중에 해가 바뀌어 1933년에 히틀러와 나치가 독일의 정권을 잡았다. 슈트라우스는 나치당에 가입하지 않았고 남들이 다 하는 나치식 경례도 회피하였다. 슈트라우스는 나치의 반유태 정책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슈트라우스에게는 아들이 하나밖에 없었다. 아들 프란츠는 유태인인 알리스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리하르트와 크리스티안의 두 자녀를 두었다. 유태인의 관습에 의하면 어머니가 유태인이면 자녀들도 유태인이었다. 슈트라우스는 며느리와 손자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슈트라우스는 히틀러가 음악 애호가로서 바그너의 열성팬이었고 또한 자기에 대히여도 호감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1907년에 오페라 '살로메'를 공연했을 때에 히틀러가 보고 찬사를 보냈으며 그로부터 히틀러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크게 존경했기 때문이었다. 나치의 선전장관인 괴벨스는 슈트라우스에게 제국음악협회(Reichsmusikkammer)의 회장을 맡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슈트라우스는 그 직분을 맡을 것 같으면 미약하나마 정치적인 혼란 때문에 침체되어 있는 독일 예술, 특히 독일 음악을 발전시킬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직분을 맡고 있으면 아무래도 며느리와 손자들을 보호하는데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33년에 제국음악협회장을 수락했다. 그리고 기왕에 베를린 올림픽을 위한 찬가의 작곡도 수락했다.


그런데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미국의 월터 브래들리 킬러(Walter Bradley-Keeler)가 1932년 로스안젤레스 올림픽을 위해 작곡한 '올림픽 찬가'(Hymne Olympique)를 앞으로의 모든 올림픽에서 공식찬가로 사용토록 결정하고 1936년의 베를린 올림픽에서도 브래들리 킬러의 '올림픽 찬가'를 사용하도록 통보했다. 그런데 앞서도 얘기했듯이 독일올림픽위원회는 슈트라우스에게 별도로 '올림픽 찬사'를 작곡해 달라고 부탁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는 독일의 그같은 사정을 듣고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다른 작곡가의 찬가를 사용하겠다는 독일측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렇게해서 독일음악협회장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하는 '올림픽 친가'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사용하게 되었다. 대본은 당시 독일의 시인이었던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이 쓰기로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가도 만들어 내지를 못했다. 독일올림픽위원회는 어쩔수 없이 공개경쟁을 통해서 작사자를 결정키로 했다.  독일시인아카데미 회장인 빌헬름 폰 숄츠(Wilhelm von Scholz)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폰 숄츠의 가사는 전설속의 지그프리트의 전투에 초점을 둔 송가(Ode)여서 아무래도 너무 국수주의적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두번째 공개경쟁을 실시했다. 3천개 이상의 가사가 출품되었다. 심사위원회는 그 중에서 네 편을 선정해서 슈트라우스에게 보내어 최종 결정토록 했다. 슈트라우스는 로베르트 루반(Robert Lubahn: 1903-1974)의 가사를 최종 선정했다. 당시에 루반은 실직 중인 베를린의 배우였다. 루반은 정부로부터 1934년에 1천 라이히스마르크의 상금을 받았다. 가사는 3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매 소절의 마지막 단어는 Olympia(올림피아_로 끝나도록 되어 있었다. 1절의 가사만 소개한다.


Völker! Seid des Volkes Gäste, kommt durch's offne Tor herein!

Friede sei dem Völkerfester! Ehre soll der Kampfspruch sein.

Junge Kraft will Mut geweisen, heisses Spiel Olympia!

deinen Glanz in Taten preisen, reines Ziel: Olympia.


굳이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이여, 우리의 손님이신 모든 이들이 열린 문으로 들어오고 있도다.

축제에 평화가 있으라! 경기에 임하는 모든 이에게 영광이 있으라.

젊음은 뜨거운 용기를 원하도다. 올림픽 게임을!

그대들의 영광이 찬양받을지라, 순수한 목적으로 모인 올림픽.


