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예언자 마이에르베르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대부

정준극 2017. 11. 23. 23:07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대부

19세기의 파리를 오페라의 수도로 만든 주역


마이에르베르의 오페라 '위그노'의 무대. 스트라스부르


자코모 마이에르베르(Giacomo Meyerbeer)라는 이름은 어쩐 일인지 아직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은 이름이다. 다만, 오페라 애호가들이라면 '위그노' 또는 '아프리카의 여인'을 작곡한 프랑스의 작곡가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마이에르베르는 19세기 프랑스의 파리를 오페라의 수도로 만든 주역이다. 마이에르베르는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대부이다. 마이에르베르는 1831년에 '악마 로베르'(Robert le diable), 그리고 그 이후에 내놓은 오페라들을 통해서 프랑스의 그랜드 오페라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한다고 분명하게 보여준 인물이다. 마이에르베르의 그랜드 오페라는 어떤 특성이 있는가? 관현악에 있어서는 독일 스타일을 인용하였고 노래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이탈리아 스타일을 바탕으로 삼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여기에 센세이셔널하고 멜로드라마적인 가사가 붙었다. 그러니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가 사랑을 받지 않을수 없었다. 한가지 특성이 더 있다. 무대의 기계장치이다. 당시로서는 최신식 기술을 이용해서 무대장치를 해 놓았다. 파리 오페라 극장의 무대 장치는 당시에 가히 최첨단이었다. 이런 여러 요인들이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를 하나의 뚜렷한 오페라 장르로서 서 있게 만들었고 그 중심에 마이에르베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마이에르베르인데 우리에게 그 이름이 생소한 것은 아마도 우리가 베르디, 푸치니, 도니체티, 로시니 등등의 오페라에만 너무 친밀하게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제 마이에르베르의 모든 것을 추적해 보자.


'악마 로베르'. 2012년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 무대


마이에르베르(Meyerbeer)라는 이름은 독일 이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독일인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앞 이름인 자코모(Giacomo)는 누가 보더라도 이탈리아 이름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가 독일계이지만 이탈리아 출신이라고 말한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의 오페라틀이 거의 모두 프랑스어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Robert le diable, Les Huguenots, Le prophète...) 독일계와 이탈리아계가 혼합된 프랑스 사람이라고 말한다. 대답은 간단하다. 마이에르베르는 독일에서 태어났고 이탈리아에서 공부했으며 프랑스에서 활동했다. 마이에르베르는 베를린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베르디나 푸치니나 바그너처럼 부유하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멘델스존처럼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고 보면 마이에르베르와 멘델스존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것 이외에도 중요한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마이에르베르는 처음에 피아니스트가 되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오페라 작곡가가 되겠다고 방향을 바꾸었다. 그래서 오페라의 본고장이라고 하는 이탈리아에 가서 몇년이나 공부도 하고 작곡도 했다. 오페라 작곡가로서 마이에르베르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1824년, 그가 33세 때에 완성한 '이집트의 십자군'(Il crociato in Egitto)으로부터였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이름을 국제적으로 높여준 작품은 1831년의 '악마 로베르'(Robert le diable)이었다. 그로부터 마이에르베르는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각광을 받았다.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베를리오즈의 말을 빌려보면 마이에르베르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짐작할수 있다. 베를리오즈는 '그는 재능을 가지는 행운이 있을 뿐만 아니라 행운을 가지는 재능이 있다'고 말했다. 마이에르베르는 20여편의 오페라를 작곡했지만 그를 정상으로 올려준 작품은 '위그노'(1836), '예언자'(1849), 그리고 사후에 초연된 '아프리카 여인'이다. 마이에르베르의 오페라들은 19세기에 세계의 유명 극장에서 끊임없이 무대에 올려지는 것이었다. 그라나 20세기 이후에는 그랜드 오페라에 대한 부담감으로 별로 무대에 올려지지 못했다.