슈트라우스는 '올림픽 찬가'를 1934년 12월 22일에 완성했다. '올림픽 찬가'의 중심되는 주제는 슈트라우스가 교향곡의 주제로 삼으려고 미리 만들어 놓은 것을 사용했다. 교향곡은 완성되지 못하였다. 슈트라우스는 '올림픽 찬가'를 완성했지만 별로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시하는 듯한 태도였다. 슈트라우스가 동료 대본가인 슈테판 츠봐이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알수 있다. '크리스마스 시즌의 무료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올림픽 찬가를 작곡했어요. 이 음악은 보통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요. 나를 포함해서 스포츠를 경멸하고 싫어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작곡했습니다'. 슈트라우스는 '올림픽 작곡'의 사례로 정부에게 1만 라이히스마르크를 요청하였지만 독일올림픽위원장과의 타협에 의해서 받지 않기로 했다. 제3제국을 위한 봉사인데 돈을 받으면 되겠느냐는 취지였다. 독일은 1936년의 동계올림픽도 주관하였다. 1936년 1월부터 바바리아의 가르미슈 파르텐키르헨에서 개최되었다. 가르미슈 파르텐키르헨은 슈트라우스가 사는 곳이었다. 슈트라우스는 국제올림픽위원회 집행부 사람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올림픽 찬가'를 처음으로 들려주었다. 노래는 뮌헨에서 초청한 오페라 테너가 불렀다. 좋은 반응을 받았다. 다음달인 1936년 2월에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슈트라우스의 작품을 '올림픽 찬가'로 공식 지정했다. 그러므로 1933년에 올림픽위원회가 미국의 브래들리 킬러의 '올림픽 찬가'를 올림픽의 공식찬가로 지정했던 것은 없던 일이 되었다. 1936년 8월 1일 베를린 올림픽의 개회식이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거행되었다.  독일올림픽위원회를 대표해서 테오도르 레발트가 49개국에서 참가한 4천명 선수단 앞에서 환영사를 했다. 연설의 마지막 구절은 국제올림픽위원회가 베를린 올림픽 개회식 바로 전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올림픽 찬가'를 올림픽 공식찬가로 결정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이어 모든 선수단과 주최측을 대신해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전했다.  그후 슈트라우스의 '올림픽 찬가'가 마침내 공식적으로 초연되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올림픽을 위해 조성된 나치교향악단, 그리고 흰색 옷을 입은 1천명 합창단이 슈트라우스의 지휘로 '올림픽 찬가'를 불렀다. 연주시간은 약 3분 반이었다. 나중에 슈트라우스는 친필 악보를 테오도르 레발트에게 헌정했다. 오늘날 리라르트 슈트라우스의 '올림픽 찬가'는 그 곡이 나치의 선전을 위한 곡이라는 이유로 거의 연주되지 않고 있다. 다만,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콘서트에서 연주되지만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대규모로 동원하기가 어려워서라도 연주되지 않고 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 율리우스 푸치크(Julius Fucik: 1872-1916)가 1897년에 작곡한 '검투사의 입장'(Vjezd gladiatoru: Einzug der Gladiatoren: Entry of the Gladiators)이 올림픽 음악으로서 자주 사용되고 있다. 공식적인 올림픽 개회식이나 폐회식 또는 메달 수여식에서 연주되지는 않지만 라디오와 TV에서 올림픽을 중계할 때에 시그널 음악으로서 많이 사용되고 있다. 검투사들이 경기장에 입장하는 것이 마치 올림픽 선수들이 경기장에 입장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는 생각에서 올림픽 관련 음악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푸치크는 원래 이 곡의 제목을 '반음계의 대행진곡'(Grande Marche Chromatique)라고 붙였었다. 전편에 걸쳐서 반음계 스케일을 자주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개인적으로 로마제국에 대하여 깊은 관심이 있기 때문에 '검투사의 입장'이라고 변경했다. 1901년에 미국의 출판가인 칼 피셔가 이 곡을 편곡하여 '천둥과 번개'(Thunder and Blazes)라는 타이틀로 출판했다. 편곡은 캐나다의 루이 필립 로렌도(Louis-Philippe Laurendeau)라는 사람이 했다. 그로부터 이 곡은 여러 분야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특히 서커스에서 주로 광대들이 뛰어나오는 장면에서 연주되었다. 그래서 이곡을 서커스에서는 '비명 행진곡'(Screamer March)라고 불렀다. 소개받은 광대들이 뛰쳐나오면서 비명 및 괴성을 지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새 방송국의 올림픽 방송 시그널 음악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미안하지만 '검투사의 입장'은 '올림픽 찬가'의 대열에 참여하지 못한다. 하지만 검투사가 없는 요즘에는 올림픽 선수들의 입장으로 더 제격인지 모른다.