마이에르베르의 또 하나 그랜드 오페라인 '예언자'의 무대 스케치


마이에르베르는 주로 파리에서 활동했지만 동시에 베를린에서도 명망있는 활동을 했다. 1832년부터 프러시아 궁정음악감독이었으며 1843년부터는 프러시아의 국가음악총감독이었다. 프러시아의 음악총감독은 베를린의 오페라에 영향을 줄뿐만 아니라 프러시아 전국의 오페라 활동을 관리하는 막강한 지위였다. 마이에르베르는 바그너가 오페라 작곡가로서 발을 내디뎠을 때부터 그를 후원했다. 그래서 바그너의 초기 오페라인 '리엔치'가 프러시아에서 공연될수 있도록 지원했다. 마이에르베르는 1844년에 베를린 왕립오페라하우스의 재개관을 축하히기 위한 오페라를 작곡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래서 나온 것이 '슐레지아 야전병영'(Ein Feldlager in Schlesien)이었다. 애국적인 내용이어서 큰 환영을 받은 작품이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마이에르베르에 대한 인기는 말년에 수그러지기 시작했다. 우선 바그너가 자기에게 후의를 베풀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이에르베르의 오페라들을 공격하고 비난하였다. 마이에르베르의 오페라는 독일적인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보다는 아마도 마이에르베르가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비난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1930년대 초반에 나치가 집권하자 마이에르베르의 오페라들은 억압을 당했다. 역시 유태인의 작품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다가 다행하게도 21세기가 되자 그동안 무시되어 왔던 마이에르베르의 오페라가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유럽의 여러 오페라 극장에서 마이에르베르의 오페라들이 공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상이 마이에르베르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였지만 이제 어린 시절의 이야기부터 다시 시작코자 한다.


베를린 궁전. 2차 대전중 파손되었다고 복구되었다. 완전복구는 2019년 예정이다.


마이에르베르는 1791년 9월 5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1791년이라고 하면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해이다. 그리고 9월5일이라면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인 '마술피리'가 비엔나에서 처음 공연된 날이다. 그렇다고 마이에르베르가 모차르트와 특별한 관계에 있다는 것은 아니다. 마이에르베르는 베를린 교외의 타스도르프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베를린의 뤼더스도르프(Rüdersdorf)에 속한 곳이다. 아버지 유다 헤르츠 베르(Judah Herz Beer: 1768-1825)는 많은 부를 축적한 재산가였다. 금융업으로 재산을 모았다. 잘 아는대로 타국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은 생존하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지 않으면 변호사, 의사, 예술가 등 전문직이어야 했다. 아무튼 그래서 유태인들은 죽어라고 돈을 벌었다. 가장 높은 소득을 올릴수 있는 것이 금융업이었다. 말이 좋아서 금융업이지 실은 많은 유태인들이 사채놀이를 해서 이자를 챙겼다. 대표적인 경우가 연극이기는 하지만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이다. 그러나 마이에르베르의 아버지는 시시한 사채놀이가 아니라 금융투자를 해서 부를 축적했다. 어머니 아말리아(말카) 불프(Amalia Wulff: 1767-1854) 역시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마이에르베르의 경력에서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마이에르베르는 어머니를 몹씨 따랐다. 마이에르베르에게는 남동생 둘이 더 있었다. 빌헬름 베르는 유명한 천문학자가 되었고 미하엘 베르는 시인이 되었다. 마이에르베르는 할어바지인 리브만 마이어 불프(Liebmann Meyer Wulff)가 세상을 떠나자 할아버지의 이름을 자기의 이름에 붙였다. 그래서 마이에르베르의 어릴 때 이름은 야콥 리브만 베르(Jakob Liebmann Beer)였다. 자코모라는 이름은 1817년 경에 마이에르베르가 이탈리아에 있을 때 붙인 이름이다.


베를린 근교의 뤼더스도르프. 마이에르베르가 태어난 마을이다. 2차 대전 중에는 공장지대였다. 위 사진은 뤼더스도르프 기념관이다.


마이에르베르의 부모님 이야기를 좀 더 하고자 한다. 아버지 유다 베르는 베를린 유태인 사회의 리더였다. 또한 독실한 유태교인이었다. 베르의 집에 안식일에 예배드릴 수 있는 회당, 즉 시나고그가 별도로 있는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아버지 유다 베르는 유태교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서 시나고그에서 부를 칸타타를 서너편이나 작곡하기 까지 했다. 아버지 유다와 어머니 아말리아는 프러시아 왕실과 가까운 사이였다.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말리아는 1816년에 프러시아 왕실로부터 영광스럽게도 '루이제 훈장'을 받았다. 그런데 같은 훈장이라도 다른 사람들이 받은 것과는 다르다. 훈장의 메달 안에 왕비의 작은 초상화가 들어 있는 훈장이었다. 아버지 유다는 자녀들이 좋은 교육을 받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베를린의 유태인 사회에서 가장 명망있는 지식인인 두사람을 가정교사로 두었다. 두 사람 모두 작가였다. 당시 베를린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식인 집안은 훔볼트 집안이었다. 훔볼트의 형제가 모두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형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저명한 자연과학자, 지질학자 겸 탐험가였다. 동생 빌헬름 폰 훔볼트는 철학자, 언어학자, 외교관이었다. 베르의 가정은 훔볼트 집안과 아주 친밀하게 지냈다. 그만큼 베르의 집안은 비록 유태인이지만 베를린에서 무시 못하는 집안이었다.  


오늘날 뤼더스도르프에 있는 마이에르베르 생가. 2차 대전 중에는 공장에 둘러싸인 곳에 있었다. 지금은 여관이다,


마이에르베르의 키보드 처음 선생은 요한 게오르그 알브레헤츠버거의 제자인 프란츠 라수카였다. 프란츠 라수카는 베를른 궁정에서도 환영받는 키보드 선생이었다. 마이에르베르는 또한 무치오 클레멘티가 베를린에 체류하고 있을 때 그에게서 레슨을 받았다. 소년 마이에르베르가 피아니스트로서 처음 데뷔한 것은 그가 불과 9세 때인 1801년 베를린에서였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D 단조를 연주했다. 베를린의 '알게마니네 무지칼리셰 차이퉁'(Allgemeine musikalische Zeitung)은 소년 마이에르베르의 피아노 연주에 대하여 '아홉살 짜리 유태인 소년의 놀라운 피아노 솜씨'라고 칭찬했다. 1804년에 루이스 슈포르가 마이에르베르를 위해 베를린에서의 연주회를 주선했다. 연주회는 대성공이었다. 사람들은 모차르트가 다시 나타난 것이 아니냐고 까지 말했다. 이후 마이에르베르는 슈포르와 비엔에 있을 때에도, 로마에 있을 때에도 교류를 하면 친밀하게 지냈다. 1810년에는 마이에르베르의 첫 무대작품인 '어부와 우유소녀'(Der Fischer und das Milchmädchen)가 베를린의 궁정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되었다. 이어 그는 다름슈타트에 가서 2년 동안 아베 보글러(Abbé Vogler)로부터 정식으로 음악 레슨을 받았다. 이때의 레슨은 마이에르베르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모멘툼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즈음에 그는 자기의 이름을 Meyer Beer(마이어 베르) 라고 쓰기 시작했다. 그는 다름슈타트에서 비단 작곡뿐만 아니라 음악 비즈네스에 대하여도 배웠다. 음악 비즈네스란 콘서트를 주선하는 일, 악보 출판가들을 다루는 일 등을 말한다. 칼 마리아 폰 베버도 다름슈타트 동창생이었다. 마이에르베르는 베버를 비롯한 몇몇 친구들과 음악연맹(Harmonischer Verein)을 구성해서 함께 음악회를 가지기도 하고 홍보하는 일도 함께 했다. 홍보활동 중의 하나는 신문에 자기들의 연주에 대한 호의적인 평이 나도록 하는 거싱었다.


소년 마이에르베르. 1802년


마이에르베르는 1813년에, 그러니까 21세 때에 헤세-다름슈타트 공국의 루드비히 대공으로부터 궁정작곡가에 임명되었다. 1813년이라면 독일에서는 바그너가 , 이탈리아에서는 베르디가 태어난 해였다. 젊은 나이에 그런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된 것은 영광이었다. 그러나 마이에르베르에게는 한가지 고민이 있었다. 피아니스트로서 나갈 것인지 또는 작곡가로서의 길을 걸을 것인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지내기를 무려 10년이었다. 당대의 피아니스트인 보헤미아 출신의 이그나스 모셀레스(Ignaz Moscheles: 1794-1870)는 마이에르베르에 대하여 '이 시대에 가장 위대한 뛰어난 거장'이라고까지 말했다. 그리고 이 기간에 마이에르베르는 피아노 협주곡, 피아노 변주곡 등 여러 편의 피아노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마이에르베르는 이 기간에 클라리넷 5중주를 작곡하기도 했다. 거장 하인리히 배르만(Heinrich Baermann: 1784-1847)을 위해 작곡한 것이다. 두 사람은 평생을 친구로서 지냈다. 이런 저런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사람들은 마이에르베르가 연주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듯이 보였다.