율리우스 푸치크


○ 필립 글라스(Philip Glass: 1937-)의 '올림피안'(The Olympian)은 '성화 점화와 폐회'(Lighting of the Toroch and Closing)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작품이다.  20세기를 선도한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인 필립 글라스는 1984년 로스안젤레스 올림픽을 위해 '올림피안'을 작곡했다. 처음에는 피아노곡으로 만들었으나 나중에 오케스트라로 편곡된 작품이 나왔다. 연주시간은 약 5분이다. 글라스라고 하면 미니멀리즘 작곡가로서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의 '올림피안'은 고전적은 스타일에 바탕을 둔 것이다. 글라스의 '올림피안'은 개회식에서 성화봉송자가 성화를 점화하는 프로그램에서 연주되었다. 로스안젤레스 올림픽준비위원회는 개회식을 위해 세 작품을 의뢰하였다. 하나는 존 윌리엄스의 '로스안젤레스 올림픽 주제'라는 곡이다. 지금까지의 올림픽 개회식 음악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은 것이다. 두번째가 필립 글라스의 '올림피안'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존 윌리엄스의 작품과 필립 글라스의 작품은 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귀중한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다.


필립 글라스


○ 월터 브래들리 킬러(Walter Bradley-Keeler: 1856-1942)의 '올림픽 찬가'(Hymne Olympique)는 원래 1932년 LA 올림픽을 위해 작곡된 것이다. 연주시간 약 3분의 짧은 곡이다. 국제올림픽위원회는 브래들리 킬러의 '올림픽 찬가'를 LA 올림픽 이후의 모든 올림픽에서 공식찬가로 사용키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1936년 베를린 올림픽도 브래들리 킬러의 '올림픽 찬가'를 사용토록 했다. 하지만 독일올림픽위원회가 자국의 작곡가에 의한 별도의 올림픽 찬가를 사용하겠다고 주장하여 그렇게 하도록 양해가 되었다. 독일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위해 이미 1932년에 거장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올림픽 찬가의 작곡을 의뢰했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1934년에 올림픽 찬가를 완성했고 계획대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개회식에서 연주되었다.

   

[대표적인 올림픽 찬가들을 정리해본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올림픽에도 올림픽 찬가가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델피의 아테네 보물보관실에서 발견한 '아폴로 찬가'(Hymne an Apollo)가 바로 올림픽 경기때에 불렀던 것이라는 얘기다. 그것을 나중에 가브리엘 포레가 음악을 붙이고 테오도레 라이나흐가 가사를 붙여서 '올림픽 찬가'로 새로 만들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근대 올림픽이 처음 열린 것은 1896년 아테네에서였다. 오늘날에 비하면 규모가 대단히 작은 올림픽이었다. 이를 위해서 그리스의 작곡가인 스피로스 사라마스가 음악을 만들고 역시 그리스의 시인인 코스티스 팔라마스가 가사를 붙인 '올림픽 찬가'가 등장하였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사라마스가 작곡한 '올림픽 찬가'를 앞으로도 올림픽이 열릴 때마나 사용키로 결정했다. 올림픽의 발상지가 그리스이며 근대 올림픽이 처음 열린 곳도 그리스이고 또한 올림픽 찬가를 그리스 작곡가가 작곡했기 때문에 이런 저런 공로를 생각하여서 사마라스의 '올림픽 찬가'를 올림픽 공식찬가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러는데 올림픽에서 예술 올림픽도 겸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1912년 스톨홀름 올림픽에서부터 예술 올림픽을 개최키로 했다. 예술올림픽은 건축, 문학, 음악, 회화, 조소의 다섯 분야로 나누어서 가장 우수한 세 작품에 대하여 금, 은, 동 메달을 주기로 했다. 결과, 음악분야에서는 이탈리아의 리카르도 바르텔레미가 '올림픽 승리 행진곡'(Olympic Triumphal March)으로 금메달을 차지했고 이 음악은 스톡홀름 올림픽에서 연주되었다. 이어 1932년의 로스안젤레스 예술올림픽에서는 체코의 요제프 수크가 '올림픽 찬가'로서 금메달 수상자가 없은 은메달을 받았다. 예술올림픽과는 관계없이 만들어진 '올림픽 찬가'들도 있다.1948년 런던 올림픽을 위해 로저 퀼터(Roger Quilter: 1877-1953)가 작곡하고 러디야드 키플링(Rudyard Kipling)이 작사한 '올림픽 찬가'는 그 중의 하나이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을 위해서는 자코 린자마(Jaako Linjama: 1909-1983)가 작곡하고 토이비 리(Toivi Lyy)가 작사한 '올림픽 찬가'가 만들어졌다. 또한 독일의 엘리자베트 레키 슐뤼셀(Elizabeth Leckie Schlüssel)이 작곡한 '올림픽 찬가'도 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개회식. 서방 국가들 거의 모두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하여 보이콧했다.


1933년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사라마스의 '올림픽 찬가'를 연주토록 권고했지만 독일올림픽위원회는 독일 작곡가에 의한 찬가를 별도로 마련하겠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올림픽 찬가'가 연주되어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위해서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축제 서곡'(Festliche Ouvertüre)를 작곡했다. 1981년에는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 회의를 위해 미국의 레너드 번슈타인이 '올림픽 찬가'를 작곡했다. 1981년에는 그리스의 전자음악 작곡가인 에반젤로스 반젤리스가 영국에서 제작한 '불타는 병거'(Chariots of Fire)의 음악을 앨범으로 작곡했다. 이 음악은 2012년 런던 올림픽 때 사이먼 라틀의 지휘로 연주되었다.1984년 로스안젤레스 올림픽을 위해서는 미국의 존 윌리엄스가 '올림픽 팡파레와 주제'라는 음악을 작곡해서 오프닝에서 사용되었다. 로스안젤레스 올림픽을 위해서는 필립 글라스가 '올림피안'이라는 곡을 작곡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위해서는 그리스의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제우스 송가'(Ode to Zeus)를 작곡했다.


1984년 로스안젤레스 올림픽. 이번에는 소련을 비롯한 15개 동구 올공산권 국가들이 4년전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한데 대하여 앙심을 품고 보이콧했다.


[올림픽 타임라인 속성 검토]