다름슈타트의 레지덴츠슐로스. 마이에르베르가 이 곳에서 카펠마이스터 직분을 맡았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상황은 자꾸 작곡가 편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1811년에는 베를린에서 '신과 자연'(Gott und die Natur)이라는 오라토리오가 성공적으로 공연되었다. 1812년에는 뮌헨에서 오페라 '입다의 서약'(Jephtas Gelübte)이 공연되었고 이어 1813년에는 슈투트가르트에서 '집주인과 손님'(Wirth und Gast)이라는 오페라가 공연되었다. 마이에르베르는 자기의 무대 작품들이 그런대로 성공을 거두자 오페라 작곡가로서 성공할 생각으로 파리로 눈을 돌렸다. 당시에 파리는 비엔나와 함께 유럽 오페라의 본부였다. 예를 들어서 이탈리아에서 한다하는 오페라 작곡가들 조차 비엔나 또는 파리로 가서 활동했기 때문이었다. 마이에르베르는 파리에서 오페라로 성공하자면 우선 이탈리아로 가서 본격적인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베를린의 아버지가 충분히 뒷받침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마이에르베르는 1816년 초에 런던과 파리를 거쳐서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마이에르베르는 런던에서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인 요한 밥티스트 크라머(Johann Baptist Cramer: 1771-1858)의 연주를 들었다. 그러다보니 자기도 작곡가보다는 피아니스트가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잠시 갖기도 했다. 그러다가 파리로 와서 잠시 체류하게 되었다. 마이에르베르는 파리에서 박물관, 도서관, 극장들을 하나하나 섭렵해 가면서 견문을 넓혔다. 그리고 아무래도 작곡가가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파리 오페라. 갸르니에 극장의 화려한 위용. 훗날 마이에르의 작품들이 이곳에서 공연되었다.


마이에르베르는 이탈리아에 있으면서 로시니와 가깝게 지냈다. 무엇보다 마이에르베르는 로시니의 오페라에 대하여 깊이 감동하였다. 그리고 로시니를 무척 존경하였다. 1816년 당시에 로시니는 24세의 청년이었다. 그런데도 나폴리에 있는 몇개 극장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해에 '세빌리아의 이발사'와 '오텔로'가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마이에르베르는 로시니로부터 영향을 받아 이탈리아에 체류하고 있는 중에 로시니 스타일의 이탈리아 오페라 몇 편을 작곡했다. 1817년 파두아에서 초연된 '로밀다와 코스탄차'(Romilda e Constanza), 1819년에 토리노에서 초연된 '세미라미데가 모습을 보이다'(Semiramide riconosciuta), 1819년 베니스에서 초연된 '레스부르고의 엠마'(Emma di Resburgo), 1820년 밀라노에서 초연된 '앙주의 마르게리타'(Margherita d'Anjou), 그리고 1821년 역시 밀라노에서 초연된 '그라나다 추방'(L'esule di Granata)이다. 나중의 두 작품은 게타노 로시(Gaetano Rossi: 1774-1855)가 대본을 쓴 것이다. 마이에르베르는 로시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를 여러모로 도와주었다. 그렇지만 1824년 '이집트의 십자군'(Il crociato in Egitto) 이후로는 그에게 어떠한 대본도 부탁하지 않았다. 마이에르베르는 1816년에 시실리를 방문한 일이 있다. 이때 그는 시실리 민요들을 상당수 수집해서 악보로 옮겨 놓았다. 마이에르베르의 노래 중에서 간혹 시실리 민요풍이 나오는 것은 이때 수집한 덕분이다. 1816년, 그러니까 마이에르베르가 25세의 청년일 때에 어느날 그는 대본가인 로시에게 생일 축하 편지를 보낸 일이 있다. 그 때 그는 자코모(Giacomo)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로부터 야콥 리브만이라는 이름은 사용하지 않고 자코모로 대신했다.  