첫 올림픽이라고 말할수 있는 이벤트는 일찍이 기원전 776년에 아테네의 올림피아에서 있었다. 올림픽이라는 명칭은 첫 체육 경기가 열린 올림피아로부터 연유한다. 그런데 종목은 단 한가지, 200미터 단거리뿐이었다. 그후 기원전 490년에 그리스의 페이디페데스라는 청년이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스가 승리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스파르타에서 아테네까지 42km의 거리를 달려온 거룩한 사건이 있었다. 그후로 이 때의 사건을 기념하고 아울러서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체육대회의 정신을 이어받은 경기가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몇 몇 곳에서 열렸으마 세월의 흐름과 함께 흐지브지해 졌다. 그러다가 1894년에 프랑스의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이 뜻한바 있어서 몇몇 인사들과 함께 올림픽위원회를 구성하였으니 이것이 오늘날 올림픽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국제올림픽위원회, 즉 IOC의 모체였다. 파리에서 모인 국제올림픽위원회는 2년 후인 1896년에 올림픽의 발상지인 아테네에서 첫 대회를 개최하며 앞으로 매 4년마다 장소를 바꾸어 개최키로 결정했다. 아테네 올림픅은 물론 대단히 의미 깊은 올림픽이었지만  유럽 일부국가만이 참석하였고 다른 나라들은 교통편 등의 어려움으로 알기는 알았지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제2회 올림픽은 파리에서 열렸다. 여성도 경기에 출전할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한 올림픽이었다. 4년 후인 1904년에는 미국의 세인트 루이스에서 개최되었다. 이 때부터 금은동 메달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그전에는 그저 우승자 한명에게 월계관을 씌어 주거나 메달이 있으면 하나 주는 식의 간편한 시상제도였다. 1908년 런던 올림픽은 최초로 올림픽 전용 경기장에서 거행된 올림픽이었다. 또한 피겨 스케이팅을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키로 결정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동계 올림픽은 사정상 열리지 못했다.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은 구미의 5개국만이 참석하는 조촐한 것이었다. 가장 최근의 올림픽인 2016년 리우 데 자네이루 올림픽에는 국내 올림픽위원회가 설치되어 있는 205개 국가로부터 1만 1천여명이 참가한 것과 비교해보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914년,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난 해에 쿠베르탱 남작은 올림픽을 상징하는 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오늘날의 오륜기를 만들었다. 1916년의 올림픽은 1차 대전으로 취소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20년, 올림픽은 재개되어 벨기에의 앤트워프에서 열렸다. 처음으로 오륜기가 사용되었다. 또한 비둘기를 평화의 상징이라고 해서 개회식 때에 수많은 비둘기를 하늘 높이 날려보내는 프로그램이 처음으로 포함되었다. 그런데 1920년의 올림픽에는 1차 대전의 패전국인 독일,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헝가리, 터키는 참석하지 못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가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1924년에는 파리에서 다시 개최되었다. 파리에서는 1900년에 처음 올림픽을 주관하였으므로 1924년의 올림픽 개최는 24년만의 일이다. 1924년에는 제1회 동계 올림픽도 개최되었다. 프랑스의 샤모니에서였다. 1928년의 올림픽은 네덜란드의 암스텔담에서 개최되었다. 그리스로부터의 성화봉송과 메인 스터디움에서의 성화점화를 처음으로 실시한 올림픽이었다. 동계 올림픽은 스위스의 생모리츠에서 열렸다. 1930년 우르과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올림픽에서 축구를 경기종목으로 채택해 달라는 상당수 회원국들의 요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은 육상위주라고 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만족하지 않은 국가들이 모여서 FIFA 월드컵을 열기로 합의했다. 그리하여 그해에 제1회 월드컵이 개최되었다.  