자코모 마이에르베르라는 이름은 1824년에 베니스에서 초연된 오페라 '이집트의 십자군'이 성공을 거두는 바람에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집트의 십자군'은 이듬해인 1825년에 런던과 파리에서 공연되었다. '이집트의 십자군'은 마이에르베르가 카스트라토를 주역으로 사용한 마지막 오페라였다. 그리고 그 전의 오페라들은 레시타티브에 키보드 반주를 했지만 '이집트의 십자군' 이후에는 오케스트라가 레시타티브의 반주를 맡도록 했다. '이집트의 십자군'의 파리 공연은 마이에르베르가 오래전부터 꿈꾸어 왔던 것이었다. 일찍이 다름슈타트에서 배웠던 것 처럼 음악 비즈네스를 실현할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집트의 십자군'의 파리 공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이에르베르가 준비했고 계약서를 자세히 검토한 후 직접 체결했으며 정당한 보상을 받도록 만든 공연이었다.


'이집트의 십자군' 런던 코벤트 가든 공연. 2012년


1826년, 마이에르베르는 35세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얼마 안되어서 사촌인 민나 모슨(Minna Mosson)과 결혼했다. 유태인 사회에서는 순수한 가문을 이어가기 위해 친척간에 결혼하는 일이 종종 있다. 마이에르베르의 경우도 그런 배경에서였다. 마치 왕조를 유지하기 위해 왕족간에만 결혼하는 경우와 같다고 보면 된다. 사촌과의 결혼은 우려와는 달리 안정되고 서로 헌신하는 행복한 것이었다. 마이에르베르 부부는 다섯 자녀를 두었다. 2남 3년였는데 2남은 어릴 때 세상을 떠나고 3녀만이 장성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베버와 마이에르베르는 가까운 사이여서 여러 음악활동을 함께한 사이였다. 그런데 마이에르베르가 민나와 결혼한 그 해에 베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베버는 오페라 '세 사람의 핀토'(Die drei Pintos)를 미완성으로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났다. 베버의 미망인은 마이에르베르를 찾아와서 '세 사람의 핀토'를 완성해 달라고 부탁했다. 마이에르베르는 거절할수도 없어서 맡기로 했지만 필요한 자료가 도무지 없어서 손을 대지 못하고 세월만 보냈다. 솔직히 마이에르베르로서는 귀찮은 일이었다. 그러는데 당시에는 사회적으로 반유태인 정서가 점차 무르익어가고 있던 때였다. 마이에르베르는 잘 되어도 비판을 받을 것이고 못 되면 더 비판을 받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1852년에 베버의 미망인을 만나서 '아무래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하고 자료들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일종의 죄책감으로 베버 미망인에게 상당액을 보상해 주었다. '세 사람의 핀토'는 나중에 구스타브 말러가 완성하였다. 말러도 유태인이기는 마이에르베르와 마찬가지였다.


칼 마리아 폰 베버가 미완성으로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난 '세 사람의 핀토'. 마이에르베르가 완성할 생각이었으나 아무래도 부담이 되어서 반환했다. 훗날 구스타브 말러가 완성했다. 비엔나 슈타츠오퍼의 무대.


마이에르베르를 오페라계의 스타로 만들어 준 작품은  파리에서 1831년에 초연된 '악마 로베르'였다. 원래는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공연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마이에르베르가 파리 오페라 극장(L'Oper) 측과 얘기를 나눈 끝에 3막 짜리를 5막으로 확장토록 했고 이어서 파리 오페라로 초연 장소가 변경되었다. '악마 로베르'는 일반 오페라로서 작곡되었으나 파리 오페라와의 협의에서 그랜드 오페라 스타일로 바뀌었다. 그것은 얼마 전에 다니엘 오버의 '포르티치의 벙어리'(La muette de Portici)가 그랜드 오페라 스타일로 공연되었고 이어 1829년에는 로시니의 '귀욤 텔'(Guillaume Tell)이 그랜드 오페라로서 공연되었기 때문에 그런 추세에 맞추기로 했던 것이다. 마이에르베르는 '악마 로베르'를 수정하면서 발레를 추가하였다. 발레 중의 하나는 '수녀들의 발레'로서 대단히 파격적인 설정이었으나 결국은 대환영을 받았다. 한편, 마이에르베르는 베르트랑과 로베르의 역할을 니톨라스 르바쇠르(Nicolas Levasseur)와 아돌프 누리(Adolphe Nurrit)에게 적합하도록 대폭 수정하였다. 그리고 누리의 추천에 의해서 코르넬리 활콘(Cornélie Falcon)이 알리스 역을 맡아 18세의 나이로 파리 오페라에 데뷔하였다. 초연의 밤에 참석했던 인사들은 다니엘 오버(Daniel Auber),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프로멘탈 알레비(Frommental Halévy), 당대의 소프라노인 마리아 말리브란(Maria Mailbran)과 줄리아 그리시(Giulia Grisi), 화가 겸 조각가인 오노레 다우미어(Honoré Daumier), 위대한 문호인 알렉산드르 뒤마(Alexandre Dumas)와 빅토르 위고(Victor Hugo) 등이었다. 활콘은 이들 모두에게 신선하고도 완벽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마이에르베르 자신도 활콘의 노래를 듣고 나서 '마침내 나의 오페라가 완성을 보았다'라고 선언했다.


 

'악마 로베르'의 초연에서 알리스의 이미지를 창조한 소프라노 코르넬리 활콘과 로베르의 이미지를 창조한 테너 아돌프 누리 


'악마 로베르'의 대성공으로 마이에르베르는 하루 아침에 파리의 명사가 되었다. 1832년에는 레종 도뇌르 멤버가 되었다. 레종 도뇌르는 프랑스에 공헌한 사람에게만 주는 훈장으로 레종 도뇌르를 받은 사람들의 모임은 그야말로 사회지도층들의 모임이었다. 마이에르베르에게는 많은 친구들이 생겼다. 레종 도뇌르 멤버이기도 했지만 마이에르베르의 부유함이 여러 친구들과 교우를 맺게 했다. 그러다보니 은근히 시기하는 사람들도 생기기 마련이었다. 마이에르베르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베를리오즈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베를리오즈는 사람들에게 '악마 로베르'는 성공이지만 알고보니까 마이에르베르가 자기 돈으로 극장 행정하는 사람들에게 6만 프랑이나 지불했다는 구만'이라면서 비아냥 거렸다. 그런가하면 프레데릭 쇼팽도 '아니, 마이에르베르는 악마 로베르를 무대에 올리기 전에 3년이나 파리에서 지냈다고 하네요. 그리고 3년 동안의 생활비는 모두 자기 돈으로 썼다고 해요. 3년이라니, 너무 길지요. 생활비를 자기 돈으로 다 내다니, 정말 많은 돈이지요'라고 말했다.  아무튼 이런 저런 구설수가 있었지만 '악마 로베르'는 독일에서도 소문이 자자했다. 그래서 파리에서의 두번째 공연을 할 때에는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빌헬름 3세가 직접 참석하기도 했다. 프레데릭 빌헬름 3세는 '악마 로베르'를 보고 난 후에 마이에르베르에게 '여보시게, 이젠 독일 오페라를 작곡해야 되지 않겠나? 그렇게 해 주게나'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악마 로베르'의 베를린 공연을 위해 마이에르베르를 베를린으로 초청했다. 그건 그렇고 '악마 로베르'는 몇 년 안에 유럽의 여러 극장에서 절찬리에 공연되는 오페라가 되었고 또한 동시에 미국에서도 공연되었다. '악마 로베르'의 성공 비결은 간단했다. 드라마틱한 음악, 멜로드라마와 같은 스토리, 그리고 화려하고 웅장한 무대에 있었다. '악마 로베르'의 성공 이후 외진 스크리브와 마이에르베르의 파트너쉽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파트너쉽은 '위그노'와 '예언자'와 '아프리카 여인'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들 오페라는 19세기에 유럽의 여러 극장들에서 마치 스탠다드 레퍼터리처럼 공연되었다.  


'악마 로베르'의 파리 오페라 공연. '수녀들의 춤'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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