1932년 올림픽은 미국 로스안젤레스에서 열렸다. 여러가지 사정상 시상식에서 국기게양을 하지 않은 올림픽이었다. 1932년에는 동계 올림픽이 미국 뉴욕주의 레이크 플라시드에서 열렸다. 1936년의 올림픽은 나치 치하의 베를린에서 열렸다. 우리나라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1등을 차지한 올림픽이었다. 1936년에는 독일 바바리아 지방의 가르미슈 파르텐키르헨에서 동계 올림픽이 열렸다. 가르미슈 파르텐키르헨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살고 있는 마을이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농구가 처음으로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물론 미국이 금메달을 가져갔다. 1940년과 1944년의 올림픽은 세계 2차대전으로 열릴수가 없었다. 전후 다시 열린 올림픽은 1948년 런던에서였다. 그러나 전후의 영국도 경제상황이 어려워서 런던 올림픽은 역사상 가장 긴축재정으로 치루어진 올림픽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1948년의 동계 올림픽은 스위스의 생모리츠에서 다시 열렸다. 그런데 독일과 일본은 2차 대전을 일으켰던 국가여서 초청되지 않았다. 1948년에는 또한 장애인 올림픽이 처음 열린 해였다. 영국 런던에 있는 스토크 만드빌(Stoke Mandeville) 병원에서 요양중이던 장애인들이 주축이 되어 마련한 올림픽이었다.주로 2차 대전의 부상병사들이었다. 그래서 제1회 장애인 올림픽을 스토크 만드빌 올림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북한 공산당에 의한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는 핀랜드의 헬싱키에서 하계 올림픽이 열렸고 동계 올림픽은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열렸다. 오슬로 동계 올림픽에는 독일과 일본도 초청되었다. 1956년에는 호주의 멜본에서 하계 올림픽이 열렸다. 그런데 이락, 레바논, 이집트가 멜본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수에즈 운하의 관할권을 차지하기 위해 이집트를 공격했기 때문에 그에 항의하기 위해 불참을 선언했다. 또한 네덜란드, 스페인, 스위스는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항의하여 멜본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이에 덩달아서 중국도 국제올림픽위원회가 대만을 하나의 주권 국가로 인정하여 올림픽에 초청한 것에 항의하여 보이콧했다. 1960년 하계 올림픽은 로마에서 열렸고 동계 올림픽은 미국의 스쿼 밸리(Squaw Valley)에서 열렸다. 올림픽을 하계이건 동계이건 도시가 아니라 유원지에서 개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스쿼 밸리는 도시나 마을이 아니라 겨울 스포츠 유원지였다. 1960년에는 본격적인 장애인 올림픽이 역시 로마에서 열렸다. 명칭은 Paralympics 라고 부르기로 했다.


1964년도 하계 올림픽은 토교에서 열렸다.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올림픽을 주관한 경우였다. 1964년도 동계 올림픽은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에서 열렸다. 날짜는 다가오는데 눈이 오지 않아서 걱정했다. 궁여지책으로 군인들을 동원해서 스위스로부터 눈을 가져와서 스키장 등등에 뿌려서 겨우 치룰수 있었다. 1968년의 하계 올림픽은 멕시코 시티에서 열렸다. 중남미로서는 처음 개최하는 올림픽이었다. 미국 선수 중에서 두명의 흑인 선수가 미국에서의 인종차별에 항의하여 이른바 '블랙 파워'(Black Power) 경례를 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올림픽이었다.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하거나 거수 경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으로 높이 치드는 경례를 말한다. 1968년도 동계 올림픽은 프랑스의 그레노블에서 열렸다. 그런데 조직위가 광고성이 있는 특정 장비의 사용을 승인하지 않자 선수들을 그렇다면 주최측이 장비를 제공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며 그렇지 않으면 집으로 가겠다고 나서서 혼란을 빚었던 대회였다. 1972년에는 독일 뮌헨에서 하계 올림픽이 열렸다. 베를린 올림픽 이후 36년만의 일이었다. 그런데 '검은 9월'이라는 테러단체가 선수촌에서 이스라엘 팀원 11명을 사살하는 침극이 벌어졌다. 이후로 올림픽의 경계가 더욱 강화되었다. 1976년의 하계 올림픽은 캐나다 몬트리얼에서 열렸다. 그런데 뉴질랜드 럭비팀이 인종차별국인 남아공과 시합을 가진 것을 항의하여서 무려 31개국이 몬트리얼 올림픽에의 참가를 거부하였다. 캐나다 당국은 올림픽 준비를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으나 참가 선수단 및 일반 관광객이 크게 감소하여서 조직위원회가 파산을 본 올림픽이었다. 1976년 동계 올림픽은 원래 미국의 덴버로 결정되었으나 덴버가 예산부족 등으로 난감하여서 취소하자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에서 다시 개최되있다.


1980년 하계 올림픽은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그러나 서방의 61개 국가들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하여 참가를 보이콧했다. 소련과 동구 공산권 국가들만이 참석한 반쪽자리 올림픽이었다. 동계 올림픽은 미국의 레이크 플라시드에서 다시 열렸다. 1984년 하계 올림픽은 로스안젤레스에서 다시 열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소련을 비롯한 동구 공산권의 15개 국가가 로스안젤레스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4년전 모스크바 올림픽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이 불참한데 대한 일종의 보복이었다. 다만, 동구 공산권 국가 중에서 루마니아만이 참석했는데 결과 루마니아는 종합 2위를 차지하였다. 1986년의 IOC 회의는 지금까지 올림픽에는 아마추어만이 출전할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프로도 참석할수 있도록 규정을 개정하였다. 이에 따라 프로들은 속으로 좋아서 죽을 지경이었다. 1988년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88올림픽'이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TV 중계권을 판매하여서 소요예산의 상당부분을 충당한 올림픽이었다. 또한 메달 수상자 11명이 약물복용 등으로 부적격하다는 판정을 받아서 메달이 취소된 올림픽이었다. 동계 올림픽은 캐나다의 칼가리에서 열렸다. 1992년 하계 올림픽이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열렸다. 소련이 붕괴한 후여서 러시아는 구소련에 소속되어 있던 국가들을 통합하여 단일팀으로 출전했다. 또한 독일도 통독되어서 단일팀으로 나왔다. 1992년도 동계 올림픽은 프랑스의 알베르비유에서 열렸다. 올림픽 역사에서 가장 작은 마을에서 개최된 경우였다. 인구가 1만 8천명 남짓이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는 동계 올림픽을 하계 올림픽과 같은 해에 가지면 번잡하므로 다음번만은 2년 후에 갖기로 하고 그후에는 매4년마다 열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1994년에 동계 올림피이 노르웨이의 릴리함머에서 열렸다.


1996년 하계 올림픽은 미국의 아틀란타에서 열렸다. TV중계권을 사상 가장 비싼 값에 판매한 올림픽이었다. 일반 기업체의 후원도 사상최고였다. 특히 코카 콜라가 가장 많은 후원금을 냈다. 1998년 동계 올림픽은 일본 나가노에서 열렸다. 여자 아이스하기가 올림픽 종목으로 처음 채택되었다. 2000년의 하계 올림픽은 시드니에서 열렸고 2002년의 동계 올림픽은 미국의 솔트 레이크 시티에서 열렸다. 솔트 레이크 시티 올림픽은 IOC 위원들 중 일부에 대한 뇌물 파동이 있어서 난리였지만 대회는 솔트 레이크 시티가 예정대로 개최권을 유지하였다. 2004년 하계 올림픽은 아테네에서 열렸다. IOC 창립 2백주년을 기념하는 올림픽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9. 11 테러의 여파로 올림픽 역사상 가장 경비가 강화된 올림픽이었다. 때문에 준비가 지연되는 등 문제가 많았다. 예를 들어서 메인 스터디움의 공사는 개회식 하루 전날 겨우 마칠수 있었다. 아무튼 그래도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2006년 동계 올림픽은 이탈리아의 토리노(튜린)에서 개최되었다. 그리고 2008년 하계 올림픽은 베이징에서 8월 8일 저녁 8시 8분에 개회식이 선포되었다. 중국 사람들은 숫자 8의 발음이 발전한다는 의미의 發과 같은 빠이기 때문에 8을 대단히 좋아한다. 그래서 그런 시간대를 정한 것이다.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세계 신기록 43개, 올림픽 신기록 132개 나온 신기록 파티장이었다. 미국의 수영선수인 마이클 펠프스는 베이징에서만 8개의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2010년의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은 실내에서 개회식이 거행된 최초의 올림픽이었다. 2012년 하계 올림픽은 런던에서 열렸고 2014년 동계 올림픽은 러시아의 소치에서 열렸다. 그리고 2016년 하계 올림픽은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열렸다. 그리고 2018년 동계 올림픽은 우리나라 평창에서 2018년 2월 9일부터 2월 25일까지 열린다. 2020년도 하계 올림픽은 토쿄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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